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의 길
유예진 지음 / 현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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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6857>을 읽으면서 문득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스24 메인에서 프루스트에 관한 도서를 검색했을 때 저의 눈길을 끈 책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면서 당시 프랑스에서 주목받던 작가와 작품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는 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이 쓰신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 길’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프루스트가 활동했던 당시 프랑스 문단을 지배했던 작가들을 활동 시기에 따라 소개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화가, 작가, 음악가, 건축가 등 예술가 100여 명의 작품 200여 점을 인용하고 있는데, 유예진교수님은 그 가운데 허구의 인물인 베르고트를 포함하여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다양한 시기에 활동한 소설가, 시인, 극작가, 문학평론가 열 명을 골랐습니다. 이들은 프루스트와 직간접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하며, 그러한 영향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녹아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존했던 작가들과 그들의 문학 작품들이 프루스트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과 스토리와 엮여있어 그 실마리를 풀어가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은 17세기 작가인 세비녜 부인과 라신을, 19세기 작가로는 발자크, 상드,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 말라르메를 그리고 20세기 작가로는 지드와 바르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사후에 활동했던 바르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당시 프랑스 문단을 지배했던 문인들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유예진교수님은 이들 문인들의 글과 사상,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이들이 주고받은 서간까지 인용하여, 문학 작품에 얽힌 일화, 당시 시대 상황이나 사건, 소설 밖에서의 프루스트의 삶을 알게 해 주는 전기적 내용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부록으로는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세비녜 부인의 편지, 공쿠르 형제의 일기, 상드와 플로베르, 프루스트와 지드가 주고받았던 편지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들 자료는 프루스트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것 들입니다.

 

책의 말미에는 작자가 인용한 외국의 문헌목록을 덧붙이고 있어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내용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점과 차이가 있는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라신의 작품 <페드르>가 미친 영향에 관하여 ‘사라진 알베르틴’편을 인용하여 질베르트가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소유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전에 미리 한 걸음 물러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질베르트 역시 마르셀에게 우정이 아닌 사랑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꽃피는 아가씨 그늘에(1)’에서는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다가 그녀의 의외의 모습에 놀라 사랑하는 마음을 접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질베르트는 확실히 외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두 질베르트가 있었다. 그 부모의 두 성질은 단지 그녀의 몸 안에 섞여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두 성질은 서로 다퉈 그녀를 빼앗고 있었다.(200쪽)”라고 적어, 마치 현대 정신의학에서 해리성장애로 정리되는 성격의 단면을 드러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5068).

 

작가가 맨 마지막 등장인물로 프루스트 사망당시 일곱 살이었던 롤랑 바르트를 인용한 것은, <텍스트의 기쁨>에서 “프루스트는 나를 찾아온다. 내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라고 할만틈 프루스트를 경외한 바르트가 프루스트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논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바르트식 프루스트 읽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밖에도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문인들의 작품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구체적인 구절까지 인용하고 있어,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들의 작품을 읽고 확인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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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무의식 -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김명남 옮김 / 까치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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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해리스박사는 <자유의지는 없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4786>에서 “뇌파검사(EEG)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통해 확인한 결과,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뇌의 운동피질이 활동하고 있더라”는 데이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우리의 뇌에 있는 신경세포는 이미 우리가 할 행동을 지시하는 신호를 내보내는 것이라고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온 것이 사실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며,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뇌의 활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샘 해리스박사가 우리가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데이터에 의하여 바뀔 수도 있는 판단을 성급하게 내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조심스럽게 달아두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믈로디노프교수의 <새로운 무의식>은 역시 같은 데이터를 인용하여 무의식의 영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fMRI라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고 내리는 판단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실들, 특히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의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생각들이 얼마나 오류투성이이며, 의식 아래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의 영향을 크게 받는지를 과학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물로디노프교수가 뇌의 이러한 기능을 ‘새로운 무의식’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라는 부제가 의미하는 것처럼 프로이트에 의하여 제창되었던 과거의 ’무의식‘과 차별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의식과 무의식 양쪽에서 지각, 감정, 사고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와서 빚어진 산물이다.(26쪽)”라고 한다면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행동을 어떻게 구별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행동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정신적 과정에 의하여 지배될 때가 많다는 올바른 결론을 내렸지만, 당시의 과학 수준으로는 이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환자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드러나는 정황들 가운데 환자의 병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추출해내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요법에서 추천하는 자성적 기법(self-reflection)을 통해서 뇌의 무의식적 과정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제한점이 드러나면서 정신분석학은 점차 관심을 잃어가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감각 더하기 마음이 곧 현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뇌에서 처리하는 과정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무의식이 작용하여 정보들 사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보다 완벽한 모형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뇌의 데이터처리체계가 두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은 기억의 형성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건에 대한 기억을 꾸며내기 위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린다는 것입니다. 즉, 풍부한 상상력으로 생각해낸 속임수들로 기초적인 기억을 보완하는 과정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고 그 영향이 항상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8043>에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주인공 푸네스는 열아홉살이 되던 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의식을 잃었는데, 의식을 회복하고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사소한 기억까지도 명확하게 되살리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에 관한한 놀라울 능력을 가진 푸네스지만, 그의 놀라운 능력은 그저 단순한 정보수집체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믈로디노프교수는 1920년대 러시아 심리학자 AR 루리아의 연구대상이었던 솔로몬 셰레솁스키가 바로 푸네스와 꼭 같은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보르헤스도 이 연구에 대하여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무의식>의 제2부 ‘사회적 무의식’에서 저자는 다양한 실험들을 인용하여 사람의 마음 읽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기 등과 같이 무의식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람들의 사회적 패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의식은 인간의 생존을 돕는 방향으로 진화되어 온 것이 틀림없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마음, 즉 무의식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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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정동희 옮김 / 민음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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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를 통하여 인문학을 같이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돌아보면 정작 변죽만 울려온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무언가를 배우려면 개념을 정립하고, 전체를 개괄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각론을 파고드는 순서를 따는 것이 일반적인 접근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문학의 핵심이라고 할 철학 부문은 그야말로 아는 바가 거의 없어 저 역시 철학을 다룬 책을 읽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강영안교수님은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철학을 소유하고 있는가. 어디서 철학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인용해서 철학이 어디에 있는가를 논의하면서, 정보의 가치가 중시되는 가운데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의 가치가 점차 무게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아내고 있습니다.(강영안 지음,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22459)

 

강영안교수님은 “우리 인간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주변의 사물과 사건 사이에서, 우리 실존의 의미를 찾으려는 깊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의미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존재, 우리의 고통, 우리의 욕망, 심지어는 우리의 의미 추구의 근거에 관한 물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강영안 지음,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32쪽)”고 하고 이런 인간의 욕망에 본질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노력을 철학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철학은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한 관심이 엷어져왔는데, 그 이유는 철학이 지나치게 학문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대중의 삶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논제를 뒤쫓다보니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자초한 것이라 본 것입니다.

 

철학이 대중으로부터 이탈하면서 대중이 역시 철학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게 되다보니 철학이 무엇인지 조차도 가물가물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철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책들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철학의 세부 분야에 관한 책들을 제외하고서도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된 책도 버트런드 러셀(홍신문화사, 1995, 2008)의 것이 가장 많이 번역되어 있고, 질 들뢰즈 등(현대미학사, 1995), 에드워드 클레이그(동문선, 2003) 등 외국 철학자의 책들이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엄정식(문학사상사, 2000), 박이문(지와 사랑, 2008), 최유신(철학과현실사, 2006) 등의 국내 학자들의 책들도 나와 있습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북소리]에서 소개드린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공부법;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38>에서 안상헌님은 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철학이 현실세계로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생각하는 힘과 창의성이 강조되면서 철학공부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현실세계로 내온 철학의 모습을 보여준 대표적인 책으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르테가는 ‘근대 유럽 지성사에 큰 획을 그은 스페인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스페인 특유의 지적 전통과 근대 유럽철학의 흐름을 접목시켜 새로운 차원의 사상적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오르테가가 1920년 3월부터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내용을 묶은 것입니다. 2월 27일 마드리드대학 철문학부 강의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오르테가의 강의는 예상치도 않게 엄청난 수의 청중이 몰려드는 바람에 연기되어 3월 초 마드리드 대학본부의 대형강의실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리베라 독재정권에 대한 반정부운동의 중심이었던 마드리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오르테가 역시 정교수직을 박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중단되었다가, 4월 9일 레스극장에서 속개되었고 베아트리스 공주 극장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될 정도로 오르테가의 열의와 그의 지지자들의 호응이 뜨거웠다고 합니다.

 

오르테가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철학강의는 1898년 쿠바를 둘러싼 미국과의 전쟁(미서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몰락한 스페인의 국내정세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페르난도왕과 이사벨여왕이 1492년 8월 3일 동양을 향한 콜럼버스의 항해를 승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고, 스페인은 400년 동안 대제국의 영화를 누리게 되는데, 미서전쟁의 패배로 제국의 영화가 스러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스페인의 지성들은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를 통하여 국내정세를 반전시키려 한 것입니다. 오르테가는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던 것입니다. 오르테가는 이 공개강의를 통하여 ‘대중이 지배하는 사회’를 예언하여 스페인 문화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첫날 강연에서 오르테가는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이라고 간주하는, 실은 진정한 삶을 감싸고 있는 껍질을 뚫고 우리에게 비밀로 남아 있는 존재 본연의 존재, 순수 내적 존재의 영토로 회귀할 것(5쪽)”이라고 강연의 전체 개요를 요약하면서 “철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내 강의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6쪽)”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근대철학과 지난 시대의 철학을 구분하는 근원적 차이로 ‘사유의 변화’를 제시하였습니다. “사유의 변화들을, 과거에 진리였던 것을 오늘날 하나의 오류로 전환시키는 변화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의 진리와는 다른 진리로 인식하게 하는 지향성의 변화로 인식해야 할 것(13쪽)”이라는 것입니다.

 

강의 초반 오르테가는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이 확장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이 위축되었던 19세기 후반의 분위기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시대를 맞아 꽃피우기 시작한 과학이 정확한 추론을 통해 성취된 지식과, 동시에 사실에 대한 감각적 관찰에 의해 확증되는 종류의 인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인식론의 궤를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이를 계기로 과학은 다른 학문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고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물리학은 인식방법을 극도로 향상시킨 제3의 특성을 가미하게 되었는데, 바로 인간의 물질에 대한 지배를 위한 실질적 유용성을 확보한 것입니다. 이로서 ‘물리학의 제국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물리학의 우월성에 압도당한 철학이 위축되어 버린 점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시한 오르테가는 물리학의 우세가 인식이라는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리학에 대한 대중의 신념이 부풀려진 것이라는 사실을 의학의 사례로 설명한 점이 눈길을 끌어 인용합니다. “그 누구도 의학을 과학의 전형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어느 시기의 마법사들처럼, 병원에서 의사들이 받고 있는 숭배는 그에게 의사라는 직업과 인격에 하나의 안정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는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무모한 대담성을 즐기고 있다. 우리가 볼 때 이는 참 어이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의사란 과학의 성과를 이용하고 다루는 사람이지 결코 과학자도 이론가도 아니기 때문이다.(37쪽)” 수긍이 가는 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의사들이 무모할 정도로 대담성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요?

 

오르테가는 철학자들이 과학자들로부터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경멸적 모욕을 받았다고 하고,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과학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40쪽)”이라고 응수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적어도 19세기 후반 유럽의 지성사회는 그러한 비유를 즐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철학과 과학을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니 철학과 과학의 비유사례를 우리나라의 의료체계에서도 보고 있는 것도 비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의학과 한의학이 대립하는 가운데, 과학적 근거를 내놓지 못하는 한의학을 국가 의료의 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료계의 입장과 철학적 배경을 가진 한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좁은 시각이라는 한의학의 반론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르테가는 “철학은 우주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논지의 대상을 우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인식을 다루고 있는 물리학은 물질이라는 가시적이며 현실적인 대상과 직면하는 반면 철학은 철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우주와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우주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막연한 대상을 사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철학자는 존재하는 일체의 전체성에 관심을 가지고 전체성 속에서 각 사물의 위치, 역할, 지위와 같은 각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 양상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의 사유대상을 우주로 확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르테가는 철학의 위치를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철학이란 이론적 인식 행위, 즉 우주에 관한 이론에 다름 아니다. 세계의 전경을 우리에게 펼쳐주는 우주라는 단어가 중대한 의미를 지닌 ‘이론’이라는 단어의 의미론적 무게를 어느 정도 경감해 주는 듯 보일 때조차도 우리는 우리가 창조주인 양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하는 것은 오직 우주에 관한 이론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117쪽)” 일견해서는 종교와 타협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만, 이어서 오르테가는 세계 위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그리스나 유대의 신은 물론 기독교의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이 사유의 산물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신과 영혼이라는 두 개의 실재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과 영혼에 관한 인식이야말로 기독교에서의 최고의 인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신과 영혼에 대하 알기를 열망한다. 그 이상을 내가 알기를 원하는가? 나는 단지 신과 영혼만을 알기를 열망한다. (…) 더 멀리 나아가지 마라. 자아 속에서 찾아라. 진리는 인간의 내부에 존재한다.(188쪽)”라는 기독교 이념의 설립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여 그가 인간의 내성의 기저에서 신을 발견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의 신은 얼핏 보기에 세계에 대해서는 초월적이지만 “영혼의 기저”에 있어서는 내재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에 의하여 ‘나’는 일차적인 이론적 진리의 위치로 상승했고, 라이프니츠가 이것을 자기 자신 속에 감금한 채 우주로부터 분리된 단자를 창안했을 때 ‘나’는 내적인 작은 세계, 미시적 우주 혹은 라이프니츠 자신이 표현한 대로 작은 신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피히테에 이르러 관념론이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운명이 최정상에 도달하면서 전체적 우주, 만물로 확장되었다.(194쪽)”고 하여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나”의 존재를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르테가는 모든 시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고유의 과제, 사명, 혁신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설파하면서 변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이러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각인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이 추구하는 근본적 목표라고 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별 어려움 없이 “삶이란 우리가 행위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삶은 우리가 행위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결국 세계 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세계 내 사물들과 존재들에 전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40쪽)”라는 답에 이르게 되기를 희망하였던 것 같습니다.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복잡하게 돌아가는 오늘 날을 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주문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스페인의 대중들에게 들려준 오르테가의 조언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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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어떻게 당신을 속이는가 - 생각 속에서 길을 잃곤 하는 당신을 위한 4단계 두뇌 훈련법
제프리 슈워츠 & 레베카 글래딩 지음, 김학진.이상원 옮김 / 갈매나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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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자신의 믿는 바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이클 셔머는 <믿음의 탄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1601>에서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대뇌의 신경세포, 뉴런과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개입하게 되는데, 특히 전대상회피질과 전전두엽피질에서 있는 오류탐지네트워크가 연합학습을 통하여 잘못된 패턴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패턴성을 학습하는 뇌는 진화과정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지만, 아직 완벽한 프로그램으로 완성되지 않은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미있는 패턴을 발견하게 되면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라도 믿으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샘 해리스박사는 <자유의지는 없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4786>에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즉, “뇌파검사(EEG)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통해 확인한 결과,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뇌의 운동피질이 활동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뇌가 인간의 사고활동을 통하여 만들어진 자유의지에 따라서 만들언 믿음을 속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뇌가소성에 관한 연구를 강박증 치료와 연관시키는 연구를 하고 있는 제프리 슈워츠박사와 레베카 글레딩박사는 정서적 경험을 끊임없이 과대 포장하는 경험이 있는 인간의 뇌의 작용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 특히 신경과민, 불안과 초조, 긴장감, 우울, 분노, 약물남용, 게임중독, 등 다양한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들을 돕는 방법을 <뇌는 어떻게 당신을 속이는가>에 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프롤로그에 요약한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아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뇌의 거짓말에 좌지우지되는를 보여주고, 유해한 사고나 감정, 행동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 줄 것이다. 또한 4단계 두뇌훈련법을 삶에 적용하는 방법도 알려줄 것(20쪽)”이라고 적었습니다. 4단계 두뇌 훈련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는 ‘꼬리표 바꾸기’로, 뇌의 거짓말과 불편한 감각을 찾고 실체 파악하기, 2단계는 ‘인식 바꾸기’로 뇌의 거짓말에 대한 인식 바꾸기, 그 생각과 충동이 계속 당신을 괴롭히는 이유 말하기, 3단계는 ‘초점 바꾸기’로 거짓 충동, 생각, 감각이 여전히 존재하는 가운데 생산적인 행동과 사고로 주의 돌리기, 마지막 4단계는 ‘평가 바꾸기’로 뇌의 거짓말이 만들어낸 생각, 충동, 감각 등이 사실이 아니고 집중할 가치도 없음을 깨닫기의 순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토니, 카라, 애니 등 여덟 명의 등장인물이 안고 있는 정신적 문제점을 과거의 삶, 특히 기억의 심층에 잠재되어 있는 어린 시절 있었던 정신적 충격이 원인이 되어 자아에 대한 생각을 왜곡하는 뇌의 거짓작용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의식하지도 못했던 과거의 일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정신장애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싶습니다. 프로이드류의 주관적 해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제시하는 치료법은 분명 효과가 입증되는 사례들이 있었을 것이므로 타당한 점이 있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만, 객관적이지 못한 원인이라면 전체적인 치료과정을 과학적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음과 두뇌가 다르다는 저자의 주장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두뇌는 환경으로부터 정보, 즉 이미지나 남들의 말, 혹은 감정적 반응이나 신체적 감각 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동적으로 암기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인식이나 고민은 없다. 이렇게 처리된 입력 정보는 우리 의식 차원으로 들어간다. 마음은 바로 여기서 개입한다. 이 단계에서 마음은 두뇌가 보내온 정보에 초점을 맞출지, 아니면 다른 정보에 집중할지 결정한다.(44쪽)” 샘 해리스의 자유의지 이론과는 차이가 있어 보여서 이 점이 어떻게 정리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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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2013-06-07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요? 샘 해리스가 말한 자유의지란 것도 결국, 생각을 말하는 겁니다. 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되어진 것... 다시 말하면 그게 생각이죠. 이 책에서 말하는 마음은 내부에서 올라온 그 생각에 동의를 할지, 거부를 할지, 하는 판단이구요.

처음처럼 2013-06-07 14:31   좋아요 0 | URL
차이가 없을까요? 샘해리스의 자유의지에 관한 실험결과는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것은 제 생각입니다.)이 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샘 해리스와 같은 해석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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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은 독특한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와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 담겨진 의미에 대하여 생각을 펼치고 있습니다. 라블레의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즉, 즉각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하려 드는,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것, 즉 도덕적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소설의 도덕이라는 것(15쪽)입니다.

 

<배신당한 유언들>은 이처럼 라블레를 시작으로 세르반테스, 발자크, 프루스트, 카프카 그리고 헤밍웨이 등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사유는 문학의 범위를 넘어 작곡, 음악, 번역, 지휘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서로 연관을 짓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작품을 해석하는데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즉 작품이 완성되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가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을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역설이 성립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상정하여 쿤데라는 ‘배신당한 유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게 된 것 같습니다.

 

<배신당한 유언들>을 통하여 많은 앞선 시대의 작가들, 음악가들, 심지어 화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삶이 조명되고 있습니다만, 특히 문학의 카프카와 음악의 스트라빈스키가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특히 사후에 자신의 작품들의 처리에 대하여 구체적인 유언을 남긴 카프카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정리하기로 결심한 카프카는 친구 브로트를 유언집행인으로 하여 “내가 쓴 모든 것들 가운데, 유효한(gelten) 것은 다음 책들뿐이다. <판결>, <운전기사>, <변신>, <감화원>, <시골 의사>, 그리고 <단식 광대>라는 단편 하나.(<명상> 몇 부 정도는 남겨도 무방하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것들을 폐기처분하는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단 한 부도 재판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382쪽)” 하지만 브로트는 “내가 그의 단어 하나하나를 광적으로 숭배했다는 것을” 카프카가 알았다거나 “만약 그의 의사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진심이었다면 당연히 다른 유언집행인을 선택했을 것이다.” 는 등의 이유로 친구의 유언을 집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청개구리 우화와 반대사례가 되는것인가요? 평소 부모의 말이라면 거꾸로 행동하기 일쑤인 아들을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었던 부모는 개울가에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기는데 청개구리 아들은 부모가 죽자 평소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해서 부모님 유언대로 개울가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부모의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개굴개굴 운다던가요?

 

쿤데라는 죽은 이의 뜻을 따르는 것이 “두려움이나 속박 때문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믿지 않기 때문(414쪽)”이라고 말합니다. 망자의 마지막 의사에 대한 복종은 “신비적”이며 “모든 합리적, 실제적 성찰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의 친구 브로트는 절친이 마지막 남긴 간곡한 부탁을 외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어야 하는건데 말입니다.

 

쿤데라는 카프카의 사례를 들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없애기로 결심하는 이유를 몇 가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죽음의 순간에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애착을 가지지 않게 된 것인데 실패의 유물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작품들은 사랑하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남긴 작품이 자신이 혐오스럽게 여기는 미래의 처분에 맡기게 된다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작품을 사랑하고 미래의 세상에는 관심도 없지만 대중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대중의 몰이해로 인한 괴로움을 죽어서까지 겪을 수 없다는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 마지막 이유는 바로 작품의 해석에서 다양한 접근을 넘어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부류들이 작가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입니다. 쿤데라가 <배신당한 유언들>이라는 제목을 정한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원작자의 의도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것을 ‘배신당한 유언’이라는 은유로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저자가 권하는 카프카의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카프카의 소설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들을 소설 읽듯이 읽는 것뿐이다. K라는 등장인물에게서 저자의 초상을 찾는다거나 K의 말들에서 암호화된 신비한 메시지를 찾으려 들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동거지, 그들의 말, 그들의 생각을 주의 깊게 좇으면서 눈앞에서 상상해 보는 것 말이다.(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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