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 써니네 집에서 - 자이언 국립공원 1
남편의 마라톤 참가와 기부금 300달러 - 자이언 국립공원 2
남편이 마라톤을 마치고 자이언 탐방에 나섰다. 마라톤을 마치고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텐데 직접 근무했던 곳이라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아서 마냥 신나 있었다. 이렇게 노는 일에 열정적인 남편 덕분에 우리 가족이 미국까지 가게 된 것이지 싶다.
전날 라스베가스에서 자이언으로 오는 길은 내내 황무지였다. 도로 주변엔 누런 빛깔밖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서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런 길이 이어질 때는 남편이랑 자꾸 투닥거리곤 했는데 스프링데일 근처에서 버진 강(Vergin River) 줄기를 따라 자라난 초록빛 식물들을 보자 어느새 말다툼도 끝나버렸을 정도로 식생이 달랐다.
자이언(Zion)이란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시온을 말하는데 1860년대 이 지역에 처음 들어와 정착한 몰몬교도들이 '성스러운 안식처'란 의미로 붙였다고 한다. 종교적인 의미가 크다고 하지만 나야 뭐 종교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으니 더이상 할 말도 없고.
공원 입구를 알리는 랜드마크는 써니네 집에서 5분 정도 올라가니까 나왔다. 랜드마크는 물론 도로도 붉은 사암 가루로 포장을 해서 주변과 잘 어울렸다.
입장료 25달러(차 한대당)를 내고 우회전하면 비지터 센터가 금방 나온다. 우리는 미리 끊은 연간 회원권을 보여주고 통과. 입장료를 내면 일 년에 두 번씩 나오는 국립공원 안내 신문을 주는데 공원에 대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남편이 마라톤을 뛰러 간 후 아이들과 함께 비지터 센터를 구경했다. 이곳에서는 직원들에게 길안내도 받고 국립공원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어서 여행자들의 필수 방문 코스.
그리고 비지터 센터 안에 있는 서점을 꼭 구경해야만 한다. 서점이지만 책은 물론 온갖 기념품을 다 팔고 있어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써니가 이곳 서점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운이 좋으면 한국어 안내를 받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월악산 국립공원 규모 정도 되는 자이언은 비지터 센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친환경 셔틀 버스를 이용해야만 한다. 셔틀 버스는 무료지만 실제로는 공원 입장료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셔틀 버스가 없는 국립공원은 입장료가 좀 싸단다. 이 셔틀 버스를 타고 비지터 센터에서 계곡 끝까지 왕복하면 90분이 걸리지만 중간에 구경하고 싶은 코스가 나올 때 내리면 된다.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가서 사람들이 모두 내린 곳은 버스 종점. 우리도 여기서 내려 강변(Riverside Walk Trail)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천천히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30분을 걸어가니 내로우(Narrow, 버진 강 상류 협곡 지대)라고 이름 붙은 곳이 나왔다.
강변을 따라 양쪽은 거대한 바위 절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더 눈이 부셨다. 평소에는 말라 있는데 눈이 녹으면서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고.
수천만 년 전부터 버진 강이 지층을 깎아내며 흘러간 흔적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 저런 물길을 만들 수 있는 건지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은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오랜 세월만이 해낼 수 있는 저런 흔적을 만날 때마다 인간과 한번도 부딪힌 적이 없는 공룡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상상에 빠져들기도 했다.
여기로 계속 올라가면 내로우(Narrow)로 들어가 더 멋진 풍경을 만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초봄인지라 물도 차고 위험해서 통제중이었다. 간혹 한두 사람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했지만 우리는 모범 여행자라서 가지 말라는 곳은 안 감. 강물이 흙탕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옆에 사암 절벽이 강물에 깎여 물에 섞여서 흐르기 때문이란다. 계곡의 침식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중이라는 얘기.
거대한 붉은 사암을 나바호 샌드스톤(Navajo Sandstone)이라고 부르는데 바위가 붉은색을 띠는 이유는 철분 성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철분은 모래가 퇴적되어 사암이 형성될 때 모래 알갱이를 뭉치게 하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는 남편의 말씀.
계곡을 걷다 보니 왠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바위산과 나무와 물이 흐르는 계곡... 이건 바로 우리나라 산에도 있는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며칠 동안 삭막한 황무지(desert) 지역만 돌아다니다 만난 자이언은 꼭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산과 비슷했다. 문득 써니 부부가 은퇴 후 자이언으로 간 이유가 바로 이 고향 같은 느낌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좋은 구경거리도 배가 고프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 점심 먹을 곳을 찾다가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오니 도시락을 펼쳐놓은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나라는 어딜 가도 먹거리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로 식당도 많고 가게도 많다. 하지만 미국의 국립공원 지역에서 그런 풍성한 먹거리를 기대했다간 쫄쫄 굶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시를 만나면 제일 먼저 마트에 들러 간단한 먹거리들을 사들고 다녔다. 오늘의 점심은 마늘빵과 사과와 물. 이렇게 간단하게 때우다 보니 늘 배고픔에 시달린 불쌍한 우리 가족이여!!!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셔틀을 타고 위핑락 방향 정류장에서 내렸는데 순찰중인 공원 레인저가 우리를 보고 차를 세웠다. 남편이랑 같은 숙소를 사용했던 룩이라는 사람인데 두 사람이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남편이 정말 고마운 사람이라며 한지 부채 하나를 꺼내 주자 룩 아저씨가 아들을 불러 총을 보여주고 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글쎄, 미국의 국립공원 레인저들은 실탄이 장전된 진짜 총을 가지고 다니더라구. 아이구, 무서워용!
자이언 국립공원은 사방이 암벽인데 룩이랑 헤어져 위핑락으로 올라가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저런 바위가 보였다. 꼭 붉은 바위 위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것 같다. 칼슘 성분의 미네랄이 많이 포함되어 붉은색 사암과 달리 흰색을 띠게 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가 바로 위핑락(Wepping rock)이다. 눈물 흘리는 바위쯤 될랑가? 계곡 위 고원 지대에서 스며든 물이 틈이 많은 사암 지층을 쭉쭉 통과하다가 사암보다 더 치밀한 이암(진흙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암석층)을 만나자 통과하지 못하고 물이 빠져 나오는 중이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꼭 바위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위핑락이라고 부른다는데 이름 한 번 잘 지었다 싶다.
바위의 눈물을 받아 먹는 아이들. 사암층을 통과하는 동안 정수가 되어 깨끗하긴 한데 검사 결과 약간의 세균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먹는 건 각자 알아서... 그리고 아이들 뒤로 보이는 풀은 바위의 눈물이 준 뽀나스가 아닐까?" 아그들아, 바위가 흘리는 눈물 맛이 어떠 하더냐?"
산을 내려와서 다시 셔틀버스를 타러 가는 중이다. 산이지만 완만한 경사여서 힘이 들지 않으니 콧노래 절로 나왔다.
휴먼 히스토리 뮤지엄(Human History Museum)은 이 지역에서 살던 고대 인디언부터 몰몬교 개척자들의 이야기를 테마로 만든 작은 박물관이다. 비지터 센터에서 셔틀로 한 정거장만 가면 있지만 우리는 트레일을 다 돌고 난 후 내려오다 들렀다.
자이언의 사암으로 만들어놓은 이 전시물을 지나치면 이쪽 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또 안쪽에 있는 작은 극장에서 우리가 다 둘러보지 못한 자이언의 아름다운 풍경을 영상으로나마 만날 수 있어서 흐뭇했다.
박물관에서 나와 차를 타고 자이언마운틴카멜 하이웨이(9번 지방 도로)를 가다 보면 터널을 하나 만나게 된다.
후버 대통령 시절 뉴딜 사업의 하나로 1927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30년에 완성된 이 터널은 1.8킬로로 당시 미국에서 가장 긴 터널이었다고 한다. 이 길이 생긴 덕분에 브라이스 캐년, 그랜드캐년 노스림과 자이언을 연결하는 관광이 가능해졌다고...
터널을 지날 때는 공원 직원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 큰 차가 통과할 때는 일방통행로가 되기 때문에 버스나 대형 캠핑카는 특별 통과료를 지불하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야 지나갈 수 있다네. 별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들려주는 남편.
터널 안에는 아치 모양의 큰 구멍이 몇 개 뚫려 있는데 조명 시설이 없기 때문에 빛과 환기를 시키는 창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요것의 이름이 윈도우(Window)란다. 하지만 여기서 내려서 밖을 내다보는 건 위험하기 때문에 금지한다고 하니 궁금해도 참아야지.
터널 밖에서 올려다 본 창문의 모습. 거대한 바위산에 뻥 뚫린 구멍이 신기하다. 터널이 뚫린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었다는데 바위산은 숨을 쉬게 되었을까? 아니면 숨이 더 막히게 되었을까?
터널을 통과하면 나오는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캐년오버룩(Canyon Overlook) 트레일을 향했다. 올라가는 길에 발견한 인디언브러쉬라는 식물이다.
우리가 잘 아는 손바닥 손인장의 한 종류. 해발 2천 미터가 넘고 겨울도 길고 눈도 많이 내리는 이곳에서 선인장이 자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 선인장은 황무지(desert) 지역에 가장 잘 적응한 식물 중 하나라서 아주 추운 날씨부터 더운 기후까지 다 견디고 자란다고. 집에서 키우는 이런 선인장이 잘 자라는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간 캐년오버룩 트레일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이 멋지다. 뒤로 보이는 철망 아래는 낭떠러지. 멀리 우리가 차로 올라온 길이 꼬불꼬불 보인다. 이 사진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올라온 한국인 교포 부부가 찍어주었다. 우리한테 말을 거는 걸 보니 한국말을 너무나 잘하더만 부부끼리는 영어로 말을 하데...
자유주의자 우리 아들. 언제 어디서나 거칠 것 없는 포즈. 맨눈으로는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뜨거운 햇살 아래 잠을 청하고 있었다나. 바위가 상당히 부드럽고 손에 힘을 줘서 만지면 부서져서 모래가루가 되는 걸 보니 사암이 확실했다.
산에서 내려와 작은 터널을 하나 통과한 후에 만난 봉우리다. 층층이 결을 이룬 모습이 예뻐서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이건 동쪽 관문 근처에 있는 사암 봉우리인데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멀리서부터 보여 차를 안 세울 수가 없다. 정식 명칭은 체커보드 메사(Checkerboard Mesa). 하얀 바위산에 규칙적으로 가로 세로 체크 무늬의 균열이 나 있는데, 거참 신기하더라. 체커보드 메사는 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단다. 이 봉우리 하나 보겠다고 지질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미국 전역에서 온다나 어쩐다나.
그랜드캐년의 거대함 앞에서는 잔뜩 주눅이 들어 주변만 빙빙 돌면서 시선을 계곡 아래로만 떨구어야 했다. 하지만 자이언은 누구라도 계곡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면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서 마냥 행복했다. 그래서 나는 작지만 사람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자이언이 거대한 그랜드캐년보다 더 마음에 들었음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