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캐년을 나와 라스베가스에서 하룻밤을 자고 우리가 향한 곳은 유타 주에 있는 자이언 캐년 국립공원이었다. 이곳은 남편이 한 달 반 동안 근무를 한 곳이라서 더 특별한 곳이기도 했다. 라스베가스에서 세 시간 정도 가니까 자이언이 있는 스프링데일이라는 작은 동네에 도착했다. 라스베가스가 있는 네바다 주와 유타 주는 한 시간의 차이가 있어서 우리 시계로는 여섯시인데 유타 주 시계로는 일곱시여서 좀 억울했다. 인구가 500명밖에 안 되는 마을이지만 도서관, 은행, 여러 개의 갤러리까지 갖추고 있는 멋진 동네였다. 자이언에서의 하룻밤은 남편이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신세를 진 교포 써니와 존 선생님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도착하니 이미 저녁 준비를 다 끝내놓고 우리 가족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셨다. 시차 계산을 못한 우리가 약속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써니 선생님은 현재 자이언 국립공원 비지터센터 안에 있는 서점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데 한국에서 직원이 근무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정말 좋았다고 한다.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관광객이 아닌 한국 사람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 반가웠다고... 더구나 혼자서 숙식을 해결하는 애처로운 모습에 수시로 불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친해진 것 같았다. 남편의 붙임성 좋은 성격도 한몫 했고... 써니네 마당에서 바라본 풍경. 멋진 풍경 덕분인지 써니를 비롯해 은퇴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사는 것 같았다. 써니 부부는 70년대 초 캘리포니아로 이민 가서 사업에 성공한 교포다. 두 분은 도시 생활을 접고 50대 초반에 은퇴를 하고 7년 전 이 동네로 들어오셨다고 한다. 여행중 이 동네가 마음에 들어서 은퇴지로 결정하고 땅을 구입해놓은 게 30대 후반의 일이라고... 너무 늙어서 은퇴하면 기운도 없고 의욕도 없어서 새로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른 은퇴를 결심했다고 했다. 40대에 접어든 내게 은퇴는 먼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은데... 아니 그런 시기가 올까 싶은데... 두 분을 보니 후반기 인생을 멋지게 살려면 은퇴도 일찍 준비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에 있는 포도밭과 창고다. 와인을 만들 생각이라며 직접 지어놓은 와인 숙성 창고까지 보여주셨다. 은퇴를 한 두 분은 도시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듯했다. 농사를 짓고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여유를 즐기는 걸 보며 은퇴란 이런 거로구나 싶었다. 우리는 회사에서 퇴직하면 큰일나는 줄 알고 새로운 일자리 찾기에 급급한데 젊어서 열심히 일하고 은퇴 후 180도 다른 인생을 산다면 한 번 태어나 두 가지 인생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써니의 남편인 존 선생님이 직접 지은 와인 창고다. 위쪽에 보이는 곳은 손님이 왔을 때 가든 파티를 하는 곳이란다. 직접 농사 지은 채소를 곁들여 숯불구이를~ 하지만 우리의 저녁식사는 미국식 스파게티였다. 나는 남편과 달리 처음 만난 두 분이 너무 어려워서 조심조심... 집안도 정말 멋지게, 그러면서도 약간은 한국식으로 꾸며놓았는데 사진은 못 찍겠더라.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써니를 위해 준비해 간 선물을 풀어놓았다. 박완서 책 세 권과 제주 걷기 여행 책, 그리고 남편이 특별히 부탁했던 고춧가루와 한지 부채까지... 선물 하나하나에 모두 애정을 보이며 좋아하셔서 무겁게 들고 간 보람이 느껴졌다. 그리고 써니 부부는 우리 아이들을 정말 예뻐라 하셨다. 한국말을 하는 아이들을 본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신기하다고 했다. 처음 방문한 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우리 아들은 온 집안을 들락거리며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존 선생님을 귀찮게 했는데도 친할아버지처럼 정성껏 대답을 해주시곤 했다. 당신의 자식들은 미국에서 낳아 미국의 아이로 키웠으니 우리 아이들을 보며 떠나온 조국을 생각한 건 아닌지... 그래서 어쩌면 써니 부부에게 가장 큰 선물은 우리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우리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며 메일을 주시곤 한다. 집 안팎을 참 예쁘게 꾸며놓았는데 대부분의 시설이 존 선생님이 직접 만든 거라고 해서 더 놀랐다. 마당 한켠엔 작은 연못도 있고, 심지어는 집 한쪽에 작은 찜질방까지 만들어놓았더라는... 써니네 포도밭 옆에 있는 캠핑카. 써니 선생님은 여기에 집을 지을 때(2년 걸렸다고) 캘리포니아에서 왔다갔다하며 호텔에서 자는 게 불편해서 캠핑카를 구입했다고 한다. 써니는 우리보고 캠핑카랑 집 중 어디에서 자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캠핑카지요. 여행하면서 수도 없이 보아온 캠핑카에서 잘 수 있다며 아이들이 더 좋아했다. 캠핑카 안에는 2층 침대랑 부부 침대가 있고, 소파도 펼치면 침대가 되어서 6~7명은 거뜬히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불을 많이 준비해주셨는데도 새벽엔 추웠고 여관방만큼은 편안하지 않아서 난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은 일곱시도 되기 전에 먹었다. 써니는 출근하고 남편은 자이언 국립공원 100주년 기념 마라톤 참가 예정이었기 때문에 모두 일찍 서둘렀다. 남편이 무사히 마라톤도 뛰고 하루 종일 자이언 국립공원을 구경한 후 바로 브라이스 국립공원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인사를 하러 집에 들리니 써니가 저녁 먹고 하룻밤 더 자고 가라고 했다. 남편은 그래도 된다고 했지만 난 여전히 어려운 분들이었기에 하루 더 머물면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만 먹고 떠나기로 했다. 써니네 집을 떠나기 전에 기념 사진을 찍었다. 우리야 남편 덕에 미국 여행 한 번 하게 된 운이 겁나게 좋은 가족이지만 이 분들은 세상에 아쉬울 게 없는 미국의 중산층이었다. 가진 것 많지 않은 우리에게 베풀면서도 늘 기분 좋게 해주셨던 두 분에게 정말 감사를 드리고 싶다. 사진을 찍고 두 분이 한 번씩 안아주셨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사람을 진정으로 아껴주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데 감사를 넘어 감동을 받았다. 특히 남편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 드릴 때마다 하셨던 말씀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나에게 되돌려주려고 하지 마라. 너의 도움이 필요한 다음 사람을 위해 베풀어라!" 이곳은 스프링데일에 있는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동네 사람들이 기부금을 모아서 만들었다는데 써니 부부도 이 도서관을 짓는 데 기부를 했다고 한다. 입구 길쭉한 담벼락에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는데 거기에 써니 부부도 있었다. 남편에게 그 말을 듣고 일부러 찾아가 보았다. 돈을 많이 낸 사람일수록 위에 이름을 새겨놓는데 써니 부부의 이름은 자랑스럽게도 맨 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