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문이 많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그만큼 혼란스럽다는 반증이다. 윤리적 가치의 혼란은 필연적으로 강제성을 띤 제도적 가치를 부르기 마련이다. 역사 속에서충신이 많이 등장했던 시대는 그만큼 더 좋은 사회라는 의미가아니라,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었던 시대라는 반증이다. 장자나노자가 참된 인간형으로 내세우는 ‘진정한 도를 닦는 자‘는, 나날이 외면의 허식을 덜어내어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려 한다.

"지극한 ‘예‘는 자기 자신을 남과 구별하지 않고, 지극한 ‘의‘는자기 자신을 사물과 구별하지 않으며, 지극한 ‘지‘는 책모를일삼지 않고, 지극한 ‘인‘은 친함과 친하지 아니함의 구별이없으며, 지극한 ‘신‘은 금과 옥을 내버린다."
「경상초」

니체는 보편적인 절대가치를 만드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별다른 유감이 없었다. 왜냐하면, 개인이 보편적인 절대가치를만들어내는 행위도 세상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이 자신의 해석에 불과한 인식 내용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면,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고 봤다. 이것은 어떤일에만 적합한 하나의 도구가 다른 모든 일에도 사용될 수 있다.
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이 담긴 객관적 주시는 의지와 힘이 부족하다는 징후일 수있다."
「유고(1887년 가을 ~ 1888년 3월)

진짜 뛰어난 사람은 자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굳이 남에게 설명하지 않는 법이다. 니체의 관점을 쫓아가 보면, 의지와 힘이 부족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어떤 객관적인 사태에서 찾는다. 직업 군인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스파이가 되고, 소설가의 꿈에 실패한 사람이 소설평론가가 되며, 영화감독이 되려다 좌절한 사람이 영화 평론가가 된다는 냉소적인 말이 있다. 니체는 기존에 통용되던 모든 가치관을 ‘망치‘로 깡그리 부숴버린 뒤에야 사람들이무엇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식과 지혜는 다툼의 도구가 된다"라는 장자의 시각도 보편적인 지식과 가치의 맹점을 지적한다. 보편적인 지식들은
서로 양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저마다 절대성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자에 의하면, 모든 이론은 그 이론을 편 사람의 관점‘ 이 중요하다. 서로의 처지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사적 이해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세운다. 하지만 전체 세계를 모두 조망하지도 못하면서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보편적 이념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폭력이다.
일체의 보편적 이념은 의심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 가치를 하나이상으로 마음속에 지니되, 실질적으로는 여러 이론을 받아들이는 폭넓은 자세를 취해야 한다. 또 때와 장소에 따라 내가 받아들인 가치를 효율적으로 실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장자의 아름다운 서시와 추녀에 대한 비유는 내려오는 전통과 그것을 단지 답습하기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이다. 장자는 그저 답습하기 급급한 전통가치들을 아주 세련된 비유로비판했다. 하나의 전통이 현실을 새롭게 탈바꿈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굳은살처럼 인습화 되면, 이추녀처럼 많은 사람을 괴롭힐 수 있다. 부자는 문을 닫아 버리는 것으로 추녀를 피할 수 있었지만 가난한 자들의 집은 닫을문조차 없이 허름하므로 추녀를 피해 아예 마을을 떠나버린다.
전통이 잘못 기능하면 대개 사회 지도층들보다는 일반 서민들이 더 피해를 입는다.

Nietzsche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만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묻지 말고 그저 걸어라.
사람은 그 길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법이다.
『반시대적 고찰』

장자
비록 형벌로 한쪽 발이 잘렸지만 인품으로 유명한 ‘왕태‘라는자가 있었다. 공자의 제자가 그에 대해 물었다.
"왕태는 외발이인데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고, 그는아무것도 가르치는 게 없는데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마음이가득 채워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그에게 모여드는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정지된 물을 거울 삼아 자기를 들여다본다. 멈추길원하는 자가 있다면 오직 잔잔한 물만이 그를 멈추게 할 수있다."
「덕충부」

백이伯夷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수양산 밑에서 죽었고,
도척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동릉산 위에서 죽었다. 이두 사람이 죽은 장소는 달랐지만, 생명을 해치고 자연 그대로의본성을 훼손한 점에서는 똑같다. 어찌 반드시 백이가 옳고도척이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변무」

Nietzsche

가장 현명한 인간은 누구인가. 모순을 가장 풍부히 갖는 자.
모든 종류에 대해 촉각기관을 갖는 자다. 그리고 때때로 장엄한화음을 이루는 위대한 순간을 경험하는 자다.
『유고(1884년 여름~가을)

莊子

성인은 자연스럽게 도에 맞추어 행위 할 뿐, 일부러 도를도모하지는 않는다. 인에 합치되어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의義에 머물러도 그것을 쌓지 않는다. 예禮에 따르지만, 그것에구애되지는 않고 세상일에 접해도 그것을 일부러 사양하지는않는다. 성인은 사물의 성질에 따라 자신을 맞춘다. 사물이란것은 도의 측면에서 볼 때 실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는하지만, 어떻든 현실에서는 나에게 영향을 주기에 불가불 실천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재유」

장자의 중도는 단지 어떤 것과 어떤 것 간의 평균치가 아니다. 예를 들어 흐르는 냇물 양쪽에 둑이 있다고 가정하자. 여기에서 냇물은 중간 지평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냇물의 흐름은엄청나게 빨라 양쪽 둑을 무너뜨리면서 흐른다. 이것은 상반된양쪽의 가치가 이 중간 지평에서 모두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장자 사상에서 중도의 세계란 그 안에 최대한의 가치들이 포함되어 있어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이른바
‘아르키메데스의 점’(아르키메데스가 충분히 긴 지렛대와 그것이 놓일 장소만 주어진다면 지구도 들어올릴 수 있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과 같은지층이다.

우리가 단편적인 가치들에 매몰돼 그것에 의해서만 모든현상을 해석하려는 도그마에 빠질 때, 우리의 외부환경에 대한대응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곧 중독의 위험성이기도 하다. 악함이란 단지 도덕적인 결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중독을 뜻한다. 도덕적 선함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 또한 오히려 악함이 될 수가 있다. 무엇에 빠지는 것, 즉 중독이란 그것이 알코올 중독이든 이상주의중독이든 모두 나쁜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중도란 그 자체가 진리로 표방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무용함과 유용함은 상황에 따른 판단을 요구한다.
위 이야기에서 장자가 제자와 먹은 거위는 울지 못하는 거위였기 때문에 요리 재료로 쓰였다. 이 거위는 자연의 본성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본성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이다.
자연의 본성이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정해진 보편적인 규칙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자연스러운 성정을 의미한다. 개가 짖는 것이 개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성정이듯 거위또한 우는 것이 자연적 성정에 가깝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있고자 하는 방식대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가우리에게 들려주는 삶의 지혜이다.

Nietzsche

위대함이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강물도 스스로커지거나 풍부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를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크고 풍부하게만든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장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면서 타인을 그의견에 따르게끔 하는데 마음을 쓰면서, 그 모든 것이 자연그대로 하나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것을 조삼朝三이라고한다.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나누어주면서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마."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낸다. 이번에는 원숭이를기르는 사람이 "그렇다면 아침에는 네 개, 저녁에는 세 개를주마."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한다. 이처럼이름과 실질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이작용한다. 이는 목전의 이익에 마음을 뺏겨 시비의 가치판단을하므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聖人은 시비의 대립을조화시켜, 천균天判, 자연의 균형, 만물제동의 원리에서 쉰다. 이를양행兩行이라고 한다.
「제물론」

니체와 장자에게 ‘규정되지 않은 본능’과 ‘규정을 기준 삼아 내리는 판단’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한 개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규정으로 내린 판단은 편견으로 이어지기 쉽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지니게 한다. 이런 편견들은 무의식적으로 끌어 올린규정되지 않은 본능으로 해체시켜야 한다. 편견이 무너진 자리에는, 새로운 현실을 반영해 다시 만든 ‘새로운 규정적 판단‘
이 자리한다. 이런 순환 관계는 계속 진행된다. 이것은 안정과불안정 사이의 교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교체가 역동적으로 이루어질수록 다양한 가치를 내면에 품을 수 있는 심리적 영역(니체의 아포리즘에서 말한 ‘강물)이 그만큼 넓어진다.
‘분열과 정복‘은 현대 사회의 좌우명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자신을 만물과 분리해 인식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이런
‘현상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과 자연의관계, 개인에 내재된 힘의 진실을 인식하면 희망은 있다. 니체와 장자의 아포리즘은 계속 그 희망을 말한다. 모든 가치를 끌어안을 수 있는, 폭넓은 내면 세계가 지닌 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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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은 무거운 짐을 상징합니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내게 지워진 짐을 내려놓으려 애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짐을 찾아 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가 지고 있는 무게야말로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비밀이라는것을 느끼게 합니다. 자유 역시 그 무게가 있는 곳에서 숨 쉴수 있다는 역설을 엿보게도 합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중력이라는 상징 안에서 우리는 사랑의 짐과 무게와 책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성인이란 결국 사랑의 무게를 열정과 자유로써 기쁘게 지고 간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두려움 없이 선택한 ‘사랑의 중력‘은때로는 순교에 이를 때까지 숱한 고난과 역경으로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린(2디모 4.7)’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은총을 통한 하강의 법칙이란 사랑의 질서 안에 자신을 온전히 던짐으로써 낮아지는 삶‘을 뜻한다고 알게 됩니다. 이러한 전적인 투신 속에서 육신의 조건을 상징하던 중력은 은총속에 변용되어, 사랑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에 따른 움직임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그 아름다운 경구의 참뜻을 만나게 됩니다.
Amor Meus Pondus Meum.

스스로를 낮추기, 그것은 정신의 중력에 있어서는 올라가기이다. 정신의 중력은 우리를 높은 쪽으로 떨어지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중력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유의 명상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에서 배우듯, 은총과 함께 상승하여 탈속하려는 갈망과 중력에 몸을 맡겨 나의 욕망과 함께 하강하려는 두 가지 상반되는 운동을 넘어서서, 사랑의 중력과 함께 자신을 비우고 하강하는 삶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은총은 일상 안에서 우리가 도피가 아닌 진정한 초월의 길에 이르도록 인도합니다. 삶의 중력을 사랑의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타인의 짐을 기꺼이 함께 지는 여정을걸어보도록 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더듬어 간다는 것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대로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감지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묻게 될 때도있습니다. 내게 ‘얼굴을 쓰다듬을 손‘이 없다는 것은이제 더 확인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문득,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미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들이, 내 손이 어루만질 얼굴들이 나의 인생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상한 체험도 아니고떠들썩하게 소문내거나 정색을 하고 심각하게 만들사건들도 아닙니다. 그냥 눈이 하늘에서 조용히 내려오듯, 어린아이처럼 눈밭에서 장난을 하듯, 인생의 가장 작은 모서리에서부터 회의와 체념이 희망에 물들어가고 생기로 치유되는 순간입니다. 그런순간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 기억과 함께 ‘지금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독자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신비로운 손에, 독자분들의 손이어루만지는 신비스러운 얼굴에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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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
최대환 지음 / 파람북 / 201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비참- 우리의 비참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것은 오락이다.
한데, 그것은 우리의 비참 중에서 가장 큰 비참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 자신을 서서히 잃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락이 없으면 권태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이 권태는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더 강력한 방법을 찾도록 부추길 것이다. 그런데 오락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죽음에 이르게 한다. (팡세)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만 좋은 약이 됩니다. 우리에게 인생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참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작별의 자리에서 소크라테스가 가르쳐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되게 철학을 수행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이자, 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삶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죽음의 의미를 통찰하는 씨앗 안에서 자란다는 것을 고대 철학의 현인들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스승들이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말기 이래 근대와 현대까지 많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영적 동반자가 되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의 『준주성범』에서도다음과 같이 ‘죽음의 연습‘을 통해 영적 회심과 성장에 이르라는 권고를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의 너의 삶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네가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살펴보라. 우리는 오늘 살아 있으나 내일 죽으며, 곧 잊힌다. 오! 사람의 마음은 어찌 그리아둔하고 완고한가! 지금 순간만 생각하고 장래 일은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 모든 행동과 생각을 함에 있어 바로 오늘 죽을 것처럼 하고 있어라."
- 23장 죽음에 대한 성찰 중 3항

하지만 우리는 『준주성범』에서 삶의 무상함과 죽음 후에 올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진지함으로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참 기쁨을느끼라는 권면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의 때에 찾고자 하는 삶의 모습대로 지금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며 슬기로운가!"
- 23장 죽음에 대한 성찰 중 4항-

지금 주어진 삶을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과 함께,
삶의 마지막에도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이 살아내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의 긍정은 죽음을 생각하고 연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에서 자라나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저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무기력과 탈진의 시대라 일컫습니다. 이런 시대에 각 개인에게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을 바꿀 거창한 계기를 헛되이 기다리거나 자괴감만 남길 자극적 쾌락에 탐닉하는 대신 자신의 일상을 감사와 경이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더나아가 그런 눈을 가진 이들만이 평범한 일상이 품은 ‘빛나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소개하는 한 우화가 이러한 삶의태도를 잘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한 지혜로운 스승이 자신의 두 제자를 하산시켜 세상으로 보내며, 만일 ‘세상의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인생은 복될 것이라 이릅니다. 하산 후 서로 다른 길을 가다.
가 한참이 지나 두 제자가 다시 만났을 때, 한 제자는 세상의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겪으며 결국은 모든 것이 빛난다는사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씁쓸해합니다. 여기에 다른 제자가 행복으로 빛나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든 것이 빛나는 것은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이존재하는 것이지."

구약성서 중 지혜문학에 속하는 집회서를 보면 후대인의 시각에서 다윗의 생애를 평가하고 그의 삶을 신앙의 관점에서묵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집회 47). 그중에 아름답고 감명 깊은 구절이 있는데, 다윗은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집회 47, 8)‘라는 대목입니다. 이 한 구절에 다윗이 겪은 수많은 비극과 고통 그리고 스스로 범한 큰 죄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훌륭한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는 것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여받은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지요.
죄를 고백하고 수치심에 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모든 처분을 맡기는 가난한 모습을 보인 것은 참으로 온전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느님 앞에 가난해질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자비를 신뢰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윗이 삶의 여정에서겪은 수많은 인생의 사건을 관통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사르트르의 이 명제는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단순한 명제로, ‘인간은 역사와 삶 속에 존재하며, 상상하고 변화할 자유가 있다‘라는 뜻이다. (…) 본질중심의 사고는 실패의 미덕과 모순된다. 만약 실패로 우리가 변화한다면, 실패를 통해 우리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실패 자체로 우리가 누구인지 결정된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실패를 인정하면 앞으로 펼쳐질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볼 수 있다.
페팽에 의하면 실존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삶을 가능성으로이해하는 것이며, 한 방향으로만 성공하려 애쓰거나 그 성공을 보존하며 일체의 실패를 허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대신, 실패를 가능성의 장이 열리는 사건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실패는 더 풍부한 실존적 삶의 조건이 되겠지요.

위대한 재즈 음악가 마일스 데이비스의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인용합니다.
한 음이 연주되었을 때 그 음이 정확한 음인지 틀린 음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 다음 음이 연주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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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자신만의 ‘힘에의 의지‘에 충실하면서 결코 특정 이념이나 타자의 일방적인 억압 에 끌려 들어가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는 개성이 부족한 집단 주의에 대항하면서 ‘거리를 두는 파토스Pathos der Distanz’라는 개념 장치를 제시했다. 거리를 두는 파토스’란 쉽게 이야기해서시시한 유행이나 좇는 집단과 대중에게서 멀리 떨어져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하라는 의미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간격, 유형의다수성,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자하는 의지, 내가 ‘거리를 두는 파토스‘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강한 시대의 특징이다. 오늘날에는 극단적인 것들 사이의 긴장과간격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극단적인 것 자체가 희미해져결국은 유사하게 되어버린다. (우상의 황혼)

니체에 의하면, ‘좋음’ 이란 누군가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야만 한다. 이런 사람을 니체는 고귀한 인간이라 불렀다

저것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이것이라고 하는 데서 생긴 것이고,
이것이라고 하는 것도 저것이라고 하는 나와 대립해서 생긴것이다. 즉 저것과 이것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나란히 아울러생긴 것이다. 보는 방식을 바꾸어 보면, 생生’과 아울러 사死’있다. 가능함과 아울러 ‘불가능함‘이 있다. 옳음‘에 의해그름이 존재하며, 그름에 의해 ‘옳음이 존재한다.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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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장례미사 때 읽었던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기도시 이끄소서, 온유한 빛Lead kindly light」의 첫 구절을 오늘 밤에는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끄소서, 온유한 빛이여, 온 데가 어둠 속이오니 / 그대나를 인도하소서. 밤은 어둡고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졌으니, / 나를 인도하소서. / 내 발을 지켜주소서. 먼 경치를 보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오니 / 한 발치면 족하나이다.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의 『팡세』에 나오느 ‘숨은 신Deus Absconditus‘의 개념을 떠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파스칼은 구원과 은총이 우리의 삶 안에 실재하지만 누구에게나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숨은 신‘이라는역설적 방식으로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때문이라고설명합니다. 파스칼은 ‘믿고자 하는 이는 이에 충분한 빛을볼 것이며, 믿지 않으려는 이 역시 그에 충분한 어둠을 보게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빛을 보는가 어둠을 보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파스칼의통찰 속에 현상학, 곧 나타남‘을 보여지는 대로 바라보는 인식과 실존의 방식이 담겨 있음을 발견합니다.

나의 손은 / 몸 가눌 곳으로 향하고 그리고 발견한다네.. /
그리고 발견한다네. / 오직 장미 한 송이가 지지대인 것을
(힐데 도민)

소망을 기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이 단련되고 굳건해져서 흔들리지 않는 희망이 될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우리가 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의 덕은 하느님의선물입니다. 교회가 희망을 사랑과 믿음과 함께 ‘신학의 덕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희망을 담을 만할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조형‘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재난의 시대에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닌 진정한희망을 믿는 개인들이 함께 희망을 조형해가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구원의 희망은 ‘그럼에도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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