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노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세계는 신비로운 주발 같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지 못한다. 그것을 붙잡으려는 사람은 오히려 잃어버린다.
비밀스런 주발인 땅은 부서질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땅을 잔인하게 착취하고 마모시키면서 그를 통해 완전히 파괴하는 중이다.
땅을 보호하라는 명령, 곧 땅을 아름답게 대하라는 명령이 땅에서 나온다. 보호하다schonen‘ 라는 낱말은 어원으로보아 ‘아름다운 것dem Schönen‘이라는 말과 친척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호할 의무, 아니 명령을 내린다. 아름다운 것은 보호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이 옳다. 땅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의 절박한 과제이자 의무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 뛰어난 것이니 말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두 요소, 곧 스투디움 studium과 풍크툼 punctum을 구분한다. 스투디움이란 우리가 사진에서 읽어 낼 수 있는 정보들을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사진을 탐구할수 있다. 그에 반해 풍크툼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말 그대로 하자면 그것은 새겨진 것‘이라는 의미로, 라틴어 낱말pungere(새기다)‘에서 나온 것이다. 풍크툼은 관찰자의 마음을 꿰뚫고 흔들어놓는다.
내게 있어 《밝은 방의 풍크툼은 그의 유일한 애인인 어머니가 서 있는, 책에서 보여주지 않는 겨울정원[온실이라는의미도 있음]이다. 여기서 나는 겨울정원을 이중의 모습으로본다.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위한 상징적 장소, 형이상학적애도노래의 장소다. 밝은 방은 내 눈에는 꽃피는 정원, 겨울어둠 속의 밝은 빛, 죽음 한가운데의 생명, 오늘날의 죽은삶 한가운데서 다시 깨어나는 삶의 경축이다. 형이상학의빛 한 줄기가 검은 방chambre noir을 밝은 방chambre claire으로, 밝은 겨울정원으로 바꾼다.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시간을 다르게 느낀다. 시간이 훨씬 더 느리게 흐른다. 시간이 확장된 것이다.
다음 봄까지의 시간이 거의 영원처럼 느껴진다. 다음번 단풍은이루 말할 수 없이 멀리에 있다. 여름도 끝없이 길다. 겨울은 영원히 계속된다. 겨울정원에서의 노동이 겨울을 더 길게 만든다.정원사 노릇 첫해만큼 겨울이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나는 추위와 얼음서리로 몹시 고통을 겪었으나 나자신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겨울에 꽃피는 식물들, 눈과 얼음서리 한가운데서도 피어난 꽃들 때문이었다. 나의걱정, 나의 염려는 무엇보다도 꽃들을 향했다. 정원은 나를이기적 자아에서 한 발짝 더 멀리 떼어놓았다. 나는 자식이없다. 하지만 정원에서 다른 이를 위한 걱정, 염려라는 것이무슨 뜻인지 천천히 배우고 있다. 정원은 사랑의 장소였던것이다.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 가을크로커스와 봄크로커스는 모습은 비슷해도 시간감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식물이 매우 뚜렷한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 어쩌면 오늘날 어딘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 부족한 인간보다 심지어 더욱 시간의식을 갖는다는것이 놀랍다.

아도르노Adorno는 내가 슈베르트에게 품고 있는 정열에대해 철학적인 설명을 해준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슈베르트의 음악 앞에서는 영혼에 먼저 물어보지도 않고 눈에서눈물이 쏟아진다. 즉 우리는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로 운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행동주체인 자아를 무장해제시킨다. 자아를 뒤흔들어 성찰 이전 비슷한, 성찰 같은 눈물을흘리게 한다.

‘디지털‘은 프랑스 말로는 뉘메리크numérique이다. 즉,
숫자로 된 것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신비로움을 없애고 시詩를 없애고, 세상을 낭만적이지 않게 만든다. 세상에서 온갖 비밀, 온갖 낯섦을 없애고, 모든 것을 알려진 것, 진부한것, 친숙한 것, 내 마음에 드는 것,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모든 것은 동일하게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디지털화에 직면하여 세상을 다시 낭만화하고, 땅을, 땅의 시를 다시 찾아내고, 땅에 신비로움, 아름다움, 고귀함의 품격을 되찾아주어야 할 것이다.

구원이란 위험에서 구해낸다는 뜻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풀어주어 본래의 본질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땅을 구원한다는 것은 땅을 이용한다거나 땅을 위해애쓴다는 것 이상의 의미다. 땅의 구원은 땅을 지배하지않고, 땅을 예속하지 않는 일이다. 지배와 예속에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바로 무제한 착취다. 죽어야 할 인간은 하늘을 하늘로 맞아들이는 한에만 지구에 산다. 태양과 달과별들이 각기 제 길을 가도록 그대로 두고, 계절들이 각각의 축복과 재앙을 주도록 해야 한다. 밤을 낮으로 만들고,
낮을 헐레벌떡 쫓기는 불안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다.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전에 몰랐던, 강하게 몸으로 느끼는 특이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땅의 느낌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세계의 디지털화라는 행진을 하면서 땅을 떠났다. 생명을 살리고 행복하게하는 땅의 힘을 우리는 더는 느끼지 못한다. 그 힘은 모니터 크기로 줄어들고 만다. 노발리스에게 땅은 지복과 구원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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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순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 일울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을 더 온전히지 뜻에 맡겨야 하고,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향한 자기의 정신으로만 살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때의 체험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 가려는 마지막 노력이나 의지를 모두 내던져 버리는, 나를 묶고 있더 마지막 실오라기까지 풀어주는 느낌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는 말로 표현하면 너무 간단하지만 그 이후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영향을 미쳤다.

하느님 뜻은 내가 처한 상황 ‘저 쪽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황 자체가 바로 나에 대한 그분의 뜻 ‘그것‘이었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내가 상황을 그분 손에서 넘겨받듯이 받아들이고, 고삐를 풀어놓은 채 나 자신을 온전히 그분 섭리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분은 나에게 나 자신의 어떤 간섭이나 노력, 어떤 유보나 예외, 내가 조건을 붙이거나 주저할 수 있는 모든여지를 배제하는 철저한 신뢰를 요구하셨다.
그분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를 바라셨다. 여기에 요구되는 것은 절대적인 신앙이었다.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를 믿고, 그분이 아주 사소한일에도 관심을 두고 계심을 믿으며, 나를 받쳐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그분의 힘과 사랑을 믿는 그런 신앙이었다.
이는 마지막 남은 내면의 의혹, 곧 하느님께서 그곳에계시면서 나를 떠받쳐 주지 않으시리라는 마지막 두려움까지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가 곧잘 잊어버리는 평범한 진리가 있다.
바로 하느님이 육화를 통해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다는것이다. 우리는 이 교의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 곧 하느님이 육체를 지니신 까닭에 춥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통증을 느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아셨다는사실을 자주 묵상하지 않는다.
그분은 긴 세월 동안 목수로서 평범한 노동을 하셨고,
피곤한 몸으로 먼지투성이의 길을 걸으셨으며, 차가운밤공기나 스산한 비에 몸을 움츠리시고,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도 깨어 계셨고, 목마름과 더위를 겪으셨으며, 지치고 완전히 탈진하기도 하셨다.
그분은 추운 새벽에 뻣뻣하게 경직된 몸을 일으키는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아셨고, 온몸이 욱신거리는육체적 피곤과 두통, 치통도 아셨을 것이다. 때로는 근심과 번민을 하셨고 갈등을 겪기도 하셨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육화를 통하여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생활이 어떤 것이며, 인간이 두 손으로 일하는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셨다.

그런 환경에서도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졌고,
무슨 일에든 힘이 다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최선을다했다.
그것은 바로 그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시베리아에서 새 도시 건설에 협력한 것은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니키타 후르시초프가 원해서가 아니라하느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치른 고역은 결코 징벌이 아니라, 내 구원을 위해두려워 떨며 실현해 나가는 하나의 길이었다. 내가 하는일이 비록 들짐승이 내는 단말마의 비명처럼 처참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저주가 아닌 하느님께 향하도록 돕는 길이었다. 그러기에 이 일은 하느님의 손에서 친히 내게 부여된 것이고 품위를 높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나에게 제시된 하느님의 뜻이었다.

사제는 친구를 사귀려고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오는 수인들 앞에서 참으로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노력과 거의 무관한 하느님 은총의 역사役事라는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사제를 찾는 것은 그가 인격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제에게 현명한 조언이나 영적 권고 또는 갖가지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는 어떤 해답이 아니라 죄를 사해주는 성사의 힘을 기대하고 찾아왔다.
사제는 이러한 사실 앞에서 기쁨을 느끼는 한편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사제를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대변자,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하느님 일을 수행하는 이로 생각하고 사제를 찾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사제는 자신의 개인적 불편을 넘어 육체적으로 아무리 피곤하고 관리들한테 어떤 무서운 협박을 당하더라도 자신의봉사직과 사목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수인 한사람 한사람을 만날 때마다 현재이 시각, 이곳에서 내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과 그토록기묘하고 무시무시한 길을 거쳐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신하느님 섭리의 손길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하느님과 신앙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
이곳에선 신학을 통해 배운 교과서적 답변보다 하나의물음, 하나의 대화, 하나의 만남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 은총의 손길을 느낄 줄 아는 감각과 직관력, 끝없는연민의 마음만이 요구되었다.

성장에 요구되는 것은 어떤 계획된 접근 방법이나 계산된 실천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심지어는 속죄와 단식과 극기 같은 고행이라 해도 그것이 자기 뜻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도움 은커녕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사람은 늘 하느님 뜻을 성취하는 방법보다 그분이 우리 앞에 예비해 두신 사람과 장소와 사물 안에서 드러나는 그분 뜻에 일차적으로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설령 그것이 고통과 위기와 고독, 굶주림이나 질병 같은육체적 시련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느님 뜻을 실현 하고 있다는 의식이 기꺼이 희생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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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기며 우리가 만들어 낸 세계 속에서 평온하게 살아간다. 또한 제아무리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이미 타협해 사는 법을 터득한 기존질서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면서 하느님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우리의 판에 박힌 생활을 분쇄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에게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것,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당신과 영원토록 함께 살도록 조처해 두셨다는것, 세상의 사물이나 세상 자체가 결코 우리의 영원한 터전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당신 것이며 만사에 당신을 찾고 당신께 얼굴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기위해 일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어지도록 허용하심으로써 이 세계가 우리의 영원한 거처나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고, 올바른정신으로 참된 가치에 대한 감각을 되찾을 수 있게 우리생각을 당신께로 되돌리게 해주신다.

우리는 불만과 의심 많은 아이처럼 위기에 직면해서야비로소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께 얼굴을 돌린다. 크나큰손실이나 가족의 불상사로 깊은 절망감을 맛보게 될 때비로소 그분께 몸을 돌리고 ‘왜?‘ 라고 묻는다. 정말 어쩔수 없는 때를 맞아서야 그분께 얼굴을 돌리고 그분의 도우심과 지원과 위로를 구하는 것이다. 이하느님은 신비롭게도 당신 섭리로 우리의 비극을 이용해 당신 현존과 사랑, 우리에 대한 변함없는 관심과 배려를 우리의 타락한 인간 본성 안에 일깨워 주신다.
하느님은 결코 앙갚음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당신을 잊고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벌하고자 재난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그분은 항상 현존하시며 변함없이 충실하시다. 우리가평온하고 안락한 시기에는 그분을 바라보거나 찾지 않지만, 그분은 언제나 그곳에 계시면서 우리를 이끌고 보살피신다. 우리가 의지하고 또 날마다 우리를 부양해 준다.
고 믿고 있는 바로 그것을 그분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본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곧 우리는 기존질서와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지낼 때는 그 같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느님 뜻이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를 미리 규정하는 것과 하느님 뜻이 이것이어야 한다고 단정하게 만드는 그 생각을 합리화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빛어내는 소치일 뿐 아니라 가장 다루기 힘든 유혹의 근원이다

단순하고 평범한 진리,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변 환경한 장소와 사람들과 문제점을 통해 우리에게 하루하루그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곧 그분의 뜻이다. 이 뜻을 단순히 이론이나 하느님 은총으로 가끔씩 부여되는 섬광같은 통찰력이 아니라 그날그날 일상에서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나치게가을 쓸 필요는 없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뜻은 하루의모든 상황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므로 우리는 모든 사실을 그분이 바라보시고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그대로 관망하는 법을 터득하기만 하면 된다.)이런 사실을 하느님 뜻으로 보지 않고 지나치려는 것이 바로 유혹이다. 유혹은 너무나도 한결같고 사소하고단조롭고 일상적이라는 이유에서 지나쳐 버리는 대신,
하느님 뜻은 이러해야 한다는 우리 관념에 어울리는 더고상한 다른 어떤 ‘하느님 뜻을 찾으려는 데 숨어 있다.
테플라야 고라에서 우리가 겪은 유혹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것은 삶이 스스로 기대했던 그것이 아님을 돌연히깨닫게 된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유혹이다. 그에 대한해답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의 이 사실만이 진실로하느님 뜻임을 깨닫는 데 있다. 매일 매순간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어려움은 그것이 다른 모든 위대한 진리처럼 지나치게단순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더 까다로운 해답을 찾는 동안, 해답은 줄곧 우리 코앞에 모습을드러낸다.
이것은 하느님의 모든 진리가 지닌 단순함이라는 표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나 단순하게 보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것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모든 진리가 그렇듯 실천에서도 결코쉽지 않다. 이것은 너무 단순해 그런 확신에 머무를 줄모르는 인간 편에서 볼 때 따르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인간의 나약한 본성은 쉽게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환경은 지극히 단조롭고 일상적이며 판에박힌 듯 똑같아 보이지만 우리에게 그날그날 부여되는하느님 뜻은 그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를 빗나가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그 속에 몰입되어 비록 순간적일지라도 위대한 진리를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신적 진리를 파악해 그것을 따르고 행동하며, 그에게서 발산되는 영감의 빛을 통해 매순간을대면하고 그것만을 되새기며 유일한 원칙으로 삼아 그 방향으로 매진할때 우리는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변키거나 모든 악을 제거하고 온갖 병폐를 치유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과 섭리가 작요하는 상황 속에서 사람이 당신 뜻대로 행동해 주기만을기대하신다. 그리고 하느님 은총은 그가 행동하는 데 결코 부족함이 없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환경에서 체험하는 무력감은 그상황 안에 자신을 지나치게 개입시키려는 경향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무력감에 자신을 아무 가치 없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의식에 압도당한다.
우리는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우리가 할 수 있는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몰두하여 그분 뜻과 섭리는 모두잊어버린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의 존재 의미와 존엄성, 가치, 그리고 개인이 그분의 섭리 안에서 수행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역할 등을 한시도 잊지 않으신다. 그분에게 각 개인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똑같이 중요하므로 늘 보살피신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각 개인에게부여된 하루하루의 상황을 당신 손에 반드시 받아들이시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 주기를 기대하시며, 행동하는 데 필요한 은총을 내려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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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바람에 색깔을 칠하는 사람입니다. 분명 거기에있는데, 분명 무언가 있는 것을 느끼는데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우리 대신 표현해주는 사람입니다. 정제된감정을 집중하고, 고르고 골라 가장 순수하고 구체적인 이미지와 진실된 언어로 우리 대신 말해줍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머리가 완전히 폭발해버린 듯한 느낌을 받을 때 시를쓴다고 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목에 무언가 뜨거운것이 치밀면, 그것은 시를 쓰라는 신호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순간적이라도 지독한 사랑을 느낄 때의 감정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들은 그래서 모두 자신이 느끼는 사랑을 말로 옮긴 사람들입니다. 남녀간의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이웃 사랑, 나라 사랑, 한 마디로 뭉뚱그려 모두 삶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정시인 새러 티즈데일은 말합니다. "나의 노래를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심장입니다(It is my heart that makes my songs, not I)."
즉 자기의 심장으로 우리를 대변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입니다.

왜냐하면 시는 그렇게 사전적이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단순간결하게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그런 ‘선언‘으로는마음의 신비를 절대 전할 수 없습니다. 시는 정보 위주의선전문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상을 보고 그냥 ‘이건 책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시가 될 수 없지요. 그 책상에서친구와 함께 공부했던 추억, 그 친구의 얼굴, 그 시간의 소중함을 떠올리며 그 책상에 대해 마음과 이미지로 말하는것이 바로 시입니다. 그래서 시는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웅변으로 말하기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조그만 소리로 말하는것, 신작로처럼 뻥 뚫린 길을 놔두고 향기로운 오솔길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인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는 시란 문을 활짝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살짝 문을 열었다 닫고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육신의 생일은 9월이지만,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것이라는 <생일>을 읽으며, 나도 다시 한 번 태어나고픈 소망을 가져봅니다. 저 눈부신 태양을 사랑하고, 미풍 부는 하늘을사랑하고, 나무와 꽃과 사람들을 한껏 사랑하고, 로제티처럼
"My love is come to me!" 라고 온 세상에 고할 수 있는 아름다운 4월의 ‘생일‘을 꿈꾸어봅니다.

어른과 아이 - 앤 머로 힌드버그-

일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어른
밥벌이를 하고 내일을 계획하려
근심스럽게 저녁 하늘을 훑어보고
걸을때 서두르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어른
이웃을 의심하고 가면을 쓰고
갑옷 입고 행동하며 눈물을 감추는 것은 어른.

노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아이
미래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기쁨으로 노래하고, 경이로워하며 울 줄도 알고
가면 없이 솔직하고 변명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잘 믿고 가식도 전혀 없이,
사랑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아이.

아침마다 우리는 가면 쓰고 갑옷 입고 세상이라는 전쟁터로 나갑니다. 내 안의 순수한 마음, 남을 믿는 마음, 경이로움을느낄 줄 아는 마음을 억누르고 무관심과 무감각의 갑옷으로 단단히무장한 다음, 삶이라는 커다란 용과 싸우러 나갑니다.
밥벌이를 위해 서둘러 걷고, 남을 의심하고 또 미워하고, 내가 한 발짝이라도 더 올라서기 위해 남을 무시하고 짓밟기도합니다. 저녁이 되면 오늘의 싸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내일의 전투 계획을 짭니다.
오늘의 행복은 미래를 위해 접어두고, 가끔씩 왠지 사는 게서글퍼져 눈물이 날라치면 매몰차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딱딱한 갑옷 입고 총알 쏟아지는 적진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가면 없이 솔직하고, 기쁨으로 노래하고 사랑하기좋아하는 내 안의 아이는 참 살기가 힘듭니다.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고 떠받드는 유명인, 즉 ‘Somebody‘
가 되는 것은 마치 여름날 개구리가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것과 같이 의미 없고 허무한 일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선거에당선되기 위해 목이 터져라 이런 저런 슬로건을 부르짖는 일,
기계적으로 박수치며 입에 발린 말로 찬양하는 청중 앞에서와글와글 자기 이름을 외쳐대는 일은 얼마나 끔찍할까요.
미국 듀크 대학의 농구 감독 시셉스키는 모든 농구 지도자들의 꿈인 NBA 챔피언, LA 레이커스 팀의 감독직을 고사했습니다. 제자로부터 "한 명의 선수는 단지 손가락 한 개에 불과하지만, 다섯 명으로 뭉치면 단단한 주먹이 된다는 소중한교훈을 가르쳐주신 감독님, 감독님의 지도와 격려를 받기 위해 이 학교에 왔습니다. 저희의 감독님으로 남아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대중이 권력과 부로 찬양하는 ‘Somebody 보다는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으로 맞아주는 ‘Somebody‘로 남기를 택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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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사람의 세 가지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오는 것이 한 가지즐거움이고,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 오는 것이한 가지 즐거움이고, 나 혼자 외롭게 찾았던 곳을 마음이 맞는좋은 벗들과 어울려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다."

사람은 관물을 통해 사물의 가치를 사물의 이치로 인식한다.
사문의 이치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사물이 각기 지닌 가치를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관물의 이유는 사물의 이치를 인식해사물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데 있다. 단순히 사물을 보지 말고사물의 이치를 봐야 비로소 사물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관물이란 사물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고, 마음이 아닌 이치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낫고, 이치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보는 것보다 낫다. 이치로 사물을 바라보면 환히 통하여 보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관물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등下은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고, 중등中等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것이고, 상등上等은 이치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보면 한가지 사물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보면 한 가지 사물 밖의 다른 사물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치로 사물을보면 ‘일이관지一以貫之’ 곧 한 가지 사물로 만 가지 사물을 환히꿰뚫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봄날 햇볕처럼 따뜻하고 온화해야 넓은 도량을 갖출 수 있다. 또한 가을 서리처럼엄숙하고 엄정해야 높은 절개를 지킬 수 있다. 사람이든 일이든품을 때는 봄날 햇볕처럼 따뜻해야 하지만, 끊을 때는 가을 서리처럼 서늘해야 한다. 천하의 천한 일인 똥을 날라 먹고사는 엄행수의 덕을 높여 칭찬하고 벗의 정을 나눈 이덕무에게서 봄날 햇볕 같은 넓은 도량을 읽을 수 있다면,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출세를 멀리한 채 처사와 은사의 삶을 추구하는 이덕무에게서는가을 서리 같은 높은 절개를 엿볼 수 있다. 이덕무가 생각한 인격의 궁극적인 경지는 넓은 도량과 높은 절개를 함께 지니는 것이다. 가을을 좋아해 가을 시를 많이 남긴 이덕무가 그 못지않게‘
봄을 읊은 봄 시를 많이 남긴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고 웃는 것은 뒤쪽까지 환히 트인 줄 알기 때문이다. 서둘러 거울 뒤쪽을 보지만 단지 까맣고 어두울 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 왜 까맣고 어두운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기묘하다. 거리낌이 없어서 막힘도없구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무엇에도 막히지 않아야 참된 감정과 진실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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