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어째서 무언가가 거기 있고 무無는 없지? 나무며…… 나비며…… 말이야. 나무 나무가 외로움을 타지 말라고 나비가 있지. 나비: 그럼 나무는? 나무: ……나비가 날다가 쉬라고.
물론 깊은 겨울에 풍성한 여름 꽃들의 화려함을 기대할수는 없다. 겨울은 그냥 섬세하고 사랑스럽고 부서지기 쉬운 형태들만을 만들어낸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Thoreau는 《월든 Walden》에서 이렇게 말한다.
겨울이 내놓는 많은 현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부서지기 쉽고 섬세하다.
모든 겨울꽃들은 어딘지 매우 부서지기 쉽고 섬세하고, 사랑스럽다. 뒤로 물러난 그 자태가 극히 고귀한 인상을 풍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혹독한 얼음서리가 지나가면 나의 겨울정원은 마법처럼 한겨울에 작은 봄을 불러온다.
봄이 다가오면 나는 슈만의 시인의 사랑 Dichterliebe〉을 즐겨 부른다. 시인의 사랑 첫 노래보다 봄에 더 잘 어울리는노래는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5월 모든 봉오리 피어날 적에 내 마음도 열렸네.
따뜻한 5월에는 이 노래를 가장 즐겨 부른다. 5월은 내겐 이미너무 여름이다. 어차피 5월Mai‘ 이란 낱말은 이탈리아의 성장의 신神 이름을 딴 것이다. ‘성장‘이란 아름다운 낱말이 아니다. 우거진다는 뜻이 함께 울린다.
나는 그늘을 좋아하는 꽃들을 몹시 사랑한다. 내 이름 병철은 밝은 빛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림자가 없다면 빛은 빛이 아니다. 빛이 없이는 그림자도 없다. 그림자와 빛은한데 속한다. 그림자가 빛의 형태를 드러내준다. 빛의 아름다운 윤곽이 그림자다.
디기탈리스는 라틴어 이름이다. ‘디기탈digital [디지털] 이란 낱말은 주로 헤아리는 손가락 디기투스digitus를 가리킨다. 디지털 문화는 인간을 작은 손가락 존재로 축소시킨다. 디지털 문화는 헤아리는 손가락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는 헤아리지 않는다. 헤아리는 것은 역사 이후의 범주다. 트윗이나 정보는 서로 합쳐봐야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타임라인timeline도 삶의 이야기, 또는 전기傳記를 들려주지 않는다. 더하기를 할 뿐 이야기를 하지는않는다. 디지털 인간은 끊임없이 헤아리고 계산한다는 의미에서 손가락을 쓴다. 디지털은 숫자와 헤아리기를 절대화한다. 페이스북 친구들은 무엇보다도 헤아려진다. 하지만우정이란 이야기다. 디지털 시대는 더해진 것, 헤아림, 헤아릴 수 있는 것 등의 합계를 낸다. 심지어 애착도 ‘좋아요‘ 형태의 숫자로 바뀐다. 이야기(내러티브)는 그 의미를 엄청나게 잃는다. 오늘날 모든 것은 업적과 능률의 언어로 바꿀수 있도록 숫자로 만들어진다. 게다가 숫자는 모든 것을 비교가능하게 만든다. 업적과 능률만이 헤아려진다. 그래서 오늘날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모조리 존재하기를 멈춘다. 하지만 존재는 이야기지 헤아리기가 아니다. 헤아리기에는 역사이자 기억인 언어가 없다.
식물과 동물은 우리의 옛날 모습, 앞으로 되어야 할 모습이다. 우리는 그들처럼 자연이었으니, 우리의 문화가 우리를 이성과 자유의 길을 통해 자연으로 도로 데려가는 것이 옳다. 식물과 동물은 우리에게 영원히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는, 우리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특별한 우수로 가득채운다. 동시에 그들은 이상理想에서 우리가 이루는 최고완성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숭고한 감동으로데려간다. (프리드리히 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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