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로고스logos‘에 관한 관상을 하기 위해 귀족 지위마저 사촌에게 양보한 채 홀로 산에서 지냈습니다. 그의 수많은 어록 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명언이 있습니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자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 것만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성향은 우리가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더욱 도드라집니다. 함께 기도하자고 말은 하지만 확신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기대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못하는 걸까요?
인생에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기대하지 않는 걸까요

기도해 봤자 소용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기대할 수 없는일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대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런 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일상에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우리는 너무도 쉽게 단정해 버립니다. 그런 특별한 일들은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내면에서 먼저 그런 기대를 품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런 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 원하면 당신이 하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자매님은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바닥의 성혈을 조심스럽게 닦은 다음, 그 손수건을 사제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그 사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원하면 그 손수건을 가져가라며 무심히 말했고, 결국 자매님은 그 손수건을 집에 가져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성혈을 닦았던 손수건이기 때문에 너무도 귀중한 보물이라서자매님은 바로 액자에 모셨습니다. 그 자매님에게 그 손수건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 성녀의수건과 똑같은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감동적인이야기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아는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섬세함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주님께 이런 마음을 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주님의 신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신앙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주님과 만나기에 참으로 좋은 시간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만난다."
는 표현보다 "주님께서 우리와 만날 수 있도록 온전히 내맡긴다."는표현이 더 낫겠습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만남에서는 하느님께서 항상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좀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우리는 늘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

진짜 멋지고 놀라운 말씀들입니다.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 시작부터 놀랍지 않습니까?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이 직접 광야로 가신 게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가신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들은 우리가 원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시도록 내어 맡겨 드려야 합니다. 지금국어 시간은 아닙니다만, 문법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이다. 혹은 ‘나는 ~을 한다‘는 식의 능동적인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 이루어졌다‘는 식의 수동적인 목소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내가 ~을 한다‘가 아니라 ‘나에게 ~이 이루어졌다‘
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수동태에는 항상 ‘행위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 일이 도대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입니까? 바로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 인도를 받아 가셨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에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자, 제일 맛있는 걸로 골라 봐요." 그러자 아이는 하나를 골랐고, 옆에 있던 어머니가 고맙다는 대답을 유도해 보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신부님께 뭐라고 말해야하지?" 그런데 그 꼬마는 제게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구두쇠~."
그 녀석은 제가 캐러멜을 한 봉지 다 줄 거라고 예상했나 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다면 매일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께 온전히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틀림없이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러한사실을 믿으며 살아간다면, 성령께서 당신에게 말씀해 주시고 넌지시 암시해 주심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보게 되고, 당신 안에서도 어떻게 활동하시고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경이롭고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활동하십니다만, 특히 아주 강렬하게 기적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미사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참으로 아름답고 감격스러우며 열광할 만한 것입니다.

주교님!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만일 제가 ‘예‘라고 대답했는데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혹 제가 ‘아니요‘라고 대답했는데 부활의 영광이 사실이라면 어쩌지요?" 주교님은 묵묵히 바닥에 떨어진 그의 망토를 집어 십자가의 예수님을 덮어 드린 후, 칼을 집어 십자가 옆에두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세요.
하늘나라의 영광을 선택하든지 지상에서의 영광을 선택하든지, 영원한 영광을 선택하든지 언젠가는 없어질 영광을 선택하든지." 마리노 성인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를 성대하게준비 중이던 왕궁으로 가서 단호히 외쳤다고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마리노 성인은 그 자리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느끼고 있다면 그 강력한 힘으로 즉시 배고픔을 해결해 버리시오."
이 유혹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시지 않소. 그러니까 지금 당장당신의 그 강력한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버리시오."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것처럼 살아가기

도대체 무엇이 유혹이란 말입니까? 마치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외면한 삶이 바로 유혹입니다. 나의 문제들을 내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것, 내 힘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유혹입니다.
"이봐요, 도대체 왜 계속 배고파 하는 겁니까? 당신 스스로 해결해요. 당신은 저 돌들도 빵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이렇게 교활한 유혹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예수님은 유혹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거나다름없습니다. "명심하여라. 나에게 가장 기본적인 양식은 오직 하느님의 뜻이다. 내 아버지의 뜻만이 나의 양식이다. 나는 이 양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바로 내 양식이다." 결국 우리에게유혹이란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드는 겁니다. 하느님께 호소해야 할 아주 특별한 순간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이 안 통하자, 유혹자는 그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유혹자는 스스로에게 속삭였을 겁니다. ‘좋아! 옆구리로 침투할 수없다면 정면 돌파를 해야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한다니까 그 마음을 이용해서 유혹해 보자‘ 유혹자는 두 번째 유혹을 위해 예수님을 거룩한 도성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세운 다음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이 유혹의 속뜻은 이러합니다. "자, 그렇다면 좋소! 당신이 그토록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있다니까, 당신 자신을 낭떠러지로 내던져 보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당신이 그토록 의지하는 하느님께서 구해 주실 테니까." 그야말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제안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시험하지 마라." (마태 4,7) 두 번째 유혹의 핵심은 나에게 전혀 자유가 없는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만 달려 있으니, 나는 그분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식의 유혹입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것처럼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유혹

이었다면, 두 번째 유혹은 나에게 자유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도록 만드는 유혹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우리의 삶에서 아주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은총, 그분의 뜻에 관한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나의 자유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이는 사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물이면서도 위험하기도 한 자유

그러고보면 자유라는 것은 신비입니다. 동시에 자유는 소위 ‘왜냐하면주의(esqueismo, 핑계대고 변명하는 습관)‘의 위험이 있습니다. 변명과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행위인데, 일종의 병리 현상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우리는 늘변명과 핑계를 대기 바쁩니다. 가령 한 어린이에게 "주일 미사에 왜안 갔니?"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아~ 그날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세상에나! 24시간 내내 바빴다는 겁니까?
또 다른 예로 어떤 이에게 "당신은 왜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나요?" 하고 묻는다면 수많은 변명과 핑계가 뒤따를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변명과 핑계들은 그야말로 ‘왜냐하면병‘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그 행동들의 밑바닥에는 하기 싫다는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할까요? 자유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어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 두가지의 유혹을 거부하고 이겨내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자유를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 자유를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 나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는 데 우리의 자유를 사용하게 되면 유혹자는 사라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소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름길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 거짓 우상들

우상이란 거짓된 잡신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경배하고 있는 거짓 하느님들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참된 행복은 십자가라는 더 비싼 값을 치르고 난 후에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지름길을 찾으려고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유혹입니다. 지름길만세!"라고 부를 만한 유혹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우리에게 이렇게말합니다. "이봐요! 당신은 굳이 비싼 값을 치르는 생고생을 할 필요가 없어요. 너무도 쉽게 당신이 원하는 행복을 가질 수 있소." 예를 들어 볼까요? 10일 만에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어학 광고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노력 없이 배우는 독일어라는 광고를 보고 강좌를 신청한 적이 있습니다. 강좌를 다 마친 후 당당하게 독일을 방문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어느 가게에 들어갔는데 종업원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알아듣는 척 웃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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