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우리는 추석에 시댁에 가려면 최소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비행기표 예매 때문에. 이번엔 아버님 돌아가시고 정신없던 남편이 추석 3주 전에야 예매했다. 토요일에 갔다가 추석 다음 날 오면 딱인데 원주에서 한 번밖에 없는 비행기가 우리가 원하는 날은 예매가 끝난 상태~ 어쩔 수 없이 금요일에 가서 추석날 올라오기로.
9일 금요일 - 아이들 조퇴시켜서 원주공항으로 가니 비행기 한 시간 연착. 그럴 줄 알았으면 조퇴나 하지 말걸~ 대한항공이 한 번 다녀주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하니 김포에서 출발하는 저가 항공을 부러워할 수는 없지만 박봉인 우리에겐 징하게 비싼 요금이다. 네 식구 왕복 교통비만 80만원이 넘으니... 여기에 제사 비용과 어머니를 위해 산 티셔츠 두 벌 값까지 하면 우리 명절 비용은 130만원이 기본. 혹시 젊은 처자분 제주 남자 만나려거든 돈 잘 버는지 꼭 알아보시길...
제주에서. 제주공항에서 택시 타고 15분 만에 시댁 도착하니 어머니께선 둘째아들네 먹이겠다고 제주 흑돼지 오겹살을 삶으며 법석이셨다. 일찍 저녁을 먹은 후 아들과 우리 부부는 택견학당에 가서 사부님께 한 달 동안 우리 아들 사람 만들어 보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 말씀 올리고 무릎 꿇고 앉아 좋은 부모 되기 강좌를 한 시간 동안 들었다. 집에 올 때 사부님께서 직접 땄다는(?) 100% 토종 꿀도 한 병 얻어 왔다. 무릎 꿇고 앉아 있었던 보람이 있었다.ㅎㅎ
집에 온 남편은 동창회가 있다며 나가고 TV 앞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았다. 다시보기를 통해 보고 있던 드라마는 시크릿 가든. 본방할 때 자자한 명성은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1회, 2회 보는데 재미가 쏠쏠해서 도저히 끊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 깊은 관계로 4회까지 보고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잠을 청했다. 현빈의 얼굴을 그날 처음 알았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를 하면서...
10일 토요일 아침 설거지를 끝내니 형님은 거문고 배우러 나가고, 아주버님은 당직 근무라며 나가셨다. 집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TV 앞에 앉아 비밀스런 정원으로 빨려들어갔다. 6회까지 본 후 아버님을 뵈러 추모 공원에 다녀왔다. 오는 길에 비 오는 날엔 따끈한 국물이 최고라며 칼국수를 먹고 장을 보러 갔다. 장 본 거 정리하고 내가 가져간 꽃게로 인터넷 뒤져가며 간장게장을 담갔다.
횡재. 그 사이 남편은 남자 아이들 셋을 데리고 축구 관람하러 갔다가 접이식 자전거를 경품으로 타오는 쾌거를 이루었다. 저녁 먹기 전에 남편이랑 고모님댁에 인사를 하러 다녀왔다. 형님은 9시가 넘어 들어왔고, 동창회가 있다던 아주버님은 12시 무렵 들어와 이젠 늙어서 2차 가자는 놈도 없더란다.
11일 일요일 아침부터 명절 준비에 바쁜 어머님을 뒤로 하고 철없는 두 며느리는 TV 앞에 앉아 현빈의 싸가지 없는 매력에 홀딱 빠져 있었다. 송편을 만들고, 전을 부치면서도 TV 앞을 못 떠나자 참다참다 어머님 한 말씀 하셨다. "야들아, 전 타는 건 괜찮은데 너희들 손 델까 봐 걱정이다." 그래도 두 며느리는 꿋꿋하게 앉아 김주원과 길라임의 영혼이 원래대로 돌아오길 기원했다. 전을 다 부치고도 TV 앞을 못 떠나는 마누라들을 위해 아주버님과 남편은 집 안팎 대청소를 했다. 현빈이 죽일놈이라면서~ 밤 11시가 넘자 어머니께서 낼 아침엔 모두 6시에 기상하라는 말씀과 함께 소등 명령을 내리셨다. 어쩔 수 없이 TV 도 off.
12일 월요일 추석, 방에서 자다가 덤벼드는 모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거실로 나와 뒹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나오더니 주방의 불을 켰다. 살짝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다시 들어가시겠지 했는데 채도 썰고 다지기도 하고 6시까지 열심히 지지고 볶았다. 미리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6시에 일어나라는 어머니 말씀을 지키고자 세 시간 동안 꿋꿋하게 요리하는 소리 다 듣고는 6시 알람이 울림과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며느리들이 할 일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차례 지내기. 제주에서는 친척들간에 차례를 지내는 순서가 있다. 10촌 정도의 집안 남자들이 모여 다니면서 차례를 지내는데 우리 시댁은 점심 때. 하지만 우리가 1시 10분 비행기를 타야 해서 8시에 지냈다. 줄줄이 오는 손님들께 인사를 하고, 차례를 지내고 식사를 위해 교자상 네 개를 폈으니 대충 몇 분이 오셨나 계산이 된다. 아참, 먼 친적들이 모이기 전에 6촌까지 모여서 7시 30분에 아버님 제사를 따로 지냈다. 대형 카스테라, 보리빵, 귤주스... 음, 제주 며느리 된 지 15년차건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특이한 제사 음식.
원주로. 차례를 지내고 설거지를 끝낸 후 며느리들도 시댁에서 가까운 5촌 당숙집으로 차례를 지내러 갔지만 우리 네 식구는 비행기 시간을 핑계로 몇 집 더 돌아야 되는 돌림 차례에서 빠져나왔다. 어머니께서 바리바리 싸놓은 명절 음식을 들고는 비행기를 타고 원주 집에 오니 2시 40분. 늦은 점심상을 TV 앞에 차린 이유는 제주에서 18회까지밖에 못 본 시크릿 가든 때문이었으니~~~ 그리하야 3박 4일 동안 시크릿 가든 완결!
13일 화요일. 몸이 더이상 누워 있지 못하겠다고 발버둥칠 때까지 온 가족이 누워 있었다. 시댁에 가서 며느리로서 내세울 만큼 한 일도 없는데 몸은 왜 피곤한지 모르겠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