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consumption 이걸 주목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틱톡을 보는지 유튜브를 보는지, 여전히 케이블을 보는지, 저녁8시 뉴스를 보는지를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미디어 소비 행태가 어떤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것이죠.

‘본방 챙겨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OTT를 이용하면 지하철에서, 버스에서도 볼 수 있는 걸 굳이 시간 맞춰TV 앞에 앉아서 볼 이유가 있을까요? 게다가 TV 프로그램말고도 재미있는 영상이 여기저기에 넘쳐나고 있죠. ‘매스미디어‘가 없어지고 ‘퍼스널 미디어‘가 생겼습니다. 이게정확한 표현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유튜브에서 개인 방송을 하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미디어가 될 수

이런 시대가 됐습니다. 브로드 broad 캐스팅은 사라졌고 이제는 내로우narrow 캐스팅이 있습니다. 브로드캐스팅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들입니다. 이제 큰방향은 내로우 캐스팅입니다.

저는 이것이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기업활동에 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구조 개선 등 투명경영을 고려해야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철학이 담겨 있는 말로, 많은 기업이 ESG 라고 하면 ‘환경‘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요. 하지만 시작은 가장 작은 원, ‘거버넌스Governance‘, 내부입니다. 또한 거버넌스라고 하면 경영의 투명성을 크게 이야기하지만,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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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peut, je crois, se passer de bonheur personnel,
si on a des amis, des aimés heureux; car leur bonheur est une lumière qui nous baigne doucement.
행복하게 지내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개인적인 행복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들의 행복이 우리를
부드럽게 비춰주는 빛이 되기 때문이다.
- 로망 롤랑 Romain Rolland (작가)

ㄻ생존 이상을 생각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관념적 논쟁은 잉여적 사치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생존이 다급한 사람에게는 두 걸음 전진하기 위한 한 걸음 후퇴마저 사치이자 여유로 여겨질 수있다. 가난한 자들이 우파 정부에 표를 던지는 논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노란 조끼를 입고 일어선 노동자들은, 생존하는 삶으로 이들을 전락시키려는 정부에 맞서 저항했다. 무력하게 떠밀려가 꾸역꾸역 생존을 방어하는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을 누릴 권리를 지켜가기로 했다. 존엄한 삶은 그 가치를 인지하고 지켜내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아무도 의심하지않는 한국 사회에서, 정부는 주 69시간 노동과 2024년에도 여전히 1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시간당 최저임금을 생존의 틀로 제시한다. 생존이 삶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좀처럼 대기중에 유포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 삶과 생존이 구별되지 않는세상에 진입해버려, 그 두 가지를 식별할 감각을 상실한 것처럼.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 성공을 거두자, 우린 단지 ‘더 잘 먹고사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Survivre c‘est mourir.
Il faut patiemment et sans relâche
construire, organiser, ordonner.
생존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다.
끊임없이 건설하고 조직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r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Scrupule(스크뤼퓔)은 어떤 행동을 취함에 있어서 미적거리게하는 마음속 걸리적거림이다. 우리말로는 불안감, 가책, 세심함혹은 소심함이라고도 해석된다. 하나의 단어가 어찌 이토록 다른 결의 의미들을 담고 있는 것일까?
스크뤼은 라틴어 scrupulus에서 온 단어로 자잘한 모난 돌을 뜻한다. 신발 속으로 굴러들어 와 자유롭게 걷는 것을 방해하는 작고 모난 돌은 얼핏 부정적 의미로만 느껴지지만, 작은 걸림돌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살피는 세심함에 초점을 맞추면 긍정적인 말이 될 수 있다.
형용사 scrupuleux(스크뤼퓔뢰)는 신발 속에 들어온 까칠한 작

"그녀는 스크뤼퓔뢰즈하다 Elle est scrupuleuse"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알며, 그 소리가 들리면 멈출 줄 아는 세심한 도덕률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태도가 시간의 지체를 초래할지라도 결과와 상관없이 그 사람 마음속에서 일던 갈등이 드러내는 성정, 즉 상대를 헤아릴 줄 아는세심함, 윤리적 엄격함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없이‘라는 뜻의 전치사 sans 이 앞에 붙은 ‘sanssculpule(거침없이, 아무 망설임 없이)‘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느껌을 전달한다. 가차 없이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 망설임 없이 병든 강아지를 유기하는 주인처럼 신발 속 작은 양심의돌멩이들의 걸리적거림을 지르밟고 신속히 실용적 선택을 하는사람의 태도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양심의 거리낌으로 머뭇거리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결과보다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드러낸다. 머뭇거림, 양심의 불편함이 당장 어딘가에 가많아 또렷한 결과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사람의 마음속에서 걸리적거리는 작은 돌멩이의 존재는 그의 인간다움을 투영하는 하나의 존중받을 만한가치가 되는 것이다.
잠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행위가 사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계기를 전하는 것처럼, 양심의 돌멩이가 움직일 때 머뭇거리는 심성은 사람들 사이에서 숨 쉴 공간을 제공한다. 인공지능을통해 세상을 작동시키고자 하는 시대가 눈앞에 와 있다. 인간의능력은 인공지능의 신속, 정확함에 이를 수 없을 터이나, 두근거리는 심장과 번뇌하고 망설이는 인간의 소프트웨어를 인공지능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과 비슷한 결의 마음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Marguerite Yourcenar는 이렇게 표현했다.
C‘est au moment où l‘on rejette tous les principes qu‘il convient de se munir de scrupules.
모든 원칙을 버릴 때 우리가 지녀야 하는 것이 스크뤼퓔이다.

모든 성문화된 원칙이 사라진다 해도 각자 양심 속 사각거림에 반응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세상은 제대로 굴러갈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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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며, 단순하게 산다는 건 사는데 불필요한 것들은 되도록 걷어내고 필요하거나 좋아하는 일들에 시간을들이며 사는 일이라는 걸 이해해갔다. 내 삶에 꼭 있어주었으면 싶은 것들을 몇 개 정해놓고 그것들을 하면서 시적시적 걷듯 생활하는 마음이 좋았다.

단순한 생활이 좋은 건,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깃든 생활이라서다. 내 삶과 동떨어진 것들이 아닌, 내 몸과 마음에 밀착된 매일의 일과에 의미를 부여하며 시간을 쓰는 생활. 이런 생활을 보내다 어느 날 뚜렷이 느끼게 되는 삶에 대한 만족감. 나는 이런 만족감을 느끼며 살고 싶었고, 지난 1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누군가가멈춰서 눈여겨볼 일상은 아니지만, 나의 에너지와 몸과 마음이 서로 호응하며 만들어낸 일상은 오롯이 나의 일상이었다.

단 한 시간이라도,
단 하루라도 가벼운 상태가 되는 것.
이 상태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거나 하고 나면 기분 좋은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찾은 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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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로고스logos‘에 관한 관상을 하기 위해 귀족 지위마저 사촌에게 양보한 채 홀로 산에서 지냈습니다. 그의 수많은 어록 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명언이 있습니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자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 것만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성향은 우리가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더욱 도드라집니다. 함께 기도하자고 말은 하지만 확신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기대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못하는 걸까요?
인생에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기대하지 않는 걸까요

기도해 봤자 소용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기대할 수 없는일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대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런 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일상에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우리는 너무도 쉽게 단정해 버립니다. 그런 특별한 일들은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내면에서 먼저 그런 기대를 품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런 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 원하면 당신이 하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자매님은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바닥의 성혈을 조심스럽게 닦은 다음, 그 손수건을 사제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그 사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원하면 그 손수건을 가져가라며 무심히 말했고, 결국 자매님은 그 손수건을 집에 가져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성혈을 닦았던 손수건이기 때문에 너무도 귀중한 보물이라서자매님은 바로 액자에 모셨습니다. 그 자매님에게 그 손수건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 성녀의수건과 똑같은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감동적인이야기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아는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섬세함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주님께 이런 마음을 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주님의 신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신앙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주님과 만나기에 참으로 좋은 시간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만난다."
는 표현보다 "주님께서 우리와 만날 수 있도록 온전히 내맡긴다."는표현이 더 낫겠습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만남에서는 하느님께서 항상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좀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우리는 늘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

진짜 멋지고 놀라운 말씀들입니다.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 시작부터 놀랍지 않습니까?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이 직접 광야로 가신 게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가신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들은 우리가 원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시도록 내어 맡겨 드려야 합니다. 지금국어 시간은 아닙니다만, 문법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이다. 혹은 ‘나는 ~을 한다‘는 식의 능동적인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 이루어졌다‘는 식의 수동적인 목소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내가 ~을 한다‘가 아니라 ‘나에게 ~이 이루어졌다‘
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수동태에는 항상 ‘행위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 일이 도대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입니까? 바로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 인도를 받아 가셨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에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자, 제일 맛있는 걸로 골라 봐요." 그러자 아이는 하나를 골랐고, 옆에 있던 어머니가 고맙다는 대답을 유도해 보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신부님께 뭐라고 말해야하지?" 그런데 그 꼬마는 제게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구두쇠~."
그 녀석은 제가 캐러멜을 한 봉지 다 줄 거라고 예상했나 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다면 매일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께 온전히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틀림없이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러한사실을 믿으며 살아간다면, 성령께서 당신에게 말씀해 주시고 넌지시 암시해 주심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보게 되고, 당신 안에서도 어떻게 활동하시고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경이롭고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활동하십니다만, 특히 아주 강렬하게 기적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미사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참으로 아름답고 감격스러우며 열광할 만한 것입니다.

주교님!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만일 제가 ‘예‘라고 대답했는데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혹 제가 ‘아니요‘라고 대답했는데 부활의 영광이 사실이라면 어쩌지요?" 주교님은 묵묵히 바닥에 떨어진 그의 망토를 집어 십자가의 예수님을 덮어 드린 후, 칼을 집어 십자가 옆에두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세요.
하늘나라의 영광을 선택하든지 지상에서의 영광을 선택하든지, 영원한 영광을 선택하든지 언젠가는 없어질 영광을 선택하든지." 마리노 성인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를 성대하게준비 중이던 왕궁으로 가서 단호히 외쳤다고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마리노 성인은 그 자리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느끼고 있다면 그 강력한 힘으로 즉시 배고픔을 해결해 버리시오."
이 유혹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시지 않소. 그러니까 지금 당장당신의 그 강력한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버리시오."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것처럼 살아가기

도대체 무엇이 유혹이란 말입니까? 마치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외면한 삶이 바로 유혹입니다. 나의 문제들을 내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것, 내 힘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유혹입니다.
"이봐요, 도대체 왜 계속 배고파 하는 겁니까? 당신 스스로 해결해요. 당신은 저 돌들도 빵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이렇게 교활한 유혹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예수님은 유혹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거나다름없습니다. "명심하여라. 나에게 가장 기본적인 양식은 오직 하느님의 뜻이다. 내 아버지의 뜻만이 나의 양식이다. 나는 이 양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바로 내 양식이다." 결국 우리에게유혹이란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드는 겁니다. 하느님께 호소해야 할 아주 특별한 순간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이 안 통하자, 유혹자는 그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유혹자는 스스로에게 속삭였을 겁니다. ‘좋아! 옆구리로 침투할 수없다면 정면 돌파를 해야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한다니까 그 마음을 이용해서 유혹해 보자‘ 유혹자는 두 번째 유혹을 위해 예수님을 거룩한 도성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세운 다음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이 유혹의 속뜻은 이러합니다. "자, 그렇다면 좋소! 당신이 그토록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있다니까, 당신 자신을 낭떠러지로 내던져 보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당신이 그토록 의지하는 하느님께서 구해 주실 테니까." 그야말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제안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시험하지 마라." (마태 4,7) 두 번째 유혹의 핵심은 나에게 전혀 자유가 없는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만 달려 있으니, 나는 그분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식의 유혹입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것처럼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유혹

이었다면, 두 번째 유혹은 나에게 자유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도록 만드는 유혹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우리의 삶에서 아주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은총, 그분의 뜻에 관한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나의 자유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이는 사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물이면서도 위험하기도 한 자유

그러고보면 자유라는 것은 신비입니다. 동시에 자유는 소위 ‘왜냐하면주의(esqueismo, 핑계대고 변명하는 습관)‘의 위험이 있습니다. 변명과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행위인데, 일종의 병리 현상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우리는 늘변명과 핑계를 대기 바쁩니다. 가령 한 어린이에게 "주일 미사에 왜안 갔니?"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아~ 그날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세상에나! 24시간 내내 바빴다는 겁니까?
또 다른 예로 어떤 이에게 "당신은 왜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나요?" 하고 묻는다면 수많은 변명과 핑계가 뒤따를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변명과 핑계들은 그야말로 ‘왜냐하면병‘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그 행동들의 밑바닥에는 하기 싫다는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할까요? 자유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어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 두가지의 유혹을 거부하고 이겨내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자유를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 자유를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 나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는 데 우리의 자유를 사용하게 되면 유혹자는 사라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소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름길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 거짓 우상들

우상이란 거짓된 잡신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경배하고 있는 거짓 하느님들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참된 행복은 십자가라는 더 비싼 값을 치르고 난 후에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지름길을 찾으려고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유혹입니다. 지름길만세!"라고 부를 만한 유혹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우리에게 이렇게말합니다. "이봐요! 당신은 굳이 비싼 값을 치르는 생고생을 할 필요가 없어요. 너무도 쉽게 당신이 원하는 행복을 가질 수 있소." 예를 들어 볼까요? 10일 만에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어학 광고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노력 없이 배우는 독일어라는 광고를 보고 강좌를 신청한 적이 있습니다. 강좌를 다 마친 후 당당하게 독일을 방문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어느 가게에 들어갔는데 종업원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알아듣는 척 웃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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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에서 ‘창의성‘으로김이설의 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에는 신춘문예에 몇 년째 낙방한 시인 지망생인 주인공이 매일 일과를마치고 주방 식탁에 앉아 시를 필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모방은 창조의 원동력이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모차르트Wolfgang A. Mozart 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 전 유럽을 여행하면서 각 지역의 음악 양식을 모방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기와 복사기의 발명으로 의미가 변모되긴 했지만, 모방은 여전히 예술에서 끈질기게 생명력을유지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모방‘이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복사‘의 개념을 넘어서, 예술가의 마음에 그려지는 관념과도 연관된다는 것이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20세기의 작곡가 메시앙livierMessiaen을 보자. 조류학자처럼 새에 대해 박식했던 메시앙은새의 소리에서 무궁무진한 음악적 모티브를 발견하였고,
이를 음악적 작품으로 변용하였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새의 깨어남Réveil des oiseaux〉(1953)은 나이팅게일부터 산비둘기에 이르는, 프랑스에 서식하는 38가지 새의 소리를 중심으로 ‘자정부터 ‘낮‘까지 새들이 깨어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국의 새oiseOiseaux exotiques〉(1955-1956)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프랑스를 넘어 아시아와 미국에 서식하는 새들의 노래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새의 양식‘이 집대성된 작품으로 평가되는 피아노 독주곡 <새의 카탈로그 Cataloque d‘oiseaux〉(1958)는 연주 시간이 2시간에 이르는대규모 작품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양한 새들을 더욱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1. 알프스의 까마귀, 꾀꼬리, 파랑지바퀴2. 지중해딱새3. 숲부엉이, 종달새 4. 연못휘바람새 5. 종달새, 비단휘바람새 6. 지빠귀새
7.말똥가리새, 딱새비둘기, 도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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