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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언젠가부터 앞을 내다보는 것보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한 우물만 파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해온 까닭에 생각해볼 일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직장을 한번 옮길 때마다 새로 맡은 분야에서의 도전, 아이디어를 모아 기획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사연들, 설명할 기회도 없이 그렇게 준비해서 추진하던 일들을 놓고 떠나야만 했던 이유들... 아마 책으로 써도 몇 권은 될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담아 자신의 기록으로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여전히 일에 묶여 기록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자신을 게으르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은 이스탄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이 작가로 성장해온 배경을 이스탄불이 변화해온 과정과 엮어서 기록한 자전적 회고록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생물인 건물과 거리로 구성되는 도시가 세월을 따라가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도시가 성장할 때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하루가 다르게 거리와 건물이 늘어나고 활력이 넘치지만, 내부 혹은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눈에 띄게 활기가 줄어들면서 건물도 퇴락하기 시작하는 모습은 동물이 늙어 쇠락하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비잔틴 시대를 거쳐서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 동서양의 문명이 만나는 접점에 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대하여 과거인물들이 남긴 기록과 또 작가가 어렸을 적부터 지켜보아온 것들을 담담하게 적어내려 가는데, 그 안에는 이스탄불을 사랑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글로 적어내기 어려운 부분은 이스탄불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은 물론, 1819년에 발간된 앙투안 이그나스 멜링의 세밀화는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모습들, 혹은 퇴락해서 스러져가는 모습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의 모습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도 기록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파묵의 기억에 갈무리된 그런 사건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나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파묵의 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해오고 있는 이난아교수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너무나 허망하고 빠르게 허물어져 가는(너무 빠르게 새로워져 가는) 이스탄불의 소멸에 대한 저항의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다.”(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http://blog.joins.com/yang412/13126504) 자신의 방식으로 이스탄불의 쇠락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도하면서, 이스탄불이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불행이란 자신과 도시를 혐오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이스탄불에 대한 파묵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탄불의 가난한 변두리 마을까지도 사랑하는 그는, “가난한 변두리 마을이나 폐허, 나무, 풀 같은 자연의 우연적인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면, 그 마을, 즉 폐허로 덮인 그 가난한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351쪽)”
한편으로는 숨겨두고 싶을 것 같은 개인 혹은 가족의 어두운 과거사까지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밖으로 도는 아버지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과 갈등,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형과의 힘겨루기, 첫사랑 이야기 등 자신이 작가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성장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작품에 어떻게 녹여냈는지 연결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형제들이 모여 사는 파묵아파트는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 등장하고 박물관 같은 할머니집의 거실 풍경은 <순수박물관>의 배경이 되었고, 레샤트 에크렘 코추의 <이스탄불 백과사전>에 관한 이야기는 <고요한집; http://blog.joins.com/yang412/12957187>에서 백과사전의 편찬에 매달리는 의사 셀라하틴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파묵이 어렸을 적에 가족들과 떨어져 지한기르에 있는 이모집에 보내졌다는 이야기는 꼭 제가 어렸을 적 외갓댁으로 보내졌던 일이 생각나게 하고, 가족들이 차를 타고 보스포루스로 산책을 나가면서 형과 싸웠다는 이야기에서는 미국여행길에 아이들이 싸우는 통에 운전이 힘들었던 기억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사소해서 지나칠 것 같은 일에서 읽는 이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파묵의 세심한 면을 엿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탄블>을 읽으면서 언젠가 꼭 방문할 도시의 목록에 이스탄불을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누가 읽어주지 않아도 저의 이야기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정리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