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우리 안에서 조용히 작용한다. 너무 조용해서 듣지 못하고 지나치기 쉽다. 단순한 삶을 선택한 사람은 주변에서 그리고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삶의 조용한 작용에 계속 귀 기울인다.
이 책에서 살펴볼 많은 사례에서 단순한 삶이란 바쁜 생활의 소음을 잠재우고 생명이 발산하는 나직한 음성을 듣는 일이다. 한때 모든 생명체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조용한 작용은 전체로 경험되는 세계, 말 그대로 ‘단순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차이를지운다. ‘단순함simplicity‘ 이라는 단어는 원래 라틴어 ‘심플렉스simplex‘에서 유래되어 프랑스어 ‘심플리시테simplicité‘를 거쳐 생겨났다. 어원은 인도 유럽 고어인 sem 하나과 plek다이 합쳐진 것으로 한 겹 또는 ‘전체‘를 말한다. 우리 내부와 주변에서 들리는삶의 나직한 음성은 개념적 범주로 분리된 모든 것을 통합시킨다. ‘살아 있음은 삶의 양식으로서 단순함을 실천할 때 경험되고 활력을 얻는 조용한 에너지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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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생명과 해방을 주시는 성령의 법에따라‘로마 8,2 그리스도 안에서 걷고 뿌리내리고 자신을 굳건히세우려‘콜로 2,6-7 한다면, "빛 속에서" 1요한 1,7 그리고 "사랑 안에서 에페 5,2 새로운 삶의 길을 걷고로마 6,4 싶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중심에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무엇을 버려야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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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윤태호 작가는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나를 좋아해도 되는것일까? 우리에겐 마음도 있고 심장도 있습니다. 그 질문을던질 때 그것들이 다 움직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모습으로 태어난 것, 그 이유를 찾는 데 우리는 늘 결정적으로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지금 우리 자신의 삶에 우리가 아주 약간의 원인 제공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는 사실상 타인에의해 결정되는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힘센 타인이 나를 마음대로 하는 한도 안에서만 우리는 유연할 수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는 매일매일 묶여서 반복적인 일을 하는 시지프스이면서 동시에 반항하는 인간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원인과 결과를 착각합니다.
내가 원래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행동을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세계는 …… 우리가 자신을 알기 위하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는 거울이다. 요컨대 나는 세계가 나의 교과서가 되기를 바란다.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박홍규.

내가 당신 마음에 들고 당신에게 중요해진 건 내가 당신에겐 일종의 거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내 내면에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상대를 위한 거울이어서 서로 답을 주고받고 서로조응하는 거지요. 그러나 당신 같은 기인들은 괴팍하고 쉽게 마술에 걸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볼수 없고 읽어낼 수도 없고 세상 어느 것 하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요. 그런 기인이 느닷없이 그를 정말로 응시하는 얼굴을, 그에게 어떤 대답을 줄 것 같고 어떤 친밀함을 풍기는 그런 얼굴을 발견했을 때 기쁨을 느끼는 건 당연합니다.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거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얼굴에서 우리는 ‘최고의 나‘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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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줌’ 이 말에서는 ‘있음‘과 ‘줌‘, 다시 말해 ‘존재‘와 ‘선물‘이.
일치한다. 독일어에서는 ‘무엇이 있다‘는 말을 ‘Es gibt ~‘라고 한다. 여기서 ‘gibt‘라는 동사는 ‘주다‘는 뜻의 ‘geben‘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있음‘이 곧 춤‘이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을 고상한 미사여구 정도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힘들고 힘든 시절, 바로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젠 지쳤다‘며 운명의 줄을 놓아버리고 있다. 신문을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뭔가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그래서 떠올린 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가진 원초적 선물이 필요하다. 곁에 있어주자. 나를 너에게 선물하자.

누구보다 초조함에 시달렸고 그것의 문제를 잘 알았던 작가 카프카. 그는 초조함이야말로 인간의 죄악이라고 했다. 그는 〈죄, 고통, 희망 그리고 진실한 길에 관한 성찰)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죄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아마도 그의 문학은 이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치열한 노력이 또한 철학이고, 철학이어야 한다.
고 생각한다. 철학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쉽게 부딪히는 난관이 두 가지있습니다. 그 하나는 갈림길, 즉 기로에 서는 겁니다. 갈림길 앞에서 묵적(묵자) 선생은 슬피 울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면결코 울며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우선 갈림길 입구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잠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내가 갈 길을 정하여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 자비로운 이를 만나면 그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지언정 결코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역시 앞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호랑이를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호랑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호랑이가 꼼짝 않고 서서 가지 않으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나무에 허

어떻든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괴롭다면 일단 한숨 자고 생각해보라는 것, 길을 걷다 배고파 죽을 지경이면 음식을 빼앗아서라도 살아남으라는 것, 호랑이를 만나 죽게 생겼으면나무 위로 피하고, 결국에 죽을 것이면 시체라도 넘기지 말 것, 별수 없이 호랑이에게 먹힌다면 그래도 한 번쯤은 호랑이를 물어보라는 것, 그야말로 모두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말들이다.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막다른 길‘이란 그것을 앞에 두고 울며 돌아가는 사람에게만 막다른 것일 뿐 그것을 헤쳐 나가는사람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루쉰 스스로는 ‘운이 좋아‘ 그런 막다른길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막다른 길을 만나지 않은 것은 그가 어떤 길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막다른 곳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존재들은 서로 비교를 불허하는 독특함을 가졌고, 다른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덕을 지녔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의 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고유한 ‘힘‘을 이해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 자체에서 수반될 수 있는 ‘약점‘이나 ‘곤경‘을 아무런 ‘악의‘ 없이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결국, 하나의 공동체란 사람과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이런 이야기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매킨타이어.. Macityre 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서사의 일부 요소일 뿐인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좋은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내고 남기는것은 모두 이런 이야기들이다. 장담하는 건 좀 그렇지만, 수유너머‘에 있는 물건들 중 내가 잘 모르는 물건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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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중간적 존재입니다. 삶과 죽음의 중간적 존재. 이룬것과 이루지 못한 것의, 현실과 꿈의, 어둠과 빛의, 기쁨과 슬픔의, 출발점과 목적지의, 어제와 내일의 중간적 존재입니다.
까뮈의 문장이 있습니다. 까뮈는 "나는 비참하였다. 그러나그렇게 비참하진 않았다. 나에게는 태양이 있었다."라고 말했지요. 비참과 태양 사이에서 그는 태양 쪽으로 걷고 싶어 했습니다. 태양이 있는 쪽으로, 빛 쪽으로, 또다시 빛 쪽으로 결코눈을 떼지 않고 그러나 환상은 없이. 그렇게 걸음을 걷는 것이우리의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중간적 존재인 우리에게 그 중간 지대에서 셀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그게 별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든 위로받고 싶어 하는 거, 그게 아주 독입니다. 그건 끔찍하고 비겁한 일입니다.
저는 그때 3년 어디 가서 조용히 지내야 했던 겁니다.

이젠 주장하지 않고 듣고 싶어졌습니다. 누가 "난 쭉쭉빵빵이 좋아." 그러면 예전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이젠 묻습니다. "왜 좋아? 언제부터 그랬어? 촉감 때문이야? 아니면 야동을 많이 봐서 그러니?"
듣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싫어요."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당신을 더 잘 알게 되나요?"란 질문이 가능함을. 그리고 그 질문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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