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베냐민은 어떤 이야기에서 이렇게 썼다. "그 섬에는열일곱 종의 무화과가 있다고들 한다. 그 이름들을 - 행속에서 제 길을 가는 남자가 혼잣말하기를 - 알아야 할거야." 그러니까 각각의 무화과 종류는 제각기 독특해서다른 것으로 치환될 수가 없다. 그런 독특성은 열일곱 종의 무화과를 한 이름만으로 부르지 못하게 한다. 보편적명칭은 그들의 유일성, 제각기의 특성, 고유한 이름의 특성을 없애는 일이다. 이런 독특성 덕분에 각각의 무화과종류는 제각기 저만의 이름, 곧 고유한 이름을 얻는다. 각각의 무화과는 저만의 이름을 갖고 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마치 이름이 그 본질, 그 존재에 접근을 허용하는 순간적인 암호이며, 오직 고유 이름으로 부르기, 그런호출만이 그 본질을 맞추는 것만 같다. 그들이 그토록 다른데, 그것을 단 하나의 이름, 하나의 보편적 명칭으로 부른다면 각각의 무화과 종류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독특한 것만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고유한 이름을 붙이기,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기가 각각의 무화과 종류를 체험할 열쇠를 손에 쥐여 준다. 잘 알다시피 인식이아니라 체험이 중요하다. 체험은 일종의 부르기, 또는 깨우기다. 진짜 체험, 즉 불러내는 대상은 보편성이 아니라 독특성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만남을 가능케한다.
뛰어난 것이 시들어도 울지 마라! 머지않아 그것은 젊어지리니! 너희 마음의 멜로디가 멈추어도 슬퍼하지 마라!! 머지않아 어떤 손이 그 소리를 다시 켜게 되리니!! 나는 어떠했던가? 나는 끊어진 현악연주 같지 않았던가? 소리를 조금 더 내긴 했지만 그것은 죽음의 소리였다. 나는 이미 어두운 백조의 노래를 부른 다음이었으니! 죽음의 화환을 나 자신에게 둘러주고 싶었지만 나는 겨우겨울 꽃들만 지녔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휘페리온》
니체는 이름 붙이기를 권력행사로 파악한다. 지배자들은 "각각의 물건과 사건을 하나의 소리로 낙인찍고 그로써 그것을 소유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의 기원은 지배자들의권력선포‘ 이다. 언어는 ‘가장 오래된 물건 점유과정의 잔향이다. 모든 낱말, 모든 이름이 니체에게는 하나의 명령이다.
원추리 꽃이 화려하게 무성하다. 노랗고 빨간 색으로 빛난다. 그렇다, ‘빛난다 leuchten‘는말은 꽃피는 원추리를 위한 동사다. 장미는 빛나지 않는다. 장미는 다른 동사를 요구한다. 광채를 내뿜는다strahlen고할 수도 없다. 아네모네나 밀짚꽃은 광채를 내뿜는다. 그럼장미는? 장미는 반짝이지도glänzen 않는다. 약간 멈추어 있기 때문이다. 장미는 뒤로 물러선 자세다. 장미의 화려함의비밀이 거기 있다. 장미는 장미한다. 장미하다 rosen가 장미를 위한 동사다.
릴케는 장미와 천사를 사랑했다. 내 정원엔 수많은 장미들이 있다. 이들은 내 눈을 섬세하게 풀어준다. 정원 입구에천사상 둘이 서 있다. 그들이 나의 장미정원을 보호한다. 릴케는 장미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수많은 눈까풀 아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 되고 싶은 열망이여.
장미들로 이루어진 밤, 수많은 수많은 환한 장미들로 이루어진 밤, 장미들로 이루어진 환한 밤, 천 개 장미눈까풀들의 잠. 환한 장미-잠, 나는 너의 잠자는 자. 네 향기들의 환한 잠자는 자, 네 서늘한 내면성의 깊은 잠자는 자.
그럼 마치 꽃잎이 꽃잎을 건드리기에 감정 하나 생겨나는가? 그리고 이것은, 감정 하나가 눈까풀처럼 열리고 그 아래 순전히 눈까풀, 감긴 눈까풀들이 있는 건가, 마치 열 배나 잠자면서 내면의 시력을 약화시키기라도 하는 듯.
지금 이 순간 릴케의 이 장미 구절들을 사랑한다. 잠을이룰 수 없기 때문에, 깊지만 환한 잠, 장미 잠을 갈망하기때문이다. 나는 기꺼이 잠들어 그 누구도 아닌 사람, 이름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은 구원이리라.
오늘날 우리는 오직 에고 나 자신에만 열중해 있다. 누구나 큰 소리로 누군가가 되고자 하고, 누구나 진짜가 되고자 하며 다른 사람과는 달라지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모두 같다. 나는이름 없는 사람들이 그립다.
하이데거는 유명한 휴머니즘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인간이 한 번 더 존재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면, 그보다 먼저 이름 없는 자로 존재하기를 배워야 한다. 공공성을 통한 유혹이나 사적인 것의 무력함을 동일한 방식으로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발언하기 전에, 먼저 존재Sein가 다시자기에게 말 걸게 해야 한다. 정작 말 걸어오면 거의 할말이 없는, 또는 드물게만 할 말이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우리는 오늘날 모두 특별한 존재이기에 할 말이 너무 많고, 소통할 것이 너무 많다. 우리는 고요함과 침묵을 잊었다. 나의 정원은 고요함의 장소, 정원에서 나는 고요함을 만든다. 나는 휘페리온처럼 귀 기울여 듣는다.
디지털화는 결국은 현실 자체를 없앤다. 또는 현실은 디지털 내부에서 현실성을 빼앗기고 하나의 창이 된다. 머지않아 우리 시야는 3차원 디스플레이와 같아질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진다. 나의 정원은 내게는 다시 찾은 현실이다.
"땅을 보호하라는 명령, 곧 땅을 아름답게 대하라는명령이 땅에서 나온다. 보호하다 schonen‘ 라는 낱말은어원으로 보아 아름다운 것dem Schönen‘ 이라는 말과친척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호할 의무, 아니 명령을 내린다. 아름다운 것은 보호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이 옳다. 땅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의절박한 과제이자 의무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 뛰어난 것이니 말이다. 보호는 찬양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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