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인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정동희 옮김 / 민음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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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를 통하여 인문학을 같이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돌아보면 정작 변죽만 울려온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무언가를 배우려면 개념을 정립하고, 전체를 개괄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각론을 파고드는 순서를 따는 것이 일반적인 접근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문학의 핵심이라고 할 철학 부문은 그야말로 아는 바가 거의 없어 저 역시 철학을 다룬 책을 읽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강영안교수님은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철학을 소유하고 있는가. 어디서 철학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인용해서 철학이 어디에 있는가를 논의하면서, 정보의 가치가 중시되는 가운데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의 가치가 점차 무게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아내고 있습니다.(강영안 지음,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22459)

 

강영안교수님은 “우리 인간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주변의 사물과 사건 사이에서, 우리 실존의 의미를 찾으려는 깊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의미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존재, 우리의 고통, 우리의 욕망, 심지어는 우리의 의미 추구의 근거에 관한 물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강영안 지음,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32쪽)”고 하고 이런 인간의 욕망에 본질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노력을 철학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철학은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한 관심이 엷어져왔는데, 그 이유는 철학이 지나치게 학문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대중의 삶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논제를 뒤쫓다보니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자초한 것이라 본 것입니다.

 

철학이 대중으로부터 이탈하면서 대중이 역시 철학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게 되다보니 철학이 무엇인지 조차도 가물가물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철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책들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철학의 세부 분야에 관한 책들을 제외하고서도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된 책도 버트런드 러셀(홍신문화사, 1995, 2008)의 것이 가장 많이 번역되어 있고, 질 들뢰즈 등(현대미학사, 1995), 에드워드 클레이그(동문선, 2003) 등 외국 철학자의 책들이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엄정식(문학사상사, 2000), 박이문(지와 사랑, 2008), 최유신(철학과현실사, 2006) 등의 국내 학자들의 책들도 나와 있습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북소리]에서 소개드린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공부법;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38>에서 안상헌님은 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철학이 현실세계로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생각하는 힘과 창의성이 강조되면서 철학공부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현실세계로 내온 철학의 모습을 보여준 대표적인 책으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르테가는 ‘근대 유럽 지성사에 큰 획을 그은 스페인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스페인 특유의 지적 전통과 근대 유럽철학의 흐름을 접목시켜 새로운 차원의 사상적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오르테가가 1920년 3월부터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내용을 묶은 것입니다. 2월 27일 마드리드대학 철문학부 강의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오르테가의 강의는 예상치도 않게 엄청난 수의 청중이 몰려드는 바람에 연기되어 3월 초 마드리드 대학본부의 대형강의실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리베라 독재정권에 대한 반정부운동의 중심이었던 마드리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오르테가 역시 정교수직을 박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중단되었다가, 4월 9일 레스극장에서 속개되었고 베아트리스 공주 극장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될 정도로 오르테가의 열의와 그의 지지자들의 호응이 뜨거웠다고 합니다.

 

오르테가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철학강의는 1898년 쿠바를 둘러싼 미국과의 전쟁(미서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몰락한 스페인의 국내정세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페르난도왕과 이사벨여왕이 1492년 8월 3일 동양을 향한 콜럼버스의 항해를 승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고, 스페인은 400년 동안 대제국의 영화를 누리게 되는데, 미서전쟁의 패배로 제국의 영화가 스러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스페인의 지성들은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를 통하여 국내정세를 반전시키려 한 것입니다. 오르테가는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던 것입니다. 오르테가는 이 공개강의를 통하여 ‘대중이 지배하는 사회’를 예언하여 스페인 문화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첫날 강연에서 오르테가는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이라고 간주하는, 실은 진정한 삶을 감싸고 있는 껍질을 뚫고 우리에게 비밀로 남아 있는 존재 본연의 존재, 순수 내적 존재의 영토로 회귀할 것(5쪽)”이라고 강연의 전체 개요를 요약하면서 “철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내 강의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6쪽)”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근대철학과 지난 시대의 철학을 구분하는 근원적 차이로 ‘사유의 변화’를 제시하였습니다. “사유의 변화들을, 과거에 진리였던 것을 오늘날 하나의 오류로 전환시키는 변화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의 진리와는 다른 진리로 인식하게 하는 지향성의 변화로 인식해야 할 것(13쪽)”이라는 것입니다.

 

강의 초반 오르테가는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이 확장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이 위축되었던 19세기 후반의 분위기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시대를 맞아 꽃피우기 시작한 과학이 정확한 추론을 통해 성취된 지식과, 동시에 사실에 대한 감각적 관찰에 의해 확증되는 종류의 인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인식론의 궤를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이를 계기로 과학은 다른 학문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고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물리학은 인식방법을 극도로 향상시킨 제3의 특성을 가미하게 되었는데, 바로 인간의 물질에 대한 지배를 위한 실질적 유용성을 확보한 것입니다. 이로서 ‘물리학의 제국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물리학의 우월성에 압도당한 철학이 위축되어 버린 점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시한 오르테가는 물리학의 우세가 인식이라는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리학에 대한 대중의 신념이 부풀려진 것이라는 사실을 의학의 사례로 설명한 점이 눈길을 끌어 인용합니다. “그 누구도 의학을 과학의 전형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어느 시기의 마법사들처럼, 병원에서 의사들이 받고 있는 숭배는 그에게 의사라는 직업과 인격에 하나의 안정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는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무모한 대담성을 즐기고 있다. 우리가 볼 때 이는 참 어이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의사란 과학의 성과를 이용하고 다루는 사람이지 결코 과학자도 이론가도 아니기 때문이다.(37쪽)” 수긍이 가는 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의사들이 무모할 정도로 대담성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요?

 

오르테가는 철학자들이 과학자들로부터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경멸적 모욕을 받았다고 하고,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과학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40쪽)”이라고 응수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적어도 19세기 후반 유럽의 지성사회는 그러한 비유를 즐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철학과 과학을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니 철학과 과학의 비유사례를 우리나라의 의료체계에서도 보고 있는 것도 비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의학과 한의학이 대립하는 가운데, 과학적 근거를 내놓지 못하는 한의학을 국가 의료의 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료계의 입장과 철학적 배경을 가진 한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좁은 시각이라는 한의학의 반론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르테가는 “철학은 우주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논지의 대상을 우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인식을 다루고 있는 물리학은 물질이라는 가시적이며 현실적인 대상과 직면하는 반면 철학은 철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우주와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우주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막연한 대상을 사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철학자는 존재하는 일체의 전체성에 관심을 가지고 전체성 속에서 각 사물의 위치, 역할, 지위와 같은 각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 양상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의 사유대상을 우주로 확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르테가는 철학의 위치를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철학이란 이론적 인식 행위, 즉 우주에 관한 이론에 다름 아니다. 세계의 전경을 우리에게 펼쳐주는 우주라는 단어가 중대한 의미를 지닌 ‘이론’이라는 단어의 의미론적 무게를 어느 정도 경감해 주는 듯 보일 때조차도 우리는 우리가 창조주인 양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하는 것은 오직 우주에 관한 이론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117쪽)” 일견해서는 종교와 타협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만, 이어서 오르테가는 세계 위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그리스나 유대의 신은 물론 기독교의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이 사유의 산물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신과 영혼이라는 두 개의 실재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과 영혼에 관한 인식이야말로 기독교에서의 최고의 인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신과 영혼에 대하 알기를 열망한다. 그 이상을 내가 알기를 원하는가? 나는 단지 신과 영혼만을 알기를 열망한다. (…) 더 멀리 나아가지 마라. 자아 속에서 찾아라. 진리는 인간의 내부에 존재한다.(188쪽)”라는 기독교 이념의 설립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여 그가 인간의 내성의 기저에서 신을 발견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의 신은 얼핏 보기에 세계에 대해서는 초월적이지만 “영혼의 기저”에 있어서는 내재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에 의하여 ‘나’는 일차적인 이론적 진리의 위치로 상승했고, 라이프니츠가 이것을 자기 자신 속에 감금한 채 우주로부터 분리된 단자를 창안했을 때 ‘나’는 내적인 작은 세계, 미시적 우주 혹은 라이프니츠 자신이 표현한 대로 작은 신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피히테에 이르러 관념론이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운명이 최정상에 도달하면서 전체적 우주, 만물로 확장되었다.(194쪽)”고 하여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나”의 존재를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르테가는 모든 시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고유의 과제, 사명, 혁신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설파하면서 변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이러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각인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이 추구하는 근본적 목표라고 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별 어려움 없이 “삶이란 우리가 행위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삶은 우리가 행위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결국 세계 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세계 내 사물들과 존재들에 전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40쪽)”라는 답에 이르게 되기를 희망하였던 것 같습니다.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복잡하게 돌아가는 오늘 날을 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주문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스페인의 대중들에게 들려준 오르테가의 조언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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