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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종묘(宗廟)에 가서 물박달나무, 주목, 향나무, 귀룽나무, 느티나무(괴槐), 은행나무, 가래나무 등을 보았다.

이제는 직원들, 해설사들과 안면을 익혔을 만큼 자주 드나든 종묘에 앞으로는 나무 때문에 드나들게 될 것 같다.

종로구 재동의 헌법재판소를 백송(白松)만으로 이야기하는 세간과 달리 독일가문비나무(나무 껍질이 검어 검은피나무로 불리다가 가문비나무로 불리는 나무)를 함께 이야기하며 흑백을 가리는 헌법재판소에 어울린다고 해석한 한 숲 해설가처럼 좋은 안목을 갖출 수 있기를 바라며.

적(迪)이란 말 구체적으로는 세한도(歲寒圖)의 주인공인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의 이름에 있는 적, 그리고 적솔력(迪率力)이란 말에 들어 있는 적(迪)이란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최근이다.

이상적은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즉 ‘논어‘에 나오는 소나무와 잣나무는 물론 살구나무와도 관련이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최근 알았다.(강판권 지음 ‘나무를 품은 선비‘ 참고)

우선(藕船) 이상적은 유배를 당해 지위와 권력을 모두 잃은 스승 추사 김정희에게 한결 같은 의리를 보인 선비(역관譯官) 이다.

그가 추사로부터 겨울이 오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게 된다는 의미가 담긴 세한도를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살구나무와 이상적의 인연이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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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종묘 해설은 나온 지 몇 년쯤 된 책 몇 권을 참고해 시나리오를 구성했습니다. 이 책들에는 망묘루(임금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궁궐을 떠나 종묘에 와서 처음 인사 드리는 곳으로 묘당 즉 정전을 바라보고 선왕들의 은덕과 종묘사직을 생각하던 곳)에 조선의 역사, 문화 책들이 비치되어 있어 자유 열람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도서가 분실되는 등 문제가 있어 망묘루는 폐쇄되었습니다. 물론 망묘루 폐쇄가 전적으로 도서 분실 때문에 결정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6월 3일 향대청(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 등을 보관하고 제관이 대기하며 제사 준비를 하던 곳) 앞에서 8일무(佾舞; 종묘 제례에 사용되는 춤으로 가로 여덟 세로 여덟 즉 64명이 추는 춤) 사진이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요 오늘 보니 악공청(종묘 제례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대기하던 곳) 앞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춤은 향이나 축문보다 악공청과 더 가깝겠지요. 그러나 그런 사실을 왜 이제야 알고 시정했는지 의아합니다.

영녕전(정전에 모셔졌다가 옮겨지는 임금들을 모시는 별묘別廟 개념의 신실神室)에 명종의 신하인 이언적이 없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이언적 뿐이 아니라 모든 공신이 없습니다.)

이언적은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 송시열 등과 함께 종묘와 문묘에 함께 모셔진 분으로 소개되었는데요 명종이 정전에서 (불천위不遷位가 아니기에) 영녕전으로 옮겨졌을 때 그곳의 중앙 신실에 모셔져 있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가 추존왕인 까닭에 신하가 없는 마당에 후손인 명종이 신하와 함께 모셔질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사상적, 제도적 기틀을 세운 정도전이 종묘 또는 문묘에 모셔지지 않은 것과, 끝까지 고려를 위해 충성하고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정몽주가 조선의 문묘에 모셔진 것이 정치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면 이언적은 추존왕 제도와 조천(祧遷; 불천의 반대) 제도로 인해 이상한 봉변을 당한 셈입니다.

종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19칸의 신실입니다. 그런데 남문 쪽에서 보는 신실은 별 멋이 없습니다. 동문쪽 즉 측면에서 보아야 장엄한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확히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둥과 칸이 반복되는 정전의 신실들은 무한(無限)을 생각하게 합니다.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상 외로 종묘 해설 듣기를 신청한 분들께 자원봉사 해설을 하고 돌아가며 몇 자 적었습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해설이었다고 자평합니다. 아쉽지만 진보의 계기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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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급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광해군은 종묘(宗廟)의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증축한 임금이다.

광해군의 증축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종묘를 다시 세우며 이전보다 신실(神室)을 늘린 것이다.
광해군 외에 명종, 영조, 헌종, 고종이 정전을 증축했고 현종, 헌종이 영녕전을 증축했다.

헌종도 2관왕이지만 그는 조선에서 존재감이 미약한 임금들인 명종, 정종, 현종, 경종 등과 비슷한 레벨의 임금이다.

이 분들은 모두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정전이 아닌 마이너 리그격인 영녕전에 봉안(奉安)되었다.

광해군은 폐위된 군주이지만 연산군과는 성격이 다르다.

광해군이 안타까운 것은 그가 종묘 봉안을 염두에 두고 정전과 영녕전을 증축한 것은 아니겠지만 증축 2관왕으로서 정작 자신은 종묘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해군이 종묘를 증축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된 종묘를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니 불가피한 면이 있다.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도 저질렀지만 명나라와 후금(後金) 사이에서 펼친 양면 외교 또는 실리 외교는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소득이 많은 사람이 세금을 더 내는 대동법을 실시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해명해야 할 부분은 광해군이 서인과 북인의 당파 싸움으로 희생되었다는 부분이다.

문제는 패륜(悖倫)과 치적(治積) 사이의 부조화이다. 궁색하게 들리겠지만 광해군은 자신을 왕이 되게 한 대북파가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라고 극성스럽게 주장하자 하늘을 보고 탄식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경희궁과 인경궁을 지은 광해군의 무리한 토건정책도 지적되어야 한다.

패륜과 치적 사이의 부조화보다 더한 문제는 내정과 외치 사이의 부조화인지도 모르겠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일파)는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지는 나라 명에 의존하다가 청(후금)으로부터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다.

광해군은 오늘 우리에게 화두를 던져준다. 아니 그의 시대가 그런 것이라 해야겠다. 광해군과 그의 시대는 오늘 우리를 보는 듯 하다. 역사가 흥미로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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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16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조 반정공신들은 정말 최악의 위정자
들 그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멀쩡한 임금을 폐위시킨 자신들의 결정
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망해가는 명나라
에 대한 의리를 고집하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까지 몰아 넣었으니 말입
니다.

천조국을 신주단지 받들어 모시듯이 하
는 일부 몰지각한 당파가 오늘날 보여
주는 모습과 유사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6-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들이 저지른 행악은 오늘날 우리의 어떤 정당의 모습과 너무 유사합니다. 선조도 임진왜란때 도망만 다닌 잘못을 덮으려고 자신이 명군에 도움을 요청해 이겼다는 주장을 rhetoric적으로 했고 결국 그 논리에 갇혀 위기를 자초했지요.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미언’이란 평론집에서 저자 강계숙 평론가는 미언을 수수께끼에 가까운 말(謎言), 미혹하게 하고 매혹시키기도 하는 말(迷言), 미래의 어느 때엔가 완성될 말(未言), 작고도 아름다운 말(微言, 美言) 등으로 풀었다.

안성재 교수의 ‘노자, 정치를 깨우다’란 책에 미언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미언대의(微言大儀) 즉 짧은 말 속에 심오한 의미를 가진 말의 줄임말이다.

강계숙 평론가가 노자의 이 미언대의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전개가 微言 하나에 국한된 것이 아님이 중요하다.

요즘 페이스북의 정치 만화(萬花/ 滿花)를 보며 안성재 교수의 말을 생각하게 된다. ‘도덕경’은 정치 텍스트로서 이례적으로 짧은 축약형의 문장을 가진 텍스트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정치적이고, 정치를 싫어하는 사람도 정치를 통해서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도덕경’이 정치 텍스트라는 말은 고무적이다.

단 ‘도덕경’의 정치는 대동(大同)의 덕(德)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도덕경’의 정치적 독해는 해명하고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다.

요즘 한창 벌어지는 반민주세력의 정치적 패악을 보면 기본적으로 잘못된 정치의식과 왜곡된 계급 의식 탓이지만 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래 저래 정치 이야기가 페이스북의 대종(大宗)을 이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가운데 정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주로 하는 분들이 있어 그나마 다양성이 유지됨을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다.

내게는 모든 분들이 배울 분들이다. 물론 타산지석의 사례들도 있다. 좋아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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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찌어찌 해서 역사책 읽기에 흥미를 붙이고 있다. 그 역사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이 천명(天命), 정당화, 이데올로기적 선전 등에 관한 내용이다.

강대국인 은(殷)나라를 상대해야 했던 주(周)의 문왕이 은의 주(紂)왕의 군대를 무찌른 후 은나라 사람들을 찾아가 자신이 주(紂)왕을 친 것은 당신네 조상들의 천명을 받아서였다고 주장한 것은 은나라 백성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이 과정에서 좌묘우사가 나왔다.(장인용 지음 ‘주나라와 조선’)

그런가 하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천명(天命) 사상을 만들어 새 국가 건설의 명분을 퍼뜨리려던 중 고구려 성좌도 탁본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이를 돌에 새길 것을 명해 만들어진 석각(石刻) 천문도라는 내용(박석재 지음 ‘하늘을 잊은 하늘의 자손’)도 같은 차원의 글이다.

천명을 내세운 것이기보다 정당화라 하는 편이 맞지만 죽은 지 125년이나 지난 정몽주(끝까지 조선 건국에 반대한)를 조선의 문묘(文廟)에 모신 것은 그의 학문을 고려(考慮)해서가 아니라 고려(高麗)에 대한 정치적 신념(충성)을 시대정신으로 활용하기 위한 반정(중종 반정) 세력의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최연식 지음 ‘조선의 지식 계보학’)도 그렇다.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박정희가 고고학 발굴을 민족주체성 회복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선전에 마음껏 활용했다는 분석(김태식 지음 ‘직설 무령왕릉’)도 그렇다.

한 신문에 외부 필진(대학 교수)이 쓴 대통령의 가야사 연구 관련 글이 실렸다. 필자는 정권이 역사를 장악하려 할 때 왜곡되지 않은 적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이 필자는 참여정부, 그리고 그 직후인 2008 ~ 2009년에는 개혁군주로서 정조가 주목을 받았고 정권이 바뀐 후에는 실패한 혁신가로서 광해군의 생애와 그의 비참한 최후가 거론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든 정조 부각 사례(참여정부에서 지시한 것인지 방송에서 알아서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지만) 외의 다른 사례는 모두 부도덕하거나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정권이 저지른 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1968년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동상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전통과 위인 만들기에 골몰하고 충효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한편 국민국가로의 통합을 꾀한 박정희,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집권한 이방원의 역사를 통해 정권의 정당화가 가능하다고 믿은 신군부 등...

가야사 복원을 통해 영호남의 화합을 이루라는 대통령의 주문은 정권이 역사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결코 아니다.

혹시 그 필자는 교과서를 국정으로 만들려는 것을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이 필자가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 강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는지 몹시 궁금하다.)

그러나 가야사 연구를 지시한 것은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겠다는 것과 차원이 다르고 더욱 지금 정권은 집권 과정이나 정체성 등에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정권이다.

논의에서 벗어난 감이 있고 적절한지 더 논의해야 하지만 ‘교수신문’에 실린 철학자의 글에서 이런 부분이 눈에 띈다.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어떤 연구를 수행할지 오직 고대사 연구자 자신들만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문가의 오만이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어느 정도 한국 고대사에 대한 전문성이 요구된다고 고집할 수 있겠지만 문 대통령을 비롯해 청와대 회의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그 정도의 전문성은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앞에서 거론한 부분이지만 정조에 대해 최근 이런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정조의 왕권 강화 정책이 (오히려) 세도정치를 초래했다는 것이다.(‘정조와 정조 이후’ 수록 오수창 글 ‘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그리고 19세기 세도정치의 삼각 대화’)

노무현 정권이 사라진 것에 맞추어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면밀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고 역사는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정치의 주요 파트너이기 때문이다.(공부의 부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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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14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종환 의원의 입각에 앞서 앞으로 문화부
장관이 될 인물에 대한 역사 검증 논란으로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여전히 사학계의 기득권층은 재야사학계의
주장을 야사로 일축하고 있죠. 특히나 고대
사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무엇 하나 뚜렷한
증빙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정설을 정하기
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만의 역사가 아닌 일반인들도 가
까이 다가설 수 있는 그런 역사 서술을 합
의하는 그런 건설적인 방향으로 논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6-14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상식과 합리에 바탕한 역사관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식민사관도 극복하고 역사 교육의 이상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써주신 글에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