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테 공주의 방은 조금 어두웠다. 그렇기에 꿈사냥꾼이 그의 앞에 있는 아테 공주가 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아테 공주는 단추 대신에 방울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옷을 벗으려고 하거나, 옷을 입으려고 할 때는 항상 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방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아테 공주의 방에 들어와 있는 꿈사냥꾼마저도 그 방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찾을 수 없으며, 어느 한 상태를 모르면 다른 상태도 알 수 없다. 방울 소리는 적어도 그녀에게 한해서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촉매였다. 물론 어느 상태가 그녀에게 좋은 상태인지는 그녀 자신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아테 공주의 침실은 커다란 경호견들이 새하얀, 너무나 하얘서 은빛마저 감도는 그런 털을 두르고, 그 털만큼이나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지키고 있었다. 그 경호견들은 마치 조각상같았으며, 가끔씩 혀를 드러내고 헐떡이지 않으면, 혹은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마지막으로 배가 규칙적으로 부풀어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지 않았다면 마치 어느 신전에서 침입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세워둔 가고일과 같은 조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호견들이 잠깐 움직일때에는 음식을 먹을 때 뿐이었고, 그 외에 낯선 사람이 아테 공주의 침실을 기웃거릴때 눈동자만 좌우로 굴리며 경계할 뿐이었다. 복도에는 어렴풋한 지린내가 감돌고 있었다. 유일한 때가 있다면 경호견들이 교체될 때의, 그러니까 한 무리는 자러 가고 다른 무리가 들어와 다시금 석상처럼 서 있을 때의 어수선함 뿐이었겠지만, 그런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꿈사냥꾼은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꿈사냥꾼은 자신이 가진,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사용하였다.

 

아테 공주는 미인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물론 꿈사냥꾼이 그녀의 침실까지 들어가게 된 것은 그녀가 미인이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테 공주는 카간의 친척이자 그의 정부이다. 그녀의 몸이 탐난다고 해서 목숨을 버릴 만큼 꿈사냥꾼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한 번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만약에 그녀의 침실이 많은 경호견들로 지켜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아테 공주라는 인물은 실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고 꿈사냥꾼은 단정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침실 열쇠를 받자 - 열쇠는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그는 아테 공주가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꿈사냥꾼은 사제였다. 꿈을 사냥하는 사람과 사제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지는 아담 루하니, 시간과 영원을 다루는 천사만 알 뿐이다. 아담 루하니는 천사이자 인간이었다. '모든 사람이 가진 꿈이 하나로 모인다면 그 꿈은 거대한 인간 모양으로 변모할 것이며 그 크기는 대륙의 크기에 견줄만 할 것이다.' 꿈사냥꾼은 다른 꿈사냥꾼들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방법으로 아담 루하니를 숭배하였고, 그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수도원의 일만명이나 되는 처녀 수녀들을 아이를 가지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가 아담 루하니를 숭배하는 방법이었다. 아담 루하니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다. 진실된 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때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처녀 수녀들과 자신이 스스로마저 잊어버릴 것 같은 쾌락에 이를때, 그는 그녀들의 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담 루하니의 조각을 찾기 위해서.

 

"그래서 이제 여기에 이르렀나요."

 

아테 공주가 말했다. 그녀는 수도원의 마지막 수녀였다. 꿈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다. 그리고 아담 루하니의, 제 3의 천사의 조각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다음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 지라도, 자신은 꿈 사냥꾼의 역할, 수많은 꿈들을 모아 아담 루하니를 이룩해내고, 이윽고 인간이 인간 이상의 가능성을 가지게 만드는 그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역할보다도 지금 당장의 그에게는 그녀에게 확인해야만 할 것이 있었다. 그리고 아테 공주는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조각이었다. 그녀의 은빛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 사냥꾼은 숨을 헉, 하고 들이쉬었다. 과연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누구보다도 느렸다. 하지만 느린 사람이야말로 뒤에서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가장 빨리 보이는 사람인 것이다.

 

"공주여, 나는 그대에게 이르기 위해서 이 책을 넘기며 찾아왔습니다. 이 책의 매 장에는 죽은 자를 붙들어매고, 산 자를 죽게 만드는 독이 묻어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 장을 넘기면 나는 이제 죽을 것입니다."

 

"알 사파르, 내 앞에 있는 당신은 꿈인가요, 현실인가요?"

 

"나는 이미 꿈을 통해 당신의 말과 당신의 열쇠를 전달받았습니다. 여기 있는 나는 벌을 삼켜 죽은 알 사파르이기도 하며, 수많은 처녀를 잉태시켜 결코 편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게된 가련한 꿈사냥꾼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담 루하니의 사도, 그리고 그의 뒤를 바싹 따르는 종복입니다."

 

"나는 곧 죽을 거에요, 알 사파르.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이 힘을 모아 나를 지옥으로 보내려고 하고 있어요. 아마도 내 선택의 대가이겠지요.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에요. 그들의 지옥에서 나는 다시는 꿈을 꾸지 못할 거에요. 그렇기에 당신이 내 꿈을 꾸고 있었기에 다행이에요. 그래서 묻는 말이니 말해봐요, 알 사파르, 내가 다시 꿈을 꾸던가요? 그대의 꿈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이던가요?"

 

"공주여, 당신은 아랍인들의 종교를 맞아들이는 선택을 했고, 그 시도는 성공했지만, 그대의 깊은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스스로를 아담 루하니의 수녀이자 꿈사냥꾼의 후견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 아랍인과 유대인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책을 책이라 여기지 않고, 오직 주어지는 책만을 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손으로 아담 루하니의 흔적을 찾는 것이 그들의 주님을 구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완전을 꿈꿉니다. 거기서 꿈이 발생되어 나옵니다. 이미 완전한 상태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그리고 아랍인들은 모두 우리를 기만한 것이며, 그들의 주가 주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만입니다. 그렇기에 그대 자신도 스스로를 기만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옥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지어진 지옥이 아닌 스스로의 기만이라는 감옥을."

 

"나는 논쟁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들의 신을 믿으라고. 적어도 셋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공격을 당하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보복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들의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나도 스스로가 기만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앞으로의 나는 더한 기만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알라를 섬기다가 그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야훼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왕국은 너무나 깊고 그들이 아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이 가장 옳은 선택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면, 나 자신이 스스로를 기만할지라도,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될지라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에게 책을 집필해오라고 했었지요. 내 기만의 대가로 내가 잃어버리게 될 것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말이지요. 우리들의, 그리고 아담 루하니와 꿈에 관한. 그 책이 있고, 잊혀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몇 해전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흐른 적이 있을 때, 저는 예언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찾아올 것이며, 그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에 우리의 시간도 느리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저는 당연히 위대한 사람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사람이 개화하기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닐까, 라고 말이지요. 아마도 당신의 말은 옳을 것입니다. 내 꿈에서의 당신은 마치 새처럼 쿠, 라는 단어만 반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옥에 있지 않았습니다, 공주여. 당신은 당신의 현명함의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이리로 올라와요, 알 사파르. 마지막으로 내게 그대의 방식으로 아담 루하니를 섬기게 하세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이 바로 우리 민족의 책인 카자르 사전이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책의 매 장에는 몸을 마비시키고 이윽고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독을 발라두었습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이제 우리 꿈사냥꾼의 이야기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나 또한 사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몸, 우리 민족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짐작이 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부름을 받고 달려오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책은 태어나려고 한다. 이 책이 다른 사람에게 읽혀지든 읽혀지지 않든 그것은 이 책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 나는 이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책을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하게 하는 권리도 나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만,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이었는지 그대와의 이야기를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독은 단 한 번만 발랐기에 누군가 이 책을 끝까지 넘기면 그 다음 사람에게는 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히 나에게는 이 마지막 장을 넘길 힘이 남아있습니다."

 

알 파사르는 카자르 사전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독이 온몸에 퍼져 죽었다. 아테 공주는 명을 내려 꿈사냥꾼, 알 사파르의 죽은 몸을 우리에 넣게 했다. 그리고 물 위에 매달아두라고 명령했다. 시체는 썩지 않았다. 아테 공주가 물고기 모양의 열매를 입에 물었다가 그의 몸에 뱉자 그제야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아테 공주는 자신이 이제 이 물고기 모양의 열매, 쿠, 라는 단어만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참고 : 위의 책은 '하자르'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카자르' 가 더 좋은 것 같다. (설령 카자르, 의 K가 묵음일지라도.) 예전에 내가 읽은 책은 카자르 사전, 이라는 이름으로 남성판과 여성판으로 나누어져 있던 책이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 책을 읽었기에 나로서는 카자르, 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고, 여기서 쓰는 글에서도 카자르, 라는 이름으로 계속 진행할 것이다. 리뷰보다는 소설에 가깝지만, 이런 특별한 책에는 특별한 리뷰가 필요한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3-09-03 00:49   좋아요 0 | URL
책 장마다 독을 발라두었다고 하는 거 움베르토 에코 소설 <장미의 이름>에도 나오지 않나요 이 책 읽지는 않았는데 그런 말을 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책 읽어보려고 했는데 앞에만 조금 보다가 말았습니다 재미있다고 하던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게 <장미의 이름>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이 한권이었거든요 찾아보니 두권이길래... 다른 것을 본 것인가

꿈사냥꾼은 작가인 밀로라드 파비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종교라는 것을 억지로 믿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기도 하군요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합니다(다른 나라에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이 있었죠) 보통 소설과는 다른 형식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색다르게 쓰셨군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희선

가연 2013-09-10 17:40   좋아요 0 | URL
멋진 소설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면ㅎㅎ 맞아요, 장미의 이름에서도 나오죠. 이 카자르 사전은 비슷한 내용을 말하긴 하는데 좀 달라요. 거기선 주요 트릭이지만.. 여기선 하나의 단어 설명이지요. 저는 꿈사냥꾼이 밀로라드 파비치 라는 생각을 한번도 안해봤는데.. 그러고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 외로 쓰기가 어려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