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웃으면서 살아갑니다
단노 도모후미.오쿠노 슈지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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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환자가 쓴 투병기를 열심히 찾아서 읽고 있습니다. 치매 환자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말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큰 불편 없이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매 의심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병원에 가는 것을 꺼리거나, 치매진단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병을 공개하기를 꺼리는 것은 치매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때문입니다. 치매에 걸리면 폭력적이 되거나, 변을 뭉개는 등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모습이 사라지는 모습을 먼저 떠올리는 것입니다.


문화평론가 수전손택은 <은유로서의 질>에서 어원학적으로 보자면, 환자는 고통받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환자들이 가장 깊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암이나 치매와 같은 불치병에 걸린 환자를 대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동안 치료법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암의 경우는 그나마 조금 나은 편입니다. 하지만 완치가 불가능한 알츠하이머병 등의 치매를 진단받은 환자에게는 뭐라고 해야 할지 이 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해답은 환자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치매를 진단받은 환자가 여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잘 설계할 수 있으려면 환자 자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웃으면서 살아갑니다>를 읽으면서 이런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 미야기현에 있는 넷츠도요타 센다이 지점의 자동차 판매사원으로 활동하던 단노 도모후미씨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받은 것은 불과 39살 때였습니다. 진단을 받기 5년전부터 시작된 기억력의 감퇴가 문제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비망록을 활용하여 건망증에 대응하여 별 문제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비망록에 적어두었다는 사실을 잊거나 고객의 이름은 물론 얼굴까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심한 건망증으로 병원을 찾아간 단노씨는 2주일간 입원하여 매일 3-4가지 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노씨는 어떤 검사를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뇌의 위축이 심하여 알츠하이머병이 의심되지만 39살이라는 젊은 나이 때문에 결국 대학병원에 다시 2주일간 입원하여 검사를 다시 받게 되었습니다. 치매를 확진하기 위하여 1달이나 걸린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습니다.


단노씨가 치매진단을 받은 뒤에 아내와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들이 보인 반응도 놀라웠습니다. 물론 단노씨나 아내도 처음에는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이를 극복하고 힘을 내기로 했습니다. 단노씨 가족들은 모두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성격인 것 같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회사의 대표였습니다. 단노씨와 아내가 본사에 가서 대표와 임원 그리고 인사부장에게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받았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물론 회사를 그만두라는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겠다는 각오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표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테니까 돌아오세요. 아직 몸은 움직일 수 있죠? 본사의 총무인사 그룹으로 돌아와요. 책상을 옮기는 것부터 일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60)” 일본의 기업들은 평생직장이라는 전통을 내세워 회사에 충성하도록 했다지만, 최근에는 평생직장의 전통도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단노씨처럼 젊은 나이에 발병하는 알츠하이머병은 진행이 빠른 편입니다. 하지만 단노씨의 경우는 진단받은 뒤로도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판매사원이 아니라 판매사원을 지원하는 역할이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출퇴근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치매로 진단되었음에도 일상적인 삶은 물론 대중강연 등도 하면서 치매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깨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치매는 불치의 병이고 인간의 존엄마저도 무너지는 끔찍한 병이라는 인식이 굳어져있습니다. 치매 초기의 환자가 일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체계가 어서 갖추어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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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08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치매 진단을 받고 잘살아가고 있는 저자이군요. 주변에 치매 부모 님과 함께 힘든 여정을 가는 분들을 봐서 안타까운 마음에 이 책 같은 내용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어느 애주가의 고백 - 술 취하지 않는 행복에 대하여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이덕임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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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하지 않는 행복에 대하여라는 부제에 끌려 읽게 된 책입니다. 사실은 저도 평생 마셔온 술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표지에 적힌 비교적 긴 소개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콕 찔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술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과 에피소드가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린 것 같던 때, 나는 얼마나 많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거나 변경했던가. 숙취로 하루를 시작한 날은 얼마나 잦았던가. 부모님, 형제자매 혹은 친구의 생일을 잊은 날은 얼마나 많았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욕하고, 은행에서 자주 돈을 빌렸으며, 도움을 받아야 했던가. 아침에 생판 낯선 이와 함께 깨어나는 일은 몇 번이었던가!”


그렇습니다. 이 책은 술을 너무 사랑했던 분이 술로 인하여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또 사랑하는 술과 작별해야만 하는 이유를 적시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솔직하게 적고 있어서, 제가 술에 관한 책을 쓴다면 이 책의 저자처럼 감추는 것 하나 없이 홀랑 드러낼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만큼 술을 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 역시 알코올 중독까지는 몰라도 알코올 의존증의 단계에 이를 정도로 술을 탐닉했던 적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각한 사건이나 사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처럼 단호하게 술을 끊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그럭저럭 술을 마시곤 합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술은 너무나 지독해서 순간 금주를 결정했다고 바로 금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겹도록 긴 내면의 반감들이 모이고 쌓여 금주를 하게 만들면 모를까(18)”라고 했습니다.


앞서 제가 알코올 중독까지는 아니고 알코올 의존증에 빠진 적이 있다고 적었습니다만, 저자는 이마저도 콕 짚어서 눈치를 주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알코올의존증이 갖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고 싶어 한다.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의존증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중독증을 구별하려 애쓴다.(56)”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술에 대해 농담을 하거나 술에 얽힌 환상적인 일화를 낭만적으로 포장해 내 개인적인 알코올 문제를 웃기는 영웅담으로 미화시켜 왔다.’라고 했습니다.


술에 만취하여 큰 사고를 친 뒤에는 술을 줄여보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통제가 되는 듯했습니다만, 어느 순간 다시 사고를 친 적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 대하여도 술을 줄이는 식으로 알코올 문제를 해결하려던 사람 중에 10년이 지나서까지 성공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실패한 걸로 밝혀졌다.(84)”라고 했습니다.


술을 마셔본 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였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간 다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 슬하를 떠나 객지에서 살고 있을 때였으니 비교적 자유로웠던 탓에 술을 조심스럽게 마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마셔본 가락으로 술이 센 편이라는 착각 속에서 술을 거절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술을 청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은 숙취 때문에 고통스러워야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면 술자리를 빌면 수월하다는 또 다른 착각 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과 어울리다보니 점차 술도 늘고 사건 사고도 많아졌던 것 같습니다. 숙취 속에서 깨어났을 때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는 순간들이 이어졌지만, 해가 설핏 저물면 또 누군가 함께 마실 사람을 찾곤 했던 것입니다.


<어느 애주가의 고백>이라는 반어적인 제목을 달았습니다만, 이는 술에 속아서 삶을 낭비한 술꾼의 고백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저자처럼 홀랑 까뒤집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술에 관한 저의 실패를 고백하는 글을 써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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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1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성규.허정애 옮김 / 범우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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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20세기 초를 살던 영국 지성인이 꿈꾸었던 이상향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시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의 손자입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발표한 것은 1932년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 합본되어 있는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1958년에 발표되었습니다.


헉슬리는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쓰는 시점에서 보면 <멋진 신세계>를 쓰던 시점과 비교해보면 덜 낙관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멋진 신세계>에서 예언했던 것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실현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상상했던 미래의 독재정권은 오지 오웰이 <1984>에서 그렸던 독재정권보다 훨씬 덜 지독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독재자들도 죽고 상황은 바뀌었다고 합니다.


<멋진 신세계>은 그 무렵 주목받던 우생학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정자와 난자를 등급에 따라 인공적으로 수정하고 체외에서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화학처리를 하여 역시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등 5등급으로 분류된 인간이 태어나도록 조절합니다. 수정란 하나에서 최다 96개의 개체를 만들어내는 기술도 적용합니다. 정자와 난자를 어떻게 얻는지에 대하여는 별도 설명이 없습니다. 헉슬리가 현대에 살았더라면 아마도 체세포 복제기술을 적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공수정 후에 병에 담겨 성장한 태아는 병으로부터 나오는 출생과정 이후에도 각자 맡아야할 업무에 관한 학습을 받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문명세계에 사는 인간들은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태어나게 됩니다. 이들은 헨리 포드가 일관작업으로 T형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는데 성공한 1908년을 포드기원 1년으로 합니다. 이들의 문명세계를 조정하는 사람들은 10명의 세계감독관들입니다. 이들은 사회구성원의 행복이 목표이며 공동사회, 동일성, 안정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출생이 기계적으로 조절되는 것처럼 삶의 모든 것들이 통제되는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이들 이외에도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종족을 유지하는 야만족이 살고 있습니다.


초반 멋진 신세계의 구성원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설명된 다음에는 버나드와 레니나가 뉴멕시코의 야만인 보존지역을 여행하는 장명으로 옮겨갑니다. 마치 동물원처럼 역사적 유물로 보존되는 지역입니다. 6만의 주민이 문명화되지 않은(?) 옛날 방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곳에서 베타급의 문명인 여인 린다와 그녀의 아들 존을 만난데서 파문이 시작됩니다.


버나드와 레니나가 모자를 문명사회로 이주시키면서 사태가 심각해집니다. 야만의 세계에서 성장한 존의 눈에는 문명사회에는 무언가 부족한 것을 느낀 것입니다. 과학의 힘으로 이상향을 만들어냈지만 문명인 사이에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이 느껴지지 않은 것입니다. 존은 문명세계를 통제하는 세계감독관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나 문명세계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문명세계의 일원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교외로 탈출한 존에게 문명세계 사람들은 크게 관심을 보이지만 존의 행동은 그저 찻잔의 태풍에 그치고 마는 것 같습니다.


<멋진 신세계>의 기본 틀을 딴 다양한 작품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2005년작 영화 <아일랜드>의 경우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가복제를 통하여 만들어진 인간이 체세포를 제공한 사람에게 장기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아일랜드로 갈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장기를 제공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들이 살고 있는 공간 자체가 아일랜드였는지도 모릅니다.


헉슬리가 <다시 가본 멋진 신세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멋진 신세계>에서 예언한 것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심각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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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 손창섭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2
손창섭 지음, 조현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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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님의 <비오는 날>을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읽고서 상당한 충격이 남았습니다. <비오는 날>에 수록된 14편의 단편들 가운데 일제 때, 만주의 장자워프 마을을 무대로 한 ‘광야’와 6.25 사변 당시 수색인근을 무대로 한 ‘희생’, 그리고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신의 희작’을 제외하고 나머지 11편은 대체로 전후 부산을 무대로 혹은 환도 후 서울을 무대로 한 작품들로 보입니다.


14편의 작품들에서 보는 공통점은 등장인물들이 하나 같이 당시 사회의 밑바닥에서 어렵게 삶을 꾸려가는 존재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북출신들이 적지 않다는 점, 그래서인지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지문에 북한말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에는 사라지거나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작가가 살아가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작품이 놀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는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할머니와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소학교를 마치고 만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교토와 도쿄에서 신문과 우우를 배달하면서 고학을 했는데, 우여곡절이 있어서 몇 군데의 중학교를 거쳐 니혼 대학에서 잠시 수학했다고 합니다. 19살이 되던 해 친구 동생인 지즈코와 동거생활을 시작하였고, 뒤늦게 책읽기를 시작하여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해방되고 1946년 단신 귀국하였지만, 별다른 기반이 없어 바닥 생활을 하다가 고향인 평양을 찾았다가 공산치하에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역시 어려운 처지에 빠졌습니다. 1948년 월남하여 교사, 잡지사 편집 기자 등으로 일하면서 생활기반을 겨우 마련했습니다. 6.25사변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하였다가 남편을 찾아왔던 아내와 상봉하여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6.25사변이라는 대재난의 피해자들입니다. 작가에게 전쟁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의 대결의 장이 아니라, 노아의 홍수에 비견되는 대재난이었습니다. 노아의 대홍수에서는 신에 의하여 선별된 노아의 가족과 한 쌍의 동물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손창섭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별다른 능력이 없이 나약한 존재들인데, 특히 병이 들거나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이 번제의 제물처럼 스러져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6.25 사변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넘어온 우리나라에서 <비 오는 날>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은 어쩌면 외면하고 싶다는 심리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물들이 존재했음을 증언한 손창섭의 작품들은 주목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 오는 날>을 인용한 글이 아마도 술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 단편집에 수록된 이야기들 가운데 술을 마시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서술 또한 간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은 표제작인 ‘비 오는 날’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화자인 원구가 친구 동욱을 만나던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동욱(東旭)의 거처를 왕방하기 전에 원구(元求)는 어느 날 거리에서 동욱(東旭)을 만나 저녁을 같이 한 일이 있었다. 동욱(東旭)은 발보다 먼저 술을 먹고 싶어했다. 술을 마시는 동욱(東旭)의 태도는 제법 애주가였다. 잔을 넘어 흘러내리는 한 방울도 아까워서 동욱(東旭)은 혀끝으로 잔 굽을 핥았다.(51-52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동경에 있는 국립연구소를 친선방문했을 때 일본의 선술집에서 일행들과 저녁을 먹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청주를 시켰더니 청주 잔을 굽이 있는 잔받침에 내왔습니다. 주인장이 청주를 따르는데 술이 잔을 넘어 받침에 고이도록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잔을 넘쳐 받침에 고이는 술만큼이 주인장이 손님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6.25사변과 같은 큰 재난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삶이 힘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찾아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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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유품정리인은 보았다! - 생의 흔적을 정리하는 이들이 말하는 죽음 그 이후, 개정증보판
요시다 타이치.김석중 지음 / 황금부엉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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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벌었던 뇌은행 사업을 직장관계로 접은 지도 벌써 10여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수차례 이사를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은퇴하면 다시 시작할 요량으로 관련 자료를 보관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리를 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에서 뇌은행사업을 시작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관련자료 일체를 기증하기로 하였습니다.

 

나이가 들면 일을 저지르기는커녕 하던 일도 정리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 책을 읽었습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유품정리사업을 시작했다는 요시다 타이치씨가 쓴 <유품정리인은 보았다>입니다. 유품을 정리해주는 사업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일을 하시는 김완씨가 쓴 <죽은 자의 집 청소; https://blog.naver.com/neuro412/222154821058>를 읽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글에도 글쓴이의 성품을 반영되는 법입니다. 유품정리라는 같은 일을 하는데도 요시다 타이치씨와 김완씨의 글은 느낌이 달랐습니다. 물론 일본과 한국이라는 문화적 차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보다도 김완씨가 시를 전공한 전업작가였다는 점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죽은 자의 집 청소>에는 고인의 존재와 삶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고 한다면 <유품정리인은 보았다>은 제목 그대로 죽은 사람이 남긴 공간을 정리하는 ‘일’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유품정리인은 고인이 남긴 흔적을, 냄새까지도 완전하게 제거하여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일을 합니다. 고인이 쓰던 공간을 누군가 산 사람이 다시 쓸 수 있도록 재생시키는 작업인 셈입니다. 또한 고인이 생전에 아껴 쓰던 물건 등 고인의 추억과 관련된 유품을 정리하여 유족들에게 전하거나 누군가 다시 쓸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어린이가 이야기한 것처럼 “유품을 정리하는 일은 저 세상으로 간 사람들을 위하여 ‘천국으로의 이사를 돕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합니다.

 

대체로 변사체가 발견되면 일단 경찰에서 현장을 수습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단은 죽음의 원인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의 경우는 집주인이나 유족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도착하여 주검을 발견하게 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체로 유품정리인이 현장에 도착해서 주검을 발견하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유품정리사업을 시작하고 1,000건 이상의 고독사 현장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고독사의 현장은 대체로 사후 오랜 시간이 경과된 다음에서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마련입니다. 특히 주변 사람들과 왕래가 없는 경우가 더 그렇습니다. 사체가 부패하여 냄새가 심해지거나 사체에서 나온 구더기가 집밖으로 기어 다니는 상황이 되어서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고독사의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이가 들어가면 신변정리를 잘 해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표지에 적혀있는 “내일, 당신의 물건들이 유품이 될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콕 박혔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외출할 때는 속옷까지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동안 끌어안고 있던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도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자는 10년 정도의 이삿짐 사업을 정리하고 유품정리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쓴 것은 사업을 시작하고 4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고 합니다. 역시 누리사랑방에 유품정리사업을 하면서 만났던 사연들을 올려두었던 것을 후소샤(伕桑社) 출판사의 눈에 띄어 책으로 내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역시 누리사랑방에 좋은 글을 쓰면 책을 낼 기회가 생기는 것은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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