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화가들 - 살면서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아주 특별한 미술 수업
정우철 지음 / 나무의철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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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거 아시나요? 그림을 시작한 후 고향 사람들이 불렀던그의 별명은 ‘마을의 멍청이‘였답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했겠다,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는데 본인이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린다며멍청이라 불렀지요. 그래도 마티스는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 고개숙이지 않았습니다.
마티스가 그랬습니다. 마티스는 이후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열한 시간씩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을의 멍청이는 결국 프랑스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 되었지요. 그럼 여기서 마티스의 초창기 그림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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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믿음과 신뢰는 긴밀한 관계를 이룹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가 붙들고 있었던 것을내려놓고, 소유한 것도 놓아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내적 고향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성경은 아브라함에 대해 이상적인모습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가리키신 곳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거듭 의혹을 품습니다. 이집트에 머물때에는 파라오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파라오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 중에 언제나 의혹도 따를 겁니다. 우리는 길을 떠나지만 곧 다시 안전장치를만들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불러주신 하느님을 신뢰하지만,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방책을강구합니다.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할까 대비하는 것입니다.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가 늘 신뢰했던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뢰했던 것은 신뢰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꽉붙들고 놓지 않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에 일으켜 주시는 신뢰는 우리에게 익숙한 고향이 지금까지 선사했던 것을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뢰는새로운 것에 도전하도록 우리를 북돋아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습관들, 소유물,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집, 고향에서 맺은 인간관계 등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신뢰는자신이 삶을 주도하기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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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동그래지며)저 배짱 없어요. 70년 살아보니 인생이 평탄하고 싶어도 평탄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어느 순간 ‘오케이, 이 골짜기 넘으면 또 어떤 벼랑이 올까, 올 테면 와라, 내가 넘어줄게‘가 되는 거죠. 사는 게 다 그래요. 망하고 싶은사람이 어딨어요? 자식 아픈 거 보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그런데 어느 날 멀쩡하던 제 자식이 중환자실에 들어가 뇌수술을 받았어요. 이듬해엔 출근하던 삼풍백화점이 하루아침에 무너져서 동료를 잃고 직장을 잃었죠.
그런 일 겪으면 인생관이 바뀌어요. 그래도 벌어진 일은 받아들여야 해요. 아무 일 없이 평탄했으면 내 인생 콘텐츠도없었겠죠.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이 경이롭고 안쓰러워. 어쩌면 저렇게 유능할까, 막 존경하다가 ‘앞으로 나이의 첩첩산중을 어떻게 넘어갈꼬‘ 생각하면 애처로워서…

인생에서 일어난 일은 어떻게든 끌어안아야 되잖아요. 걸림돌이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디딤돌이 되더라고요.

그런데도 ‘나 치매 걸리면 싼 요양원에 넣어달라‘고 하셨다죠.
치매 걸리면 알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비싼 데 가요. 비싼 요양원도 다 자식들 허영이죠. 대신 이런 당부는 해요. "너희들 욕 안 먹으려면 자주 찾아 와." 부모 임종 앞두고 수의가지고, 관 가지고 싸우는 자식들을 많이 봤어요. 왜 그런 거고민시켜요? 저는 이미 시신 기증 서약도 했으니 몸에서 쓸만한 건 다 빼내고 가루만 주겠죠. 애들은 엄마가 죽어도 각막은 살아서 누군가 볼 수 있으니 또 얼마나 좋아.
어차피 우리가 사는 게 죽으러 가는 거예요. 배고픈 애들 밥먹이다 가면 황천길이 편하잖아요. 죽으러 가는 길에 골짜기도 건너고 강도 건너고 평야도 건너는 거예요. 누구는 금수저 물고 태어나고 누구는 수저도 없이 태어난다고들 불평하죠. 그런데 나무젓가락 들고 막노동판에서 먹어도 동료들과 웃으며 식사하면 그게 행복이에요.

무슨 말이든 경쾌하게 하는 편이죠?
내 모토가 삶에 찌들지 않은 상큼한 할머니잖아요. 겁주지않아도 어차피 삶은 무거워요. 젊은이들은 더 무겁죠. 그러니 말이라도 경쾌하게 해줘야죠. 자존감 없으면 더 고단한사회니까요.

." 기도하고 산책하면서 루틴을 다져요. 스트레칭, 신문 읽기, 독서도 빼놓지 않죠. 루틴은 나를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거예요. 몸의 뼈대 같아서 루틴이 튼튼하면 일상이 무너지지 않아요. 젊을 때와 다른 건 해야 할 일을 억지로 하진 않는다는 거. 집이 좀 더러워도 내키지 않으면 "먼지야, 내일 치워줄게" 그러죠(웃음).

(미소 지으며)"하고 싶은 일을 해. 단 네 생활과 노후는 스스로 책임져. 사회에 폐 끼치지 말고." 사는 게 별거 아니에요. 그래서 남에게 폐 끼치는 거 아니면 제 성질대로 살아야해요. 패션도 마찬가지예요. 필요에 따라 조언해 주지만, 근본적으로는 ‘입고 싶은 거 입으라‘가 답이에요. 어릴 적 엄한 부모 밑에서 레이스 달린 거 못 입어본 사람은 커서 공주옷 입어야 욕구가 풀려요. 억압이 해결되는 거죠.
꼰대가 별 게 아니에요. 무조건 ‘나한테 맞추라‘고 억압하는꼰대들은 예나 지금이나 있어 왔어요. 조너선 스위프트라고《걸리버 여행기》 쓴 작가가 그랬어요. 젊은이한테 참견하지말고, 그들이 같이 놀자고 하기 전에 끼어들지 말라고요. 이태리에서도 집안의 어르신은 점잖게 앉아 있어요. 그래도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꼭 젊은이가 어른의 의견을 묻죠.

야망과 열정은 다릅니다. 야망은 역경에 맞서 애써 위로 올라가려는 것이에요. 반대로 열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눈사태처럼자신을 붙들고 가속도를 내서 그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것이든가요.
실제로 자연선택은 무작정 속도를 폭발시키는 대신 에너지를 아껴 써서 지구력을 증진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타오르는 열정을 식히는 것 자체가 노화의 일반적인 과정이 아닐까요.

‘검은머리솔새는 바람에 맞서는 대신 바람을 타고 날고 싶어 한다. 바람의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다.‘

후회에 관한 유의미한 발견은 무엇이었나요?
사람들은 너무도 다양하게 많은 것을 후회하더군요. 연애,
재정, 가족, 교육 등등. 그 심층구조를 들여다보니 후회는4가지로 정리됐어요.
첫째, 삶의 안정적 인프라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기반성후회. 둘째, 성장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대담성 후회․셋째, 양심적이지 못한 일에 대한 도덕성 후회. 넷째, 더 사랑하고 손 내밀지 못한 관계성 후회입니다.

괴롭혔던 사람에게 사과할 수도 있고, 흉한 문신은 지울 수도 있죠. 차선책으로 해석을 달리할 수도 있어요. 가령 "그사람이랑 결혼한 건 후회하지만 ‘적어도‘ 예쁜 두 아이를 얻었잖아"처럼요. 하지만 무행동에 대한 후회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요. 나이 들수록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대부분 무행동에 대한 후회는 후회의 심층구조에서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담성 후회‘와 ‘관계성 후회’로나타났습니다.

훌훌 털고 간 게 아니라슬픔과 함께 나아간 거예요. 모든 상처가 다치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슬픔과 사랑을 동시에 느끼며 다시 웃고 나아갈 뿐이지요.

사랑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잃게 되지만
사랑은 결국 다시 다른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 수전 케인-

보통의 아이들도 눈부신 지평선을 보면 슬퍼해요. 떠나고헤어지는 것을 힘겨워하죠. 그럴 때 ‘언젠가 다시 보게 될것‘이라는 말보다 더 위안을 주는 가르침은 작별의 고통이삶의 일부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아이들이 우는 이유는 우리가 기만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고 문제없는 게 정상이며 낙담, 병, 이별, 피크닉의 파리떼는 비정상이라는 강박을 버리세요. 덧없음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위안이 돼요.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는 〈봄과 가을>이라는 시에서 소녀에게 이렇게 가르쳐요.
‘인간이 태어난 것은 시들기 위해서란다. 네가 슬퍼하는 것도 마거릿, 너 자신인 거야.‘

끓어오르는 감정을 단번에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일단 물러서면 많은 일은 저절로 조정됩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심호흡을 하세요. 적나라한 분노를 쏟아내면 주목은받겠지만 탁월함과는 거리가 멀어져요. 최악의 상황을 그려본 후 서서히 압력을 낮추세요.
제 생각에 그런 정서적 주권을 쥔 대표적인 사람은 버락 오바마입니다. 그는 자부심과 기쁨은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트럼프 시대에조차) 좌절과 분노는 적절하게 제어했어요.
반응의 적정 온도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따뜻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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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음 한가운데서 그 심장 박동은 한결같다. 그리고 귀를기울이는 이에게는 그때보다 감지하기가 더 어렵지도 않다. 어쩌면참으로, 우리가 쓸데없는 것들로 더욱 시끄럽게 그 박동 소리를 압도할수록, 그 심장 박동은 더욱 고요하게, 더욱 끈질기게, 더욱 충실하게 자신을 알리고 있지 않을까.

하나는, 이 책이 삼위일체적 순환의 신비‘를 말하려는 것 같다는점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와 하느님 아버지에게로돌아간다. 그분에게서 사랑이 샘물처럼 솟아 만물을 적시고 흐르며그분에게로 귀환한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때까지 (1코린 15,28 참조). 그리고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있다. 성령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심장이 세계의 중심이다. 온우주가 그분의 몸이다. 심장이 어찌 자기 몸을 돌보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이 생명의 흐름과 순환을 가로막고 차단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세속성에 대한 풍자와 준엄한 비판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이 책이 ‘모순의 신비‘에 대해 곳곳에서 거듭하여 말한다는 점이다. 이 모순의 신비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아들 안에서신성과 인성이 결합함으로써(위격적 일치) 이로부터 귀결되는 본질적 특성으로, 예수님의 생과 수난, 부활의 전 생애를 관통한다. 곧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크신 분"(안셀모 성인이 "그보다 더작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작은 분이 되심으로써, 하느님 아들 안에서 양극단이 곧 무한과 한계, 낮춤과 높임, 권능과 무능, 강함과 약함, 충만과 공허, 하느님 가까이 하느님 멀리가 온전히 매개되고견지되며 무한히 초월된다. 이러한 모순의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서남김없이 드러난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에 인간 존재가 지닌 ‘모순‘이 있다. 우리는 무한자이신 하느님을 향해 창조되었지만, 그분이 아니라면 한순간도 유지될 수없는 존재이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그분께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 역설적 존재인 인간에게 발타사르는 ‘시간‘이 지닌 가능성에 주목하도록 초대한다. 우리가 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부르심에, 은총 작용에 응답하는가에 따라, 인간의 유한함은 하느님의 무한함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시간‘은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는 중요한 장이 아닐 수 없다. 발타사르는 인간이 무한으로 나아가기 위한 비결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와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자세, 그리고사랑을 꼽았다. 더 나아가, 그는 하느님 곁에서 죽고 부활할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고 전한다. 그렇게 "시간의 비밀스러운 강물에 우리의 몸을 씻을 때" 우리는 무한을 향한 구원의 길로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보라. 둥둥 떠다니며 흔들거리는 것, 신비로이 유동하는것이 있으니, 그것은 시간이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가는 보이지 않는 작은 배. 이것에서 저것마다 노 저어 가는 여정. 시간 속으로오르자마자 배는 이미 너를 싣고 출발하고, 너는 어떻게 그러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네 아래 단단한 바닥은 이미 출렁이며요동치고, 가혹한 물길은 굽이치며 솟구친다. 잘도 휘감아 도는 강물처럼 굽이굽이 흐르기 시작한다. 강기슭이 번갈아 나타나고, 곧이어 배는 숲들을 가로질러 가며 너를 뒤흔든다. 너른 들판들과 인간의 도시들을 연이어 지난다. 물결은 그 자체로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럽다. 부드럽게 살랑이다가도 금세 성난 폭포처럼 변한다.

시간은 은총처럼 충분히 길다. 시간의은총에 너를 맡겨라. 너는 시간을 끊어 내고 그것을 움켜잡아 어디에든 저장할 수 없다. 그러니 시간이 흐르도록, 달려가도록 두어라.
너는 어떻게든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아름다운 화음에 쓸어 담아단번에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인내는 듣고자 하는 이의 첫 덕성이다. 그리고 둘째 덕성은 내려놓음이다. 보라, 마지막 음이 다 울리기전에는 네가 멜로디의 진동을 앞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멜로디가 다 울린 다음, 그제야 너는 감추어진 무게와 긴장의 굴곡들과 간격의 굽이들을 조망할 수 있다. 귓속으로 들어간 것이 비로소마음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아니 더욱 그렇게 네가 감각의 다양성 안에서 감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정신의 일체성 안에서도 파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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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힘을 다해 허리를 짚고 구부려 뻗어 올리고자 하는 다리를 보면 이여인 역시 이 짐이 가볍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에서는 ‘산다는 것이 뭐 대순 겨, 짐이란 게 그저 지면 되는 것이제!‘ 뭐 이런 것들이 느껴집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평온하고도 따스하며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저 표정은 등 위의 올려진 짐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감동이 솟아나게 합니다. 저 표정에서는 짐짓 도사인 척하는 허풍이나 무게를 감당함에서 오는 지나친 경직, 위엄 같은 것은 찾아볼수없습니다. 마치 가벼운 보따리 하나 들어 올리듯, 늘 해야 할 일상의 일을 하는 듯…

제가 소속된 트라피스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성 베네딕도는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그는 수도생활에나아감에 따라 짐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넓어져 같은 생활을사랑의 감미로 달려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짐을 진 사람이 달려간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사랑의 달콤함으로 바로 이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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