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베냐민은 어떤 이야기에서 이렇게 썼다. "그 섬에는열일곱 종의 무화과가 있다고들 한다. 그 이름들을 - 행속에서 제 길을 가는 남자가 혼잣말하기를 - 알아야 할거야." 그러니까 각각의 무화과 종류는 제각기 독특해서다른 것으로 치환될 수가 없다. 그런 독특성은 열일곱 종의 무화과를 한 이름만으로 부르지 못하게 한다. 보편적명칭은 그들의 유일성, 제각기의 특성, 고유한 이름의 특성을 없애는 일이다. 이런 독특성 덕분에 각각의 무화과종류는 제각기 저만의 이름, 곧 고유한 이름을 얻는다. 각각의 무화과는 저만의 이름을 갖고 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마치 이름이 그 본질, 그 존재에 접근을 허용하는 순간적인 암호이며, 오직 고유 이름으로 부르기, 그런호출만이 그 본질을 맞추는 것만 같다. 그들이 그토록 다른데, 그것을 단 하나의 이름, 하나의 보편적 명칭으로 부른다면 각각의 무화과 종류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독특한 것만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고유한 이름을 붙이기,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기가 각각의 무화과 종류를 체험할 열쇠를 손에 쥐여 준다. 잘 알다시피 인식이아니라 체험이 중요하다. 체험은 일종의 부르기, 또는 깨우기다. 진짜 체험, 즉 불러내는 대상은 보편성이 아니라 독특성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만남을 가능케한다.

뛰어난 것이 시들어도 울지 마라! 머지않아 그것은 젊어지리니! 너희 마음의 멜로디가 멈추어도 슬퍼하지 마라!!
머지않아 어떤 손이 그 소리를 다시 켜게 되리니!!
나는 어떠했던가? 나는 끊어진 현악연주 같지 않았던가? 소리를 조금 더 내긴 했지만 그것은 죽음의 소리였다.
나는 이미 어두운 백조의 노래를 부른 다음이었으니!
죽음의 화환을 나 자신에게 둘러주고 싶었지만 나는 겨우겨울 꽃들만 지녔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휘페리온》

니체는 이름 붙이기를 권력행사로 파악한다. 지배자들은
"각각의 물건과 사건을 하나의 소리로 낙인찍고 그로써 그것을 소유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의 기원은 지배자들의권력선포‘ 이다. 언어는 ‘가장 오래된 물건 점유과정의 잔향이다. 모든 낱말, 모든 이름이 니체에게는 하나의 명령이다.

원추리 꽃이 화려하게 무성하다. 노랗고 빨간 색으로 빛난다. 그렇다, ‘빛난다 leuchten‘는말은 꽃피는 원추리를 위한 동사다. 장미는 빛나지 않는다.
장미는 다른 동사를 요구한다. 광채를 내뿜는다strahlen고할 수도 없다. 아네모네나 밀짚꽃은 광채를 내뿜는다. 그럼장미는? 장미는 반짝이지도glänzen 않는다. 약간 멈추어 있기 때문이다. 장미는 뒤로 물러선 자세다. 장미의 화려함의비밀이 거기 있다. 장미는 장미한다. 장미하다 rosen가 장미를 위한 동사다.

릴케는 장미와 천사를 사랑했다. 내 정원엔 수많은 장미들이 있다. 이들은 내 눈을 섬세하게 풀어준다. 정원 입구에천사상 둘이 서 있다. 그들이 나의 장미정원을 보호한다. 릴케는 장미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수많은 눈까풀 아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 되고 싶은 열망이여.

장미들로 이루어진 밤, 수많은 수많은
환한 장미들로 이루어진 밤, 장미들로 이루어진 환한 밤,
천 개 장미눈까풀들의 잠.
환한 장미-잠, 나는 너의 잠자는 자.
네 향기들의 환한 잠자는 자, 네 서늘한
내면성의 깊은 잠자는 자.

그럼 마치 꽃잎이 꽃잎을 건드리기에
감정 하나 생겨나는가?
그리고 이것은, 감정 하나가 눈까풀처럼 열리고
그 아래 순전히 눈까풀, 감긴 눈까풀들이
있는 건가, 마치 열 배나 잠자면서
내면의 시력을 약화시키기라도 하는 듯.


지금 이 순간 릴케의 이 장미 구절들을 사랑한다. 잠을이룰 수 없기 때문에, 깊지만 환한 잠, 장미 잠을 갈망하기때문이다. 나는 기꺼이 잠들어 그 누구도 아닌 사람, 이름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은 구원이리라.

오늘날 우리는 오직 에고 나 자신에만 열중해 있다. 누구나 큰 소리로 누군가가 되고자 하고, 누구나 진짜가 되고자 하며 다른 사람과는 달라지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모두 같다. 나는이름 없는 사람들이 그립다.

하이데거는 유명한 휴머니즘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인간이 한 번 더 존재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면, 그보다 먼저 이름 없는 자로 존재하기를 배워야 한다. 공공성을 통한 유혹이나 사적인 것의 무력함을 동일한 방식으로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발언하기 전에, 먼저 존재Sein가 다시자기에게 말 걸게 해야 한다. 정작 말 걸어오면 거의 할말이 없는, 또는 드물게만 할 말이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우리는 오늘날 모두 특별한 존재이기에 할 말이 너무 많고, 소통할 것이 너무 많다. 우리는 고요함과 침묵을 잊었다. 나의 정원은 고요함의 장소, 정원에서 나는 고요함을 만든다. 나는 휘페리온처럼 귀 기울여 듣는다.

디지털화는 결국은 현실 자체를 없앤다. 또는 현실은 디지털 내부에서 현실성을 빼앗기고 하나의 창이 된다. 머지않아 우리 시야는 3차원 디스플레이와 같아질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진다. 나의 정원은 내게는 다시 찾은 현실이다.

"땅을 보호하라는 명령, 곧 땅을 아름답게 대하라는명령이 땅에서 나온다. 보호하다 schonen‘ 라는 낱말은어원으로 보아 아름다운 것dem Schönen‘ 이라는 말과친척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호할 의무, 아니 명령을 내린다. 아름다운 것은 보호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이 옳다. 땅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의절박한 과제이자 의무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 뛰어난 것이니 말이다. 보호는 찬양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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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어째서 무언가가 거기 있고 무無는 없지? 나무며…… 나비며…… 말이야.
나무 나무가 외로움을 타지 말라고 나비가 있지.
나비: 그럼 나무는?
나무: ……나비가 날다가 쉬라고.

물론 깊은 겨울에 풍성한 여름 꽃들의 화려함을 기대할수는 없다. 겨울은 그냥 섬세하고 사랑스럽고 부서지기 쉬운 형태들만을 만들어낸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Thoreau는 《월든 Walden》에서 이렇게 말한다.

겨울이 내놓는 많은 현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부서지기 쉽고 섬세하다.

모든 겨울꽃들은 어딘지 매우 부서지기 쉽고 섬세하고,
사랑스럽다. 뒤로 물러난 그 자태가 극히 고귀한 인상을 풍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혹독한 얼음서리가 지나가면 나의 겨울정원은 마법처럼 한겨울에 작은 봄을 불러온다.

봄이 다가오면 나는 슈만의 시인의 사랑 Dichterliebe〉을 즐겨 부른다. 시인의 사랑 첫 노래보다 봄에 더 잘 어울리는노래는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5월
모든 봉오리 피어날 적에
내 마음도 열렸네.


따뜻한 5월에는 이 노래를 가장 즐겨 부른다. 5월은 내겐 이미너무 여름이다. 어차피 5월Mai‘ 이란 낱말은 이탈리아의 성장의 신神 이름을 딴 것이다. ‘성장‘이란 아름다운 낱말이 아니다. 우거진다는 뜻이 함께 울린다.

나는 그늘을 좋아하는 꽃들을 몹시 사랑한다. 내 이름 병철은 밝은 빛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림자가 없다면 빛은 빛이 아니다. 빛이 없이는 그림자도 없다. 그림자와 빛은한데 속한다. 그림자가 빛의 형태를 드러내준다. 빛의 아름다운 윤곽이 그림자다.

디기탈리스는 라틴어 이름이다. ‘디기탈digital [디지털] 이란 낱말은 주로 헤아리는 손가락 디기투스digitus를 가리킨다. 디지털 문화는 인간을 작은 손가락 존재로 축소시킨다.
디지털 문화는 헤아리는 손가락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는 헤아리지 않는다. 헤아리는 것은 역사 이후의 범주다. 트윗이나 정보는 서로 합쳐봐야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타임라인timeline도 삶의 이야기, 또는 전기傳記를 들려주지 않는다. 더하기를 할 뿐 이야기를 하지는않는다. 디지털 인간은 끊임없이 헤아리고 계산한다는 의미에서 손가락을 쓴다. 디지털은 숫자와 헤아리기를 절대화한다. 페이스북 친구들은 무엇보다도 헤아려진다. 하지만우정이란 이야기다. 디지털 시대는 더해진 것, 헤아림, 헤아릴 수 있는 것 등의 합계를 낸다. 심지어 애착도 ‘좋아요‘ 형태의 숫자로 바뀐다. 이야기(내러티브)는 그 의미를 엄청나게 잃는다. 오늘날 모든 것은 업적과 능률의 언어로 바꿀수 있도록 숫자로 만들어진다. 게다가 숫자는 모든 것을 비교가능하게 만든다. 업적과 능률만이 헤아려진다. 그래서 오늘날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모조리 존재하기를 멈춘다. 하지만 존재는 이야기지 헤아리기가 아니다. 헤아리기에는 역사이자 기억인 언어가 없다.

식물과 동물은 우리의 옛날 모습, 앞으로 되어야 할 모습이다. 우리는 그들처럼 자연이었으니, 우리의 문화가 우리를 이성과 자유의 길을 통해 자연으로 도로 데려가는 것이 옳다. 식물과 동물은 우리에게 영원히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는, 우리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특별한 우수로 가득채운다. 동시에 그들은 이상理想에서 우리가 이루는 최고완성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숭고한 감동으로데려간다. (프리드리히 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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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완전한 평정상태‘라는 표현으로 정의럼 보인다. 키니코스주의자라면 인간의 비참이 사회전약과 관습에서 비롯한다고 할 것이고, 에피쿠로스주라면 이기적 관심과 쾌락을 좇는 태도에, 회의론자라면잘못된 의견, 즉 억견에 이 비참의 원인을 돌릴 것이다.
헬레니즘 철학들이 소크라테스의 유산을 자기 것으로 내세웠든 그러지 않았든 간에, 이 철학들은 인간이 무지하기 때문에 비참, 불안, 악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모두 소크라테스와 견해를 같이했다. 사물에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물에 대해 내리는 가치판단에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치판단을 바꿀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따라서 이 철학들은 치유의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인간이 가치판단을 바꾸기위해서는 근본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유방 !
식, 존재방식을 바꾸겠다는 선택. 이 선택이 바로 철학이 다. 철학 덕분에 인간은 내적 평화, 영혼의 평정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좋은 휴가는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고 스스로를 ‘잘 돌보는시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휴가는 철학의 시가‘ 이라 말할 수 있지요. 그렇기에 휴가로 얻는 좋은 열매란청학과 마찬가지로 평정심‘이 아닐까요. 이는 곧 감정과 느끼의 억압이 아니라 내면과 육신의 숱한 일렁임들이 만족과절제로 조화를 이룬 상태이겠지요. 이는 눈앞의 일들과 욕구와 비교에 사로잡힌 ‘지금‘에 사는 게 아니라, ‘언제나‘와 ‘영원함‘을 마음에 담은 사람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역설적으로이런 이에게 ‘지금‘의 소중한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영원을 담고 있는 ‘지금‘을 알아보는 것을 철학자들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보다.
맛깔스런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일상과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향유하는 법을 배우라고 권고합니다.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존재를 풍요롭게 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지요.

우리는다른 사물들과 똑같이 별 가루로 만들어졌고, 고통속에 있을 때나 웃을 때나 환희에 차 있을 때나 존재할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세상 만물이 별의 먼지‘라는 것은 과학적 진술일뿐더러, 깊은 의미에서는 시의 언어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이 신비를 가리키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우리는 별을 바라보며 경탄하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별의 먼지이자 신에게서 온, 그래서 신을 닮은 사랑의 작품이기 때문이지요.
깊어가는 여름 안에서 휴가를 보낼 때는 이처럼 별을 바라보며 우리의 인생을 성찰하는 귀한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현대인들은 성과 중심의 문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여가를 잘 보내는 것은 육신을 위해서나 정신적, 영성적 측면에서나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여가를 단순한 휴식이나 소일, 여흥과 구분할 필요가 있고, 여가를 향유!
하는 것이 우리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성숙시킨다는 점을기억해야 합니다.
휴가와 여가의 본래 뜻이 가장 고귀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도야하는 시간을 가지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한 사람이 바로 요제프 피퍼입니다.

독일의 가톨릭 철학자 요제프 피퍼입니다. 그는 보석 같은 책『여가와 경신』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의 수도원 전통에 힘입어 여가의 본질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요하면서도 우리에게 생기와 의욕을 주는 휴가는 삶을 성숙시킵니다. 손에 움켜쥔 것을 가만히 놓아보고, 보고 싶어하는 것만이 아닌 존재 자체를 여유 있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관조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체험은 우리가 하는 일을 새로운 관점으로 대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더 이상닦달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근본 목적을 음미하며 때로는 멈추고 기다릴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성서는 예수님께서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닦달하지 않는‘ 언어입니다. 자유로움과 관조하는 여유 속에서 그러한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세속적, 삶의 번잡함에서 잠시 벗어나 여가를 갖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삶의 요소이며, 낭비와 무위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굳은 심지를 통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결실의 시간입니다.

가을에 관한 유명하고 아름다운 3편의 시들인 「가을날Herbstag」 「가을의 끝Ende des Herbstes」 「가을herbst은 거의 연이어 배치되어 독자들이 가을의 정취와신비에 깊이 잠기게 합니다.
「가을의 끝」의 첫 연은 릴케에게 가을은 그저 좋은 풍광의시절이 아니라 뼈저린 인식의 시간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얼마 전부터 나는 모든 것이 /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 무언가가 일어나 움직이며 / 죽이고 고통을 주고있다.

한편, 「가을」의 마지막 연은 비록 가을이 나뭇잎이 떨어지듯죽음의 그림자가 서리는 조락의 때임에도, 결국은 우리에게구원의 시간이라는 위안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 두 손으로 받아내는 어느 한 분이 있다.
그러나 가을을 노래한 릴케의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역시 「가을날」입니다. 이 시를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다 보면, ‘감사‘와 ‘기도‘만이 존재의 신비‘에 다가서는 참다운 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 들녘엔 바람을풀어놓아 주소서. //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하소서.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길 사이로 /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시는 앞부분에서 우리를 절대자에게 향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절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지요.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부분을 읊조리면서는 누구나 스스로의 내면이 얼마나 성숙되고 무르익었는지를 한 번쯤 겸허하게 살펴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신의 그림자 속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며,
자연 또한 신의 숨결로 충만하고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안에 깃든 신을 발견하고 신의 가르침으로 자신이 성숙해지고 깊어져가는지를 진지하게 살피는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기에만 단단해지고 강해져서 흔들림 없어 보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과 주관을 고집하는 완고함보다는, 마음에부드러움을 지니고 우리 안에 깃든 신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의미들에 눈뜨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서 성숙함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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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기도하기를 바라지요. 내가 내속에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 안에서, 늘 새삼 우리가 하느님이과고 부르는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신 신비에 얼마나 인접해 있는지를 것작 알아차린다면, 그리고 마치 이 신비에 나를 맡기듯이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자세를 취한다면, 내가 이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나는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 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곡진한 대답이다. 신비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신비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거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보다 먼저,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 자신을인간에게 주신다. 하나님의 자기 전달‘selbstmiteilung Gottes 이다. 이것이 라너가 말하는 ‘은혜‘다. 그 은혜로 인해 우리는 이미 곁에 와 있는 신비를온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기도한다. 그래서 믿는다.

그들은 당신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들이과 마음을 초조하게 하는 처음과 끝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 없이도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속속들이 잘 압니다.당신 없이도 뭐든 스스로 계획하고 추진합니다. 그들에게 당신은 그저 세상이 지금처럼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가도록 해주시는 분, 그래서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인 그런 분 아닐까요?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들에게도 생명의 하나님이십니까? 주님, 내가 사람들에 관해 말한 것이 참인지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누가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의 마음도 (내가 아니라) 당신만이 아십니다. 나는 그저 다른 이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시지요. 당신은 내마음 깊은 곳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은 숨어 계신 분, 그러나 당신 앞에서는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속에도 내 눈에 비친 다른이들처럼 살고 싶은 바람이 슬며시 고개를 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께, 당신에 대해 말하려 하면, 내 마음은 어쩔 줄을 모릅니다. 당신을 내 생명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그 어떤 이름도 당신을 정확히 말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자꾸만 당신 아닌 다른 것으로 슬쩍 옮겨 가려는 충동을 느낍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존재를 찾으려고 합니다. 당신의 낮설음과 두려움보다는 내 마음이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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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노래하든 슈만의 이 연가곡은 마음속의 동경을 일깨워줍니다. 그리움과 갈망이 귀한 것은 살아 있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의 기쁨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봄은 그런 때 여야 합니다.

영화를 다 본 후, 저 나름대로 ‘내 안에 나의 숲, 나의 정원을간직하자‘라고 영화의 메시지를 정리해보았습니다. 귀농은이 메시지를 위한 상징일지도 모릅니다. 살다가 지쳐 쓰러지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를 때, 다시 생명력을 회복할 수있는 곳을 우리는 나름대로 틈틈이 가꾸고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 때 찾아갈 수 있는 나만의 치유 공간은 곧 행복의 비밀이지 않을까요. 그 공간에 따스한 사람의 온기까지더해진다면 더욱 좋겠지요.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를 보며 잔잔한 음악이 참 좋다 싶었습니다. 엔딩곡인 융진의 〈걷는 마음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와 함께 개인적으로 떠오른 음악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재즈 피아니스트 티에리 랑의 너무나 아름답고 명상적인 곡 나의 정원Private garden)입니다.

왜 사람들은 행복한 시간에 굳이 상실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것일까요? 행복한 순간이 흘러가야 다른 행복한 순간이 오는것이 이치인데, 그걸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쓸쓸한 마음에 이렇게 자문하다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세속현자‘인 코헬켓의 권고를 곰곰 새겨봅니다.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코헬 7, 14)좋은 것을 그늘진 마음 없이 즐기기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좋은 것을 누리면서도 기뻐할 줄 모르거나, 행복한순간에도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앞서곤 하지요.
그래도 애를 써야 합니다. 인생에는 좋았던 순간에 집착하며사라지는 것을 미리 두려워하고 서글퍼하는 것과는 다른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배워야 합니다.

곧이어 그녀는 절망적으로 묻습니다.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인간이 있을까요? 매 순간마다요?" 이런 그녀의질문에 작가의 분신이라 할 ‘무대감독‘은 대답합니다. "없죠.
성인들이나 시인들이라면 아마…."
죽음의 문 앞에서 우리의 삶은 일회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더없는 무게를 얻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우리 삶의 모든존재를 담게 됩니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명상은 우리가생생하게 살아 있는 지금의 삶을 살게 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죽음으로 단절되는 유한한 삶에서 슬픔과 허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삶의 빛나는 조각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살아 있는 희망이지요.

하나 여행은 이렇게 달콤쌉씨름한 탐미적인 항유만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는 불편함과 한계들 속에서 많은 것을 새롭게 깨닫는 배움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실뱀테송은 지리학을 전공한 후 여행자로서의 삶을 살고, 그 깨달음을 글로 전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를 사랑하는독자가 적지 않지요. 그는 자신의 에세이 『여행의 기쁨』에서여행과 유랑에서 단련되는 몸과 정신, 확장되는 시선에 대해인상적인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고되게 걷는 여행과 유랑이 사물들의 본모습을 보여준다고 믿었습니다. 다음의 글에서 말하듯이 말입니다.
내가 신발 밑창만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통을즐기는 취향 때문이 아니라, 느림이 속도에 가려진 사물들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차나 자동차의유리창 뒤로 풍경을 흘려보내면서 풍경의 베일을 벗길 수는 없다.

. 『불안의 책』의 시작은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을 믿었듯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에 태어났다. (…) 그러니 나처럼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얼마 안 되는이들에게서 단념이라는 삶의 방식과 숙명이 된 관조를 빼고 나면 무엇이 남겠는가? 종교적인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알 능력도 없다.
페소아의 시적, 철학적 탐구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가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떠남‘에서 시작됩니다. 파스칼 메르시에의 소설 『리스본행야간열차』에서 페소아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모든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내가 아니기 m문이다. 내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모든 불가능하것들 중에서 가장 불가능하게 여겨지므로 날마다 열망하는 것이고, 슬픈 순간마다 체념하는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을 때 저는 독일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있었습니다. 그 어느 여름의 시작에 혼자 이국의 영화관에서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나의 리스본은 어디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구나 여름에 여행을 꿈꾸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로의 여행,
일상의 참 의미를 찾는 여정이 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일상과 애써 ‘낯설어 지고 지금까지 욕망하고 바라던 것이 정말 의미 있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절박하다는 것을 적어도 우리의 무의식이 알고, 신호를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를 보고 생각에 잠겼던 그때가 기억납니다.
‘이제 메르시에도, 페소아도 낯선 이름들이 아닙니다만, 때때로나의 인생이 나 자신에게 낯설어야 한다는 그 여름의 깨달음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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