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 1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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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경숙을 좋아했다. 이사하면서 수백 권의 책을  정리하고 왔건만 그녀의 소설들은 아직 우리집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인문학 책들은 다 꺼내놓으면서 유독 몇 박스나 되는 소설책은 표지를 닦아가며 다시 정리하는 내게 남편은 그것들도 정리하길 바랐다. 하지만 난 한마디로 남편의 말을 묵살해버렸다. "그것들은 내 젊은 날이야!"

이미 예민함을 다 잃은 내 감성이 다시 그녀의 소설을 꺼내 읽을 것 같진 않았지만 난 함부로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소설가로 삶을 시작한 순간부터 난 그녀에게 몰두해 있었으므로 그녀의 소설을 버리는 건 나의 젊은 날을 송두리째 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어쩜 그래서 나의 이십대도 그녀의 문체처럼 늘 망설이고 안개가 낀 듯 선명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난 이제 사십이 되어 사십대의 신경숙이 쓴 소설을 읽는다.

신경숙 소설에서 중요한 테마는 언제나 사랑이다. 여기에서도 콜랭의 사랑과 더불어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강연의 사랑, 왜곡된 홍종우의 사랑, 그리고 두 여인의 사랑이 나온다. 그들 중 나는 두 여인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지만 그 사랑을 다 받아들일 수도 없고, 행복한 듯 하지만 행복하지 않기도 한 여인 리진.

그녀는 정치적으로 어지러웠던 조선 말의 궁녀였다. 궁녀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사극 속에 등장하는 덕에 익숙하지만 그녀들은 왕이나 혹은 왕족을 돌보는 소리 없는 그림자였을 뿐이다. 늘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 속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 궁녀 리진의 삶이 기록으로 남아 있었고, 오늘 신경숙의 손을 거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의 1권을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설레었다. 프랑스 외교관 콜랭이 첫눈에 반한 궁중 무희 리진을 데리고 파리로 떠나기까지 나도 함께 가슴이 떨리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초조해하며 리진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날개를 펼친 새처럼 혹은 날아가는 꽃잎을 잡을 것처럼 춘앵무를 출 땐 나도 같이 그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당했고, 처음 보는 프랑스 요리를 거부감 없이 먹는 모습을 지켜볼 땐 콜랭과 함께 입가에 웃음을 띄우기도 했다.

콜랭이 당사자가 아닌 왕과 왕비 앞에서 리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땐 거부당하면 어쩌나 마음을 졸였다. 사랑이 날아가버릴까 봐 초조해하는 콜랭은 더이상 자국의 이익을 세우려드는 힘센 나라의 외교관이 아니었다. 그저 사랑에 애태우는 한 남자일 뿐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독립된 인간으로 대해준 콜랭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리진의 대사는 지극히 신경숙적이다. "나를 루브르에 데려가세요."

또 한 사람의 사랑 때문에 이 소설의 가치는 더 커지는 게 아닐까 싶다. 왕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민비는 대원군과 힘 다툼을 하다 결국 일본 세력에 의해 시해당하는 아주 강인하고 냉정한 인물이다. 하지만 리진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민비는 한없이 작고 외로우며 사랑을 가진 왕비이자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자신의 백통 가락지를 빼어 프랑스로 떠나는 궁녀의 손에 끼어주는 것은 왕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한 남자를 사이에 둔 그런 인연이고 싶지 않다고, 너를 보내는 가련한 나를 잊지 말라"는 말은 왕비에게 리진이 궁녀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리진이 프랑스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도 왕비의 사랑이 그리웠던 때문이다. 귀족의 부인으로 개화된 세상의 최고급 문화를 섭렵하지만 리진은 언제나 이방인었다. 리진이 프랑스에서 왕비에게 쓴 부치지 못한 편지 속에는 왕비에 대한 리진만의 극진한 사랑이 담겨 있다. 결국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길 포기하고 왕비의 품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종속시킨다.

어미 없는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아주었고, 사랑스런 소녀로, 그리고 아름다운 무희로 자라게 해준 왕비가 리진에겐 돌아가야 할, 자신보다 더 소중한 어머니였던 것이다. 결국 왕비가 시해된 후 리진은 죽음으로 왕비의 사랑에 보답한다. 리진의 시선을 통해 민비를 지켜본 나는 작가의 염원대로 민비에 대한 과거 기억을 완전히 지우고 말았다.

리진, 그리고 민비, 내 가슴 속에 오래 남을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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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2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가슴을 오래 울리는 리뷰에요. 신경숙 소설은 님의 젊은날!
리진의 시선으로 읽히는 민비. 이 책에 대한 리뷰가 많이 올라오던데
가장 잔잔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글입니다.

소나무집 2007-07-22 09:48   좋아요 0 | URL
소설 자체가 잔잔해서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지던 걸요. 신경숙의 글은 사물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요. 특히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아주 작은 것들에요. 저는 주로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곤 하네요.

치유 2007-07-20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를 통해 제가 책 한권을 읽어낸 느낌이에요..울림이 있는 리뷰에요..쓰고 보니 혜경님도 같은 댓글을 달아놓으셨군요..

소나무집 2007-07-22 09:51   좋아요 0 | URL
제 리뷰 속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도 많아요. 저는 주로 리진과 민비의 이야기만 했지만 프랑스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강연의 사랑이나 서씨의 사랑도 애절해요.

세실 2007-08-1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읽고 싶어 집니다. 참 맛깔스런 리뷰네요.
민비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하게 되는 군요.

소나무집 2007-08-31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 깊게 보지 않았어요.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그냥 푹 빠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