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전통에서 시Lyrik 란 가슴에 품은 채 연주하는 고대 그리스의 탄주악기 뤼라lyra를 그 어원으로 한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시가 곧 음악이요, 시의 생명이 가슴의 진정성에있다고 여긴다. 그런 관념은 거의 본능과도 가까운 문화적 유전자로 남아서 그들은 지금도 노래가사와 시를 구분하지 않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팝송 가사를 찾고 싶을 때 서정시를뜻하는 단어 ‘리릭lyric‘을 그대로 검색어 창에 넣을 수 있는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독일어에서 노래를 뜻하는 리트Lied의 어원도 뤼라다. 노래가 시고 시가 곧 노래다. 그래서 괴테는 시를 "그저 읽으려 말고, 늘 부르라 nur nicht lesen, immer singen"고 말했다. 시는 결코 눈으로 읽는 문자가 아니기에 아이들도 지을 수 있다. 글자를 몰라도하루 종일 노래하는 것이 아이들이다. 그처럼 서양인들에게 시는 내가 적어 친구에게 선물할 수도 있는 쉬운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말言을 가지고 누각이 있는 특별한 집寺을세운 것을 시詩라고 보는 동양 사람들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는 시가 노래라는 인식이 희미한 까닭에 시가 어렵다고 느낀다. 알게 모르게 시인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선神仙처럼 여긴다. 중국인들도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르지 않는가. 시란 특별한 사람이 쓰는 것이지, 나 같은 보통 사람이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뭔가 멋지고 심오한 시어가 잘 떠오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시는 단순한 노래가사보다 위에 있다. 노래를 위해서는 그저 가사를 쓰면 되고, 시는 고요한 가운데 울리는 심오한 것이라고 여긴다. 서양의 진정성과 동양의 특별함. 이 둘은 모두 예술의 지향점이므로 굳이 선후나 우열을 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문화 향유의 주체가 소수 귀족들에서 일반 시민들에게로 넘어오던 근대 이후, 시와 노래에 대한 서양적 관념은 분명 힘을발휘했다. 시가 곧 노래라 여겨 왔기에 서양 사람들은 소박한민요에서 새로운 시적 생명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요를 모델로 하여 쉽게 이해되는 시를 쓰고 여기에 다시 진솔하고 단순한 곡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가곡이란 단순히 성악 음악의 한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성 있는 문화를 가꾸려는 시인, 음악가, 시민들사이의 역동적인 교류이자 천재와 문화저변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마음을 울리는 시인의 말 한 마디가 작곡가의 손끝에서 노래로 바뀐다. 그것을 성악가와 피아니스트가 조화로운음악으로 재현해 내면, 듣는 이들의 마음 속에 새로운 시심詩心이 자라난다. 읽고 상상하고 표현하는 일로 그들 모두가하나가 된다. 그렇게 수많은 읽기와 수많은 해석과 수많은 상상력이 생겨난다. 굳이 직업작가가 아니어도 관계없다. 읽기와 듣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애호가가 되고, 나아가 직접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저 수동적으로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문화인이 된다. 그래서 가곡에서 시인은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되찾고, 음악가는 시어에 의지하여자신을 성찰하고, 시민들도 조화의 감각으로 자기 감수성과상상력을 가꾼다. 우리도 그런 문화를 한번쯤 가꿔보아야 하지 않을까. 예술가곡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클라라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의 마음은 여전히 진실하고 확고한가요? 흔들림 없이 나는그대를 믿어요. 하지만 세상 하나뿐인 연인에게 아무 기별을 못듣는다면 아무리 강한 용기마저도 길을 잃게 마련이지요. 그 여인이 내게는 당신입니다. 수천 번 모든 것을 되새기고 또 스스로에게 말해 보았어요. 우리가 원하고 움직인다면, 꼭 그렇게 해야할 겁니다. 저한테 그냥 간단히 ‘네‘라고 적어 주세요. 다가올 당신의 생일에 제가 드리는 편지를 아버님께 직접 전해달라고 부탁드릴 참이니까요. 비록 교수님께서 지금은 저를 보란 듯이 반대하기로 작정하셨지만, 당신이 절 위해 직접 간청하는데, 설마 저를 쫓아버리기야 하시겠어요?
심각한 편지에는 유쾌한 답장. 클라라는 사랑의 조바심때문에 작은 사랑의 표현조차 빠뜨리고 만 연인을 놀리듯이 - 이렇게 답장했다.
그냥 간단히 ‘네‘만 하라고요? 그 짧은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중요하다니! 당신 마음은 내 마음처럼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는 게 아니었나 보죠?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온 영혼을 담아 그 ‘네‘ 라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내 가장 깊은 마음을 다해 당신께 그 ‘네‘라는 말을 속삭일 게요. 영원히요!
슈만은 뤼케르트Friedrich Rückert, 1788~1866의 시구를 빌려, 클라라를 "나보다 더 나은 나mein befres Ich"라고 부른다. 이처럼 사랑은 ‘나‘와 ‘너 사이의 구분을 잊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너‘는 ‘나‘를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서로의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서로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한다. 슈만과 클라라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만남‘의 자리를 기념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따로 흘러가던 두 가닥의 시간이 겹쳐지는 순간, 역사가 달라지고 운명이 뒤바뀐다. 내가 기억해야 할 만남의 자리는 어디인! 가 -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꼭 숙고해야 ! 할 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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