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나는 키치의 세계에서 비키치의 세계로 갔다가 다시 키치의 세계로 돌아와 결국 그 세계에서 마감하죠. 사비나는 조금왔다갔다합니다. 키치는 여러가지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이런 것이죠. 만약 캄캄한 밤 11시경 차를 타고 시골 어디쯤을 지난다고 합시다. 저 너머 노란 불이 켜진 작은 농가가 보여요. 가까이 지나면서 보니 엄마와 아이가 함께 책상에 앉아 있어요. 차 안에 있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엄마와 함께 공부하고 있구나, 아! 따뜻한 가정의 모습하지만 차가 지나가자마자 회초리가 등장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사람들은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보는 거예요. 그런 것이 키치예요. 보이는것,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협한 시선...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요.
그 여자 자체가 아니라 그 여자가 지닌 여성성을 좋아하는 것이고, 전체가 아니라 부분을 좋아하는 태도가 바로 키치라는 걸 또 보여주고 있고요.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사비나의 아파트 앞에서, 당연히 일어나야해던 일이 이제 일어났음에도 프란츠는 속수무책이죠. 아내에게 모든것을 주고 집을 나온 프란츠는 아내와 딸이 없는 시간에 몰래 집에 가서자신의 물건들을 챙겨 오래된 도시의 작은 아파트로 갑니다. 그리고 새거처에서 새 테이블을 배달받은 순간, 처음으로 자신이 고른 가구 앞에서 비로소 독립적 인간이 됐음을 깨닫습니다. 그 순간, 그는 불현듯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사비나의 육체적 존재가 그가 믿었던 것보다는 훨씬 덜 중요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흔적이었다. (…) 그의 자유와 새로운 삶이 부여한 이 예기치 못한 행복, 이 편안함, 이 희열,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남겨준 선물이었다.
보이는 거짓과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은 이 책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니‘키치‘라는 단어와 맞물려 있어요. 모든 이데올로기는 ‘주장‘을 위해집을 필요로 합니다. 키치적이에요. 그래야 사람들을 모을 수 있으니까요. 모든 투쟁, 슬로건 또한 키치적이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정치 선동자들의 특징은 그래야만 한다‘를 흔들림 없이 믿고 있다는 거예요. 흔들리는 사람은 선동가가 될 수 없어요. 내가 지금 이 일을 해야만 우리 민족의 장래가 밝아진다는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되죠. 그래서 저는 키치는편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잘라서 편집하는 게 바로 키치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광고는아주 키치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의 삶 또한 편집이에요. 편집이 없을 수 없죠.
모든 걸 포기했지만 그 순간 아주 행복 해요. 그런데 이상한 행복감이에요. 내 품에 있었으면 좋겠다며 작아지길 원했던 남자가 진짜 그렇게 돼서 함께 춤추고 있는데, 작아진 그 남자의 모습이 슬퍼요. 슬픔이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것이고, 행복이란 그들이 함께 있다는 걸 의미하죠. 그래서 시골에서 늙어가고 있는 슬픈 인생의 형식 속에 둘이 함께 춤추고 있다는 행복이 공간을 채운 거죠. 슬픔이 형식이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는 테레사와 토마스의 사랑에 대한 이 마지막 구절은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넘어선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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