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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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앞을 내다보는 것보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한 우물만 파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해온 까닭에 생각해볼 일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직장을 한번 옮길 때마다 새로 맡은 분야에서의 도전, 아이디어를 모아 기획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사연들, 설명할 기회도 없이 그렇게 준비해서 추진하던 일들을 놓고 떠나야만 했던 이유들... 아마 책으로 써도 몇 권은 될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담아 자신의 기록으로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여전히 일에 묶여 기록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자신을 게으르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은 이스탄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이 작가로 성장해온 배경을 이스탄불이 변화해온 과정과 엮어서 기록한 자전적 회고록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생물인 건물과 거리로 구성되는 도시가 세월을 따라가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도시가 성장할 때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하루가 다르게 거리와 건물이 늘어나고 활력이 넘치지만, 내부 혹은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눈에 띄게 활기가 줄어들면서 건물도 퇴락하기 시작하는 모습은 동물이 늙어 쇠락하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비잔틴 시대를 거쳐서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 동서양의 문명이 만나는 접점에 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대하여 과거인물들이 남긴 기록과 또 작가가 어렸을 적부터 지켜보아온 것들을 담담하게 적어내려 가는데, 그 안에는 이스탄불을 사랑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글로 적어내기 어려운 부분은 이스탄불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은 물론, 1819년에 발간된 앙투안 이그나스 멜링의 세밀화는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모습들, 혹은 퇴락해서 스러져가는 모습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의 모습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도 기록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파묵의 기억에 갈무리된 그런 사건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나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파묵의 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해오고 있는 이난아교수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너무나 허망하고 빠르게 허물어져 가는(너무 빠르게 새로워져 가는) 이스탄불의 소멸에 대한 저항의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다.”(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http://blog.joins.com/yang412/13126504) 자신의 방식으로 이스탄불의 쇠락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도하면서, 이스탄불이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불행이란 자신과 도시를 혐오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이스탄불에 대한 파묵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탄불의 가난한 변두리 마을까지도 사랑하는 그는, “가난한 변두리 마을이나 폐허, 나무, 풀 같은 자연의 우연적인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면, 그 마을, 즉 폐허로 덮인 그 가난한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351쪽)”

 

한편으로는 숨겨두고 싶을 것 같은 개인 혹은 가족의 어두운 과거사까지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밖으로 도는 아버지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과 갈등,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형과의 힘겨루기, 첫사랑 이야기 등 자신이 작가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성장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작품에 어떻게 녹여냈는지 연결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형제들이 모여 사는 파묵아파트는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 등장하고 박물관 같은 할머니집의 거실 풍경은 <순수박물관>의 배경이 되었고, 레샤트 에크렘 코추의 <이스탄불 백과사전>에 관한 이야기는 <고요한집; http://blog.joins.com/yang412/12957187>에서 백과사전의 편찬에 매달리는 의사 셀라하틴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파묵이 어렸을 적에 가족들과 떨어져 지한기르에 있는 이모집에 보내졌다는 이야기는 꼭 제가 어렸을 적 외갓댁으로 보내졌던 일이 생각나게 하고, 가족들이 차를 타고 보스포루스로 산책을 나가면서 형과 싸웠다는 이야기에서는 미국여행길에 아이들이 싸우는 통에 운전이 힘들었던 기억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사소해서 지나칠 것 같은 일에서 읽는 이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파묵의 세심한 면을 엿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탄블>을 읽으면서 언젠가 꼭 방문할 도시의 목록에 이스탄불을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누가 읽어주지 않아도 저의 이야기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정리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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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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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심야시간에 방영되는 리얼 체험 프로젝트 <인간의 조건>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야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듯이 이미 우리네 삶에서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문명의 이기를 배제한 삶을 통하여 그 소중함을 느끼게 하거나, 생각없이 소비하고 버리는 생활패턴에 제약을 두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는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인간의 조건>에서 원산지와 생산자가 확인되는 식재료로 만든 음식만을 먹을 수 있다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만약 한 차원 높여 스스로 얻은 식재료, 혹은 스스로 얻은 식재료로 교환한 음식만을 먹을 수 있도록 한다면 한 끼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요? 당장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를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수렵이나 채집을 해야 끼니를 해결하게 될 터인데, 들이나 산에 나가 채집한 식재료가 독이 없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면 굶는 도리밖에 없겠습니다.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우리가 식탁에 올릴 수 있는 식품의 재료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제공되고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유칼립투스나무잎만 먹고사는 코알라와는 달리 인간은 식물, 동물에서 광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품을 먹을 수 있습니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나무잎의 모양과 냄새만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면 되지만, 채집과 수렵시기의 인간들은 비슷한 모양이나 냄새를 가진 다양한 것들 가운데 독이 있는 것을 가려내야 해를 입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안전이 확보되지 못하면 먹을 수 없다는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농경기에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식물을 길러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었고, 산업사회에서는 식품분야의 전문가의 판단에 의존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com/yang412/12583563>에서 밈(me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지식의 축적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판단과 기억을 공유하는 문화라는 이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즉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하여 축적한 음식에 관한 풍부한 지혜를 문화로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는 금기, 의식, 조리법, 예절, 전통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구조 안에서 지혜로운 식사규칙을 규범화해놓았고, 이에 따라 우리는 식사 때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다(19쪽).

 

인구가 늘고 식품산업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딜레마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빵과 파스타를 삼가면 고기를 많이 먹으면서도 체중을 줄일 수 있다는 로버트 엣킨스박사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황제다이어트로 알려진 다이어트법의 이론적 바탕이 된 연구이기도 합니다. 엣킨스박사의 주장은 건강의 적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스테이크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반면 건강에 좋다고 알려져 있던 빵과 파스타는 도덕적 오명을 뒤집어쓰고 수많은 빵집과 면류제조회사가 파산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엣킨스박사의 주장은 몇 가지 새로운 역학연구결과로 지지하는 분위기를 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국가적 섭식장애라고 표현하고 식문화를 통하여 극복했던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사례로 충분한 학문적 뒷받침 없이 이념적 주장 때문에 식품으로서의 안전성이 의심받았던 2008년 광우병 파동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산 쇠고기는 광우병에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입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미국산 쇠고기 혹은 쇠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무엇을 먹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하여 땅에서 식탁까지 식재료가 어떻게 생산되고 식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즉 음식사슬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음식사슬은 태양광선으로부터 에너지를 합성할 수 있는 식물로부터 그런 능력이 없는 종들에게로 에너지가 전달되는 시스템입니다. 식품이 발전해온 과정을 보면, 수렵과 채집으로 먹거리를 해결하던 시기로부터 유기적으로 농작물을 키우고 가축을 길러 먹거리로 이용하던 시기를 거쳐 농작물과 가축을 산업적으로 생산하여 먹거리로 만드는 시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먹거리가 발전해온 과정을 거꾸로 거슬러가면서 음식사슬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제 1부에서 산업적 음식사슬을 먼저 설명하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 우리가 가장 크게 우려하고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제2부에서는 저자가 전원적 음식사슬이라고 부르는 산업농업의 대안방식(유기농, 지역농업, 생물학적 농업, 초유기농 등)으로 생산되는 음식사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제 3부에서는 후기 구석기적 음식사슬이라고 할 수 있는 수렵·채집 음식사슬입니다.

 

저자는 이들 세 가지 음식사슬 모두에서 경험이 가능한 범위에서 직접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농가에서 옥수수재배와 관련된 노동을 직접하고 축산농가에서 공장식(?)으로 키우는 소를 키우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였는데, 닭을 키우는 농장이나 공장식 도축시스템을 적용하는 도축장은 보안을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는 제한 때문에 직접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유기농 기법으로 경영되는 농장에서 밭작물과 가축을 키우고 도축하는 과정은 직접 경험한 것들 입니다. 마지막으로 맷돼지를 사냥하고 버섯과 소금을 채집하는 경험을 직접하고 그렇게 얻은 식재료를 가지고 직접 조리를 해서 특히 사냥과 채집을 도와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조그만 파티로 음식사슬을 탐구하는 저자의 긴 여행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세 가지 음식사슬 가운데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는 단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후 간식시간에 구수한 냄새가 딱 좋은 찐옥수수를 먹을 수 있는 계절입니다. 강원도 옥수수가 간식거리로 사랑받고 있습니다만, 옥수수에 숨어있는 놀라운 비밀을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중미가 원산지인 옥수수는 1492년까지 구세계에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식물인데, 옥수수가 우리의 땅과 몸을 점령해온 이야기는 식물세계의 가장 위대한 성공스토리 가운데 하나라고 저자는 단정합니다. 1621년 봄, 원주민 스콴토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운 미국 최초의 청교도 이주민들은 구대륙에서 들고 온 밀이 혹독한 신대륙에서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전적 변이성이 뛰어나 새로운 환경에 신속하게 적응하는 옥수수야말로 답이었던 것입니다. 옥수수의 풍요로움 덕분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옥수수씨 한 알을 심으면 150알 이상, 많게는 300알까지 생산되었는데, 1950년대 개발된 화학비료가 더해서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여기에 유전자재조합방식으로 개발된 신품종은 대단한 생산량을 보장하게 된 것입니다. 병충해 뿐 아니라 밀식재배에 대한 저항성이 뛰어나 1920년 아이오아에서 1에이커당 평균 20부셀(미국도량형으로는 35.2리터) 생산되던 옥수수는 1950년대 70~80부셀로 늘고, 지금은 200부셀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옥수수가 자라는 일은 언제나 태양광선을 포획하여 이를 음식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는데, 이제는 상당 부분이 화석연료를 음식으로 바꾸는 과정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67쪽)

 

미국대륙에서 옥수수가 넘쳐나게 된 것은 각종 보조금을 포함한 정부 정책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산된 옥수수 가운데 사람들이 직접 먹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 가축사료의 원료가 되거나, 옥수수를 증류하여 에탄올을 만들고, 그리고 옥수수로부터 고과당옥수수시럽을 포함한 다양한 식품첨가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사우스다코타에 있는 블레어목장에서 송아지를 사서 입식하는 방식으로 소를 키우고 도축되는 과정도 뒤쫓았습니다. 소와 같은 반추동물은 풀을 양질의 단백질로 바꾸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의 반추위는 용량이 45갤런이나 되는 발효탱크로서 그 안에 사는 박테리아가 풀을 셀룰로오스로 분해하여 소화할 수 있도록 진화된 것입니다. 이런 소에게 엄청난 양의 옥수수와 단백질 및 지방보충물, 그리고 수많은 새로운 약물을 투입하여 불과 14개월 만에 80파운드에서 1,100파운드로 만드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만해도 4~5년 걸리던 일입니다. 농축칼로리라고 할 옥수수를 먹고 자란 소는 금세 살이 찔 뿐 아니라 고기의 마블링이 좋아서 소비자들이 좋아한다는 것인데, 풀을 먹도록 진화된 소가 옥수수 사료만 먹게 되면 고창증과 산중독에 걸리기 쉽기 때문에 이번에는 항생물질을 사료에 첨가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소에게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하여 동물성 단백으로 만든 육골분을 사료에 첨가하는 방식이 개발되어 광우병이 발생하고 인간에게까지 전달되는 불행한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전원적 음식사슬의 시작은 풀입니다. 저자는 닭과 소, 칠면조, 토끼, 돼지에다 토마토, 단옥수수, 딸기류까지 다양한 농작물과 가축들을 키우고 있는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농장에서 초유기농 농산물과 고기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생산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100에이커의 목초지에서 4만 파운드의 쇠고기, 3만 파운드의 돼지고기, 1만 마리의 영계, 1,200마리의 칠면조, 1,000마리의 토끼, 42만개의 달걀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하여 목초지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 풍요로워지는데, 풀은 더욱 무성해지고 땅은 더욱 비옥해지고 건강해지는 것은 지렁이 덕분입니다. 폴리페이스 농장주 셀러틴은 우리가 먹을 음식을 생산하는 일이 제로섬 게임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더 많은 먹을거리를 거두어들인다고 해도, 자연이 꼭 더 많은 것을 빼앗긴다고-표토가 줄어들거나 생산력이 줄어들거나 서식 생물이 감소한다고-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나무와 풀, 야생동물 그리고 가축이 모두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방식의 농장경영을 통하여 농장폐기물을 줄이고 인공화학물질의 투여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폴리페이스 농장의 또 다른 특징은 이 농장에서 생산되는 농축산물은 대부분 농장 인근 지역에서 소비된다는 점입니다. 산업적 음식사슬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아이오아주에 있는 옥수수농장으로부터 캔자스시티의 사육장과 포장공장을 거쳐 이곳저곳에 산재해있는 식품가공업체로 흩어진 식재료가 마린 카운티의 맥도날드 매장에 이르기까지 대략 1,500마일을 이동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대단히 짧은 식품마일리지라고 하겠습니다. 이 농장에서는 농장을 방문하는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팔거나 농민장터, 대도시의 구매클럽, 인근의 소규모 상점, 혹은 원하는 레스토랑에 직접 공급하는 방식으로 소비자들을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농장의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은 신선하다는 점과 도축과정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오래 전 방문했던 도축장에서 소와 돼지가 도축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짐승을 도축하는 모습을 보면 그 고기를 먹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자가 다루지 않고 있는 공장식 도축시스템에 관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게일 아이스니츠의 <도살장; http://blog.joins.com/yang412/10092378>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독후감을 쓰면서 ‘알고는 먹기 어렵겠네요’라고 제목을 붙였던 것을 보면 저 역시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세 번째 주제 ‘수렵과 채집의 음식사슬’은 내가 직접 사냥하고, 채집하고, 재배한 식재료들로만 저녁식사를 준비해보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이런 방식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사냥감, 야생식물이나 버섯도 충분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잡식동물의 축복은 자연에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모두 먹을 수 있다는데 있는 반면 잡식동물의 저주는 그 가운데서 먹어도 안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365쪽)”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고르든 그것이 산업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주어진 은총이라는 것을 더 이상 애써 떠올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라는 마무리 글에 담긴 저자의 생각을 되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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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시간 : 길고도 아픈 치매가족의 하루 - 세계 최고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이 제공하는 치매극복 가이드
피터 V. 라빈스, 낸시 L. 메이스 지음, 안명옥 옮김 / 조윤커뮤니케이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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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 홉킨스의대에서 치매환자를 진료하는 의료진들이 치매환자와 가족들에게 치매진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1981년에 처음 내놓은 책입니다. 1991년, 2006년 그리고 2011년에 발전된 내용을 담아 개정판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1991년에 나온 개정판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만해도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만, 2011년에 나온 개정판은 분량이 두배가 넘는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간략하게 요약한 글처럼 한 가정에 치매환자가 있게 되면 치매환자는 물론 가족 구성원 모두가 너무나 큰 영향을 받아 생활이 통째로 흔들리게 됩니다. 어쩌면 하루가 36시간이 아니라 48시간, 60시간 같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고된 상황을 맞게 된다는 의미에서 ‘36시간’이라는 제목을 정한 것 같습니다.

 

제가 치매를 공부하던 1990년대 무렵 만하더라도 미국 내 치매환자가 400만명이라고 하던 것이 2010년대에는 500만명에 이르게 되었고 2008년에 치매치료에 1,600조 달러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정부 발표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의 치매환자는 53만명으로 2025년에는 1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고 하니 치매가 국가적 질병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치매의 본질을 세세하게 다루기보다는 치매환자와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치매환자가 보이는 증상은 제각각이라서 맞춤형 대응방식을 마련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치매환자들이 보일 수 있는 증상들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고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변형하여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저자들은 많은 사례들을 통하여 다양한 대응방안을 제시하고 있어 실제상황에서 응용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먼저 치매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소개하고 치매를 진단하는 과정, 치매 환자들의 전형적인 행동 증상과 대응방법, 치매환자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면서 부딪히는 문제점과 해결방안, 치매환자들에게 필요할 수도 있는 의학적 문제들과 각각의 상황에서의 대응방안, 간병하는 사람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상황들, 가족들이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들과 협력방안, 가정에서 돌보기 어려운 치매환자를 요양시설로 모시게 되는 경우 고려할 점,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고 알려진 속설들에 대한 평가, 치매에 대한 연구의 현주소 등등을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작은 제목 가운데 중복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중복되는 점도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의료제도 안에서 대응방안들을 검토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보도 적지는 않습니다.

 

제가 치매에 관한 책을 처음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 1996년이었고, 2003년에 개정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동안 치매치료에 관하여 발전된 내용을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오던 터입니다. 그동안 관련 자료를 꾸준하게 수집해왔고, 최근에 출판사와도 개정판을 내기로 의논이 되었지만, 막상 금년들어 하고 있는 일이 갑자기 많아지면서 원고를 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이 계기가 되어 개정판의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여름휴가기간에는 하는 일도 다소 줄기 때문에 원고작업이 가능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녁시간에 책읽는 시간을 줄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은 17대 국회에서 보건복지위원으로 보건복지분야, 특히 치매환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안명옥의원님께서 번역을 맡으셨는데, 번역이 아주 잘 되어서 읽기에 편하고 이해가 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세집 건너 치매환자가 있을 정도로 치매는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집안에 치매환자를 모시고 있는 가정에서 반드시 읽어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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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문 밀레니엄 북스 22
앙드레 지드 지음, 김동호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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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뒤쫓는 책읽기의 일환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은 <푸르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11784>에서 앙드레 지드와 마르셀 프루스트를 연결하는 고리가 크게 두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두 사람이 모두 동성애자였으며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던 동성애 행위를 작품에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스완네집 쪽에서’의 출간을 거절했지만 후속작을 출판한 누벨 르뷔 프랑세즈라는 문예지의 창간인이자 출판인이 앙드레 지드였다고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동 시대를 살았던 지드의 작품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용했을 법도 합니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편에서는 노골적인 동성애를 묘사하고 있는 푸르스트였고, 지드 역시 남색을 다룬 소설 <코리동>, <씨앗이 죽으면>, <위폐범> 등을 발표한 바 있음에도 프루스트는 지드의 작품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프루스트와 지드의 작품세계를 비교한 텍스트를 읽기 위하여 지드의 <좁은문/전원교향악>을 읽게 되었습니다. <좁은문>은 1909년에 <전원교향악>은 1919년에 각각 발표된 작품입니다. <좁은문>은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라고 한 누가복음 13장 24절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좁은문의 주인공 제롬은 두 살 연상인 외사촌 엘리사를 사랑하지만, 엘리사의 동생 쥘리에트가 중간에 끼어드는 바람에 엘리사가 한발 물러서고, 이런 정황을 알게 된 쥘리에트가 다시 양보하는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결국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엘리사가 죽음을 맞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기 됩니다.

 

옮긴이는 작품해설을 통해서 엘리사가 제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가 제롬보다 나이가 2살 위라는 것, 그래서 자기는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 둘째, 자기 동생 줄리엣이 제롬을 사랑하고 있다는 배려심, 셋째는 자기가 결혼하면 혼자 남는 아버지에 대한 염려, 넷째, 불륜에 빠진 자기 어머니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충격” 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줄리엣이 제롬에게 빠져 있다는 정황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달아난 다음 홀로 된 아버지가 걱정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제롬은 이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이기 때문에 둘이서 같이 모셔도 될 상황입니다. 엘리사가 연상이라는 점이 걸림돌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프랑스사회에서 연상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은 <좁은문>보다 앞서 발표된 조르주 상드의 <사생아 프랑수와; http://blog.joins.com/yang412/13190187>에서 이미 두 살 정도의 연상녀가 사회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고 보이는 점입니다.

 

다만 <사생아 프랑수와>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근친상간이 오히려 문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사촌이라면 비교적 가까운 친척이라고 볼 것입니다. 인륜적인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육체적인 쾌락과 지상 위에서의 행복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높임으로써 사랑을 한층 더 애절하고 절실한 존재로 창조해냈다고 하는 평가가 적절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연히 만나게 된 불쌍한 처지에 놓인 농아 제르튀르드를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돌보는 과정에서 연민이 사랑으로 변하게 된 목사님은 아들 자크가 제르튀르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충격에 빠지게 되는데, 그런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제르튀르드가 사랑한 것이 자신이라는 고백을 듣게 됩니다. 진퇴유곡이라 할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결국은 제르튀르드가 죽음을 택하고 마는 비극으로 치닫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과연 ‘인간에서 출발해서 사랑으로 승화한 한 편의 전원시’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은지 따져볼 일이 아닐까요?

 

프루스트와 지드는 어릴 때 병약했던 것까지도 닮은 점이 많은 작가였음에도 작품세계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점은 다시 공부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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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 - 강제윤 시인의 풍경과 마음
강제윤 지음 / 호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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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같은 제목에 끌려 읽게, 아니 보게 된 책입니다. 글보다 사진에 담긴 저자의 글을 읽어보려 했다고 할까요? 서문에 해당하는 ‘여행자의 서’에 적은 저자의 여행관(?)은 이렇습니다.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확인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여행이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 본 사람은 안다. 길에서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어떠한 여행도 존재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구도행 아닌 것은 없다.” 저는 아직 이런 여행을 해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아 충격이었습니다.

 

강제윤시인은 특히 섬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8년 동안 한국의 섬 약 300여개를 걸으며 바다의 풍경과 그 바다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에게서 삶을 찾는 여행자의 모습을 전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에서는 섬여행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자연의 모습과 함께 여행에 비유되는 인간의 삶을 사는 지혜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생적 여행자이며 길의 자녀들이다. 지구는 은하계를 여행하는 우주선, 이 순간에도 우리가 탑승한 지구는 시속 11만 킬로미터의 놀라운 속도로 우주를 항해한다.”(38쪽, 은하 여행자) “우리는 늘 삶에 서툴다. 그렇다고 삶이 실수투성이인 것을 책망하거나 탓할 이유는 없다.”(17쪽, 처음 살아보는 삶)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우리네 삶이기에 연습이라는 것을 할 틈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나의 삶은 특별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섬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폭풍이 거센 바다에서는 파도를 이길 도리가 없기 때문에 애써 중심을 잡으려 몸부림치지 말고 파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라 권합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평온을 되찾게 될 것이라구요. 섬에서는 느림의 미학을 절로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카페리가 다니지 않는 섬에서는 오로지 두 다리에 의지해야만 어딘가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섬의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릿느릿 걷고 또 걸어도 작은 섬에서는 시간이 모자라지 않는다구요. 이렇게 걷다보면 걷기의 의미를 깨닫게 되나봅니다. “온전한 걷기란 단지 다리 근육의 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생각의 폭을 넓히는 정신의 운동이기도 하다.”(61쪽, 걷기는 정신의 운동)

 

사실 제가 운동 삼아 하는 걷기는 속도를 붙여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느림의 미학을 깨우칠 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저자는 이렇게 꼬집고 있습니다. “동일한 풍경을 보고서도 사람마다 그려내는 풍경이 제각각인 것은 사물을 관찰할 때의 속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속도고 놓치는 풍경을 걷기의 속도는 포획해 낸다.(60쪽, 걷기의 속도) 연전에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외국여행하면 비행기를 타고가서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고 버스나 비행기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느껴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동차로 이동을 해도 그곳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업기 마련이지요. 최선이 걸어서 여행하는 것이고, 자전거만 해도 그래도 낫더라는 것이지요.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저자는 “집을 떠나 자연의 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바쁘게 걷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다시 속도의 노예가 되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온갖 헤찰을 하면서 느리게 걸어야 한다구요. 목적지가 여행이기 때문에 걷다가 길을 잘 못드는 일은 없다는 것이지요. 잘 못 든 길이 바로 여행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삶 자체가 여행이기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 삶이라는 누군가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늙음은 결코 죽어가는 일이 아니다. 삶을 완성해가는 일이다. 삶의 근원에 더 깊이 다가서는 일이다.”(156쪽, 늙음은 삶의 완성이다.) 삶을 완성해가다 보면 미래에 올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통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삶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서 비롯된다.”(100쪽,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삶이라는 여행을 통찰하고 나만의 여행이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느리게 걸으면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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