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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것 콤플렉스란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의 책에서였(다고 기억한)다.
김현 선생이 새것 콤플렉스란 개념을 제시한 것은 공부하는 사람이 진득하게 하나의 주제를 연구하지 못하고 유행에 휩쓸려 새 것을 찾아 다니고 그것에 어느 만큼 익숙해지면 또 다른 새 것을 찾아 가는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새것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들이 어떤 기제로 그렇게 하는지는 내 관심 밖이다.

나는 가끔 새것 콤플렉스는 아니고 새것에 대한 열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자평을 하곤 한다. 익숙한 것들을 남다른 시각으로 보려는 것 또는 서양 이론과 동양 이론을 비교해 하나의 틀에 담아내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제 일정을 마친 후 서점에 들러 책을 훑어보다가 정치학 박사 김용신의 ‘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란 책을 알게 되었다.

퇴계(退溪)와 사칠리기(四七理氣) 논쟁을 한 유명한 학자인 고봉(高峯) 기대승의 사상과 프로이트 이론을 비교한 책이니 흥미를 자극하는 책이다.

퇴계와 고봉의 논쟁을 퇴고논쟁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때의 퇴고는 완성된 글을 다시 읽어 고치고 다듬는 것을 의미하는 推敲가 아니다.

하지만 退高 논쟁을 推敲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논의를 거쳐 진리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글을 쓸 때에는 아무리 어려운 내용일지라도 알기 쉽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특히 학자들의 말을 인용할 때는 너무 어려운 것은 쉬운 말로 약간 바꾸는 노력까지 한다고 말한다.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이다.

이제 고독하게 몰입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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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여행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가본 사람은 물론 그곳에 살던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프랑스 파리를 서술했다는 칸트. 그가 다시 흥미를 자극한다.

전쟁(2차 대전) 때문에 적국 일본을 방문할 수 없어 간접 자료들만으로 정확한 일본 분석서인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과 함께 생각해볼 문제이다.

바야르는 예의 그 칸트 이야기를 한다. 바야르에 의하면 칸트는 한 번도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언제나 동일한 도정(道程)을 따라 산책했지만 낯선 나라들에 대한 묘사와 해설을 한 사람이다. 바야르는 자신의 책을 칸트에게 바친다고 말한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내세웠던 칸트는 신비주의 신학자인 스베덴보리가 놀라운 초능력을 보이자 처음에는 인정했다가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는 스베덴보리가 펼치는 형이상학이 도덕 신학적 관점에서 가질 수 있는 의의만을 인정했다. 칸트는 상상력의 소산은 지성적 판단에 의해 검토되고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베덴보리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대화재를 480km나 떨어진 곳에서 생중계 하듯 설명했다.(설명이 사실과 놀랍도록 일치했다고 함)

스베덴보리는 스웨덴 사람이다. 헬렌 켈러도 소속되었던 새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이론가인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 등의 책은 성경 만큼이나, 어떤 때는 성경 이상의 참고서로 통한다는 느낌을, 1년여 시간을 마지못해 동참하며 받았다. 지난 2009년에서 2010년 사이의 일이다.

칸트가 열하(熱河)를 여행한 연암(燕巖)처럼 외국 여행을 할 기회를 얻었다면 열하일기 같은 여행기를 썼을까? 칸트는 왜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 밖을 여행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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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자연의 법칙들은 어둠 속에 있었네. 하느님이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 그러자 온 세상에 빛이 가득했네.(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이는 18세기에 활약했던 영국의 유명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시인 자신보다 더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이 “그때 신이 ‘빛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빛이 생겨났다.”는 구약 성경 창세기(1장 3절)의 한 구절을 바탕으로 나온 말이라는 사실도 유명하다.

포프의 저 말은 뉴턴의 묘비에 새겨진(명銘) 글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리차드 바이스는 ‘빛의 역사’에서 교황을 뜻하는 Pope라는 말 때문인지 뉴턴의 묘비명을 “교황이 쓴(말한)” 것이라 말한다.(228 페이지)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론물리학자 레너드 서스킨드는 증거와 숫자를 나열하고, 더하고 나누고, 도표와 도형을 계량한 박식한 천문학자를 보며 알 수 없게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 나와 홀로 거닐며 촉촉하게 젖은 신비로운 밤공기 속에서 이따금 하늘의 별들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고 말한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 – 1892)보다 알렉산더 포프의 감정을 더 선호한다는 말을 했다.(‘우주의 풍경’ 172 페이지)
휘트먼에게 별은 자연과학으로부터 느낀 따분하고 지루한 감정에 대한 해독제였을까? 그가 데이트 상대 여성으로부터 “별이 참 예쁘네요.”란 말을 듣고 “현재 이 지구상에서 별이 빛나는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 말을 했다는, 핵융합 반응과 질량 결손(缺損)에 따라 빛을 내는 별의 원리를 처음 밝힌 한스 베테(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이과 바보 문과 바보’ 58 페이지)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우리는 ‘빛이 있으라’는 신의 말씀으로 빛이 생겨났다는 사실에 경외(敬畏)를 느끼지만 우치다 다츠루가 그랬듯 그 구약 성경 구절로부터 빛보다 소리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우치다 다츠루 지음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139 페이지)을 왜 읽지 못하는 것일까?

다츠루는 소리야말로 빛의 기원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절대자에게서나 가능한 일이 아닌지? 그리고 빛이 있으라는 말로 인해 빛이 생기게 되었기에 소리가 빛의 기원이라 하지만 엄밀히 말해 신의 의지(意志) 또는 사유가 빛을 있게 한 것이다.

빛과 소리를 차별화해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츠루의 의도는 신을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금기이지만 청각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음성을 표상보다 근원적인 지향적 차원으로 간주하는 유태교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빛과 소리를 전혀 다른 것이 아닌 파동(波動)의 상이한 종류로 볼 수는 없을까?(빛도 파동이고 소리도 파동이다.) 형상으로 신을 표현하는 것은 불경하고 소리로 신을 표현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가?(다츠루는 신의 티자성을 훼손한다는 표현을 썼다.) 생각해볼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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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새 책을 구입해 반납했다. 돌아오는 길에 김현 평론가가 ‘행복한 책읽기’에서 건망증에 대해 한 말을 생각했다.

옛날에는 건망증이 심하다는 말을 잊음이 많았다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출처는 이태준(李泰俊) 전집이다.

아울러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한 말도 음미했다.

“A라는 책을 찾기 위해 먼저 A가 있는 장소를 지시하고 있는 B라는 책을 참조하고 B라는 책을 찾기 위해 먼저 C라는 책을 참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이 모험들 속에서 나는 나의 인생의 시간을 탕진하고 낭비했다..”는 말이다.

보르헤스가 말한 ’책‘이 문자 그대로의 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많지도 않은 서가에서 인용해야 할 것을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리곤 하는 사람이 나다.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을,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는 생각은 공허하고 계산을 거치지 않은 자료는 맹목이라는 말로 설명한 책도 내가 찾아 다닌 것들 중 하나이다.

결국 검색을 통해 만난 한 리뷰를 보고 그 책이 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란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그 리뷰는 내가 쓴 것이다. 꼼꼼하게 기록해두지 않아 벌어진 웃긴 일이다.

그래도 나는 주(主)인 내용에 비해 부(副)인 책 제목, 저자 이름 등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결국 기억일 것이다. 생각과 자료 모두 결국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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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8-18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구할 수 없는 한전숙 선생님의 현상학 책을 모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잃어버리고 현금으로 배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6개월쯤 지나 이사를 준비하다가 책상 뒤 공간에서 그 책이 발견되었는데, 갖다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제가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책이 지금은 또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네요. 사람의 책 욕심이란 뭘까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8-18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시군요... 현상학 책이라면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판된 책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궁금증도 생깁니다. ^^ 책 욕심은 가장 신선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 ^^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란 부제를 가진 책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을 읽고 있다. 이미 어른이 되어 많은 날들을 보낸 내게 도움이 될 여지가 별로 없는 책임에도 구입한 것은 제목이 가진 매력 때문이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은 사회화로서의 성장이 개인에게 억압적인 과정임을 라캉의 이론 등에 의거해 쓴 책이고 여성 시인들의 시를 분석한 책이기도 하다.

저자 양효실은 예술가를 전시주의자 또는 노출증자로 정의한다. 양효실에 의하면 전시는 상처를 자랑하는 것이고 노래하는 것이며 즐기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예술가란 소통하려는 욕망과 감추려는 욕망 사이의 긴장에 의해 추동(推動)되는 사람이란 말을 했다.

위니콧처럼 볼 수도 있고 양효실처럼 볼 수도 있다. 다만 예술가가 아니지만 드러내는 듯 감추는 나는 위니콧의 말에 마음이 간다는 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약용의 순정함과 곡진함을 마음에 두지만 표현에서는 감추는 법을 잘 활용하는 글을 쓴 박지원 같은 제스추어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란 부제와 달리 저자는 자신의 글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만큼이나 약한 이들을 학대할 뿐 여전히 화해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인 나에게 지침이 될 글이 분명하다. 나는 지금 오랜만에 미학자의 유려한 사유를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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