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상자의 역습 - 대중문화가 어떻게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들었나?
스티븐 존슨 지음, 윤명지.김영상 옮김 / 비즈앤비즈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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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가 ‘바보상자’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 배경에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뇌를 잠식하는 ‘중독성’에 기초하여, 무조건적인 폄하의 시선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뉴튼 미노우’의 말처럼, TV 방송은 선혈과 위협, 파괴와 폭력, 사디즘과 가학, 살인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자극적인 요소의 잠식은 갈수록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는 추세다.

  모든 방송이 ‘그러하다’, 라고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대중문화의 추세가 폭력적인 경향이 우세하게 작용하고 있다. 폭력뿐만 아니라, 성을 상품화 한 선정적인 방송으로 기본적인 욕구를 자극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자극 일색의 대중문화를 접할 때 마다 전문가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하양 평준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의 대중문화 깔고 앉기의 시선 속에서 ‘스티븐 존슨’은 역설적인 대중문화의 이점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제 2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한 21세기의 복잡 다양한 문화 컨텐츠의 과부하로, 이 모든 것을 즐기기에는 하루 24시간도 모자란 실정이다. 우리의 삶에서 TV, 게임, 인터넷, 영화를 뺀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아마 지루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심각한 정서불안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휴대폰을 두고 외출했다면 십중팔구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휴대폰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바보상자의 역습 Everything bad is good for you」은 갈수록 복잡하게 변화하는 대중문화 속에, ‘우디 앨런’의 영화를 차용한 ‘슬리퍼 커브’라는 이론으로 일반적인 ‘바보상자’의 인식에 대해서 반격하고 있다. ‘슬리퍼 커브’란, 복잡한 대중문화에 우리 두뇌가 길들여지면서 특정한 형태의 문제해결 능력이 향상된다는 뜻이다. 치밀할 만큼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학술서는 아니지만, 작가 나름대로 지금까지 접한 수많은 문화컨텐츠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표적인 다섯 가지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인간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이론이다.

  가장 먼저 ‘게임’의 반복학습을 통해 얻는 이득에 대해서 설명한다. 방학이 되면 PC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청소년이나, 게임에 미쳐 일주일간 잠을 자지 않고 게임을 하다가 숨진 사람의 기사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이토록 온라인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티븐 존슨’은 그 해답을 게임에서 나름의 보상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찾았다. 시뮬레이션 게임을 통해서 얻는 즉각적인 보상. 즉, 아이템, 레벨 상승 등, 최종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별적인 보상 네트워크 속에서 그 어떤 매체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최상의 만족감’을 얻는다는 결론이다. 

게임은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한다. 게임을 통한 지적효용은 모두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증거를 평가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장기적인 목표를 고려한 후에야 결정을 내린다. 따라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배우는 건 결국 올바른 선택을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다른 어떤 대중문화도 이런 식으로 우리 뇌의 의사결정 기관을 자극하지 않는다. -49p

  게임에 이어, 대표적인 TV 시트콤과 리얼리티 쇼, 그리고 영화에서 보여 지는 한결 같은 ‘슬리퍼 커브’ 이론은 기가 막히게도 잘 맞아떨어진다. 20년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치밀한 영화를 살펴본다면 이해가 빠르다. 복잡하다 못해 어렵게 만들기 위해 발악을 하는 요즘 영화의 플롯을 보다가, 20,30년 전 영화를 본다면 지루함을 참기 힘들다. 단순하게 이어지는 영화들을 보기에는, 지금 우리의 눈과 두뇌는 너무도 빠르게 이해하도록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영화에 사용된 고전적 테크닉의 답습이라고 할 만큼, 과거에는 어려워서 관심도 없던 영화나 드라마들이 시장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TV나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그 속에서 배울 점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주인공이 나와 동격화 되는 과정에서 추리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물론 저속한 부분들이 있음은 물론이지만, 대중의 취향은 점점 고급화 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게임, TV, 영화, 인터넷’이 세계를 지배하는 동안, 인간의 사고력 또한 함께 발전한 것이다.

  중독의 차원을 넘어서,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대중문화를 올바르게 흡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인 듯 하다. 이왕이면 자신에게 어떤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인가를 적절하게 판단해서, 개인의 문제를 사회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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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카메라의 눈 - 영화와 현대 소설에 나타난 영상의식
앨런 스피겔 지음, 박유희.김종수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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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낳은 20세기 최고의 영화비평가 ‘앙드레 바쟁’은 이런 말을 했다.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보면 영화는 소설보다 50년은 뒤떨어진 것 같다.”

오늘날, 예술로서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영화라지만, 영화 속 사물의 존재 방식이 소설보다 반세기 가량 뒤쳐져 있다니. 영화관계자들이 들으면 조금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명한 영화비평가가 저런 말을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소설이 영화로 재탄생 되는 과정만 지켜보더라도 소설의 위상은 영화를 충분히 압도한다.

지난 100년간의 문학의 흐름과 구상화 형식 안에서의 고도의 시각화와 실절적인 본체를 추구하는 리얼리즘의 발달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영화의 구도와 맞물려 간혹 비교대상이 되곤 하지만, 아직도 문학 고유의 극대화된 시각화는 정교한 테크닉의 카메라의 시선과는 분명한 차별감이 있다.

사람의 오감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렬한 자극을 받게 되는 장기는 단연 눈이라고 생각 한다. 눈먼 자의 세상과 정상인의 세상은 그 어떤 장애의 벽보다 가장 높고 견고할 것이다. 오감 중 가장 민감한 눈을 통해 느끼게 되는 예술의 한 단락에 영화와 소설이 나란히 거론 된다는 사실은 이미 인류사에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두 분야가 각별하기 때문이다. 사물을 이해하는 눈, 눈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인지하는 뇌, 인간이 추구하는 미학의 극치 소설과 영화의 공통점은 과연 무엇일까.

본 서「소설과 카메라의 눈」에 나타난 현대 소설에 나타난 영화의 영상의식은 문학이론과 영화의 특별한 인식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으로 한 층 빛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서사방식은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에 현대문학의 영상미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의 눈은 현란한 카메라 기법에 따른 몽타주나 해부학적 지식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기에 소설의 지극히 아름다운 서사적 흐름이 친연성을 보이며 영화적으로 표현됨을 당연시 한다. 이미 영화가 나오기 한참 전부터 소설에서는 지극히 세밀하고도 정교한 시각적인 흥분이 시작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선두주자 프루스트, 조이스, 포크너의 형식적 실험과 거투르드 스테인과 젊은 시절 헤밍웨이의 문체적 혁신, 그리고 흔히 플로베르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눌 수 있는 소설의 엄청난 반향의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인 소설의 시각적인 외상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텍스트로 읽는 대신 머릿속에 그려지는, 영화보다 수십 배는 더 큰 상상과 천대만상의 시선처리 방식들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단지 기록하는 기계일 뿐인 카메라와 예술가의 혼이 결합되어 탄생한 펜 끝의 신화인 소설, 그 어느 쪽도 우수성과 완벽성을 논할 수 없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소설은 결코 영화에 뒤지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인물의 클로즈업부터 시작해, 망막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소설 속 배경을 표현하는 그 완벽함, 그리고 공간의 무한함과 냄새와 온기까지 펜 끝에 녹아 있는 소설에서도 역시 영화 못지않은 리얼리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소설과 카메라의 눈」은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은 아니지만, 문학이나 영화 전공자가 아닌 본인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럼에도 경건한 마음으로 저자의 말에 경청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려운 문맥의 연결을 골똘히 생각해 보면서 가늠할 수 있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혼을 느꼈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한 일일이 거론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학인들과 그들의 분신 같은 작품들을 예시로 간간히 삽입 되어 있는 본문을 읽어보며 지난 100년간의 문학사를 재조명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인상깊은구절]
구성화된 소설 안에서는 이미지의 중요성이나 이미지들 간의 엄밀한 상호관계를 파악하기에 앞서 이미지들을 보다 빨리 보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인 지연 때문에 우리는 이미지들을 한 번 보는 게 아니라 두 번 본다. 처음에는 바로 드러나는 별개의 이미지를 본다. 그 다음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정신적 반응을 정리하여 이미지들은 다시 보게 되는데, 이때에는 이미지들 간의 연속성과 응집성을 보게 된다. (중략) 작가가 우리에게 발견하도록 놓아둔 이미지들의 배치에서 구성화된 관념을 파악한다. 그 관념은 이미지들을 끌어 모아 - 이미지들에 의해 구성화되면서 - 예술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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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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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년, 이맘때쯤 서점 가에 나와 있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얼핏 보고는 그저 그런 남자의 우울한 투병기쯤으로 지례 짐작을 하고 돌아서 버린 기억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에 대해 전혀 무지한 나로써는 ‘김영갑’ 이라는 석자의 존함은 너무나 낯선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뉴스를 자주 접한 것도 아니어서 그 분의 일생에 대한 소식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뒤늦게 서야 책을 통해 그 분의 삶을 조심스럽게 엿볼 수 있었다.

우연히 사진작업을 하기 위해 제주도에 들른 이후, 20년 동안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마력을 지닌 섬, 제주도. 무엇이 그를 그토록 들뜨게 하고, 사진에 일생을 바치게 만들었을까. 한 번도 제주를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황홀경에 젖어 들게 만드는 그 분의 사진을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고된 삶의 틈새로 빠져들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 그 삶의 이정표는 어떤 누구도 일러주지 않는다고 한다. 혼을 담아 열정을 바친 인고의 허물을 감싸 쥐고, 너른 하늘과 들판을 카메라 속에 담고서야 살아 있는 이유를 느꼈다는 사람. 아무도 이렇게 가라고, 이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일러주지 않았다지만, 그 속에 꿈틀대는 끝없는 예술 혼이 그의 눈을 멀게 하고, 그 귀를 닫아 버렸다. 오직 사진을 위해 이 땅위에 두 발 딛고 살아 숨쉬는 것이다.

제주토박이들조차 알지 못했다고 하는 은밀하게 감춰진 제주의 사적인 풍경들을 잡아내면서 이루 말 할 수 없는 쾌감의 오르가슴을 느끼며 열정을 불태웠지만, 신은 그가 걷는 아름다운 길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불치의 루게릭병을 하사하고 말았다. 왜 천재 예술가들의 생애는 그토록 이나 짧고 고되기만 한걸까, 하고 잠시나마 안타까움에 가슴을 졸였지만,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어려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탓에 어느새 그의 몸은 혹사당하고 만 것이다. 밥 한 끼 굶어가며, 혹한의 계절에 냉방에서 잠을 자며,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모두 필름을 샀다고 하니, 그의 20년이 얼마나 혹독했을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제주도 중산간에 기거하며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소통 방식은 오로지 하나, ‘사진’일 뿐이었다. 도저히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자연만의 색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을 경험했을 듯싶다. 남은 삶의 유예기간 동안 느껴지는 건 한스러움과 슬픈 연민 대신, 가득한 열정의 불꽃과 초로 나뉘어 진 셔터소리에 깃든 만족감 뿐, 더 이상의 미련도 고통도 없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를 초월하고 자신만의 사진 미학을 고수하는 그 분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글을 읽는 내내 제주도 푸른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말로 설명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색과 완벽한 구도의 사진을 보며 넋을 잃었다. 이 땅에 존재했었던 어느 천재 예술가의 소소한 일상의 일기장을 엿보며 멀리 떨어진 독자가 한숨을 짓고, 타는 듯한 섬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삶의 이정표는 아무도 알려주는 이 없지만, 이렇게 스스로 찾아간다면 故김영갑 선생님의 삶의 애착을 조금이라도 닮고,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모두에게 인정받기 보다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고통 없이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깨달음으로, 나에게 허락된 하루라는 시간을 더욱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겠다.

[인상깊은구절]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와 길을 가르쳐준다. 그러면 그가 일러준 대로 가지만 한참을 걷다보면 점점 늪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발견한다.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오면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 1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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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 1957-2005 - Kim Young Gap, Photography, and Jejudo
김영갑 사진.글 / 다빈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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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진이 말을 걸어온다. 표현력의 한계로 도저히 설명 할 수 없는 자연의 멈춰진 평면적인 사진 속에서,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솟아있는 하늘이, 평안한 들판이, 화려한 색색의 꽃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선 늠름한 나무가, 바람 부는 방향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린 억새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는데, 아무도 눈 여겨 볼 생각 따위 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고 화사한 인사를 건네는 듯 했다.

적막한 들판의 흐드러진 꽃들의 하얀 장관을 보고 있는데, 이유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치 상처 난 곳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따끔하게 가슴 언저리 어딘가가 아파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볼 때면, 새삼 살아 있는 것들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만다. 후회할 틈도 없이 머릿속이 텅 비어지고 마는 거다.

故김영갑 선생님의 추모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사진집,「김영갑 1957 - 2005」속에 담긴 제주의 사진들은, 보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無의 공간으로 사람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을 잊은 대신, 가슴은 뜨거워진다. 한 작품 한 작품 심혈을 기울여 자연이 창조하는 최상의 조건에 부합되는 장관을 담아내기 위해 24시간을 투자한 그의 노력이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삽시간의 황홀이라고 했던가……. 마치 유체이탈을 하는 듯한 나무와, 석양빛에 흔들리는 하늘의 가장 아름다운 색을 발한다고 하는 절대 절명의 2,3초를 찍기 위해 숨을 죽인 채 고요히 하늘을 응시하고 있을 아련한 그의 굽은 등줄기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김영갑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진에 대해 이토록 진지하게 접근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으로 일반인들도 전문가 못지않은 사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쉽게 찍고 쉽게 뽑을 수 있는 이점을 활용해 사진이라는 그 자체가 남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작품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지만, 지금껏 본인은, 좋은 사진이란, 무조건 선명하고 깔끔하게 나오기만 하면 되는 줄 착각하며 살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어느 예술의 분야가 그렇지 않겠냐 만은 사진 역시 작가의 투명한 혼과 끌어 오르는 작품에의 열의, 자신만의 철학과 통찰력이 요구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런 경험이 없었기에, 이번 김영갑 선생님의 사진집으로 사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머물러 있지만 머물러 있지 않은 세상. 그 경건한 하늘과 땅의 모습을 필름에 담아 오래도록 간직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고, 새삼 감동적이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빛, 바람, 구름, 안개, 비, 눈, 이 모든 조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 앞에 인간은 얼마나 작은지, 작품에 혼신을 다한 예술가의 열정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 다는 점까지도 확실히 각인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공해에 찌든 이 도시를 떠나 풀들이 속삭이고, 상쾌한 녹음이 드넓게 우거진 들판에 누워 종일을 하늘만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어딘가로 떠날 거라면 그 목표의 1순위가 이제 제주도가 될 것 같다. 그가 있었던 땅을, 그 흙냄새를 맡아 보며 살아 있음을 실감해 보고 싶다. 아무도 몰랐던 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예술가의 혼이 깃든 이어도에서, 마라도에서, 이런 곳이 있어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자연에게 건네고 싶다. 자연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하물며 한 사람의 일생을 배우고 느꼈던 오늘의 경험은 도저히 감당 못할 커다란 상념을 심어줬지만, 더 할 수 없이 행복하고 가슴 벅찬 인생 공부를 한 기분이다. 비록 주인은 없지만, 그의 분신 두모악 갤러리는 100년이고, 200년이고 영원토록 남아 육체가 사라진 한 예술가의 사진에 대한 사랑과, 행복했던 생의 외침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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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과 여전사 1 - 21세기 남과 여
이명옥 지음 / 노마드북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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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패왕별희」를 관람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장국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단지 아름다웠다고 정의내리기 힘들 만큼 그의 색기와 도발은 예술미의 극치였다. 섬세한 손 끝, 여성보다 더 여성성을 띈 새침한 입 꼬리, 완벽한 경극배우로써의 명연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획을 그었다.

비단 장국영 뿐만이 아니다. 불세출의 할리우드 배우들, 스크린의 요정은 어느덧 강인한 여전사로 탈바꿈 되어 있고, 다비드의 환생으로 느껴지는 완벽한 미남들은 모든 이들에게 특유의 에로티시즘을 마음껏 발산하며 양성의 매력이 무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느끼게 되는 절대적인 성의 미학은 과연 언제부터 인간사에 침투하여 독보적인 제 3의 성으로 지배되기 시작했는가.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있었다. 아담과 이브를 시험에 들게 만든 신의 장난은 마치 인간의 타고난 성을 희롱하는 또 다른 기준으로 비춰진다.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고, 남성은 남성다워야 한다는 지극히 클래식한 정형적인 성의 잣대는 언제부터인가 철저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그 진리의 속사정은 상식으로 느껴지던 시기를 훨씬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여전사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여성 ‘이명옥’관장님의 「21세기 남과 여」의 강의는 너무 익숙해서 잊고 있던 익숙한 남녀의 양성화에 대한 탁월한 고찰로 시작되고 있다.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한 메트로섹슈얼에 대한 기대심은 권태로운 성의 양성화에 대한 새로운 활력소로 다가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여성보다 예쁜 남성, 남성보다 강인한 정신력의 여성, 우리는 왜 그들에게 열광하게 되었는가. 단지 평범했던 성에 대한 일탈을 위한 과감한 해방구일 뿐이라고 짐작하고 있던 본인은 새로운 개념의 제 3성에 대한 해설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은밀한 자아를 들추어내는 기분이었다.

본 서의 서막은 양성에 대한 인간의 태고 적 갈망을 자웅동체의 신과 여성미를 닮고 싶어 하던 남성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정신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걸작으로 남은 명화들과 더불어 예술가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진지하게 열거되고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모호한 모습을 지닌 천상계의 천사들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의 자아 정체성은 혼란을 야기할 만큼 지극히 그 경계선이 애매모호 하다.

「다빈치 코드」의 열풍과 함께 시작된 ‘레오나르도 다빈치’ 벗기기 게임은 이제 지겨울 만도 한데,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 예술가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은 언제나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나리자와 다빈치의 얼굴을 합성한 「모나 레오」를 보며 우리는 얼마나 경악했던가. 진실은 오로지 신만이 알고 있다고 전해 내려오는 모나리자의 미소에 담긴 뜻은 다빈치 본인이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정체된 성적 욕망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또한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의 양성애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언뜻 한 가지 사실만 본다면 천재 예술가들은 모두 성에 관한 남성과 여성의 구분 짓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니마 아니무스의 이론처럼 적당한 융합만이 인간의 생성 기초에 가장 잘 부합된 영혼의 결론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명화와 함께 떠나는 억압된 성의 색다른 도발의 여행은 역시 인간의 가장 깊이 내제되어 있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둥근 원이 주는 화합에 담긴 의미처럼, 인간의 성도 본체 하나이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배제하고도 정확하게 귀결 될 수 있는 착지점은 남성 역시 여성들이 가진 특유의 부드럽고 섬세한 육체와 정신을 흠모하고, 여성 역시 남성들 특유의 강인하고 건장한 육체와 정신을 흠모한다는 것이다. 결론은 한 개인에게 결여 된 나머지 반쪽과 자신에게 충만한 다른 반쪽의 기질을 닮고 싶다는 갈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두 처음으로 돌아간다. 엄마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태아처럼 억압된 굴레를 벗고 단 하나의 존재로 규정되어 태초로 돌아가고 싶은 제 3성의 열망을 누구나 지니고 있다. 비록 타고난 성의 굴레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본인에게 결여 된 상반된 성의 매력은 남은 인류와 남겨질 인류가 지니고 있을 매력적인 탐험의 신비로 다가오지 않을까. 과감하게 성의 일탈을 주장하는 소수, 혹은 다수의 사람들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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