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는 그의 언어학적인 업적의 대부분을 늦어도 1970년대까지는 완성하였다. 그 이후의 촘스키는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가 더 강하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노엄 촘스키의 모습도 그의 사회운동가적인, 그리고 일종의 시대의 양심, 으로서의 면모가 강할 것이다. 미국을 비판해왔다. 권위주의적인 나라에 반대해왔다. 설령 자신의 목숨이 위협당하더라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학자들과 대담을 펼치며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켜왔다. 물론 그의 사생활적인 면모에서는 그 자신의 견해와는 다르게 행동하였다는 말도 있으며(세금을 피하려고 하였다거나) 캄보디아의 민간인 학살을 왜곡시켰다는 비판도 받기도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의 연구는 펜타곤에서 지원받았었다. 뭐, 지원받았다고 해서 지원해주는 쪽을 비판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설령 그를 위선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언어학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촘스키의 전기조차 읽지 않았다.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촘스키의 일생보다는 그의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나는 그의 일종의 시대의 양심으로서의 공과 과를 캐내는 것 보다는 그의 언어학적 업적에 초점을 맞추어 풀어쓰고자 한다. 물론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이고, 최대한 용어들과 의미를 풀어쓰는 과정에서 뜻이 본래의 뜻과 달라지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이렇게 정리해두는 것에 그 의미를 두려고 한다.
유명한 언어학자를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촘스키 뿐만 아니라 소쉬르를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구조주의적인 분석법을 (영역은 다르지만 레비 스트로스와 함께) 거의 최초로 정립시킨 소쉬르는 왼쪽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펴냈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가 죽은 뒤 출간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기호학적인 접근을 주창한다. 말 그대로, 기호들에 대한 학문인 기호학에서는 그 내용보다는 아무래도 형식이 더 중요하다. 그의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다 : 언어는 실체가 아닌 형식이다. 그 이전의 언어학에서는 보통 그 언어가 어떤 내용을 가지는가, 에 더 초점을 두었다면 그는 일종의 구조주의적인 형식을 도입하였고, 그의 이런 관심은 결국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법칙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우리들에게 많이 익숙한 개념들, 랑그, 빠롤, 기표, 기의, 공시성, 통시성 등과 같은 개념을 제시하며 이는 이후에 라캉이나 데리다 등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실 이 글에서 살펴볼 것은 촘스키의 언어학적인 체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개념을 여기서 밝힐 수는 없고, 랑그와 빠롤에 대해서만 간략히 설명하겠다. 랑그는 언어다.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체계이며, 언어 전체이다. 그에 비하여 빠롤은 바로 지금 여기, 에 속하는 것이다. 언어의 특수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추상적 언어체계에서 몇 몇을 주워모아 언어를 발화하는 방식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소쉬르는 랑그를 더 중시하기는 하는데, 이는 빠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어떤 문장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 언어체계 안에서만 그 의미를 가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위의 일반언어학 강의, 에서 '무엇보다도 랑그의 영역에서 보아야 하며 랑그가 다른 모든 발현의 규범' 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소쉬르가 구조주의적인 기술을 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좀 더 보편적인 랑그를 중시하는 것이 당연하다. 앞서 말한대로, 법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랑그가 더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게 되고, 이는 그의 언어학을 랑그를 대상으로 하는 언어학으로 규정되게 만든다. 여기서 하나 더 밝혀 두어야 할 그의 개념은 공시성인데, 기존의 언어 연구는 언어의 통시적인, 그러니깐 역사적인 측면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소쉬르는 언어가 시간과는 관계 없이 '하나의 체계'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공시적인 측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렇기에 언어학자들은 그 완전한 체계를 바라보는 일종의 관찰자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랑그와 빠롤과 연관지어보면 흥미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소쉬르가 종종 이야기했던 예시, 체스게임에 관한 비유를 그대로 따라가보면 체스게임은 그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이 체계는 랑그이며 공시적인 체계이다. 그러나 게임의 양상은 언제나 다르다. 개별적이고 예측하기 어렵다. 이는 언어에서 빠롤에 비유되며, 이 빠롤은 통시적 운동, 시간에 따른 운동을 하며 변화된다. 뒤집어 말하자면, 아무리 각 게임이 특이한 모습을 가지더라도 그 게임들은 모두 체스게임이라는 이야기이다. 오른쪽의 책은 일반언어학 노트, 인데 일반언어학 강의, 와 함께 읽는다면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사실 왼쪽의 언어학의 사상사, 보다 전반적인 언어학사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김방한 교수의 책들인 언어학논고, 나 언어학의 이해, 를 참고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단점이라면 너무 오래전에 나온 책들이라 아마 도서관에서나 읽을 수 있으리라. 여하튼 위의 소쉬르에서 시작된 구조주의 언어학은 발전되어 나가면서 몇 개의 학파를 만들게 된다. 제네바 학파, 프라하 학파, 코펜하겐 학파, 런던 학파가 바로 그것인데, 각각에는 뛰어난 학자들이 또 등장하여 소쉬르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발전시켜나간다. 이 학파들 중 눈여겨 볼 학파가 프라하 학파인데, 이 학파에 속한 학자들 중 한명이 바로 로만 야콥슨이다. 유럽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이렇게 발전해나갈 무렵, 미국에서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물론 각각의 언어들의 '구조적인 특성' 을 강조하는 경향으로는 유럽과 미국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그 연구방향이 좀 더 실재적이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토착어의 기술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의 언어가 멸종하기 전에 어떻게든 알아두려고 노력하던 초기 미국의 구조학자들은 벽에 부딪히게 된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토착어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천여 개는 넘을 것이다. 이를 어떤 방식으로 기술을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에 부딪힌 그들은 그동안 연구해온 언어들의 범주로 그것을 기록해서는 안되리라고 막연히 여겼었다. 이런 언어들의 연구방법에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 이들 언어의 형태와 모습을 그대로 '기술' 하는 방법이 쓰였다. 여기서 앞서 소쉬르에서 조금 이야기한 공시성이 빛을 발한다. (초기 미국의 구조언어학자들이 연구를 진행시켰을때 주목한 것은 인디언의 언어에서는 딱히 시제형이 보이지가 않는데도 시간의 개념이 언어에 특별한 형태로 표시가 된다는 점이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 인디언들의 언어를 추출해보면 시제가 없는데도 시간의 개념이 보인다는 점에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시적인 방법이 아닌, 공시적인, 그리고 사회 전체에 주어진 랑그의 분석이 필요했고 이는 기술문법을 촉발시켰다고도 한다.)
이제 미국의 구조주의 언어학은 블룸필드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사실 사피어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사피어-워프 이론은 논술에 단골 출제되는 주제이다. 훔볼트의 영향을 받아서 언어구조가 우리의 사고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언어 상대성 가설이라고 하며, 이를 설명할 때 무지개 색깔을 나타내는 단어에 따라서 구별가능한 색깔이 차이가 난다, 등의 예시가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블룸필드에 대해서만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블룸필드는 언어 이론에 행동주의 심리학을 끌여들였다. 행동주의는 자극-반응에 따라 모든 현상을 기술하는 방법이다. 연이어 이야기하자면 직접 경험한 것과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에만 우리의 의식 현상을 한정시킨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이 행동은 어떤 자극에 따른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특정한 감정상태나 생각을 가져서 행동을 한 것이다, 라고. 그런데 이런 특정한 감정상태나 생각은 왜 생긴 걸까? 행동주의에서는 그 사람의 환경과 같은 외부 자극에 의해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특정 감정상태가 생겼으리라고 본다. 결과적으로 자극-반응, 자극-반응이 연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 사람의 생각 등을 연구하려고 마음먹었다면, 그 사람의 행동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단순히 자극-반응이 연이어 발생한다면 이는 도대체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동물도 때리면 깨갱하고 운다. 인간이 뭐가 다르겠는가.
이때 언어가 이런 행동주의 심리학에 삽입된다. 일단 언어를 인간 행동의 특수한 형태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대화에서 자극에 반응이 바로 뒤따르지 않고 그 사이에 언어가 삽입되는 상황을 볼 수 있다. 자극에 대한 언어적 대치 반응과 반응에 대한 언어적 대치 자극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내 숙제를 대신해달라, 라고 말하는 상황을 보자. 숙제가 많다. 이런 실제 자극을 보고 우리는 언어적 대치 반응을 보인다. (이봐, 내 숙제 좀 대신 해줘) 이 말은 청자에게는 언어적 대치 자극으로 작용하며 (아니 이 녀석이 나에게 숙제를 시키네) 이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언어적 대치 자극을 주며, 적당한 실제 반응 (대가를 요구한다던가, 화를 낸다거나) 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사실 명료하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도 우리가 잘 확인할 수 있는 행동을 연구하는 것 처럼, 블룸필드는 언어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은 언어 연구 방법론의 과학화와 객관화를 초래한다. 의미에 아예 신경을 안 쓴 것은 아니었다. 무슨 말인가, 라고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사실 중요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의미에 신경을 쓰게 되면 기껏 세워둔 과학적 방법론이 객관적이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여기서 구조주의의 한계점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런 자극-반응에 의하여 우리가 언어 생활을 하게 된다면, 어린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언어를 익히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씩 하나씩 어린 아이들에게 언어 자극을 주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던 문장 구조를 커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한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잠깐 여담을 하자면 사람은 어떻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일견 당연해보이는 이 말은 사실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규정하기가 힘든 질문이다. 이 질문 안에는 우리가 어떤 언어, 예를 들어서 한국어나 영어를 익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것과, 그 언어를 어떻게 우리가 습득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언어로 우리가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린아이때에는 거칠 것이 없이 언어를 습득해왔었던 것 같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말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외국에 나가서 살다 오면 그나라의 언어를 익히기에 상당히 수월하다는 것은 주변에서 흔히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를 쓰고 미국 등지에 어학 연수를 어렸을 때 보내려고 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외국 사람들이 한국어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만약에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살게 된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본제로 들어간다. 이런 어린아이는, 더 나아가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언어를 익힐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뒤에 설명할 플라톤의 문제, 라고도 한다.
이런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주의를 내세운 학자들이 위처럼 객관적인 수단에 너무 집중한다면 만약에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그 자료가 별로 적당해보이지 않아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자료 청취에 응했다고 하자. 학자들은 술에 취해서 꼬인 발음과 문장을 '객관적으로' 가져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각 언어에 대한 공시적인 연구는 각 언어로서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전체 언어의 보편성에 대한 연구는 도리어 부족하게 된다. 각 개별적인 완결된 체계로서의 언어가 여러 개 존재하는데, 이들 사이에서 인간 언어의 보편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앞서 소쉬르에서부터 내려온 전통, 언어학자는 언어 밖에서 그 체계를 바라보는 관찰자여야 한다, 이 심화됨으로서 한편으로는 언어 내부에 담긴 의미에 소홀히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촘스키가 등장한다. 언어학계에는 촘스키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촘스키를 따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촘스키를 어색해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의 연구방법, 그러니깐 마치 생물학자와 같은 그의 과학적인 언어 탐구법에 반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든 촘스키가 언어학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기존의 구조주의 언어학 이론에서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언어, 그 언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귀납적으로 자료를 모으는 것이 지상 목표였다. 하지만 이들은 앞서 말한 것 처럼 한계점을 보이게 되고, 여기서 촘스키는 하나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촘스키는 하나의 가설을 먼저 세우고 연구를 진행하는데, 이는 기존의 플라톤 문제에 기인한 것이었다. 플라톤 문제는 앞서 조금 설명했지만, 보통 러셀이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외부 세상과의 접촉이 개인적이고, 또 제한적인데도, 어떻게 자신들이 알고 있는 만큼의 것들을 알게 되는 것일까, 라고 말이다. 이는 일종의 자극의 빈곤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적어도 모국어에 관한 것에서는 주어진 자극 그 이상의 것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특히 아이들은 그들이 경험하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런 자극의 빈곤에 관해서는 기존에서는 두 가지 설을 내세울 수 있었는데 각각 경험(연장자의 말을 모방)때문에, 혹은 유전(환경과 유전의 영향)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했었지만, 둘 다 제대로 된 해결책은 아니었다.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두 가설을 종합하여야만 하였고 여기서 촘스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언어는 바로 생득적이라고 말이다.
우리 몸에는 마치 소화기관 등과 마찬가지로 언어기관이 존재한다. 그리고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대과학의 발전으로 PET-CT등의 기구를 통하여 여러 실험을 통하여 LAD(언어습득장치)가 좌뇌의 PT(Planum Temporale)에 위치하리라고 특정짓고 있다. 촘스키의 언어생득가설을 지지하는 것이다. 동물들은 인간과 달리 PT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말을 할 수 없다. 이 PT가 소리신경으로 연결되면 구어로, 손신경으로 연결되면 수화로 언어가 발화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언어능력을 고유한 특성으로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언어능력이라는 것은 기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이야기했듯 한 지역에서 한 시점에서의 언어의 양상과 다르고 특히나 그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저, 행동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다. 좀 더 보편적인 생물의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말은 우리에게 노출된 언어들을 모두 습득할 수 있다는 말로 바뀔 수 있다. 노출된 언어를 모두 모국어로 습득할 수 있다면, 이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를 두고 보편문법이라고 말하며, 여기서 우리는 촘스키의 보편문법UG을 잠깐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의문점이 생긴다. 보편문법이라는 말은 마치 하나의 언어를 익히면 다른 언어들도 충분히 다 똑같은 문법을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우리는 저 말을 그런 법칙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다. 언어내에 형식적, 실질적인 보편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이는 촘스키의 그 유명한 변형생성문법, 의 기초가 된다.) 이런 보편문법은 좀 더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보편성을 가리킨다. 이는 매개변수들로 조직된 결합구조가 바로 언어라는 이야기이다. 이 결합구조는 어린아이들의 머릿 속에 있다가, 환경이라는 매개변수값을 통하여 각자의 독특성으로 향하며 어떤 문장이 잘못된 문장인지 파악하게(우리는 특별한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모국어에 잘못된 문장을 안쓸수 있다.) 된다.
앞서 소쉬르가 언어에서의 과학적 연구의 대상을 랑그로 두었다면 촘스키의 경우에는 내재언어로 둔다. 이렇게 언어 연구의 대상을 내재언어로 두게 된 까닭은, 기존의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의 과학적 연구 방법의 대상은 무한한 수가 있을 수 있다는 문제점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길고 긴 무한한 문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촘스키는 연구 대상을 내재언어에 국한시킨다. 내재언어는 말 그대로 내재해 있는 언어이다. 개별 인간의 신경 조직에 담겨져 있는 지식이다. 화자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을 귀납적으로 수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런 문장을 만들 수 있게 되었는가, 그 지식에 눈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그런 지식에 대한 연구이다. 소쉬르의 랑그와 촘스키의 내재언어는 비슷한 면모도 많지만 촘스키의 내재언어는 규칙적인 체계이며 (랑그는 기호와 규칙을 포함한다.) 사회적인 랑그와 달리 개인적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제 변형생성문법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사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런 변형생성문법에 대해서 깊게 알지 못해도 크게 상관은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왼쪽의 책은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을 다룬 책인데, 원서이다. 한 번 번역이 되어 출판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검색이 안되어 원서를 표시해두었다.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훑어보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지만 아무래도 번역본을 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면 번역본을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나도 번역본을 읽었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의외로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에 관련된 입문서 등은 그의 유명세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이론이 너무 옛날에 기틀이 잡혀서 그런 것일까? 여하튼 책은 구절구성기술법이나 유한상태문법을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것들 보다는 변형생성문법에 대해서 바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이 글에서는 표준이론에 준해서 간단히 다루며, 최근의 최소주의이론은 제외한다.)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 가지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어야만 하겠다. 바로 표시층위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살펴보면 언어는 그 의미를 우리의 정신과 발음에 연결시킨다. 혹은 연결시키는 부분을 찾아야 옳을 것이다. 저런 부분들은 수학적인 부분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 자료를 넣는다고 해서 의미있는 자료가 바로 산출되는 기계처럼 해석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문법 구조는 내부에 복잡성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나타낸 것이 표시 층위이다.
이런 표시 층위는 초기 이론에는 네 가지 층위를 가진다. 음성형태, 논리형태, 기저 구조와 표면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현재 발달된 최소주의 이론에서는 음성형태와 논리형태만으로 구성되어있지만, 이 글에서 살펴볼 범위를 넘는다. 음성형태와 논리형태는 접합면 층위라고 불리며, 이들은 비언어적인 발음이나 정신에 연결되어있다. 기저 구조와 표면 구조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지만 절대 심오하다거나 표면에 있다거나 하는 구조는 아니다. 이런 층위를 나눔으로써 언어의 복잡성을 줄여서 언어 구조를 분석 가능한 것으로 만드려는 것이 촘스키 언어학의 핵심이다. 이제 변형생성문법으로 넘어가면, 표준이론에서는 구절의 구조 규칙에 어휘를 넣어 기저 구조가 생성되며, 이는 의미규칙의 영향을 받아 의미가 있게 된다. 이제 기저 구조는 변형규칙의 영향을 받아 표층 구조를 생성한다. 바로 이것이 변형생성문법의 핵심이다. 물론 이런 설명으로는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많이 예를 드는 것이 영어의 능동태, 수동태 문장이다. 사실 실제적인 분석은 이런 예시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사실 수학의 집합론에서 쓰이는 방법을 가져왔다. 우리가 어느 집합을 정수의 집합, 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집합의 원소의 수는 무한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한할지라도 모두 공통적인 개념, 정수, 은 공유할 것이다. 언어에서도 이를 적용한 것이다.) 개념을 위해서는 나을 것이다.
I read a book. - 1.
이런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를 수동태로 나타내면
A book was read by me. - 2.
가 될 것이다. 두 문장의 의미 변화는 없다. 이는 1번 문장이 변형되더라도, 변형규칙(여기서는 수동화 규칙이 될 것이다)의 영향을 받아서 모습이 바뀌더라도 문장의 의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의미는 표준 이론에서는 기저 부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 더 살펴보면 이런 예를 들 수 있겠다.
Singing girl. - 1'.
Writing book. - 2'.
위의 1' 과 2'는 모양이 똑같다. 둘다 명사 앞에 -ing가 오며 현재진행형처럼 보인다. 하지만 의미를 살펴보면 차이가 있다. 소녀가 노래를 부른다. (Girl is singing) 하지만 책은 쓰여진다. (Someone is writing book) 이렇게 표층구조가 비슷하게 보이더라도 실제로 그 의미가 담긴 기저구조는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런 변형생성문법은 앞서 말한 언어습득장치와 함께, 기존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을 해결해나간다. 이 글에서는 표준이론만 다루었지만 촘스키의 이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표준이론;기저구조만이 의미에 영향을 미친다, 에서 확대표준이론;기저구조와 표층구조 모두가 의미해석에 관여한다, 로 발전하고 이윽고 지배결속이론Government and BInding theory에서 기저구조는 일종의 변형규칙을 통해서 표면 구조로 변화하고, 이 표면구조는 음성학적인 규칙Phonological rule을 통하여 음성형태가 되며, 변형규칙을 통하여 논리형태로 변화한다, 까지 이르렀다. 보면 알겠지만 갈수록 기저구조가 의미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든다. 이는 그만큼 그의 이론이 많은 도전을 받았다는 점을 시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이 변형생성문법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언어학 연구에 끼치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그런데 사실 촘스키의 진정으로 위대한 발견은, 이런 이론들도 중요하겠지만, 앞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언어능력이 인간의 고유한 특질이라는 것을 제대로 밝혀낸 것이다. 막연하게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으니 동물과 다르다,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확실한 언어 기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로서 우리 인간은 동물과 분명 다르다. 우리는 언제나 언어를 사용하고, 심지어 이 글도 언어를 사용해서 쓰여졌다. 언어가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능력이라면, 언어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우리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쯤은 이런 능력이 어떻게 우리의 손에 있게 된 것인지, 이런 언어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여담인데 아래 글은 특수 상대성이론 관련 글이고 그 아래에는 히틀러 이야기를 끄적여놓았다. 내가 생각해도 글의 주제가 참.. 다양한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음 글에는 속칭 라노베, 그러니깐 서브컬처의 라이트 노벨 리뷰라도 적고 아즈마 히로키에 대한 사두용미..의 글을 끄적거려서 화룡점정을 찍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뭐, 사실 아즈마 히로키 책은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정도만 읽어보았기에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나의 서브 컬처 섭렵이 아즈마 히로키에 비해 부족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풋. 근데 이런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되려나.. 물론 나는 오덕이 아니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