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추억의 힘 - 탁현민 산문집 2013~2023
탁현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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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티>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그 어떤 영화도 현재 시점의 렌즈를 통해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수정되어서는안 된다. 모든 영화는 영화를 만들었던 당시 우리가 어디에있었는지, 세상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보냈을 때 세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을 보여주는일종의 이정표다."

사람은 확신이 섰을 때 뜨겁고, 무너졌을 때 흔들린다. 내게도 그런 확신의 순간이 있었고 참혹하게 무너진 때도 있었다. 삶의 대부분은 실수와 오류를 거듭하며 무너지는 일의연속이고 성취의 기쁨과 행복은 그에 비해 매우 짧다. 그야말로 순간이다. 그래서 서 있을 때보다 무너졌을 때, 그때 어떻게 추스르는지가 더 중요했다.
성공은 그 사람의 지위를 높이고, 실패는 그 사람을 키운다고 한다. 나를 키운 것은 결국 뒤돌아보았던 순간들이었다. 회고(回顧)의 시간이야말로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배우게 하고 조금씩 나아지게 만든다.
원고를 합본하다 하나 깨달았다. 절망과 위로, 그 모든 순간에 그것이 극단으로 치닫게 하지 않는 장치 (裝置)가 있더라는 것이다. 바로 성찰과 웃음이었다. 실패를 복기하는 과정은 괴롭지만, 과정의 성찰은 곧 위로였다. 또한 괴롭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은 가장 뛰어난 탈출 버튼이었다. 모든위로의 순간에는 반드시 성찰과 웃음 포인트가 함께 있었다.

대단치 않았지만 그리운 기억들, 결국엔 그것만이 남는 것 같다.
어마어마한 사건이나 사상이 나를 변화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오히려 여러 사소한 것들로 인해 나는 조금씩 변해왔다.
만약에 지금 하루하루가 마땅치 않다면 작고 사소한 추억들로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좋았던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경험했던 좋았던 것들은 어떻게든 내 안에 남아서 결국은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 같다. 아니, 그렇다고 믿는다.

쓸모’와 ‘쓰임’에 관해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나쓸모와 쓰임이 있다. 그런데 쓸모는 각자 노력이지만 쓰임은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의 쓸모는 나의노력에 비례한다. 타고난 재능이 단단히 한몫하지만 좀 더부지런히 자신을 채근하며 살아온 사람일수록 아무래도 쓸모가 많은 법이다. 그러나 쓸모가 많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좋은 것은 아니다.
‘열 재주 가진 사람이 밥 굶는다‘는 말처럼 정작 재주가 많으면 널리 쓰이기보다 그 재주 때문에 시기와 질투를 받게되고 구설에도 휘말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아무리 쓸모가 많아도 쓰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아무리 능력이 일천해도 중요하게 쓰이는 경우 또한 왕왕 있다.

춘양시우(春陽時雨).
그 얼굴빛을 보면 사람과 관계 맺는게
봄볕의 따사로움과 같았고,
그 말을 들어보면 사람에게 파고드는 게
단비의 윤택함과 같았다.
-주희, 《근사록》 중에서.

그럼에도 선생님은 거르지 않고 나를 만나주셨다. 나는 한번도 그렇게까지 해주신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선생님도 왜 그러셨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자면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말씀하시던 ‘더불어숲’의 철학, "나무의 소망은 한 그루 낙락장송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숲을 이루는 것"이라는 그 말씀의 작은 실천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 시절 확신에 찬 모습으로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때때로엄습하는 불안감에 선생님께 여러 번 물었다. "사람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까요? 민주주의는 종종 엉뚱한 선택을 하곤 하잖아요. 이번에도 그러면 어쩌죠?" 그때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아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다 알고 있어요. 세상은 언제나 앞으로 가지 않는 것 같지만 보다 넓게 멀리서 보면 분명히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어요."

큰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그만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합니다. 우리는 작은 기쁨에 대해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큰 슬픔에 절망해서도 안되고요." 그 말씀은 그동안 들었던 어떤 말들보다 따뜻하고분명한 위로였으며, 격려였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울고 싶어졌지만 꾹 참았다.

어제가 불행한 사람은 십중팔구 오늘도 불행하고,
오늘이 불행한 사람은 십중팔구 내일도 불행합니다.
어제저녁에 덮고 잔 이불 속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밤‘이 있습니다.
이 밤의 역사는 불행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유일한 가능성입니다.
밤의 한복판에서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새벽을 위하여 꼿꼿이 서서 밤을 이겨야 합니다.
-신영복, <오늘과 내일 사이〉.
"이제 그만 제주도에서 올라오세요. 올라와서 할 수 있는일을 하세요." 결국 나는 선생님 앞에서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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