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대학 선배 부부가 다녀갔다. 20년 만에 만난 선배님이시다. 한 학번 위 85학번인 그 선배는 학교 졸업 후 작년까지는 단 한 번도 기억 속에 떠올려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 선배와의 인연이 이어진 건 작년 어느 날 알라딘을 통해 날아온 메일 한 통 때문이었다.
서평을 쓰다 보면 가끔은 책을 편집한 사람들로부터 감사 메일을 받곤 했는데, 메일을 보낸 사람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이름이 특이해서 한 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그런 이름이었기에, 혹시나 싶어 학교와 학번을 확인하는 문자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그 선배가 맞았다. 하지만 그 선배에게 나는 기억나지 않는 후배였다. 나는 그 선배가 이름을 읊어대던 누구 누구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아이였으니까.
학교 다닐 적 그에 대한 기억은 시를 쓰는, 무서운 선배였다는 것뿐. 신입생 환영회하는 자리에 나타나 군기 확실하게 잡더니 학교 다니는 동안 내내 후배들 갈구는 역을 도맡아 했다. 이런 선배는 어디나 있더라만. 그러니 그 선배 그림자만 보여도 멀리 돌아서 다니곤 했다. 눈에 띄면 불러세워놓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데모하러 가자, 술 먹으러 가자 그러고, 그때는 그게 참 싫었다.
학교 졸업하고 그런 선배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었더랬는데, 메일을 받은 이후 가끔 전화가 왔다. 존대말도 낮춤말도 아닌 어정쩡한 말로 나누는 간단한 대화였다. "신간 나왔는데 서평 좀 써 주쇼." 뭐 그런... 그리고 말끝에 빠뜨리지 않고 하는 말이 있었다. 완도에 오고 싶다고.
그 선배는 오랫동안 다니던 출판사를 나와 지난 봄에 출판사를 차렸다. 처음 그 소식을 전해 왔을 때 이 어려운 시기에 출판사를 차리면 힘들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책을 고르는 안목이 남달라서인지 다행히 내는 책마다 반응이 좋다고 싱글벙글이다. 알라딘에서 내가 부탁한 몇 분이 신간 서평을 써주시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늘 고마워하신다.
그 선배가 지난 토요일 아침 진짜로 완도에 왔다. 선배를 집으로 부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남편도 해외 출장을 가는 바람에 내려오지 않았고, 학교 다닐 때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했던 사람인고로... 그런데 완도라는 전화 통화 끝에 "현대아파트지, 지금 갈게." 그래서 20년 만에 집에서 대면하게 된 선배다. 아침 시간이라 청소는 물론 안 했고, 나도 세수만 간단히 한 어수선한 꼴로.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배의 태도가 자주 만나던 사람 같았다. 전화 통화할 때는 어정쩡했던 대화도 편한 대로, "아들 녀석은 왜 안 보여?" 이런 식이었다. 속으로 살짝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한마디에 긴장이 풀어진 나도 바로 아줌마 근성이 나왔다. "선배님, 못 생긴 건 여전한데 살이 좀 찌셨네요. ㅋㅋㅋ " 이게 내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던 선배와의 첫 대화였다.
아침을 먹었을 리 없는 선배 부부를 위해 콩나물국을 끓이고 달걀찜을 해서 부랴부랴 아침상을 차렸다. 반찬도 없는 밥을 부부가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선배는 여직껏 독신으로 살다가 작년에야 부인을 만나 지금 같이 출판사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사모님이라고 불렀더니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리다며 오히려 날 언니라고 불렀다.
하루 동안 완도 구경도 시켜주고 같이 밥도 먹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그 선배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20년 동안 변했을 수도 있지만 그 선배는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학교 다닐 적 후배를 불러세우고 까칠하게 굴었던 것도 다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이번에 만나지 않았다면 학교 다닐 적 모습 그대로 그 선배를 기억했을 텐데... 소중한 만남, 알라딘 덕에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