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쓰며, 단순하게 산다는 건 사는데 불필요한 것들은 되도록 걷어내고 필요하거나 좋아하는 일들에 시간을들이며 사는 일이라는 걸 이해해갔다. 내 삶에 꼭 있어주었으면 싶은 것들을 몇 개 정해놓고 그것들을 하면서 시적시적 걷듯 생활하는 마음이 좋았다.

단순한 생활이 좋은 건,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깃든 생활이라서다. 내 삶과 동떨어진 것들이 아닌, 내 몸과 마음에 밀착된 매일의 일과에 의미를 부여하며 시간을 쓰는 생활. 이런 생활을 보내다 어느 날 뚜렷이 느끼게 되는 삶에 대한 만족감. 나는 이런 만족감을 느끼며 살고 싶었고, 지난 1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누군가가멈춰서 눈여겨볼 일상은 아니지만, 나의 에너지와 몸과 마음이 서로 호응하며 만들어낸 일상은 오롯이 나의 일상이었다.

단 한 시간이라도,
단 하루라도 가벼운 상태가 되는 것.
이 상태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거나 하고 나면 기분 좋은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찾은 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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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로고스logos‘에 관한 관상을 하기 위해 귀족 지위마저 사촌에게 양보한 채 홀로 산에서 지냈습니다. 그의 수많은 어록 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명언이 있습니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자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 것만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성향은 우리가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더욱 도드라집니다. 함께 기도하자고 말은 하지만 확신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기대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못하는 걸까요?
인생에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기대하지 않는 걸까요

기도해 봤자 소용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기대할 수 없는일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대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런 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일상에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우리는 너무도 쉽게 단정해 버립니다. 그런 특별한 일들은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내면에서 먼저 그런 기대를 품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런 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 원하면 당신이 하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자매님은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바닥의 성혈을 조심스럽게 닦은 다음, 그 손수건을 사제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그 사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원하면 그 손수건을 가져가라며 무심히 말했고, 결국 자매님은 그 손수건을 집에 가져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성혈을 닦았던 손수건이기 때문에 너무도 귀중한 보물이라서자매님은 바로 액자에 모셨습니다. 그 자매님에게 그 손수건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 성녀의수건과 똑같은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감동적인이야기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아는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섬세함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주님께 이런 마음을 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주님의 신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신앙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주님과 만나기에 참으로 좋은 시간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만난다."
는 표현보다 "주님께서 우리와 만날 수 있도록 온전히 내맡긴다."는표현이 더 낫겠습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만남에서는 하느님께서 항상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좀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우리는 늘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

진짜 멋지고 놀라운 말씀들입니다.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 시작부터 놀랍지 않습니까?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이 직접 광야로 가신 게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가신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들은 우리가 원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시도록 내어 맡겨 드려야 합니다. 지금국어 시간은 아닙니다만, 문법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이다. 혹은 ‘나는 ~을 한다‘는 식의 능동적인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 이루어졌다‘는 식의 수동적인 목소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내가 ~을 한다‘가 아니라 ‘나에게 ~이 이루어졌다‘
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수동태에는 항상 ‘행위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 일이 도대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입니까? 바로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 인도를 받아 가셨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에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자, 제일 맛있는 걸로 골라 봐요." 그러자 아이는 하나를 골랐고, 옆에 있던 어머니가 고맙다는 대답을 유도해 보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신부님께 뭐라고 말해야하지?" 그런데 그 꼬마는 제게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구두쇠~."
그 녀석은 제가 캐러멜을 한 봉지 다 줄 거라고 예상했나 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다면 매일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께 온전히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틀림없이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러한사실을 믿으며 살아간다면, 성령께서 당신에게 말씀해 주시고 넌지시 암시해 주심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보게 되고, 당신 안에서도 어떻게 활동하시고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경이롭고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활동하십니다만, 특히 아주 강렬하게 기적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미사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참으로 아름답고 감격스러우며 열광할 만한 것입니다.

주교님!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만일 제가 ‘예‘라고 대답했는데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혹 제가 ‘아니요‘라고 대답했는데 부활의 영광이 사실이라면 어쩌지요?" 주교님은 묵묵히 바닥에 떨어진 그의 망토를 집어 십자가의 예수님을 덮어 드린 후, 칼을 집어 십자가 옆에두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세요.
하늘나라의 영광을 선택하든지 지상에서의 영광을 선택하든지, 영원한 영광을 선택하든지 언젠가는 없어질 영광을 선택하든지." 마리노 성인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를 성대하게준비 중이던 왕궁으로 가서 단호히 외쳤다고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마리노 성인은 그 자리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느끼고 있다면 그 강력한 힘으로 즉시 배고픔을 해결해 버리시오."
이 유혹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시지 않소. 그러니까 지금 당장당신의 그 강력한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버리시오."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것처럼 살아가기

도대체 무엇이 유혹이란 말입니까? 마치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외면한 삶이 바로 유혹입니다. 나의 문제들을 내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것, 내 힘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유혹입니다.
"이봐요, 도대체 왜 계속 배고파 하는 겁니까? 당신 스스로 해결해요. 당신은 저 돌들도 빵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이렇게 교활한 유혹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예수님은 유혹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거나다름없습니다. "명심하여라. 나에게 가장 기본적인 양식은 오직 하느님의 뜻이다. 내 아버지의 뜻만이 나의 양식이다. 나는 이 양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바로 내 양식이다." 결국 우리에게유혹이란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드는 겁니다. 하느님께 호소해야 할 아주 특별한 순간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이 안 통하자, 유혹자는 그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유혹자는 스스로에게 속삭였을 겁니다. ‘좋아! 옆구리로 침투할 수없다면 정면 돌파를 해야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한다니까 그 마음을 이용해서 유혹해 보자‘ 유혹자는 두 번째 유혹을 위해 예수님을 거룩한 도성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세운 다음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이 유혹의 속뜻은 이러합니다. "자, 그렇다면 좋소! 당신이 그토록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있다니까, 당신 자신을 낭떠러지로 내던져 보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당신이 그토록 의지하는 하느님께서 구해 주실 테니까." 그야말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제안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시험하지 마라." (마태 4,7) 두 번째 유혹의 핵심은 나에게 전혀 자유가 없는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만 달려 있으니, 나는 그분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식의 유혹입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것처럼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유혹

이었다면, 두 번째 유혹은 나에게 자유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도록 만드는 유혹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우리의 삶에서 아주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은총, 그분의 뜻에 관한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나의 자유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이는 사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물이면서도 위험하기도 한 자유

그러고보면 자유라는 것은 신비입니다. 동시에 자유는 소위 ‘왜냐하면주의(esqueismo, 핑계대고 변명하는 습관)‘의 위험이 있습니다. 변명과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행위인데, 일종의 병리 현상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우리는 늘변명과 핑계를 대기 바쁩니다. 가령 한 어린이에게 "주일 미사에 왜안 갔니?"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아~ 그날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세상에나! 24시간 내내 바빴다는 겁니까?
또 다른 예로 어떤 이에게 "당신은 왜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나요?" 하고 묻는다면 수많은 변명과 핑계가 뒤따를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변명과 핑계들은 그야말로 ‘왜냐하면병‘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그 행동들의 밑바닥에는 하기 싫다는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할까요? 자유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어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 두가지의 유혹을 거부하고 이겨내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자유를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 자유를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 나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는 데 우리의 자유를 사용하게 되면 유혹자는 사라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소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름길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 거짓 우상들

우상이란 거짓된 잡신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경배하고 있는 거짓 하느님들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참된 행복은 십자가라는 더 비싼 값을 치르고 난 후에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지름길을 찾으려고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유혹입니다. 지름길만세!"라고 부를 만한 유혹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우리에게 이렇게말합니다. "이봐요! 당신은 굳이 비싼 값을 치르는 생고생을 할 필요가 없어요. 너무도 쉽게 당신이 원하는 행복을 가질 수 있소." 예를 들어 볼까요? 10일 만에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어학 광고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노력 없이 배우는 독일어라는 광고를 보고 강좌를 신청한 적이 있습니다. 강좌를 다 마친 후 당당하게 독일을 방문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어느 가게에 들어갔는데 종업원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알아듣는 척 웃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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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에서 ‘창의성‘으로김이설의 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에는 신춘문예에 몇 년째 낙방한 시인 지망생인 주인공이 매일 일과를마치고 주방 식탁에 앉아 시를 필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모방은 창조의 원동력이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모차르트Wolfgang A. Mozart 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 전 유럽을 여행하면서 각 지역의 음악 양식을 모방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기와 복사기의 발명으로 의미가 변모되긴 했지만, 모방은 여전히 예술에서 끈질기게 생명력을유지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모방‘이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복사‘의 개념을 넘어서, 예술가의 마음에 그려지는 관념과도 연관된다는 것이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20세기의 작곡가 메시앙livierMessiaen을 보자. 조류학자처럼 새에 대해 박식했던 메시앙은새의 소리에서 무궁무진한 음악적 모티브를 발견하였고,
이를 음악적 작품으로 변용하였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새의 깨어남Réveil des oiseaux〉(1953)은 나이팅게일부터 산비둘기에 이르는, 프랑스에 서식하는 38가지 새의 소리를 중심으로 ‘자정부터 ‘낮‘까지 새들이 깨어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국의 새oiseOiseaux exotiques〉(1955-1956)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프랑스를 넘어 아시아와 미국에 서식하는 새들의 노래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새의 양식‘이 집대성된 작품으로 평가되는 피아노 독주곡 <새의 카탈로그 Cataloque d‘oiseaux〉(1958)는 연주 시간이 2시간에 이르는대규모 작품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양한 새들을 더욱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1. 알프스의 까마귀, 꾀꼬리, 파랑지바퀴2. 지중해딱새3. 숲부엉이, 종달새 4. 연못휘바람새 5. 종달새, 비단휘바람새 6. 지빠귀새
7.말똥가리새, 딱새비둘기, 도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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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추억의 힘 - 탁현민 산문집 2013~2023
탁현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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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티>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그 어떤 영화도 현재 시점의 렌즈를 통해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수정되어서는안 된다. 모든 영화는 영화를 만들었던 당시 우리가 어디에있었는지, 세상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보냈을 때 세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을 보여주는일종의 이정표다."

사람은 확신이 섰을 때 뜨겁고, 무너졌을 때 흔들린다. 내게도 그런 확신의 순간이 있었고 참혹하게 무너진 때도 있었다. 삶의 대부분은 실수와 오류를 거듭하며 무너지는 일의연속이고 성취의 기쁨과 행복은 그에 비해 매우 짧다. 그야말로 순간이다. 그래서 서 있을 때보다 무너졌을 때, 그때 어떻게 추스르는지가 더 중요했다.
성공은 그 사람의 지위를 높이고, 실패는 그 사람을 키운다고 한다. 나를 키운 것은 결국 뒤돌아보았던 순간들이었다. 회고(回顧)의 시간이야말로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배우게 하고 조금씩 나아지게 만든다.
원고를 합본하다 하나 깨달았다. 절망과 위로, 그 모든 순간에 그것이 극단으로 치닫게 하지 않는 장치 (裝置)가 있더라는 것이다. 바로 성찰과 웃음이었다. 실패를 복기하는 과정은 괴롭지만, 과정의 성찰은 곧 위로였다. 또한 괴롭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은 가장 뛰어난 탈출 버튼이었다. 모든위로의 순간에는 반드시 성찰과 웃음 포인트가 함께 있었다.

대단치 않았지만 그리운 기억들, 결국엔 그것만이 남는 것 같다.
어마어마한 사건이나 사상이 나를 변화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오히려 여러 사소한 것들로 인해 나는 조금씩 변해왔다.
만약에 지금 하루하루가 마땅치 않다면 작고 사소한 추억들로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좋았던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경험했던 좋았던 것들은 어떻게든 내 안에 남아서 결국은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 같다. 아니, 그렇다고 믿는다.

쓸모’와 ‘쓰임’에 관해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나쓸모와 쓰임이 있다. 그런데 쓸모는 각자 노력이지만 쓰임은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의 쓸모는 나의노력에 비례한다. 타고난 재능이 단단히 한몫하지만 좀 더부지런히 자신을 채근하며 살아온 사람일수록 아무래도 쓸모가 많은 법이다. 그러나 쓸모가 많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좋은 것은 아니다.
‘열 재주 가진 사람이 밥 굶는다‘는 말처럼 정작 재주가 많으면 널리 쓰이기보다 그 재주 때문에 시기와 질투를 받게되고 구설에도 휘말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아무리 쓸모가 많아도 쓰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아무리 능력이 일천해도 중요하게 쓰이는 경우 또한 왕왕 있다.

춘양시우(春陽時雨).
그 얼굴빛을 보면 사람과 관계 맺는게
봄볕의 따사로움과 같았고,
그 말을 들어보면 사람에게 파고드는 게
단비의 윤택함과 같았다.
-주희, 《근사록》 중에서.

그럼에도 선생님은 거르지 않고 나를 만나주셨다. 나는 한번도 그렇게까지 해주신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선생님도 왜 그러셨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자면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말씀하시던 ‘더불어숲’의 철학, "나무의 소망은 한 그루 낙락장송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숲을 이루는 것"이라는 그 말씀의 작은 실천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 시절 확신에 찬 모습으로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때때로엄습하는 불안감에 선생님께 여러 번 물었다. "사람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까요? 민주주의는 종종 엉뚱한 선택을 하곤 하잖아요. 이번에도 그러면 어쩌죠?" 그때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아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다 알고 있어요. 세상은 언제나 앞으로 가지 않는 것 같지만 보다 넓게 멀리서 보면 분명히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어요."

큰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그만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합니다. 우리는 작은 기쁨에 대해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큰 슬픔에 절망해서도 안되고요." 그 말씀은 그동안 들었던 어떤 말들보다 따뜻하고분명한 위로였으며, 격려였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울고 싶어졌지만 꾹 참았다.

어제가 불행한 사람은 십중팔구 오늘도 불행하고,
오늘이 불행한 사람은 십중팔구 내일도 불행합니다.
어제저녁에 덮고 잔 이불 속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밤‘이 있습니다.
이 밤의 역사는 불행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유일한 가능성입니다.
밤의 한복판에서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새벽을 위하여 꼿꼿이 서서 밤을 이겨야 합니다.
-신영복, <오늘과 내일 사이〉.
"이제 그만 제주도에서 올라오세요. 올라와서 할 수 있는일을 하세요." 결국 나는 선생님 앞에서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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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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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지금 이게 뭐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군, 오늘 페테르와 밖으로 나가 게망을 끌어올리지 않았나 그리고 꽃게를 팔러 시내에도 갔었는데, 하나도 팔지 못하고,
페테르가 안나 페테르센에게 선물로 꽃게가 가득 든 비닐봉지하나를 넘겨준 게 다지, 그러니까 페테르가 봉지를 부두에 놔두고 왔고, 한참 후 그녀가 와서 가져갔지,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조금 지나서 안나 페테르센이 왔었지, 그 모든 일이 생생한데, 지금 내가 죽었다니이제 자네도 죽었다네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오늘 아침 일찍 숨을 거뒀어, 그가 말한다내가 자네의 제일 친한 친구여서 나를 이리로 보낸 거라네, 자네를 데려오라고 말이야, 그가 말한다그러면 게망은 뭐하러 걷어올렸나, 요한네스가 묻는다자네 삶과의 연결을 끊어야 하니 뭔가는 해야 했지, 페테르가말한다그런 거로군, 요한네스가 말한다그런 거라네,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난 자네가 보이는걸 요한네스가 말한다몸을 잠시 되돌려받았어, 자네를 데려올 수 있도록, 페테르가말한다이제 고깃배를 타고 떠나자고, 그가 말한다어디로 가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아니 자네는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먼, 페테르가 말한다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그리고 요한네스가 페테르를 바라본다, 페테르가 그의 하얗게센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미소짓고 있다. 그의 머리카락은 이제 더욱 길어져,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다, 숱이 많고 젊어진그의 머리 주위로 금빛이 어른거린다그래 페테르 자네로군, 페테르 자네야, 요한네스가 말한다그리고 페테르와 요한네스는 나란히 서쪽 만으로 내려가 고깃배에 올라탄 적도 없는데 어느새 홀연, 배안에 있다, 그리고 꼭그렇게 다시 만을 빠져나간다이제 그렇게 두리번거려서는 안 된다네 요한네스, 페테르가말한다이제 하늘만 쳐다보고 파도소리에 귀기울여야 해, 그가 말한다.
모터소리는 이제 안 들리지, 그렇지? 그가 묻는다안 들리는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리까지 나갈 엄두를 내본 적이 없었다. 비바람이 불고 파도도 높으니까 그리고 페테르의 고깃배가 파도에 휩쓸려 올라갔다 떨어지더니 그들은 더이상 페테르의 고깃배가 아닌 다른 배에 앉아바다 위에 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 빛과 물이 하나가 된다그리고 거기, 에르나가 눈을 반짝이며 서 있다. 그녀의 눈에서 나오는 빛 역시 다른 모든 것과 같다. 그러고 나서 페테르가 더이상보이지 않는다그래 이제 길에 접어들었네, 페테르가 말한다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몸을 돌려 저멀리 뒤편, 저 아래 멀리, 싱네가 서 있는 모습을 본다, 사랑하는 싱네, 저 아래, 멀리 저 아래그의 사랑하는 막내딸 싱네가 서 있다, 제일 어린 마그다의 손을잡고서, 그리고 요한네스는 싱네를 바라보며 벅찬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싱네 곁에는 그의 다른 자식들 모두와 손자들과 이웃들과 사랑하는 지인들과 목사가 둘러서 있다. 목사는 흙을 조금퍼올린다, 싱네의 눈에도 에르나에게서 본 것 같은 빛이 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어둠과 저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궂은일을 바라본다저 아래는 궂은일이 생겼구먼, 요한네스가 말한다이제 말들이 사라질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그리고 페테르의 목소리는 몹시 단호하게 들린다그리고 싱네는 요한네스의 관 위로 목사가 흙을 던지는 것을보며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었죠,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저도 알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속을 게워내야 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자애롭고선한 분이었어요, 싱네는 생각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하늘에흰 구름이 떠간다, 그리고 오늘 바다는 저리도 잔잔하고 푸르게빛나는데, 싱네는 생각한다, 요한네스,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

나는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를 꿈꾸어왔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위대한 인간이 등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고 눈부신 이야기를 누구나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두 가지 주제, 바로 삶과 죽음을 ‘특별한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것은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작가는 이 어려운 작업을 아주 능청맞고도 사랑스럽게 해낸다.
삶과 죽음 사이에 들어찬 모든 문장에 좀처럼 마침표를 찍지 않음으로써,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잠시 휴식하기 위한 쉼표만을 사용하면서, 죽음과 삶의 과정이 결국 하나의 끝나지않는 문장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 이야기 속에서 삶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은삶을 밀어내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무지갯빛 색실로 거대한 모자이크를 완성하는 것처럼, 작가는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이라는 아름다운 벽화를 천의무봉의 손길로 직조해낸다. 이 이야기와 함께하는 순간, ‘이토록 가까운 삶‘과 ‘저토록 머나먼 죽음‘이 서로의 손을 붙잡고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왈츠를 추고 있는 듯하다. 정여울(작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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