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하는 법이다..

아즈마 히로키에 대해서 끄적거리는 것은 뒤로 미루고 태풍도 오는데 이런 글이나 끄적거려야겠다. 들어가기 전에 몇 마디 범위와 정의에 대해서 밝혀두자면, 이 글에서 다루는 라이트 노벨은 일본의 서브컬쳐의 라이트 노벨만 한정한다. 국내의 시드노벨 등이 있고.. 어떤 책들이 나오고 있는지는 알지만 찾아서 읽은 책들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안할 것이다. 그리고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말해서 라이트 노벨에 대한 정의는 사실 엄밀하지 못하다. 앞에 애니메이션 풍의 그림이 있으면 라이트 노벨인가?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글을 쓰면 라이트 노벨인가? 여하튼 뿅가죽는[..아마 서브컬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여자(남자라도 상관없지만)캐릭터가 나오면 (다시말해서 모에할 부분이 있다면 ; 물론 모에라는 말에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이지만.. 참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니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라이트노벨인가? 아니면 위의 정의가 모두 해당되는 것인가? 세계관이 환상과 관련되어 애니메이션화, 또는 기타 미디어들로 발전이 쉽게 가능하다면 라이트 노벨인가? 처음부터 글로 쓰인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서 발전해서 글로 쓰인 것이라면 라이트 노벨인가? 나 또한 여러 라이트 노벨을 읽었지만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 라이트노벨인지, 그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위의 정의 중 글의 내용을 한정하자면 하나를 택해야 할텐데.. 아무래도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정의가 가장 만만할 듯 싶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나보다 라이트 노벨을 많이 읽고 이런 책들을 연구[..솔직히 많이 읽기는 했지만 나또한 편견이 좀 남아있어서 이런 류의 책을 연구까지 해야되는건가, 하는 의문을 스스로 느끼기도 한다.] 한 사람들은 물론 많을지도 모른다. 당장 검색해봐도 별 별 이론을 다 가져다와서 라이트 노벨을 분석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그 이론에는 지젝이나 라캉이 자주 오르내린다.. 이런 황당한.. 싶겠지만 지젝이 영화평론하는 것을 만화평론하는 것으로 바꾸면 뭐.. 안될 말은 아닐 것 같기도 하고, 나로서는 지젝의 이론을 잘 모르는터라 그냥 고개만 갸웃거리며 읽을 뿐이다.) 물론 내가 그런 본격적인 분석을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맘에 안차는 내용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요런 서재활동은 안하는 모양이니.. 조금 끄적거려도 상관없겠지? 아마 최근 라이트 노벨들 보다는 좀 옛날.. 라이트 노벨위주로 적게 될 것이다.

 

하나만 더, 계속 사족을 달게 되는데.. 앞서 나 스스로도 편견이 좀 있다고 고백하기는 했지만, 막상 나에게 라이트 노벨과 일반적인 문학장르의 우위성을 물어온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라이트 노벨을 읽은 이상으로 고전..이라고 불리는 세계문학과 국내문학을 그럭저럭 읽은 편이다. 물론 고전을 주로 읽기 때문에 최근에 나온 소설들은 오히려 잘 안보는 편이지만 말이다. 라이트 노벨은 저급한가? 글쎄, 저급한 책들도 분명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현대문학들이나 라이트 노벨이나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점에서는 동일하고..(상실의 시대, 에 이 말이 나왔었지.) 그렇기에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점은 있다. 확실히 라이트 노벨이 통통 튀는 맛은 있지만.. 그야말로 현실하고는 거리가 먼 환상에 빠져 사는 듯한 느낌을 주기는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딱 하나만 더.. 물론 라이트노벨에 대해서 역사니 어쩌니 해서 체계적으로 쓰려고 한다면, 그 옛날의 슬레이어즈,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마법소녀 리나, 라고 한다면 좀 더 친숙할 것이다.) 그 슬레이어즈도 원래는 소설이었으니.. 여러분, 마법소녀 리나 다 아시죠? 그 이전의 라이트노벨..이라고 불릴만한 소설은 잘 기억이 안난다.. 있긴 있겠지? 크흠, 그러나 이 글에서 그 정도 엄밀하게 하고 싶지는 않고 (무엇보다도 내가 별로 그렇게 쓰고 싶지가 않다.) 그러니 순서는 내가 생각나는대로 할 것이다.. 랄까, 이런 거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젠장,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내 손발이 다 오글거린다. 여하튼 각설하고, 왼쪽의 책은 늑대와 향신료, 라는 책이다. 왼쪽 표지의 여자 캐릭터가 보이는가? 왼쪽의 여자는 동물이다. 꼬리와 위의 귀를 본다면 동물이 서툴게 변신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과연 무슨 동물일까? ..제목이 늑대와 향신료니 늑대일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여우가 아니라는 점이 좀 의외일 것이다. 여기서 라이트 노벨의 특성이 있다면 바로 의외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한 부분이지만 간과하기 쉬운 부분을 잡아 오, 이런 상상력도 있을 수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두번째 특성을 잡아내자면 매력적인 캐릭터 구성이다. 적어도 외모면에서는 왼쪽의 여자캐릭터정도면 상당히 뛰어나니깐, 풋. 물론 실제 이야기를 읽으면 더 매력적일 것이다. 이 책은 향신료, 라는 이름이 광고하는대로 일종의 경제판타지이다. 배경은 중세시절이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다니면서 장사하는 행상인 남자가 주인공이고, 저 그림의 여자 캐릭터가 여자주인공이다. 자신이 신으로 받들어지던 도시에서 떠나고 싶었던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의 힘을 빌어 겨우 도시를 떠나고, 원래 자신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벌써 시간은 몇 백년이나 지난 뒤였고, 그녀의 고향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남자주인공은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남자주인공은 뼛속까지 상인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고향을 찾는 도중에 틈틈히 장사판에 뛰어들게 되고, 오래 살아온 만큼 현명한 여자주인공은 그에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조언을 한다. 때로는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꾸짖기도 하면서. 그리고 그들의 여행이 종막으로 다다르면서 그들 사이에는 묘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하지만 언제나 사랑은 힘든 법. 바로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이, 수명의 차이가 있다. 과연 그를 그녀는 그대로 좋은 추억으로만 남도록 하기 위해서 떠나보낼 것인가,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잡을 것인가?

 

이 책은 상당한 수작이다. 경제부분이라는 기존의 라이트노벨에서는 아예 다루지 않았던 부분을 상당한 연구를 통해서 (이 책을 쓴 저자는 황금가지, 를 많이 참조한 듯 하다..) 제법 생생하게 살려내었다. 물론 그, 그녀가 이 책에서 쓰는 장사 트릭들이 바로 바로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끝까지 읽히는 것은 연애부분과 장사부분을 절묘하게 결합시켰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가장 강렬한 캐릭터, 수백년을 살아왔기에 연륜이 쌓여 주체적이고 상황을 언제든 조절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외로움을 타는 나약한 면모가 있는 위의 여자주인공을 통해서 그 정점을 찍는다. 바로 이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이 캐릭터는 특별한 마법이나 창과 칼의 싸움을 통하지 않더라도(물론 아예 환상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중세, 가 배경인데 몽환적인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게 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그리고 여주인공이 늑대로 변신하는 장면이 나온다.) 책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와 더불어 청년층의 공감을 쉽게 이끌어낸다.

 

 

 

앞서 늑대와 향신료, 가 중세를 배경으로 했다면 이 풀메탈 패닉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편의상 미래라고 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가상역사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책에는 위스퍼드, 라는 존재들이 나오는데, 이 위스퍼드들은 말 그대로 속삭임을 들은 자들이다. 속삭임이라니? 무슨 속삭임을 뜻하는가, 궁금할 것이다. 이 속삭임은 미래로부터의 지식에 대한 속삭임이다. 위스퍼드, 는 태어날 때부터 미래의 누군가로부터 현실 세계에는 있을 수 없는 지식들을 전해받는다. 그 결과로 이 세계에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물체들, 물리학 법칙을 무시하는 무기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고보면 가장 빨리 발전하는 분야가 무기 분야이다. 최신식 무기를 만들면 다른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이 위스퍼드, 들을 한 명이라도 더 붙잡기 위한 조직이 있다. 이름하여 아말감이다. 이 아말감에 대항하여,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세계 평화를 지키려고 하는 조직이 있으니 바로 미스릴이다. 이 책은 저 미스릴의 중사 (용병조직이지만 군대계급이 있다.) 인 남주인공에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한다. 바로 위의 책의 표지의 오른쪽의 남자이다. 여자주인공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왼쪽의 머리가 치렁치렁한 여자캐릭터겠지. 그런데 저 표지만 보고 짐작하기에는 무리일 내용이 있으니.. 사실 남녀 주인공은 삼각관계에 빠져있다. 물론 중반쯤 결판나지만.. 미스릴의 대령이 위스퍼드인데, 공교롭게도 여자다. 위스퍼드들은 보통 천재라 일찍 그 능력을 발휘하기에 대령의 나이도 위의 청춘남녀와 동일하다. 각자의 여주인공들은 서로 다른 매력을 들이대며 남자주인공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어필한다. (뭐, 저기 저 파란 머리의 여자주인공은 사실.. 딱히 어필하는게 아닐 수도..)

 

여기서 라이트 노벨의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일상과 비일상의 만남이다. 이 특징은 특히나 일본 서브컬쳐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으로, 대략 이런 경과를 밟는다. 일상을 살아가던 주인공이 비일상의 침범을 통해서 그 일상이 부서지게 되고, 억지로 비일상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일상을 잊지 않기에 어떻게든 다시금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 책도 비슷한 경과를 밟는다. 훨씬 극적으로. 위의 여자주인공은 평범한 아이였지만 (물론 예쁘긴 하다) 위스퍼드, 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아말감에게 노려지게 되고, 그녀를 지키러 남자주인공이 파견된 것이다. 남자주인공은 원래 전쟁터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상의 평온함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게 되는데.. 비일상은 그들을 절대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녀와 함께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터로 돌아가게 된다.

 

 

 

위의 소설이 비일상과 일상을 구분지어 둘 사이의 대립을 이야기했다면, 이 토라도라는 그야말로 학원청춘물, 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학원물이란 간단히 말해서 학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왼쪽의 여자아이가 주인공인데 (역시 예쁘다. 안예쁘면 이야기가 안된다. 주로 라이트 노벨을 많이 보는 독자가 남성이 많다는 것을 감안할 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저 여자아이의 손을 보라. 손에 꼬마호랑이를 올려놓고 있지 않은가? 바로 저 꼬마호랑이가 여자주인공의 별명이다. 그 별명은 여자주인공의 흉폭함[..]과 그에 대비되는 귀여움, 그리고 이름때문이다. 이름에 호랑이가 들어가서.. 여하튼, 여자주인공이 있다면 남자주인공도 있어야 할 것이다. 남자주인공은 눈매가 아주 사나워 양아치로 많이 의심받지만 실제로는 저 여주인공보다 훨씬 건실하고 착한 학생이다. 사실 남자주인공도 그렇고 여자주인공도 그렇고 서로 다르게 좋아하는 이성이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용기가 없어서 그 이성들에게 다가가지를 못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서로 동맹을 맺었다. 서로 서로 상대방의 연애가 잘 되도록 노력해주는 그런 동맹말이다. 하지만 일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잘 흘러가지는 않았다. 잘 되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둘 다 자신의 마음을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몇 번의 오해와 몇 번의 이해 끝에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게 된다.

 

저 여주인공의 성격을 말해보라면, 츤데레, 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음.. 츤데레, 라는 말은 새침부끄, 라는 말로 바꿔서 쓸 수 있다고 하는데.. 새침부끄, 라는 말은 이상하게 어색하다. 쓰는 나도 어색하다. 그러니깐 이런 식이다. '따, 딱히 네가 좋아서 이런 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붉히면 츤데레 완성, 이랄까. 그런데 이런 성격은 강렬한 캐릭터를 완성하는테 큰 도움을 준다. 그냥 평범한 학교 연애 이야기라면 사실 기복이 좀 없을 것이다. 이런 츤데레 캐릭이 있기에 이런 저런 소소한 사건이 생기고 이윽고 독자가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다. 이런 바보같은 녀석들! 뻔히 서로 좋아하는 거 알면서! 라고.

 

 

 

 

사실 이 책은 부기팝 시리즈, 라는 큰 시리즈의 일부분이다. 보다시피 부기팝 XX라고 붙어있지 않은가. 일종의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취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라이트 노벨의 특징이다. 똑같은 주인공이지만 상황은 달라진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부기팝, 은 전면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 세계의 적, 이라고 부를만한 존재가 있을 때 등장하는데, 이 세계의 적, 이라는 녀석은 세계를 물리적인 의미로 파괴한다거나 하는 녀석은 아니고 세계의 변화를 막는 그런 존재이다. 인간의 발전을 막아버린다거나, 혹은 너무 인간의 발전을 촉진한다거나 등 그런 존재들이 모두 가능성 있다. 이들을 막기 위해서 부기팝이 등장한다. 하지만 매번 이런 세계의 적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이야기는 합성인간, 과 선천적 능력자, 에 대한 이야기들이 차지를 하고 있다. 능력자들은 특이한 능력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공간의 틈새를 벌린다든지, 약점이 보인다든지 말이다. 실질적인 주인공이 왼쪽의 저 기묘한 옷을 입은 부기팝이 아니고 왠 여고생인데, 여고생치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가죽옷을 입고 다니며 무술도 잘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특이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을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보면 부기팝도 싸우고 여주인공도 싸우는 그런 소설같지만.. 그리고 다양한 능력자들이 나오니 그냥 능력을 겨루어 싸우는 소설이 아닌가, 생각이 들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능력자들에 다양한 감정을 녹여내어서 독자들에게 생각할 점을 준다.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다면, 아마 잘 알 수 없음, 이라는 부분일 것이다. 시리즈 전체에 나오는 부기팝, 은 도대체 어떤 녀석인지 소설 전체를 통틀어도 제대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능력자들은? 그들이 모인 조직은 무엇을 목표로? 다 잘 알 수 없다. 말하자면 떡밥을 열심히 던져놓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떡밥은 평범한 능력물이나 배틀물이 아니게 만들긴 하나 이런 점들이 해결이 안된다면 강한 반발을 사게 될 것이리라.

 

 

 

앞서 게임을 원작으로 한 소설도 있다고 말한 적 있다. 바로 이 슈타인즈 게이트, 라는 소설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원래 게임으로 발매된 이 책은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인기를 등에 업고 소설까지 나왔다. 각종 드라마 시디도 발매되었고 말이지. 이 책의 전반적인 흐름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왼쪽 표지에서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남자주인공이고.. 여자 주인공은 두 명 있다. 그 중 한 명이 왼쪽의 사람이기는 한데.. 딱 보면 알듯, 여자주인공은 매우 똑부러지고 심지가 굳은 사람이다. 게다가 앞서 말한 츠, 츤데레이기도 하고. 남자주인공은 이야기 시작부분에 저 여자주인공이 칼에 찔린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우연히 남자주인공이 과거로 문자를(일본에서는 메일이라고 하는 것 같다.) 보내는 기계를 만든 상태였고,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문자로 썼다가 졸지에 과거로 날려보내고 만다. 그렇다면 과거로 문자가 날아갔다면 그로 인하여 시간선에 변동이 생기지 않겠는가?  바로 여기서 이 책의 전반적인 주제가 풀려나간다. 우리는 얼마만큼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가, 과거를 바꿈으로써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 등의 주제말이다.

 

여기서 특이하게 볼만한 부분은 캐릭터성이다. 남자주인공, 그러니까 위의 흰 가운 입은 남자, 의 모습을 보면 딱 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흰 가운이라니.. 말해두겠는데 무슨 연구소 직원은 아니다. (물론 자신이 멋대로 연구소를 만들긴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냥 대학생.. 이지만 평범하지는 않다. 그렇다, 중2병[..]에 걸린 대학생이다. 자신을 늘 광기의 과학자로 지칭하면서 무슨 일만 생기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슈타인즈 게이트, 를 읊는다. 엘, 프사이, 콩그루, 라는 정체불명의 주문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중2병 대학생은 시간을 다루며 수많은 고생을 하고, 두 여자주인공이 상처입고 죽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아야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성장해나간다. 그런데 이런 중2병의 캐릭터는 수많은 인터넷 유저들 사이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워낙 인터넷이 넓으니..) 유저들은 이 캐릭터를 보면서 처음에는 싫어했다가 (일종의 동족혐오.. 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캐릭터에 빠져들면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음.. 사실 인터넷 유저 중에 중2병이 정확히 얼마나 될 지 잘 몰라서 이런 이야기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주인공이 흔치 않다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변태라던가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은 제법 많지만 말이다

 

 

쓰는 내내 스스로도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 이전의 판타지 시리즈 다음에 이어지는 글이라고 해두자..

좀 더 쓸까, 하다가 나 스스로 좀 지치는 감이 있어서.. 이렇게만 끄적거려본다. 물론 핫하기로서는.. 어마금(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내여귀(내 여자친구가 이렇게 귀여울리가 없어) 혹은 나친적(나는 친구가 적다) 정도도 언급해주면 나쁘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최근 작품은 별로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고.. 아, 물론 슈타인즈 게이트, 는 최근작품이다, 슬슬 내가 힘들다.. 하지만 여러분, 설령 지하철에서 옆의 왠 학생이 안경에 여드름이 덕지덕지 나고, 뚱뚱하기까지 하고 거기에 이런 재기발랄한 표지를 가진 책들을 읽고 있더라도 이런 오타쿠, 기분나빠 하고 자리를 피하지 마시고.. 의외로 똑똑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랄까, 그렇다, 결론은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 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뭐, 근데 사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음.. 예를 들어서 구조주의를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구조주의 사조를 좋아한다고 하자. (사실 내가 좋아한다.) 그렇다면 레비 스트로스,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르를 따라가면서 공부를 할 것이고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는 주변사람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들을 할 것이다. 아니면 하루키를 생각해본다거나.. 마찬가지 의미에서 저 구조주의를 라이트노벨로 바꾸고, 그 뒤에 다 다른 책들을 넣어본다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이게 중요하다.) 이런 책들을 읽는다고 뭐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끄적거리는 것은 내가 이상하게도 쓰고나니깐 심리적 저항을 느껴서 그렇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면 이런 글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겠지.. 젠장 이 저항은.. 뭐지??.. 뭔가 더럽혀진 기분이다..

 

크흠, 장난은 이쯤하고.. 사실 저항이 좀 있는데 나중에 설명하고, 풋,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중고등학생때 판타지 소설을 안읽어본 사람은.. 아니, 적어도 이야기 한 번 안들어본 학생은 드물 것 같다. (물론 현재 20대에서 30대 초중반에 한정한 이야기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대학 도서관에서 책 대출 목록 1위를 묵향, 이 오랫동안 차지 하고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중고등학생때 읽은 학생들이 그 기억을 쫓아 계속 대출하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 들어와서 새삼스럽게 판타지에 빠지는 학생은 적지 않을까? 아무래도 판타지에 대한 평균적인 인식을 생각하자면 말이다. 그렇다면 왜 판타지 소설을 읽는가? 흥미롭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반영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현실이 반영된다면 그건 판타지 소설이 아닐 것이다. 중고등학생의 현실은 사실 그리 좋은 현실만은 아니다. 그렇기에 아예 현실에서 유리된 상상력의 세계를 꿈꾸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판타지 소설 내에는 공부하라고 호통치는 선생도 없고, (그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아무리 '찌질'해보여도 엄청난 재능이 잠재되어있으며, 마법공부따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하게 되는 그런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처음부터 '졸라짱센' 주인공이라면 더욱더 상관없다. 물론 모든 소설이 저런 식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판타지 소설이 중고등학생이, 심지어 성인까지도 공감하고 마치 등장인물인 것 처럼 사고하게 만드는 요소를 하나는 꼭꼭 의도하지 않았든, 의도하였든 주입해놓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나 그런 요소에의 공감은 각 등장인물의 개성이 다양하고 특이하면 특이할 수록 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현대 소설에서도 통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다만 판타지 소설은 그런 작업에서 현대 소설에 비해서 훨씬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쉽다. 그렇기에 판타지 소설이 한창 인기일 때 수많은 사이트에서 수많은 소설들이 중고등학생의 손에 의하여 쓰여졌다가 사라졌다가 했던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삶을 적어도 환상 소설 속에서는 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중고등학생들이 바보도 아니고, 언제까지 '졸라짱센' 판타지 소설의 뒤를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야 묵향, 의 주인공 묵향이[..] 손에서 강기를 펼치며 다 때려잡으면 열광하겠지만 몇 십권이 지나도 똑같이 때려잡는 일만 한다면 애정이 떨어질 것이다. 비뢰도? 이제 좀 완결났으면 좋겠다, 고 생각이 들 것이다. 천겁혈신은 명탐정 코난의 검은 조직의 보스인가? 물론 판타지 소설 중에서도 다양한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을 잘 만들어 놓은 소설들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앞의 두 소설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 에서는 아무래도 점수를 많이 주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한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을 만들어놓게 되면 이야기들은 집중하기 어려워진다. 공감은 될지라도 각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들에게 모두 동등하게 지면을 할애하다보니 스토리라인이 점차 길어지게 되는 것이다. 스토리라인이 길어지게 된다면 아무래도 상상력으로 그 세계를 그려내기가 어려워진다. 이럴때 각 등장인물의 개성이 다양하고, 게다가 일러스트까지 실려서 더욱 상상하기 쉽게 만들고, 스토리라인을 좀 약화시킨(모든 라이트 노벨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라이트 노벨이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공은 라이트 노벨로 넘어간다. 이런 라이트 노벨은 속된말로 캐릭터 빨로 승부를 보게 되고, 그렇기에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하는데 사력을 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다양한 캐릭터에 스토리라인이 약화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류의 소설을 가장 쉽게 쓸 수 있을까? 그렇다. 연애물이다. 한 명의 주인공에 다양한 속성을 가진 여주인공 여럿. 이 정도면 충분히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경우에는 토라도라, 가 가장 무난한 예일 것이다. (아니면 여러 속성을 한 여주인공에 다 몰아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위의 늑대의 향신료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고, 결국 더욱더 새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할 것이다. (위의 슈타인즈 게이트, 는 특이한 캐릭터들의 향연이다.) 그리고 그것은 라이트 노벨의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발전이 계속 되는 한 (물론 라이트 노벨 작가들이 의도해서 이런 발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계속 공은 라이트노벨로 넘어간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중고등학생들은 점처 더 많이 라이트 노벨을 읽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서브컬쳐, 라고 불리던 것이 조금은 양지로 올라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여기서 한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라이트 노벨이 판매수가 높기는 하지만, 막상 그 근원지[..] 일본에서도 괜히 서브컬쳐(아래에 있는 문화)가 아니다. 그리고 서브컬쳐에는 본질적으로 일본의 문화, 라는 인식이 깊게 남아있기 때문에.. 양지에 올라올 수는 있을 지 몰라도 국내에서 본격화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괜히 남에게 피해를, 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인 것은 아니다.. 캐릭터들의 옷을 입고 그 캐릭터인 것 처럼 흉내를 내는 코스튬 플레이[..]의 경우 그 플레이어들의 의식은.. 일부는 가관인 경우도 있다. 광복절날 일본색이 짙은 캐릭터의 옷을 입고 흉내를 낸다던지.. 더 쓰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판타지 소설에서 라이트 노벨의 이행을 당연한 것 처럼 써놓기는 했는데.. 그렇다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런 라이트 노벨이 침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반지의 제왕 다음에는 판형을 줄이고 일러스트 예쁘게 해서 간달프를 미소년으로 나오게 한다거나[..] 특이한 개성을 가진 마이야가 나온다거나 뭐 이런 책들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별로 그런 소식은 안들린다. (음.. 해리포터 시리즈나 타라 덩컨 시리즈를 그런 식으로 보아도 될까? 하지만 청소년용으로 보기에는.. 음, 청소년용이구나)그렇기에 나로서는 서브컬쳐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점차 국내에서 영역을 넓혀가는 모습에 저런 이행에 대한 생각을 끼워맞춘것이다, 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굳이 북미와 우리의 의식이 다르니까, 등등의 이유는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우리는 상상력의 동물이다. 특히 몰개성한 고교시절을 보내면서, 머리는 바리깡으로 깎이더라도 머릿속은 상상력으로 채우고 싶어하는 욕구를 절대 지우지 못할 것이다. 상상력은 능동적인 것이고, 능동적인 생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쾌감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은 만화보다는 글을 통해서 그려낼 수 있는 글을 더 선호할 것이다. 그렇기에 판타지 소설이 한 풀 꺾인 이때, 서브컬쳐는 특히나 유행을 타고 조금씩 청소년들을 잠식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옳을까? 라이트 노벨이 저급한 매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잘 모르겠다. 그러나 특히나 환상에 휩쓸리기 쉬운 중고등학생들이 이런 책들을 읽으며 현실에 유리되는 것이 옳을까? 앞서 썩 좋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소설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지만, 썩 좋은 현실이 아니라고 해서 그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런 비판도 없이 낄낄거리며 읽는 것이 옳을까? 쉬자고 읽는 책인데 무슨 비판.. 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 더 그들의 무의식에 침투하기 쉬운 것이 아닐까? 나 또한 판타지 소설도 읽고 라이트 노벨도 많이 읽었지만, 그리고 재미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고, 어떻게 이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가 있지, 라고 놀라기도 하지만.. 아마 이것이 심리적 저항일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19금 먹인다거나 판매금지한다거나 이런 수단 말고 국내 문학의 저변을 넓힌다거나 뭐 이런 것들 있지 않겠는가. 뛰어난 작가들의 웹연재도 많이 활성화되면 좋겠고. 그런게 힘들다면 라이트 노벨을 어떻게 잘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런 연구라도 필요하려나? '라이트' 노벨이라고 고개를 돌려버린다면 참 쉽겠지만 말이다.

 

 

 

다음에는 간단한 책 페이퍼 몇 권 쓰고 로마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 물론 언제 쓸 지 모른다. (사실 로마의 때밀이에 대한[..] 괜찮은 만화를 알고 있다. 소개할지 안할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앞서 쓴 촘스키 언어학에 대한 글이 쫌 정성을 기울여 쓴 글이라.. 그런데 내가 봐도 좀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큼큼.. 그런 건 이해해주시라, 어쨌든 그래서 좀 쉬는 글로 대강대강 짧게 쓰려고 했는데, 풋, 이번에는 대강대강 긴 글이 되어버렸다. 여기까지 다 읽어준 분이 있..긴 하겠죠? 어쨌든 긴글 읽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그냥 막나가는 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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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8-29 11:41   좋아요 0 | URL
라이트노벨이라, 역시 가연님 멋지십니다. 라노베는 제가 오가는 인터넷 카페서도 화제가 은근히 되고있긴 한데 저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오오카미씨 어쩌고 하는 라노베를 전에 사긴 했는데 읽진 않았어요. 꽤 긴 글 집에가서 차근 읽어보겠습니다. 후후

가연 2012-08-29 13:07   좋아요 0 | URL
푸핫, 멋지다기보다는 막나가는거겠죠..?ㅎㅎ 음.. 알라딘 서재에서 호로, 그러니깐 늑대와 향신료 여주인공의 얼굴이 메인에 떠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정말 묘한 기분이 드네요. 뭐랄까, 손발이 오그라든달까..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 하는 기분이랄까..

푸하하, 하지만.. 뭐, 이런 책들도 있다, 라는 것을 알아둔다면 그리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글이 그런 소개, 가 된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겠죠, 풋. 음.. 오오카미 시리즈군요, 라고 아는 티를 냈다가는 이대로 저는 오타쿠가 되는 거겠죠? 하하, 농담이구.. 은근히 화제가 될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소이진님이 그리 즐겨보시지는 않는다니깐 쪼끔 의외네요, 풋. 소이진님은 저처럼 디트로이트에서 메탈을 즐기시는 분 아니십니까, 하하.

이진 2012-08-29 21:28   좋아요 0 | URL
최근에는 이런 장르의 책 싫어합니다. 자꾸 일본어 번역체 같다는 이야기가 들려와서요. 지금부터라도 멀리해야죠. 이런 책에 대부분 일본어 번역체가 많이 쓰이지 않습니까. 뭐뭐 할까나~? 이런거요. 크크크... 오오카미를 아시는군요. 애니 보고 배 잡고 쓰러졌습니다. 웃겨서요. 그래서 샀는데 안 읽고 있네요. 디엠씨! 그래도 애니는 계속 보지 말입니다. 푸하하핫.

늑대와 향신료의 주인공이, 그것도 민망한 자세로 알라딘 메인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살짝 기겁했습니다. 확실히 다락방님 말처럼 좀 더 막나가도 되겠는걸요. ㅋㅋ

가연 2012-08-31 19:13   좋아요 0 | URL
답이 늦었네요..ㅋㅋ일본어 번역체는 치명적이죠.. 그러고보면 소설을 쓰시려고 하시는 소이진님은 꼭 피하셔야겠네요, 풋.

다락방 2012-08-29 13:54   좋아요 0 | URL
좀 더 막나가도 되는데...( ")

뭐 더 다른 막나가는거 없어요? 더 쎈걸로.

가연 2012-08-29 15:03   좋아요 0 | URL
ㅋㅋ 막나가는 것도 그냥 막나가기만 하면 주화입마..[..]에 빠지니 좀 더 내공을 쌓아야겠죠, 풋. 다음을 위해서 한동안 내공이나 쌓을 생각이에요, 풋.

희선 2013-09-03 00:5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지금은 청소년 소설이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언제부터 그렇게 나온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아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출판사에서 거의 청소년 소설을 내고 있죠 청소년이 그런 소설을 읽을지 어떨지... 읽겠죠 저도 가끔 보는군요 책이 보이면...^^

라이트 노벨은 별로 못 읽어봤지만... '채운국 이야기' 읽다가 왜 이렇게 안 끝나 하다가 거의 끝날 때쯤에서 그만 읽었습니다(마지막에 어떻게 됐을지, 혹시 읽어봤나요 예전에 아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장 알고 싶은 것은 홍수려는 어떻게 했을까죠 그러고 보니 여기에 얼굴이 같은 사람이... 비슷하다고 해야겠네요) '소년음양사'도 조금 읽다 말고... 겨우 두 가지군요 이 두 가지 다 배경이 옛날이군요 채운국 이야기는 일본보다는 중국에 가까운, 작가가 만든 나라지만... 여기에도 개성 있는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군요(음양사라는 책에 세이메이와 히로마사가 나온다는 말을 얼핏 봤는데, 소년음양사에 나오는 세이메이 손자 이름이 마사히로예요 이름을 거꾸로 하면 같아서 신기했습니다)

위에 얼굴이 같은 사람이 나온다는 말을 했는데, 소년음양사에도 그런 사람이 나와요 친척이라서 그렇기는 한데... 이런 것을 한두번 본 것이 아니기도 하군요 그것은 대체 왜일까요 이런 걸 물어보다니...

슬레이어즈 아주 좋아했어요 책으로 본 것은 아니고 애니메이션을 봤죠 예전에 책을 사기도 했는데, 사두고 읽지는 않았군요 다 산 것은 아니고 몇 권... 오노 후유미의 <십이국기>는 라이트 노벨인가요 아닌가요 거의 판타지에 가까울지도... 갑자기 왜 이게 생각났는지 모르겠군요

늑대와 향신료에 나온 둘은 어떻게 됐나요 다른 것보다 그런 것을 더 알고 싶어하다니... 그럴 때는 서로를 위해 헤어질 때도 있지만, 이것저것 따지지 않을 때도 있지요 보는 사람은 그런 게 더 좋아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컴퓨터(사람 모습을 한)를 좋아하는 사람, 귀신을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그린 만화속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요괴를 좋아하는 사람... 우주인도 있군요 이게 꼭 사람과는 다른 무엇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요 다르지만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일지도 모르죠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이 말도 필요없는데...^^


희선

가연 2013-09-10 17:37   좋아요 0 | URL
저도 슬레이어즈 아주 좋아했어요. 정말 멋진 작품입니다. 십이국기랑 채운국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슬레이어즈는 정말 특별한 작품이지요. 우리나라의 팬픽 역사에서도, 푸하하.

늑향의 둘은 결국 결혼했어요. 희선님이라면 그걸 궁금하시려나, 하였답니다.
 
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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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 공주의 방은 조금 어두웠다. 그렇기에 꿈사냥꾼이 그의 앞에 있는 아테 공주가 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아테 공주는 단추 대신에 방울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옷을 벗으려고 하거나, 옷을 입으려고 할 때는 항상 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방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아테 공주의 방에 들어와 있는 꿈사냥꾼마저도 그 방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찾을 수 없으며, 어느 한 상태를 모르면 다른 상태도 알 수 없다. 방울 소리는 적어도 그녀에게 한해서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촉매였다. 물론 어느 상태가 그녀에게 좋은 상태인지는 그녀 자신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아테 공주의 침실은 커다란 경호견들이 새하얀, 너무나 하얘서 은빛마저 감도는 그런 털을 두르고, 그 털만큼이나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지키고 있었다. 그 경호견들은 마치 조각상같았으며, 가끔씩 혀를 드러내고 헐떡이지 않으면, 혹은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마지막으로 배가 규칙적으로 부풀어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지 않았다면 마치 어느 신전에서 침입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세워둔 가고일과 같은 조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호견들이 잠깐 움직일때에는 음식을 먹을 때 뿐이었고, 그 외에 낯선 사람이 아테 공주의 침실을 기웃거릴때 눈동자만 좌우로 굴리며 경계할 뿐이었다. 복도에는 어렴풋한 지린내가 감돌고 있었다. 유일한 때가 있다면 경호견들이 교체될 때의, 그러니까 한 무리는 자러 가고 다른 무리가 들어와 다시금 석상처럼 서 있을 때의 어수선함 뿐이었겠지만, 그런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꿈사냥꾼은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꿈사냥꾼은 자신이 가진,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사용하였다.

 

아테 공주는 미인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물론 꿈사냥꾼이 그녀의 침실까지 들어가게 된 것은 그녀가 미인이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테 공주는 카간의 친척이자 그의 정부이다. 그녀의 몸이 탐난다고 해서 목숨을 버릴 만큼 꿈사냥꾼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한 번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만약에 그녀의 침실이 많은 경호견들로 지켜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아테 공주라는 인물은 실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고 꿈사냥꾼은 단정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침실 열쇠를 받자 - 열쇠는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그는 아테 공주가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꿈사냥꾼은 사제였다. 꿈을 사냥하는 사람과 사제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지는 아담 루하니, 시간과 영원을 다루는 천사만 알 뿐이다. 아담 루하니는 천사이자 인간이었다. '모든 사람이 가진 꿈이 하나로 모인다면 그 꿈은 거대한 인간 모양으로 변모할 것이며 그 크기는 대륙의 크기에 견줄만 할 것이다.' 꿈사냥꾼은 다른 꿈사냥꾼들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방법으로 아담 루하니를 숭배하였고, 그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수도원의 일만명이나 되는 처녀 수녀들을 아이를 가지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가 아담 루하니를 숭배하는 방법이었다. 아담 루하니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다. 진실된 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때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처녀 수녀들과 자신이 스스로마저 잊어버릴 것 같은 쾌락에 이를때, 그는 그녀들의 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담 루하니의 조각을 찾기 위해서.

 

"그래서 이제 여기에 이르렀나요."

 

아테 공주가 말했다. 그녀는 수도원의 마지막 수녀였다. 꿈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다. 그리고 아담 루하니의, 제 3의 천사의 조각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다음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 지라도, 자신은 꿈 사냥꾼의 역할, 수많은 꿈들을 모아 아담 루하니를 이룩해내고, 이윽고 인간이 인간 이상의 가능성을 가지게 만드는 그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역할보다도 지금 당장의 그에게는 그녀에게 확인해야만 할 것이 있었다. 그리고 아테 공주는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조각이었다. 그녀의 은빛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 사냥꾼은 숨을 헉, 하고 들이쉬었다. 과연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누구보다도 느렸다. 하지만 느린 사람이야말로 뒤에서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가장 빨리 보이는 사람인 것이다.

 

"공주여, 나는 그대에게 이르기 위해서 이 책을 넘기며 찾아왔습니다. 이 책의 매 장에는 죽은 자를 붙들어매고, 산 자를 죽게 만드는 독이 묻어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 장을 넘기면 나는 이제 죽을 것입니다."

 

"알 사파르, 내 앞에 있는 당신은 꿈인가요, 현실인가요?"

 

"나는 이미 꿈을 통해 당신의 말과 당신의 열쇠를 전달받았습니다. 여기 있는 나는 벌을 삼켜 죽은 알 사파르이기도 하며, 수많은 처녀를 잉태시켜 결코 편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게된 가련한 꿈사냥꾼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담 루하니의 사도, 그리고 그의 뒤를 바싹 따르는 종복입니다."

 

"나는 곧 죽을 거에요, 알 사파르.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이 힘을 모아 나를 지옥으로 보내려고 하고 있어요. 아마도 내 선택의 대가이겠지요.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에요. 그들의 지옥에서 나는 다시는 꿈을 꾸지 못할 거에요. 그렇기에 당신이 내 꿈을 꾸고 있었기에 다행이에요. 그래서 묻는 말이니 말해봐요, 알 사파르, 내가 다시 꿈을 꾸던가요? 그대의 꿈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이던가요?"

 

"공주여, 당신은 아랍인들의 종교를 맞아들이는 선택을 했고, 그 시도는 성공했지만, 그대의 깊은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스스로를 아담 루하니의 수녀이자 꿈사냥꾼의 후견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 아랍인과 유대인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책을 책이라 여기지 않고, 오직 주어지는 책만을 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손으로 아담 루하니의 흔적을 찾는 것이 그들의 주님을 구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완전을 꿈꿉니다. 거기서 꿈이 발생되어 나옵니다. 이미 완전한 상태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그리고 아랍인들은 모두 우리를 기만한 것이며, 그들의 주가 주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만입니다. 그렇기에 그대 자신도 스스로를 기만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옥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지어진 지옥이 아닌 스스로의 기만이라는 감옥을."

 

"나는 논쟁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들의 신을 믿으라고. 적어도 셋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공격을 당하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보복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들의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나도 스스로가 기만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앞으로의 나는 더한 기만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알라를 섬기다가 그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야훼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왕국은 너무나 깊고 그들이 아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이 가장 옳은 선택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면, 나 자신이 스스로를 기만할지라도,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될지라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에게 책을 집필해오라고 했었지요. 내 기만의 대가로 내가 잃어버리게 될 것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말이지요. 우리들의, 그리고 아담 루하니와 꿈에 관한. 그 책이 있고, 잊혀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몇 해전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흐른 적이 있을 때, 저는 예언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찾아올 것이며, 그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에 우리의 시간도 느리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저는 당연히 위대한 사람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사람이 개화하기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닐까, 라고 말이지요. 아마도 당신의 말은 옳을 것입니다. 내 꿈에서의 당신은 마치 새처럼 쿠, 라는 단어만 반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옥에 있지 않았습니다, 공주여. 당신은 당신의 현명함의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이리로 올라와요, 알 사파르. 마지막으로 내게 그대의 방식으로 아담 루하니를 섬기게 하세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이 바로 우리 민족의 책인 카자르 사전이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책의 매 장에는 몸을 마비시키고 이윽고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독을 발라두었습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이제 우리 꿈사냥꾼의 이야기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나 또한 사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몸, 우리 민족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짐작이 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부름을 받고 달려오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책은 태어나려고 한다. 이 책이 다른 사람에게 읽혀지든 읽혀지지 않든 그것은 이 책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 나는 이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책을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하게 하는 권리도 나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만,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이었는지 그대와의 이야기를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독은 단 한 번만 발랐기에 누군가 이 책을 끝까지 넘기면 그 다음 사람에게는 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히 나에게는 이 마지막 장을 넘길 힘이 남아있습니다."

 

알 파사르는 카자르 사전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독이 온몸에 퍼져 죽었다. 아테 공주는 명을 내려 꿈사냥꾼, 알 사파르의 죽은 몸을 우리에 넣게 했다. 그리고 물 위에 매달아두라고 명령했다. 시체는 썩지 않았다. 아테 공주가 물고기 모양의 열매를 입에 물었다가 그의 몸에 뱉자 그제야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아테 공주는 자신이 이제 이 물고기 모양의 열매, 쿠, 라는 단어만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참고 : 위의 책은 '하자르'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카자르' 가 더 좋은 것 같다. (설령 카자르, 의 K가 묵음일지라도.) 예전에 내가 읽은 책은 카자르 사전, 이라는 이름으로 남성판과 여성판으로 나누어져 있던 책이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 책을 읽었기에 나로서는 카자르, 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고, 여기서 쓰는 글에서도 카자르, 라는 이름으로 계속 진행할 것이다. 리뷰보다는 소설에 가깝지만, 이런 특별한 책에는 특별한 리뷰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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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9-03 00:49   좋아요 0 | URL
책 장마다 독을 발라두었다고 하는 거 움베르토 에코 소설 <장미의 이름>에도 나오지 않나요 이 책 읽지는 않았는데 그런 말을 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책 읽어보려고 했는데 앞에만 조금 보다가 말았습니다 재미있다고 하던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게 <장미의 이름>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이 한권이었거든요 찾아보니 두권이길래... 다른 것을 본 것인가

꿈사냥꾼은 작가인 밀로라드 파비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종교라는 것을 억지로 믿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기도 하군요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합니다(다른 나라에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이 있었죠) 보통 소설과는 다른 형식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색다르게 쓰셨군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희선

가연 2013-09-10 17:40   좋아요 0 | URL
멋진 소설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면ㅎㅎ 맞아요, 장미의 이름에서도 나오죠. 이 카자르 사전은 비슷한 내용을 말하긴 하는데 좀 달라요. 거기선 주요 트릭이지만.. 여기선 하나의 단어 설명이지요. 저는 꿈사냥꾼이 밀로라드 파비치 라는 생각을 한번도 안해봤는데.. 그러고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 외로 쓰기가 어려웠어요
 

 

 

 

  촘스키는 그의 언어학적인 업적의 대부분을 늦어도 1970년대까지는 완성하였다. 그 이후의 촘스키는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가 더 강하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노엄 촘스키의 모습도 그의 사회운동가적인, 그리고 일종의 시대의 양심, 으로서의 면모가 강할 것이다. 미국을 비판해왔다. 권위주의적인 나라에 반대해왔다. 설령 자신의 목숨이 위협당하더라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학자들과 대담을 펼치며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켜왔다. 물론 그의 사생활적인 면모에서는 그 자신의 견해와는 다르게 행동하였다는 말도 있으며(세금을 피하려고 하였다거나) 캄보디아의 민간인 학살을 왜곡시켰다는 비판도 받기도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의 연구는 펜타곤에서 지원받았었다. 뭐, 지원받았다고 해서 지원해주는 쪽을 비판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설령 그를 위선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언어학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촘스키의 전기조차 읽지 않았다.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촘스키의 일생보다는 그의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나는 그의 일종의 시대의 양심으로서의 공과 과를 캐내는 것 보다는 그의 언어학적 업적에 초점을 맞추어 풀어쓰고자 한다. 물론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이고, 최대한 용어들과 의미를 풀어쓰는 과정에서 뜻이 본래의 뜻과 달라지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이렇게 정리해두는 것에 그 의미를 두려고 한다.

 

 

유명한 언어학자를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촘스키 뿐만 아니라 소쉬르를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구조주의적인 분석법을 (영역은 다르지만 레비 스트로스와 함께) 거의 최초로 정립시킨 소쉬르는 왼쪽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펴냈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가 죽은 뒤 출간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기호학적인 접근을 주창한다. 말 그대로, 기호들에 대한 학문인 기호학에서는 그 내용보다는 아무래도 형식이 더 중요하다. 그의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다 : 언어는 실체가 아닌 형식이다. 그 이전의 언어학에서는 보통 그 언어가 어떤 내용을 가지는가, 에 더 초점을 두었다면 그는 일종의 구조주의적인 형식을 도입하였고, 그의 이런 관심은 결국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법칙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우리들에게 많이 익숙한 개념들, 랑그, 빠롤, 기표, 기의, 공시성, 통시성 등과 같은 개념을 제시하며  이는 이후에 라캉이나 데리다 등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실 이 글에서 살펴볼 것은 촘스키의 언어학적인 체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개념을 여기서 밝힐 수는 없고, 랑그와 빠롤에 대해서만 간략히 설명하겠다. 랑그는 언어다.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체계이며, 언어 전체이다. 그에 비하여 빠롤은 바로 지금 여기, 에 속하는 것이다. 언어의 특수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추상적 언어체계에서 몇 몇을 주워모아 언어를 발화하는 방식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소쉬르는 랑그를 더 중시하기는 하는데, 이는 빠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어떤 문장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 언어체계 안에서만 그 의미를 가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위의 일반언어학 강의, 에서 '무엇보다도 랑그의 영역에서 보아야 하며 랑그가 다른 모든 발현의 규범' 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소쉬르가 구조주의적인 기술을 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좀 더 보편적인 랑그를 중시하는 것이 당연하다. 앞서 말한대로, 법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랑그가 더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게 되고, 이는 그의 언어학을 랑그를 대상으로 하는 언어학으로 규정되게 만든다. 여기서 하나 더 밝혀 두어야 할 그의 개념은 공시성인데, 기존의 언어 연구는 언어의 통시적인, 그러니깐 역사적인 측면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소쉬르는 언어가 시간과는 관계 없이 '하나의 체계'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공시적인 측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렇기에 언어학자들은 그 완전한 체계를 바라보는 일종의 관찰자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랑그와 빠롤과 연관지어보면 흥미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소쉬르가 종종 이야기했던 예시, 체스게임에 관한 비유를 그대로 따라가보면 체스게임은 그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이 체계는 랑그이며 공시적인 체계이다. 그러나 게임의 양상은 언제나 다르다. 개별적이고 예측하기 어렵다. 이는 언어에서 빠롤에 비유되며, 이 빠롤은 통시적 운동, 시간에 따른 운동을 하며 변화된다. 뒤집어 말하자면, 아무리 각 게임이 특이한 모습을 가지더라도 그 게임들은 모두 체스게임이라는 이야기이다. 오른쪽의 책은 일반언어학 노트, 인데 일반언어학 강의, 와 함께 읽는다면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사실 왼쪽의 언어학의 사상사, 보다 전반적인 언어학사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김방한 교수의 책들인 언어학논고, 나 언어학의 이해, 를 참고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단점이라면 너무 오래전에 나온 책들이라 아마 도서관에서나 읽을 수 있으리라. 여하튼 위의 소쉬르에서 시작된 구조주의 언어학은 발전되어 나가면서 몇 개의 학파를 만들게 된다. 제네바 학파, 프라하 학파, 코펜하겐 학파, 런던 학파가 바로 그것인데, 각각에는 뛰어난 학자들이 또 등장하여 소쉬르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발전시켜나간다. 이 학파들 중 눈여겨 볼 학파가 프라하 학파인데, 이 학파에 속한 학자들 중 한명이 바로 로만 야콥슨이다. 유럽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이렇게 발전해나갈 무렵, 미국에서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물론 각각의 언어들의 '구조적인 특성' 을 강조하는 경향으로는 유럽과 미국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그 연구방향이 좀 더 실재적이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토착어의 기술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의 언어가 멸종하기 전에 어떻게든 알아두려고 노력하던 초기 미국의 구조학자들은 벽에 부딪히게 된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토착어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천여 개는 넘을 것이다. 이를 어떤 방식으로 기술을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에 부딪힌 그들은 그동안 연구해온 언어들의 범주로 그것을 기록해서는 안되리라고 막연히 여겼었다. 이런 언어들의 연구방법에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 이들 언어의 형태와 모습을 그대로 '기술' 하는 방법이 쓰였다. 여기서 앞서 소쉬르에서 조금 이야기한 공시성이 빛을 발한다. (초기 미국의 구조언어학자들이 연구를 진행시켰을때 주목한 것은 인디언의 언어에서는 딱히 시제형이 보이지가 않는데도 시간의 개념이 언어에 특별한 형태로 표시가 된다는 점이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 인디언들의 언어를 추출해보면 시제가 없는데도 시간의 개념이 보인다는 점에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시적인 방법이 아닌, 공시적인, 그리고 사회 전체에 주어진 랑그의 분석이 필요했고 이는 기술문법을 촉발시켰다고도 한다.)

 

이제 미국의 구조주의 언어학은 블룸필드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사실 사피어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사피어-워프 이론은 논술에 단골 출제되는 주제이다. 훔볼트의 영향을 받아서 언어구조가 우리의 사고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언어 상대성 가설이라고 하며, 이를 설명할 때 무지개 색깔을 나타내는 단어에 따라서 구별가능한 색깔이 차이가 난다, 등의 예시가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블룸필드에 대해서만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블룸필드는 언어 이론에 행동주의 심리학을 끌여들였다. 행동주의는 자극-반응에 따라 모든 현상을 기술하는 방법이다. 연이어 이야기하자면 직접 경험한 것과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에만 우리의 의식 현상을 한정시킨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이 행동은 어떤 자극에 따른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특정한 감정상태나 생각을 가져서 행동을 한 것이다, 라고. 그런데 이런 특정한 감정상태나 생각은 왜 생긴 걸까? 행동주의에서는 그 사람의 환경과 같은 외부 자극에 의해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특정 감정상태가 생겼으리라고 본다. 결과적으로 자극-반응, 자극-반응이 연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 사람의 생각 등을 연구하려고 마음먹었다면, 그 사람의 행동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단순히 자극-반응이 연이어 발생한다면 이는 도대체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동물도 때리면 깨갱하고 운다. 인간이 뭐가 다르겠는가.

 

이때 언어가 이런 행동주의 심리학에 삽입된다. 일단 언어를 인간 행동의 특수한 형태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대화에서 자극에 반응이 바로 뒤따르지 않고 그 사이에 언어가 삽입되는 상황을 볼 수 있다. 자극에 대한 언어적 대치 반응과 반응에 대한 언어적 대치 자극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내 숙제를 대신해달라, 라고 말하는 상황을 보자. 숙제가 많다. 이런 실제 자극을 보고 우리는 언어적 대치 반응을 보인다. (이봐, 내 숙제 좀 대신 해줘) 이 말은 청자에게는 언어적 대치 자극으로 작용하며 (아니 이 녀석이 나에게 숙제를 시키네)  이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언어적 대치 자극을 주며, 적당한 실제 반응 (대가를 요구한다던가, 화를 낸다거나) 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사실 명료하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도 우리가 잘 확인할 수 있는 행동을 연구하는 것 처럼, 블룸필드는 언어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은 언어 연구 방법론의 과학화와 객관화를 초래한다. 의미에 아예 신경을 안 쓴 것은 아니었다. 무슨 말인가, 라고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사실 중요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의미에 신경을 쓰게 되면 기껏 세워둔 과학적 방법론이 객관적이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여기서 구조주의의 한계점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런 자극-반응에 의하여 우리가 언어 생활을 하게 된다면, 어린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언어를 익히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씩 하나씩 어린 아이들에게 언어 자극을 주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던 문장 구조를 커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한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잠깐 여담을 하자면 사람은 어떻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일견 당연해보이는 이 말은 사실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규정하기가 힘든 질문이다. 이 질문 안에는 우리가 어떤 언어, 예를 들어서 한국어나 영어를 익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것과, 그 언어를 어떻게 우리가 습득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언어로 우리가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린아이때에는 거칠 것이 없이 언어를 습득해왔었던 것 같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말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외국에 나가서 살다 오면 그나라의 언어를 익히기에 상당히 수월하다는 것은 주변에서 흔히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를 쓰고 미국 등지에 어학 연수를 어렸을 때 보내려고 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외국 사람들이 한국어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만약에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살게 된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본제로 들어간다. 이런 어린아이는, 더 나아가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언어를 익힐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뒤에 설명할 플라톤의 문제, 라고도 한다.

 

이런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주의를 내세운 학자들이 위처럼 객관적인 수단에 너무 집중한다면 만약에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그 자료가 별로 적당해보이지 않아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자료 청취에 응했다고 하자. 학자들은 술에 취해서 꼬인 발음과 문장을 '객관적으로' 가져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각 언어에 대한 공시적인 연구는 각 언어로서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전체 언어의 보편성에 대한 연구는 도리어 부족하게 된다. 각 개별적인 완결된 체계로서의 언어가 여러 개 존재하는데, 이들 사이에서 인간 언어의 보편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앞서 소쉬르에서부터 내려온 전통, 언어학자는 언어 밖에서 그 체계를 바라보는 관찰자여야 한다, 이 심화됨으로서 한편으로는 언어 내부에 담긴 의미에 소홀히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촘스키가 등장한다. 언어학계에는 촘스키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촘스키를 따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촘스키를 어색해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의 연구방법, 그러니깐 마치 생물학자와 같은 그의 과학적인 언어 탐구법에 반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든 촘스키가 언어학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기존의 구조주의 언어학 이론에서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언어, 그 언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귀납적으로 자료를 모으는 것이 지상 목표였다. 하지만 이들은 앞서 말한 것 처럼 한계점을 보이게 되고, 여기서 촘스키는 하나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촘스키는 하나의 가설을 먼저 세우고 연구를 진행하는데, 이는 기존의 플라톤 문제에 기인한 것이었다. 플라톤 문제는 앞서 조금 설명했지만, 보통 러셀이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외부 세상과의 접촉이 개인적이고, 또 제한적인데도, 어떻게 자신들이 알고 있는 만큼의 것들을 알게 되는 것일까, 라고 말이다. 이는 일종의 자극의 빈곤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적어도 모국어에 관한 것에서는 주어진 자극 그 이상의 것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특히 아이들은 그들이 경험하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런 자극의 빈곤에 관해서는 기존에서는 두 가지 설을 내세울 수 있었는데 각각 경험(연장자의 말을 모방)때문에, 혹은 유전(환경과 유전의 영향)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했었지만, 둘 다 제대로 된 해결책은 아니었다.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두 가설을 종합하여야만 하였고 여기서 촘스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언어는 바로 생득적이라고 말이다.

 

우리 몸에는 마치 소화기관 등과 마찬가지로 언어기관이 존재한다. 그리고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대과학의 발전으로 PET-CT등의 기구를 통하여 여러 실험을 통하여 LAD(언어습득장치)가 좌뇌의 PT(Planum Temporale)에 위치하리라고 특정짓고 있다. 촘스키의 언어생득가설을 지지하는 것이다. 동물들은 인간과 달리 PT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말을 할 수 없다. 이 PT가 소리신경으로 연결되면 구어로, 손신경으로 연결되면 수화로 언어가 발화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언어능력을 고유한 특성으로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언어능력이라는 것은 기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이야기했듯 한 지역에서 한 시점에서의 언어의 양상과 다르고 특히나 그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저, 행동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다.  좀 더 보편적인 생물의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말은 우리에게 노출된 언어들을 모두 습득할 수 있다는 말로 바뀔 수 있다. 노출된 언어를 모두 모국어로 습득할 수 있다면, 이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를 두고 보편문법이라고 말하며, 여기서 우리는 촘스키의 보편문법UG을 잠깐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의문점이 생긴다. 보편문법이라는 말은 마치 하나의 언어를 익히면 다른 언어들도 충분히 다 똑같은 문법을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우리는 저 말을 그런 법칙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다. 언어내에 형식적, 실질적인 보편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이는 촘스키의 그 유명한 변형생성문법, 의 기초가 된다.) 이런 보편문법은 좀 더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보편성을 가리킨다. 이는 매개변수들로 조직된 결합구조가 바로 언어라는 이야기이다. 이 결합구조는 어린아이들의 머릿 속에 있다가, 환경이라는 매개변수값을 통하여 각자의 독특성으로 향하며 어떤 문장이 잘못된 문장인지 파악하게(우리는 특별한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모국어에 잘못된 문장을 안쓸수 있다.) 된다.

 

앞서 소쉬르가 언어에서의 과학적 연구의 대상을 랑그로 두었다면 촘스키의 경우에는 내재언어로 둔다. 이렇게 언어 연구의 대상을 내재언어로 두게 된 까닭은, 기존의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의 과학적 연구 방법의 대상은 무한한 수가 있을 수 있다는 문제점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길고 긴 무한한 문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촘스키는 연구 대상을 내재언어에 국한시킨다. 내재언어는 말 그대로 내재해 있는 언어이다. 개별 인간의 신경 조직에 담겨져 있는 지식이다. 화자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을 귀납적으로 수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런 문장을 만들 수 있게 되었는가, 그 지식에 눈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그런 지식에 대한 연구이다. 소쉬르의 랑그와 촘스키의 내재언어는 비슷한 면모도 많지만 촘스키의 내재언어는 규칙적인 체계이며 (랑그는 기호와 규칙을 포함한다.) 사회적인 랑그와 달리 개인적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제 변형생성문법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사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런 변형생성문법에 대해서 깊게 알지 못해도 크게 상관은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왼쪽의 책은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을 다룬 책인데, 원서이다. 한 번 번역이 되어 출판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검색이 안되어 원서를 표시해두었다.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훑어보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지만 아무래도 번역본을 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면 번역본을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나도 번역본을 읽었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의외로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에 관련된 입문서 등은 그의 유명세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이론이 너무 옛날에 기틀이 잡혀서 그런 것일까? 여하튼 책은 구절구성기술법이나 유한상태문법을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것들 보다는 변형생성문법에 대해서 바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이 글에서는 표준이론에 준해서 간단히 다루며, 최근의 최소주의이론은 제외한다.)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 가지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어야만 하겠다. 바로 표시층위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살펴보면 언어는 그 의미를 우리의 정신과 발음에 연결시킨다. 혹은 연결시키는 부분을 찾아야 옳을 것이다. 저런 부분들은 수학적인 부분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 자료를 넣는다고 해서 의미있는 자료가 바로 산출되는 기계처럼 해석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문법 구조는 내부에 복잡성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나타낸 것이 표시 층위이다.

 

이런 표시 층위는 초기 이론에는 네 가지 층위를 가진다. 음성형태, 논리형태, 기저 구조와 표면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현재 발달된 최소주의 이론에서는 음성형태와 논리형태만으로 구성되어있지만, 이 글에서 살펴볼 범위를 넘는다. 음성형태와 논리형태는 접합면 층위라고 불리며, 이들은 비언어적인 발음이나 정신에 연결되어있다. 기저 구조와 표면 구조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지만 절대 심오하다거나 표면에 있다거나 하는 구조는 아니다. 이런 층위를 나눔으로써 언어의 복잡성을 줄여서 언어 구조를 분석 가능한 것으로 만드려는 것이 촘스키 언어학의 핵심이다. 이제 변형생성문법으로 넘어가면, 표준이론에서는 구절의 구조 규칙에 어휘를 넣어 기저 구조가 생성되며, 이는 의미규칙의 영향을 받아 의미가 있게 된다. 이제 기저 구조는 변형규칙의 영향을 받아 표층 구조를 생성한다. 바로 이것이 변형생성문법의 핵심이다. 물론 이런 설명으로는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많이 예를 드는 것이 영어의 능동태, 수동태 문장이다. 사실 실제적인 분석은 이런 예시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사실 수학의 집합론에서 쓰이는 방법을 가져왔다. 우리가 어느 집합을 정수의 집합, 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집합의 원소의 수는 무한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한할지라도 모두 공통적인 개념, 정수, 은 공유할 것이다. 언어에서도 이를 적용한 것이다.) 개념을 위해서는 나을 것이다.

 

I read a book.  - 1.

 

이런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를 수동태로 나타내면

 

A book was read by me. - 2.

 

가 될 것이다. 두 문장의 의미 변화는 없다. 이는 1번 문장이 변형되더라도, 변형규칙(여기서는 수동화 규칙이 될 것이다)의 영향을 받아서 모습이 바뀌더라도 문장의 의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의미는 표준 이론에서는 기저 부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 더 살펴보면 이런 예를 들 수 있겠다.

 

Singing girl. - 1'.

 

Writing book. - 2'.

 

위의 1' 과 2'는 모양이 똑같다. 둘다 명사 앞에 -ing가 오며 현재진행형처럼 보인다. 하지만 의미를 살펴보면 차이가 있다. 소녀가 노래를 부른다. (Girl is singing) 하지만 책은 쓰여진다. (Someone is writing book) 이렇게 표층구조가 비슷하게 보이더라도 실제로 그 의미가 담긴 기저구조는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런 변형생성문법은 앞서 말한 언어습득장치와 함께, 기존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을 해결해나간다. 이 글에서는 표준이론만 다루었지만 촘스키의 이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표준이론;기저구조만이 의미에 영향을 미친다, 에서 확대표준이론;기저구조와 표층구조 모두가 의미해석에 관여한다, 로 발전하고 이윽고 지배결속이론Government and BInding theory에서 기저구조는 일종의 변형규칙을 통해서 표면 구조로 변화하고, 이 표면구조는 음성학적인 규칙Phonological rule을 통하여 음성형태가 되며, 변형규칙을 통하여 논리형태로 변화한다, 까지 이르렀다. 보면 알겠지만 갈수록 기저구조가 의미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든다. 이는 그만큼 그의 이론이 많은 도전을 받았다는 점을 시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이 변형생성문법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언어학 연구에 끼치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그런데 사실 촘스키의 진정으로 위대한 발견은, 이런 이론들도 중요하겠지만, 앞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언어능력이 인간의 고유한 특질이라는 것을 제대로 밝혀낸 것이다. 막연하게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으니 동물과 다르다,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확실한 언어 기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로서 우리 인간은 동물과 분명 다르다. 우리는 언제나 언어를 사용하고, 심지어 이 글도 언어를 사용해서 쓰여졌다. 언어가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능력이라면, 언어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우리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쯤은 이런 능력이 어떻게 우리의 손에 있게 된 것인지, 이런 언어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여담인데 아래 글은 특수 상대성이론 관련 글이고 그 아래에는 히틀러 이야기를 끄적여놓았다. 내가 생각해도 글의 주제가 참.. 다양한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음 글에는 속칭 라노베, 그러니깐 서브컬처의 라이트 노벨 리뷰라도 적고 아즈마 히로키에 대한 사두용미..의 글을 끄적거려서 화룡점정을 찍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뭐, 사실 아즈마 히로키 책은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정도만 읽어보았기에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나의 서브 컬처 섭렵이 아즈마 히로키에 비해 부족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풋. 근데 이런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되려나.. 물론 나는 오덕이 아니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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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8-29 13:17   좋아요 0 | URL
가연님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 덕분에 학교다닐때 번역해보았던 언어학노트를 다시 꺼내보았네요 그땐 제대로 번역하는데 급급해 언어학 전반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나봐요 노트도 다시 훑어보고 이 글도 읽다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며 재미있었어요 ^^

가연 2012-08-29 13:12   좋아요 0 | URL
오.. 뭐랄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 라는 말이 떠오르는데요, 풋. 제가 독학으로 끄적거리다보니.. 사실 고백하자면 이상할 것 같은 부분은 몽땅 빼버리긴 했지만, 아하하.. 혹시 글 내용 중에 좀 이상하거나 보충할 부분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셔도 되는데, 풋. 여하튼 이렇게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다행이네요, 풋.. 다시 봐도 딱딱한 글이라..

일개미 2012-09-04 02:19   좋아요 0 | URL
덕분에 언어학강의 질렀습니다...이러다 촘스키도 지를 기세...읽을 책이 산더미인데...아 여기 자주 오면 안되겠어요...ㅋㅋㅋ

가연 2012-09-07 15:32   좋아요 0 | URL
ㅎㅎ저도 산더미인지라.. ㅎㅎ
 
상대성의 특수이론과 일반이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음, 이주명 옮김 / 필맥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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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인슈타인이 어린 시절 학습부진아였다, 라는 말은 새삼스럽게 더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최근(이라고 한다고 해도 약 5, 6년 전에 나온) 출시된 아인슈타인의 평전을 보면 관점에 따라서는 딱히 학습부진아라고 할 만한 부분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워낙 어렸을 때 학습부진아라고 알려져있고, 그리고 학습부진아라고 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명제가 깨어지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지, 어려서부터 천재였는데 커서도 천재다, 라는 식의 명제에는 그다지 호감을 가지기 어렵다. 어쨌든 어렸을때의 아인슈타인은 어학이나 인문계통의 전반적인 지식은 많이 떨어지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의 숙부 덕분에(수많은 아동용 아인슈타인 일대기에 숙부가 어떻게 그에게 방정식을 가르쳤는지, 대수학에 흥미를 심어주었는지가 나온다.) 수학과 과학에 대한 흥미는 잊지 않았고, 각각의 분야에서 상당히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가 대학, 그것도 세계에서 상위권에 드는 대학인 스위스의 취리히 공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그의 뛰어난 수학 성적때문이었다. 다른 과목들이 점수가 부족했는데도 학장이 배려할 정도면 우수한 수준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물론 바로 입학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한 발 앙보하자면 이는 리처드 파인만 등 다른 물리학자들에 비하면 사실 아주 뛰어난 수준은 아니기는 하다.

 

기대나 흥미를 떨어뜨리는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리처드 파인만의 경우는 그의 어린 시절을 보면, 역시나 어려서도 천재였는데, 커서도 천재다, 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이다. 우리는 그의 기행들, 그리고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등과 같은 저서를 통해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지적 능력이 뛰어났었는지는 도리어 과소평가하기 쉽다. 하지만 파인만의 경우에는 혼자서 무한급수와 적분을 공부했고, 자신만의 기호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그가 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물리학에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학과에 지원한 다른 학생들을 수학시험에서 압도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이런 수준에 이른 파인만이나 몇 십자리의 곱셈을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한 문제를 풀 때 잠깐 동안 수많은 답을 찾는 경로를 계산해 낸, 그야말로 컴퓨터의 수준에 다다른 수학자 존 폰 노이만(계산을 쉽게 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개발했는데, 도리어 그 컴퓨터의 수준에 인간이 다다르다니 좀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과 같은 경우와 비교한다면 확실히 어렸을때의, 그리고 대학생때의 아인슈타인의 재능은 주변인들이 볼 때 좀 뛰어난 영재에 지나지 않아보였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에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시민이 되고, 대학에 남아 연구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삶이라는 것이 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지는 않기에, 가정교사와 같은 직업을 전전하게 되었다. 연인이었던 밀레바와 결혼을 하게 된 것도 대학 졸업 후의 일이다. 의외로 물리학자들의 지성미에 반하는 여자들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위에서 언급한 파인만의 예를 들어도 그렇고.. 아인슈타인도 연인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렇게 결혼을 아무런 안정도 없이, 가정교사 생활을 전전하면서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저때 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특허 사무소에 취직을 해서 특허사무소에서 어떻게 보면 단순반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남는 시간에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공부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특허사무소에서 일했던 것이 아인슈타인의 그의 이론의 기초를 닦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역사학자가 지은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라는 책을 읽으면 거기에 대해 흥미로운 추측을 진행시킨다. 당시의 정확한 시계가 필요한 상황이 아인슈타인의 시간에 대한 고찰에 영향을 미쳤다던가. 푸앵카레는 (그렇다, 그레고리 페렐만이 증명한 푸앵카레의 추측, 의 그 푸앵카레다.) 프랑스에서 경도국이라는, 선박에 필요한 정확한 경도를 측정하는 그런 기관의 회장이었다고 한다. 이 추측이 어디까지가 사실일지는 모르나, 확실히 흥미로운 추측이기는 하다. 그러니깐 빅뱅이론(미국드라마)의 쉘든 쿠퍼(주인공이자 이론 물리학자)처럼 아무 단순반복직업이나 택해서는 물리학적인 영감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는 1905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다른 물리학자들이라면 평생을 바쳐서 이룩할 만한 뛰어난 고찰로 가득찬 논문을 3개나 발표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광양자 이론(양자역학의 기초가 되며, 이것으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았다.), 브라운 운동 이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수 상대성 이론이다. 물론 아인슈타인 혼자서 이 모든 것을 이룩해내지는 않았다. 부연하자면,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서 아예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 근본조차 새로운 무엇인가가 번쩍 하고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광양자 이론은 막스 플랑크에게 영향을 받았다. 상대성 이론은 앞서 언급한 푸앵카레나 로렌츠에게 (특수 상대성 이론의 수식에는 로렌츠 변환, 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설령 아인슈타인이 아예 근본부터 새로운 이론을 이끌어내지는 않았다, 라고 할지라도 그의 위대함은 조금도 반감되지 않는다.

 

어느 책에서는 창의성을 이런 식으로 정의한다. 창의적인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가? 가장 뛰어난 이론을 보고 듣고 공부하라. 거기에서 조금만 비틀면 마치 나비효과처럼 처음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등장할 것이고, 그것을 잡고 끊임없이 궁구한다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이 말은 아인슈타인에게 걸맞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구도 아인슈타인처럼 빛을 생각해보지는 못했고, 그 누구도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해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그는 그렇게 기존의 물리학 체계를 보완해내었고, 우리가 더 완전한 진리에 한 걸음 닫을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생각인데, 어쩌면 아인슈타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쌓인 수많은 고찰과 이론들, 그리고 뛰어난 직관은 쌓이고 쌓여서 마치 폭발 직전의 화산과 같은 상태였다. 그런 폭발 직전의 화산과 같은 상태에서는 그 어느 누구라도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바로 그런 기폭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과학이라는 것은 쌓이고 쌓이고 쌓이다보면 결국에는 올바른 길(여기서 올바른, 의 의미는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는 바른, 이라는 의미와 동일하다.)로 발전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에테르를 믿고, 절대 시계, 그러니까 우주 그 어느 곳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절대 시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다른 이론들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상대성 이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듯,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에 대한 뛰어난 고찰이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취급하는 아이디어이다. 물론 시간은 공간과 엄밀하게는 동일하지 않다. 공간은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만 시간은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비가역적이라는 이야기이다. 고전 역학에서 사물의 이치를 밝혀보려고 노력했던 갈릴레오나, 뉴턴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좌표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좌표계라는 것은 묘해서, 우리가 어떤 좌표계를 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운동을 기술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관찰을 어디서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운동이 달라지게 보인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공을 하늘에 던진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공은 시간에 따른 위치함수로 그 운동을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때 죽어라고 배웠던 방정식들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보자. 내가 걸어가면서 그 공의 운동을 보는 것과, 내 친구가 가만히 앉아서 그 공의 운동을 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앞서 어떤 식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운동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내가 걸어가면서 운동을 보는 것과 친구가 앉아서 보는 것은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두 상황에서 시간은 어떻게 될까? 과연 그 두 좌표계에서 시간은 똑같이 흐를까?

 

갈릴레오 이래로 많은 고전역학의 연구자들은 당연히 시간이 똑같이 흐를 거라고 믿었다. 두 좌표계상에서 시간에 관한 함수로 위치함수가 주어졌을때, 두 계는 동시에 시간을 공유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별다른 증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자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뒤의 전자기학을 연구할 때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아래에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시간은 보편적인 상수가 아니다. 각 계(엄밀히 말하자면 관성계)에 따라서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서 이 제멋대로인 시간을 규정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빛이다. 아인슈타인은 대담한 가설을 내세웠다. 빛의 속도는 불변하다고 말이다. 빛의 속도는 어느 계에서든 불변하며, 이는 빛이 이동한 거리와 시간이 비례한다는 것을 이끌어내게 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무언가 모자란 기분이 든다. 무엇이 모자란 것일까? 그것은 빛이 단순히 어떤 측정 기준의 매체를 넘어서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다른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인식론적인 이야기를 모두 제외하고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빛이 우리의 망막의 수용체를 자극하여 뇌신경을 통해서 후두엽으로 상을 해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빛은 측정 기준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어느 사물이 어느 시간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를 동시에 규정해주는 매체이다. 우리가 빛이 없다면 어느 정보도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왜 블랙홀 내부에 정보가 있는가, 없는가 를 두고 왈가왈부하는가? 그것은 블랙홀 밖, 사상의 지평선 외부에 빛이 탈출하지 못하기에 그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어떤 의미있는 정보도 빛보다 더 빨리 전송될 수 없다는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빛은 정보의 매개 역할도 하기에 재미있는 현상을 이끌어내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사고 실험으로 도달했던 바로 시간팽창과 길이수축이라는 현상을.

 

시간을 재는 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빛이다. (처음에는 대담한 가설이었지만 이윽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진실이 된다.) 빛이 이동한 거리와 시간이 비례한다. 비스듬하게 광원을 비추고 다시 반사되어 돌아오는 거리를 잰다면, 빛이 많이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볼 수 있으니, 최대한 비스듬하게 광원을 비출수록 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광원을 비추는 방법은 물론 우리가 각도를 변화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운동을 할 때 그런 현상을 나타나게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몇 가지 수식을 적절히 이용하면 시간이 팽창한다는 수학적 수식을 얻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길이 수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시간이 팽창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길이 수축은 쉽게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가 관찰한 일정한 속도는 거리를 시간으로 나누었을때 등장하는 값이다. 이 식에서 시간이 팽창하게 된다면 일정한 속도일 경우 당연히 거리가 수축해야만 유지가 된다. 마침 우리는 일정한 속도에 대응할만한 멋진 매개물도 있다. 바로 빛이다. 광속 불변이라는 가설에서부터 우리는 시간 팽창과 길이 수축 모두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는 운동하는 물체에 자를 매다는 방법으로 유도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빛은 정보를 우리에게 주는 매개물이다. 길이는 누구나 알다시피 어떤 물체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를 측정하는 것인데, 이 양은 절대적인 것이다. 사람이 측정할 수 있는 도구로서는 오차의 한계가 있겠지만, 마치 이데아의 원형처럼 무언가 절대적인 값이 하나 존재할 것이다. 이를 자신의 좌표계에서는 고유한 길이를 가진다고 하여 고유길이, 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으로서는 빛이라는 매개를 바탕으로 길이가 얼마인가를 받아들이기에 길이 수축이 일어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 자신의 좌표계가 아닌, 다른 좌표계에서 측정을 했기에 길이가 줄어드는 것 처럼 보인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한 번 도 꼬아서 생각해본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관측자이다. 관측자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빛을 뿜는 물체가 관측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나, 관측자가 빛을 뿜는 물체에게 다가가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가 중학교나 고등학교때 파장을 배우면서 물에 몇 번 손가락을 휘저음으로써 파원을 만들고 물결파를 형성하는 모습을 본 적 있을 것이다. 물결파는 물이라는 매질이 필요하지만 비슷한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빛은 매질이 필요가 없다. 결국 빛은 빛 자신과 그 빛을 보는 사람의 상대적인 운동관계, 상대속도에만 그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낭만적인 이야기이다.

 

여기까지가 사실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명한 식,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 정리는 그 이후에 간단한 수학적 장치를 통해서(물론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유도된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부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 등가성이 나오게 된 것은 뉴턴 역학을 보완하면서 나오게 된 것이다. 기존의 뉴턴 역학은 사실 운동에 대한 세 식에 의하여 체계가 완료된 상태였다. 마치 아르키메데스가 거대한 지렛대를 주면 지구의 무게를 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 처럼 뉴턴의 역학은 마치 라플라스의 악마와 같이 작용하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이론 이후에 그의 역학에는 어느 정도 수정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어떤 수정이 가해진 것일까?

 

뉴턴의 역학에서는 운동량의 보존 법칙이 성립한다. 외부와의 소통이 없는 어느 곳에 어떤 물체들이 있다면, 그 물체들의 총 운동량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우리가 완전탄성, 비탄성 하면서 탄성계수를 외웠던 바로 그 부분이다. 운동량은 간단하게 정의된다.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말이다. 이제 상대성 이론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저 물체들이 있는 좌표계를 움직여보면 특이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기존의 계에서는 운동량이 보존되었는데, 움직이는 계에서는 성립이 안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론적인 입장에서는 새롭게 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보통은 우리는 질량이 특수하고 완전한 값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질량을 다시 재정의해서, 상대론적인 질량을 도입하여 다시금 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 에너지 보존 법칙과 운동 법칙에서 유도후 도출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공식 E=mc² 다. (물론 여기서부터 설명을 위해서는 수식이 필요하다.)

 

이후 10년에 걸쳐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해서 아인슈타인은 연구를 거듭했다. 보통 물리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방정식, 이라고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보통 일반상대성이론에서의 장방정식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도출된 결론은 (안그래도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이미 충격을 받았는데) 더욱 더 충격적이고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기적의 해는 1905년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제목 그대로Annus mirabilis 그의 기적의 해의 연구의 편린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치기로 한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다가오지만,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본인에게 달린 것이다, 라고들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인슈타인은 그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두 손을 꽉 붙잡았고, 이윽고 자신의 손으로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 아무리 고전역학의 모순점이 폭발 직전에 다다랐더라도 아무런 노력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의 물리학에 대한 심원한 고찰과 존재계에 대한 '신비로운' 흥미를 계속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에게 이런 일들이 다가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은 나에게도 그런 기적의 해가 언젠가 찾아오지 않을까,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기적의 해가 찾아오기 위해서는 나또한 스스로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그렇게 활짝 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게, 물론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하겠지만, 존경을 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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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13: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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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1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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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노동의 배신.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언어 영역의 지문으로 출제되기까지 했었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은 여러 작품을 하나로 묶은 일종의 연작소설입니다. 이 책은 프롤로그인 뫼비우스의 띠, 에서부터 시작해 에필로그, 에서 이야기는 끝이 나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은 얼핏 읽기에는 주인공들도 이 주인공이 나왔다가 저 주인공이 나왔다가, 하는 등 약간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다 읽고 나면 하나의 거대한 주제 아래에서 정말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요.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상징들을 살펴보면, 수학 분야에서 이용되는 도형들을 그 상징으로 사용한 경우가 등장합니다. 프롤로그의 제목인 뫼비우스의 띠, 는 저 유명한 뫼비우스의 띠, 그러니깐 하나의 띠를 잘라서 안과 밖의 구분이 없게 한 번 꼬아 만든 띠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물론 정작 저 이야기에서는 뫼비우스의 띠에 관한 이야기는 수학교사만 잠깐 언급하는 선에서 끝이 나지만, 책 전체의 프롤로그 격인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후의 이야기들과 주제의식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책을 계속 읽어가다보면, 다시금 뫼비우스의 띠, 처럼 비슷한 위상을 가지는 수학적인 상징이 등장합니다. 뫼비우스의 띠, 와 마찬가지로 한 이야기의 제목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클라인 씨의 병입니다.

 

클라인 씨의 병, 이야기는 근처 교회의 학생들이 나무껍질을 벗겨서 생활하는 한 애꾸눈 노인을 찾아오면서 시작합니다. 학생들은 애꾸눈 노인에게 설문조사를 하는데, 그 중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앞으로의 생활은 어떻게 변할거라고 생각하냐고 말이지요. 그러자 애꾸눈 노인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합니다. 자신의 삶은 앞으로 아주 좋아질 거라고 말입니다. 의아해하는 학생들에게 노인은 말을 덧붙이지요.

 

 

난 곧 죽을 거야.

 

 

애런라이크의 책 노동의 배신, 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고, 그 삶에서 무언가 이루겠다는 목표마저도 상실한 채 위의 노인과 마찬가지로 그저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상황이었고, 당시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 저자는 누군가가 직접 잠입 취재를 해서 그 실태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어느 편집장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본인이 직접 그 상황에 뛰어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막연한 상상만 하던 그녀였지만 직접 본인이 뛰어들어 일을 시작해보니 생각보다 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웨이트리스 일과 요양원 일, 청소 용역 일과 월마트 일을 체험한 그녀는 그 경험들을 살려서 분석을 내립니다. 먼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혹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어떤 절약 방법이 않을까,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런 절약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저 목숨만 하루하루 연명해 간다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3요소를 의, 식, 주라고 부르지요. 의복은 회사에서 입도록 지정된 색깔의, 혹은 아예 형식이 제한된 의복을 입게 되고, 그나마도 단벌이라서 그것을 입고 식사를 하다가 그 위에 음식물을 흘리면 세탁비, 거기에 더 나아가 여차하면 새 옷을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주거 환경은 더욱 더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대부분이 트레일러에서 잠을 자거나, 장기 모텔 투숙을 하는 현황이었고,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여러 명이서 한 곳에서 밤을 보내는 경우도 허다했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한 방에서 이 위치는 누구의 것, 이 소파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누구, 등 이렇게 제한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었지요. 저자인 애런라이크의 눈에 특히 더 불합리하게 보였던 것은, 이런 상황이라면 좀 주거환경에 드는 비용이라도 적어야 될 텐데, 주거환경을 구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지요. 그녀가 직접 집을 여러 곳에서 구해보면서 느낀 것은, 정말 가격과 그 가격으로 얻을 수 있는 효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격은 지나치게 그 효용에 비해서 높았고, 상대적으로 적절한 곳으로 보이는 곳도 일자리를 구한 곳과의 거리 및 교통비를 생각해보면 또 제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들은 저자에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비싼 돈을 주고 모텔에서 장기 숙박하는지, 혹은 불합리한 선택을 고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들은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저 울며 겨자 먹기로 '강요'당하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가난한 사람들이 고를 수 있었던 식사는 다른 의, 주에 비해서 좀 더 상황이 나았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리고 심지어 중산층에 이르는 사람들마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뚱뚱한 이유는 그들이 자기 관리를 안했기 때문이며, 그렇게 자기 관리를 안하는 사람들은 도태되어도 마땅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할 수 있는 음식물들은 그들의 예산 범위 안에서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 즉석조리식품들, 패스트 푸드 뿐입니다. 요즘 슬로우 푸드가 몸에 좋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일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뺏는 슬로우 푸드는 사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고열량의 음식들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느긋하게 먹을 수가 없다보니 자연스레 급하게 허겁지겁 음식을 먹게 되고, 여유가 있을때 한 번에 음식을 많이 먹는 등 건강에 좋지 않은 습관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악순환이 절대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다시 클라인 씨의 병, 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난쏘공, 의 큰아들 영수가 이 병을 보게 된 것은 그에게 영향을 준 과학자의 공장 내 그의 방이었습니다. 거기서 영수는 ‘긴 대롱에 구멍을 뚫어 한 쪽 끝을 그 대롱에 넣어 만든 이상한’ 병을 보게 됩니다. 이 병이 바로 클라인 씨의 병, 인데, 이 병은 내부와 외부,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앞서 보았던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이지요. 처음에는 영수는 이 병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깨닫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됩니다. 클라인 씨의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이라는 것을. 닫힌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병의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클라인 씨의 병의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여기에서의 깨달음은 이윽고 영수가 은강 공단의 회장을 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영향을 줍니다. 이 상징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은 단순히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가 되고,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가 되는, 그리고 그런 차이마저도 사라지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 가해자(은강공단의 총수)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은강공단의 노동자)가 가해자가 되는(이후 영수는 은강공단의 총수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의미를 받아들여,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차이가 없는 공간이라면, 왜 이 공간은 이렇게나 부조리가 만연할까요? 그렇기에 여기서 더 나아가서, 클라인 씨의 병은 닫힌 공간처럼 보이는 곳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길잡이인 벽이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완전히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클라인 씨의 병이 어디로 향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외부와 내부 모두를 아우르는 클라인 씨의 병, 의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도대체 이 공간의 어디쯤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요. 그렇기에 영수는 벽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조그마한 변화라도 일으키기 위해서 총수를 살해하려고 나선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노동의 배신, 은 인상적인 글귀로 마무리 됩니다. 언젠가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임금을 요구할 것이고, 엄청난 분노와 파업과 혼란이 만연할 것이지만, 그 날이 오더라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모두가 더불어 잘 살 거라고 말입니다. 이 노동의 배신, 에 나오는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워킹 푸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겠지요. 지금은 ‘곧 죽기에 앞으로 더 좋아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몫을 정당하게 평가받으며 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올지 모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서는 저 영수가 은강 공단의 총수를 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어떤 혼란이 선행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살인은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파업과 분노가 횡행하는 단계를 거칠 가능성이 높겠지요. 사실은 우리 모두 밖과 안이 구분되지 않는 그런 클라인 씨의 병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격차가 생기는 것은 이 병의 공간의 어느 구석에 각각 서로 모여서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일시적인 상황입니다. 어떤 부가 끝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이지요. 노동자들이 병의 벽을 붙잡고 걸어온다면 언젠가 충분히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뛰어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한 말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데이비드 흄은 회의주의를 극한까지 몰고 간 철학자로, 그의 논문은 아인슈타인에게 지적 영감을 주기도 했었다지요.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단지 이성만으로 결코 어떤 행위를 산출할 수도, 의지를 일으킬 수도 없으므로, 나는 동일한 능력이 의지를 방해할 수도, 감정의 선호를 반대할 수도 없다고 추론한다.’ 복잡한 문장이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의 다른 말, ‘이성은 단지 열정의 노예이고, 노예이어야 한다.’ 와 그 의미하는 바가 일맥상통합니다. 이성은 그 자체로 사실 그 자체를 의미하며, 이성만으로는 우리의 소망을 현실화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이성은 열정이 그 자신을 이끌어주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노예입니다. 동시에 이성만으로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기에 그 자신이 한 계에서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노예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시사해줍니다. 우리는 워킹 푸어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서 최저임금 등을 냉철히 따져보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립니다. 노동자들이 불합리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구나, 등과 같은 판단들 말입니다. 하지만 그 판단이 판단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그 어떤 행위도 산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열정입니다.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겠다, 는 열정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힘든 생활을 하는 워킹 푸어들, 노동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노동자들이 병의 벽을 붙잡고 걸어올 수 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병의 벽을 붙잡는 등의 행위를 통해서 노동자들이 있던 위치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상황은 언제나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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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puha 2012-08-27 18:34   좋아요 0 | URL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가연님 글은 항상 쏙쏙 들어오고, 끝까지 읽게 되네요. 저도 어제 쓰고서는 오늘 조금 더 보충하고 다듬어 보았습니다. 즐거운 오후 되세요 :)

가연 2012-08-29 02:07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koopuha님 글도 자주 들러서 읽고 있습니다. 어제 쓰신 글이랑 이번에 보충하신 글도 보았습니다. 벌써 밤이라.. 좋은 밤 되세요, 라고 말씀드리면 되려나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