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기도하기를 바라지요. 내가 내속에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 안에서, 늘 새삼 우리가 하느님이과고 부르는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신 신비에 얼마나 인접해 있는지를 것작 알아차린다면, 그리고 마치 이 신비에 나를 맡기듯이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자세를 취한다면, 내가 이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나는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 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곡진한 대답이다. 신비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신비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거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보다 먼저,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 자신을인간에게 주신다. 하나님의 자기 전달‘selbstmiteilung Gottes 이다. 이것이 라너가 말하는 ‘은혜‘다. 그 은혜로 인해 우리는 이미 곁에 와 있는 신비를온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기도한다. 그래서 믿는다.
그들은 당신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들이과 마음을 초조하게 하는 처음과 끝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 없이도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속속들이 잘 압니다.당신 없이도 뭐든 스스로 계획하고 추진합니다. 그들에게 당신은 그저 세상이 지금처럼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가도록 해주시는 분, 그래서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인 그런 분 아닐까요?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들에게도 생명의 하나님이십니까? 주님, 내가 사람들에 관해 말한 것이 참인지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누가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의 마음도 (내가 아니라) 당신만이 아십니다. 나는 그저 다른 이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시지요. 당신은 내마음 깊은 곳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은 숨어 계신 분, 그러나 당신 앞에서는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속에도 내 눈에 비친 다른이들처럼 살고 싶은 바람이 슬며시 고개를 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께, 당신에 대해 말하려 하면, 내 마음은 어쩔 줄을 모릅니다. 당신을 내 생명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그 어떤 이름도 당신을 정확히 말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자꾸만 당신 아닌 다른 것으로 슬쩍 옮겨 가려는 충동을 느낍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존재를 찾으려고 합니다. 당신의 낮설음과 두려움보다는 내 마음이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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