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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 조용헌, 로버트 파우저, 이현군 등이 쓴 ’서울의 재발견’과 정석이 쓴 ‘천천히 재생’, 박진빈 교수의 '도시로 보는 미국사'에서 공히 추천받은 도서가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이다. 도시, 미국 등을 키워드로 한 책 가운데 내가 읽은 것이 박진빈 교수의 ‘도시로 보는 미국사’ 한 권이다. 이 책에 미국도시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마이클 카츠Michael B. Katz가 ‘왜 미국 도시들은 불타지 않는가Why American Cities Don‘t Burn’(2013년)란 책을 썼다는 내용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분노를 담은 책이다. 책의 의미를 원래 불타야 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라고 설명한 저자는 사실 미국의 도시는 민권 운동기 이전에도 불탔었다고 말한다. 젠트리피케이은 1964년 독일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라스(Ruth Glass; 1912 - 1990)가 런던 시내에서 노동자 계급의 거주지에 중산층이 유입하면서 기존 거주자들인 노동자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보고 붙인 용어다. 박진빈 교수의 책에는 ‘딱 적당한 만큼의 초록just green enough’이라는 말도 나온다.

 

Winifred Curran과 Trina Hamilton이 처음 쓴 말이다. 대규모 사업은 아무리 녹색 사업이라고 해도 결국 젠트리피케이션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1. 젠트리피케이션. 2. just green enough. 3. 에리카 체노웨스(Erica Chenoweth)의 3. 5% 룰(최소 3.5%의 사람들이 평화적으로 운동에 참여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의 법칙). 4. 도시재생이 최근 내가 생각하는 개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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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를 보았다. 서양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도 천주님을 믿고 나는 성리학을 통해 기하학과 수리학을 받아들였다는 정약전의 말이 기억 남는 영화다. 정약용이 주인공이었다면 감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약전에게 물고기에 대해 가르쳐준 스승인 ’장창대’의 아내가 나는 흑산이 좋소라는 말을 한다. 이 말에 남편 장창대는 “흑산이 아니라 자산(玆山)이지, 이(this) 산이지.”라는 말을 한다. 이 부분이 영화의 끝 부분이다. 알다시피 정약전은 흑산이란 말을 두려워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자(玆)란 글자가 이것(this)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산 즉 우리가 사는 산이지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홍어(洪魚)의 영어 단어가 skate라는 사실도 알았다.(우리 영화이지만 영어 자막을 넣은 것은 해외 팬들을 위해서이겠다.) 어떻든 지금은 영화에 대해 이 정도 말만을 할 수 있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어제 ‘자산어보’를 본 곳은 광화문 씨네큐브였다. 이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곳이다. 미국 영화 ‘매기스 플랜‘(2017년 2월 2일)과 레바논 영화 ’가버나움‘(2019년 2월 19일), 프랑스/ 일본 영화 '파비엔느에 관한 진실'(2019년 12월 19일) 등의 영화를 감상한 곳이고, 일본 영화 ’인생 후르츠‘의 포스터를 본 곳이기도 하다.

 

'인생 후르츠‘는 이선생님의 추천작이기도 하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과일이 익는다. 차근차근 천천히.“란 대사가 인상적인 영화다. 이 대사를 만난 것은 영화가 아닌 도시설계자/ 도시학자 정석의 ’천천히 재생‘이란 책에서다. 창신동 도시재생을 주제로 해설하기 위해 읽는 책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지고, 그러면 땅이 비옥해진다는 말은 ”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드는 것을”이란 두보의 시와 정서가 다르다. 나는 이 말을 지난 2017년 정동(貞洞) 해설에서 활용했다.

 

정동을 현대적 명당으로 정의하며 그곳의 건축물들이 정동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모이게 된 것인지 정동이 명당이기 때문에 모이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그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만 지금과 달랐어도 정동의 아우라는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의 영화로 인해 이런 다채로운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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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江湖) 제현(諸賢)의 ('질정; 叱正'이 아닌) 질정(質正)을 바란다는 저자의 책을 읽고 있다. 질정(叱正)은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의미고 질정(質正)은 묻고 따져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흔히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뜻의 叱正을 많이 쓰니 약간 기이하다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質正이 훨씬 뜻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강호라는 말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중국의 유명 선사인 마조의 활동무대인 강서(江西)의 강과 석두의 활동무대인 호남(湖南)의 호를 딴 것이라고 한다. 물론 강호라는 말 자체가 강과 호수 즉 자연을 의미하기도 한다. 처음 강호제현이란 말을 들었을 때 혹시 무슨 상징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생각나는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은 산을 앞에 두어 산하, 산천, 산수화, 요산요수 등으로 부르지 물을 앞에 두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2019년12월 30일 아주경제 수록 강효백 교수 글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첫 소절부터 일본식 표현' 참고) 어떻든 앞서 말한 저자의 책으로 돌아가면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사랑받고 있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는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눈에 띈다.

 

꾸짖음이든 물음과 비판이든 받을 사람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 또는 사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는 질정 앞에 겸허해야 한다. 단재가 조선상고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궁예의 성씨가 궁씨냐 김씨냐 같은 사소한 문제를 두고 따질 것이 아니라 궁예의 실패한 불교개혁의 의미처럼 무게감 있는 것들을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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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작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패러디해 내 이야기로 쓴다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재인폭포, 베개용암, 백의리층 등 연천의 지질공원들, 도서관, 숭의전, 당포성 등의 문화유적지 외에 특별히 갈 만한 곳이 없다.

 

서울이 더 편하고 갈 곳이 많으니 문제다. 그럼 나는 서울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서촌, 정동, 부암동, 청계천, 올림픽 공원, 광화문, 인사동, 익선동, 삼청동, 혜화 등의 답사 코스와 아직 만들지 못한 코스를 찾아가는 과정을 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만든 코스를 찾는 것보다 새 코스를 구상하고 식사를 하고 서점을 들르는 여정을 쓰면 그럴 듯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요즘은 지인들에게 연천에 오시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그분들에게 연천 안내를 하는 과정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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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내용 숙지(熟知)를 위해 워밍업 차원의 글을 쓰고 나니 머리가 아프다. 물론 머리가 아픈 것은 생각을 무리하게 이어갔기 때문이다. 어떻든 시급하지 않은 글을 쓴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최근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존에서는 잘 모르면서 질문하지 않고 모른 체 하는 것(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 무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일뿐 무지함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기에 여유로울 때 정리, 기록해도 되는데 무리했다. 컨디션을 조절하는데 알라딘에 올린 김선희 교수의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리뷰에 댓글이 달렸다. “같은 저자의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도 정말 좋습니다 ㅎㅎ” 감사하다.

 

이 말을 듣고 책 서핑을 한다. 내가 읽고 서평을 쓴 김 교수님의 책은 세 권이다.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나를 공부할 시간’, ‘동양 철학 스케치 2’ 등이다. 곧 ‘동양 철학 스케치 1’, ‘8개의 철학 지도’, ‘실實, 세계를 만들다’ 등을 구입할 것이다.(‘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은 절판이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허비는 결코 아니다. 곧 가다듬고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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