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완전한 평정상태‘라는 표현으로 정의럼 보인다. 키니코스주의자라면 인간의 비참이 사회전약과 관습에서 비롯한다고 할 것이고, 에피쿠로스주라면 이기적 관심과 쾌락을 좇는 태도에, 회의론자라면잘못된 의견, 즉 억견에 이 비참의 원인을 돌릴 것이다. 헬레니즘 철학들이 소크라테스의 유산을 자기 것으로 내세웠든 그러지 않았든 간에, 이 철학들은 인간이 무지하기 때문에 비참, 불안, 악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모두 소크라테스와 견해를 같이했다. 사물에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물에 대해 내리는 가치판단에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치판단을 바꿀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따라서 이 철학들은 치유의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인간이 가치판단을 바꾸기위해서는 근본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유방 ! 식, 존재방식을 바꾸겠다는 선택. 이 선택이 바로 철학이 다. 철학 덕분에 인간은 내적 평화, 영혼의 평정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좋은 휴가는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고 스스로를 ‘잘 돌보는시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휴가는 철학의 시가‘ 이라 말할 수 있지요. 그렇기에 휴가로 얻는 좋은 열매란청학과 마찬가지로 평정심‘이 아닐까요. 이는 곧 감정과 느끼의 억압이 아니라 내면과 육신의 숱한 일렁임들이 만족과절제로 조화를 이룬 상태이겠지요. 이는 눈앞의 일들과 욕구와 비교에 사로잡힌 ‘지금‘에 사는 게 아니라, ‘언제나‘와 ‘영원함‘을 마음에 담은 사람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역설적으로이런 이에게 ‘지금‘의 소중한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영원을 담고 있는 ‘지금‘을 알아보는 것을 철학자들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보다. 맛깔스런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일상과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향유하는 법을 배우라고 권고합니다.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존재를 풍요롭게 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지요.
우리는다른 사물들과 똑같이 별 가루로 만들어졌고, 고통속에 있을 때나 웃을 때나 환희에 차 있을 때나 존재할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세상 만물이 별의 먼지‘라는 것은 과학적 진술일뿐더러, 깊은 의미에서는 시의 언어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이 신비를 가리키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우리는 별을 바라보며 경탄하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별의 먼지이자 신에게서 온, 그래서 신을 닮은 사랑의 작품이기 때문이지요. 깊어가는 여름 안에서 휴가를 보낼 때는 이처럼 별을 바라보며 우리의 인생을 성찰하는 귀한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현대인들은 성과 중심의 문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여가를 잘 보내는 것은 육신을 위해서나 정신적, 영성적 측면에서나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여가를 단순한 휴식이나 소일, 여흥과 구분할 필요가 있고, 여가를 향유! 하는 것이 우리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성숙시킨다는 점을기억해야 합니다. 휴가와 여가의 본래 뜻이 가장 고귀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도야하는 시간을 가지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한 사람이 바로 요제프 피퍼입니다.
독일의 가톨릭 철학자 요제프 피퍼입니다. 그는 보석 같은 책『여가와 경신』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의 수도원 전통에 힘입어 여가의 본질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요하면서도 우리에게 생기와 의욕을 주는 휴가는 삶을 성숙시킵니다. 손에 움켜쥔 것을 가만히 놓아보고, 보고 싶어하는 것만이 아닌 존재 자체를 여유 있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관조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체험은 우리가 하는 일을 새로운 관점으로 대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더 이상닦달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근본 목적을 음미하며 때로는 멈추고 기다릴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성서는 예수님께서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닦달하지 않는‘ 언어입니다. 자유로움과 관조하는 여유 속에서 그러한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세속적, 삶의 번잡함에서 잠시 벗어나 여가를 갖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삶의 요소이며, 낭비와 무위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굳은 심지를 통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결실의 시간입니다.
가을에 관한 유명하고 아름다운 3편의 시들인 「가을날Herbstag」 「가을의 끝Ende des Herbstes」 「가을herbst은 거의 연이어 배치되어 독자들이 가을의 정취와신비에 깊이 잠기게 합니다. 「가을의 끝」의 첫 연은 릴케에게 가을은 그저 좋은 풍광의시절이 아니라 뼈저린 인식의 시간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얼마 전부터 나는 모든 것이 /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 무언가가 일어나 움직이며 / 죽이고 고통을 주고있다.
한편, 「가을」의 마지막 연은 비록 가을이 나뭇잎이 떨어지듯죽음의 그림자가 서리는 조락의 때임에도, 결국은 우리에게구원의 시간이라는 위안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 두 손으로 받아내는 어느 한 분이 있다. 그러나 가을을 노래한 릴케의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역시 「가을날」입니다. 이 시를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다 보면, ‘감사‘와 ‘기도‘만이 존재의 신비‘에 다가서는 참다운 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 들녘엔 바람을풀어놓아 주소서. //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하소서.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길 사이로 /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시는 앞부분에서 우리를 절대자에게 향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절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지요.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부분을 읊조리면서는 누구나 스스로의 내면이 얼마나 성숙되고 무르익었는지를 한 번쯤 겸허하게 살펴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신의 그림자 속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며, 자연 또한 신의 숨결로 충만하고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안에 깃든 신을 발견하고 신의 가르침으로 자신이 성숙해지고 깊어져가는지를 진지하게 살피는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기에만 단단해지고 강해져서 흔들림 없어 보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과 주관을 고집하는 완고함보다는, 마음에부드러움을 지니고 우리 안에 깃든 신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의미들에 눈뜨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서 성숙함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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