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평전 - 천재의 의무 Meaning of Life 시리즈 8
레이 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 / 필로소픽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성난 독일인이 강의가 끝난 후 와서 논쟁을 했습니다."

 

1911년 11월 16일,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이 사랑하던 오톨라인 부인에게 저런 편지를 썼다.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러셀의 역설' 이라는 역설을 통해서 수학계와 철학계 모두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그는, 그 자신의 지적 능력만큼이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강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던가, 그의 여성편력은 처녀, 유부녀를 가리지 않았지만, 불륜이라고 규정하는 사회적인 시선따위는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위의 오톨라인 부인도 마찬가지인데, 그녀는 유부녀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러셀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여기서 당시의 상황을 조금 살펴보면, 러셀은 수학원리, 라는 뛰어난 책을 막 펴내었었다. 그런데 그가 그 책을 쓰느라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책을 쓴 뒤에는 모든 '진력이 빠져버릴 정도'였었다. 그래서 러셀은 스스로에게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된다. 아, 논리학자, 혹은 철학자로서의 러셀은 이제 죽었구나, 라고. 누구나 자신의 일, 이라고 규정지어진 그 무엇인가를 해내면 홀가분하기도 하고, 시원섭섭할 것이다. 결국 그런 생각이 들면 감정적으로 위로를 받고 싶어한다. 러셀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는 오톨라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그대는 나의 별이라고. 그대의 광채 때문에 내가 세계를 볼 수 있노라고.

 

이때의 러셀은 사실 합리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들에 대한 러셀의 독설과 날카로운 지성의 번뜩임은 '사랑'의 이름으로 잠깐 잠이 들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능력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처음에 기껏해야 '성난 독일인' 에 불과했던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에게 '전형적인 천재' 라고 인정받을때에는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 의한 보정이 분명 있었으리라. 사랑에 빠져서 연약해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떠넘긴다. 자신의 일을 다 했다, 더이상 이것보다 나은 일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라고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제자로 삼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 은 자신의 근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근처에 있는 사람은 늘 똑같은 상황을 반복한다. 내가 이것을 시키면 이렇게 하겠지, 저렇게 시키면 저것을 하겠지, 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이 반복되는 일상에 끼어드는 사람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판단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왠지 더 능력이 있어보이게 된다. 그러니 이 때 찾아온 비트겐슈타인은 저 두 조건을 모두 갖춘 최적의 사람이었으리라.

 

그런데 러셀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러셀이 은인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은 줄곧 자살충동에 시달렸노라고, 러셀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라고 인정하자 비로소 자신의 자살충동을 해소할 수 있었노라고 말이다. 아무리 보석이 있더라도 그 보석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원석과도 같은 재능을 발견한 사람이었고, 그 재능을 개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러셀은 분명 비트겐슈타인의 은인이리라. 그런 재능을 발견하는데 앞서 말했듯 오톨라인 부인과의 사랑, 큰 과업을 이루었다는 생각, 등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이런 일들을 생각해보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결국 이뤄낸 업적을 본다면 무의미할지라도)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 만약에 러셀이 합리주의자에 강력한 무신론자인 채로 있었다면? 러셀이 아직 난 더 잘할 수 있어, 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을 구제해주었을까, 와 같은 일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여기에 대한 답을 달아보자면, 그는 결국에는 비트겐슈타인을 인정하였으리라. 러셀은 스스로의 재능에 취해서 다른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달랐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충동에 빠져서 구제를 받아야만 했을까? 그 해답은 비트겐슈타인의 어린 시절에 읽은 책에 있다. 이 책 비트겐슈타인 평전, 에 따르면 오토 바이닝거의 책이었던 성과 성격, 이 어린 비트겐슈타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바이닝거는 자신의 책에서 천재성의 획득을 일종의 정언명령 - 칸트의 정언명령 - 으로 파악한다. 천재성을 가져라. 그것은 선이다. 그렇기때문에 그것은 무조건 수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말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천재성이란 어떤 것인가, 에 대한 규정이 (있기는 있지만) 세밀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천재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바이닝거의 이야기를 따라 정말로 정언명령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칸트의 정언명령과 비교하면서 파악해보자. 칸트의 정언명령 중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을 예로 들어보면, 거짓말을 하지 말라, 와 같은 말이 있다. 이 말은 정언명령이다. 그러니까 선이기에 무조건 수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만약에 정언명령이 무조건 절대적으로 모든 경우에서, 삶의 모든 각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우리는 이 정언명령을 수행하지 않았을때 수많은 고통과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절대적, 과 같은 말은 이상세계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살아가다보면 거짓말은 대부분 할 것이다. 당장 이 책의 주인공인 비트겐슈타인이 어릴 때 가졌던 의문이 '거짓말을 해도 이로울 때 진실을 꼭 말해야 하는가?' 였고, 그 의문에 대한 스스로가 가진 답이 '그럴 때는 거짓말을 해도 꼭 잘못은 아니다' 였으니 말이다. (비록 사유의 과정은 다르지만 흥미롭게도 루소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에서 거짓말에 대해서 내린 결론과 동일하다.) 어느 누구라도 거짓말을 했으니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어' 라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를 보고 칸트의 철학은 이렇게 대답을 한다. '분명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은 분명 절대적인 정언명령이다. 하지만 그 명령을 준수하는 사람도 있고, 준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마치 법률이 있지만 범죄자들이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오토 바이닝거가 정언명령에 포함시키려고 했던 천재성은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파악할 수 있을까? 

 

일단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천재성에 대한 규정을 해보자. 우리가 쉽게 천재성, 이라는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천재들, 의 공통된 특성을 뽑아내는 것이 빠를 것이다. 천재들의 예를 들자면, 아인슈타인, 뉴턴과 같은 사람이리라. 그런데 이들은 무엇을 했는가? 먼저 뉴턴의 경우에는 고전 역학의 세계를 열었다. 그의 프린키피아, 는 심지어 칸트의 초기 철학에도 (순수이성비판을 쓰기 전의 칸트의 철학) 영향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에 대한 개념을 모조리 뒤바꾸어 놓았다. 정리하자면 무언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사람들을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새롭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동안 있지 않았던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다는 말과 동일하다. 이런 규정은 필연적으로 천재라는 이름에 타인에 대한 우월성을 부여한다. 바이닝거 또한 이런 사고과정을 따랐다.

 

그런데 천재라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고, 천재성이 그 천재들이 가지는 특성이라면, 오토 바이닝거의 이야기에는 결함이 생긴다. 천재성을 추구하는 것이 선이고 정언명령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런 상황을 상정해보자. 모든 사람이 그 천재성을 실현한 상황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우월성을 가진다, 라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이럴 때 도대체 '천재성' 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국 오토 바이닝거의 이야기가 천재성, 에 대한 이야기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다음이 요구된다 : 모두가 천재성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이는 정언명령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모순이 된다. 앞서 칸트의 정언명령의 예로 들었던 '거짓말을 하지마라' 와 같은 문장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이상사회고 정언명령이 이루어진 사회이다. 하지만 그 명령이 천재성에 이르면 이런 일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기어코 모순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천재가 되지 못하면 죽으면 된다. 죽은 사람은 그 사회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천재성은 사회에서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산 사람들은 모두 천재이기에) 그리고 동시에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 비하여 우월한 위치에 있다. (죽은 사람들은 천재성이 부족한 사람들이기에) 이로서 이 모순이 해결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저 결론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에게는 천재와 죽음, 단 두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자살충동에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을 '구제받아야만 할 사람' 이었고 러셀은 그런 그를 (비록 합리적으로 내린 결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죽음으로부터 '구제'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깊게 볼 부분이 있다. 앞서 말한 천재성의 규정을 따르자면, 천재성은 항상 한 업적이 이루어진 뒤에 알아볼 수 있으리라.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에 관한 이론을 세우지 않았다면 누가 아인슈타인보고 뛰어나다고 인정했을까? 카프카는 그 뛰어난 문학작품들을 남기지 않았다면 단순한 공무원 정도로만 여겨졌으리라.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러셀의 인정 - 너는 천재다 - 을 받고 난 뒤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구태여 부연하자면 러셀에게 비트겐슈타인은 다음처럼 계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너는 위대한 일을 할 것이다.

 

네, 나는 위대한 일을 할 겁니다.

 

오토 바이닝거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던 비트겐슈타인은 (나중에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 을 다른 철학자들에게 권하기까지 했다.) 이 간극, '천재성을 판단하는 것은 업적이 이뤄진 뒤에 행해진다, 와 먼저 이루어진 러셀의 인정 ; 너는 재능이 있다. ', 을 어떻게 매웠을까? 여기서 그는 베토벤의 예화를 가져온다. 베토벤은 식음을 전폐하고 36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위대한 작곡을 행한다. 36시간이다. 바로 여기서 간극이 메워진다. 위대한 결과를 낳을 시간을 나에게 주겠다. 그 시간은 36시간이다. 36시간을 투자한 결과가 위대하지 않다면 주저없이 나는 죽음을 택하리라.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명료해지기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저 36시간은 그야말로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전장이다. 베토벤에게는 그 시간이 지옥의 입구이자 지옥 그 자체였다. 그럼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그 자신의 삶이 걸린 시간이었다. 왜? 36시간을 겪고 위대한 작품을 만들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국 비트겐슈타인을 세계대전에 참전해 직접 전쟁을 경험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결국 그는 정신적 의미 뿐만이 아니라 신체적 의미로도, 그 자신의 모든 부분에서 그 36시간을 겪었던 것이다. 

 

이 후 논리철학논고를 쓰고, 다른 업적을 선보였지만 죽을때까지 그는 저 자세, 천재성을 향한 경건한 자세, 를 잊지 않았다. 러셀의 인정으로 겨우 살 권리를 받았다지만, 그리고 위대한 과업을 남겼으니 이제 살아도 좋다, 라고 여기게 되었다지만 이제는 천재, 라는 그 개념 자체가 그 자신을 얽어매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 자신에게는 명료하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았고, 그것은 다시금 그 자신을 천재성, 이라는 것을 얻기 전의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그러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시금 철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비트겐슈타인 평전, 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때때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의 수명은 이제 6개월 정도 남았을 뿐이라고. 왜 이런 말들을 계속 반복적으로 했을까? 이것이 명료하게 되지 않는다면 (천재성을 다시금 얻지 못한다면) 그는 죽어야 하였기에 그런 말을 계속 반복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그가 자신의 삶의 이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만들어낸 철학들은 지금도 논의가 계속되고있다.

 

그의 철학은 어렵다. 그의 철학이 특히나 어려운 까닭은, 그는 자신의 생각에 다다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가 (자신이 쓴 책을 오독한) 괴팅겐 서평을 보고 자신의 철학을 쉽게 이야기한 형이상학 서설, 을 썼던 일처럼 비트겐슈타인도 도움이 되는 글 하나 정도는 사실 남길 수도 있었을텐데, 끝끝내 그는 입을 다물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비트겐슈타인 평전, 은 그의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이리라. 하지만 레이 몽크의 이 책이 가진 더 큰 장점은 아마 천재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으리라. 평생 칼날 위에 선 것 처럼 천재, 아니면 죽음, 이라는 일견 오만한 태도를 고수해왔던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어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마 비트겐슈타인은 독자들에게도 자신의 철학에 대한 태도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생각에 다다르려면 당신들도 죽을 각오로 뛰어와야만 한다, 라고. 하지만 끝내 그가 우리에게 천재, 아니면 죽음,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재촉한다면

 

"답장하지 않을 생각이다." 라고 무어는 일기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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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4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7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9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3-02-23 03:03   좋아요 0 | URL
사람도 만나야 할 때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을 나중에 인정했다 할지라도, 참지 못하고 죽은 뒤였다면...
비트겐슈타인, 이름만 아는 사람입니다
어쩐지 자기가 자기를 아주 힘들게 했을 것 같네요


희선

가연 2013-03-05 16:1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읽을때 드는 게 바로 그 생각, 자기가 자기를 괴롭혔다는.
 

 

 

 

해럴드 블룸의 저작, 세계문학의 천재들, 을 읽으며 저자에게 놀랐던 점은, 문학 비평이라는 부분에 카발라를 접목시켰던 점이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밝혀놓는다. 이 책은 완역본이 아니다.) 카발라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여러 가능성이 열려있지만, 문학 비평이라는 측면에까지 이용할 거라고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카발라가 이용된 다른 측면을 본다면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에 적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독자적으로 문학 비평에 카발라를 적용시켜서 문학사의 걸출한 인물들을 카발라에서 말하는 생명의 나무, 그러니까 세피로트의 각 위계에 위치시켜놓았다. 세피로트에는 10계의 위계가 있는데, 그가 적용시켜놓은 위계와 그에 따른 작가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케테르 -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톨스토이, 호크마 - 야훼스트, 플라톤, 무함마드, 비나 - 니체, 키에르케고르, 카프카, 헤세드 - 던, 스위프트, 포프, 딘(게브라라고도 읽지만 여기서는 책을 따르겠다.) - 에머슨, 디킨슨, 프로스트, 엘리엇, 티페렛 - 앨저넌, 크리스티나, 월터, 네자 - 호메로스, 조이스, 헤밍웨이, 호드 - 휘트먼, 페소아, 하트, - 예소드 - 플로베르, 보르헤스, 칼비노, 말쿠트 - 발자크, 캐럴, 예이츠. 해럴드 블룸은 총 100명의 작가들을 위계에 배열시켜놓았지만, 그 모든 것을 적을 수는 없고, 간략하게 적어보았다. 위의 케테르 등등의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사실 카발라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무슨 뜻인지 모를것이다. 이 글에서는 카발라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나름대로 각 위계에 적절한 문학작품들을 하나씩 배열해볼 생각이다.

 

 

카발라, 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유대교의 비교, 혹은 비술과 같은 것, 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정도에서 그쳐야 할 관심이 그래도 일부 대중들에게 생명력을 획득하여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에반게리온, 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에반게리온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세피로트의 나무, 상징은 그 당시 그 애니메이션을 본 많은 사람들에게 '세피로트의 나무' 라는 것이 있다, 라는 것을 강렬하게 심어주었다. 어디에 등장했는가? 에반게리온 극장판 air를 보면 마지막에 신지가 탄 초호기가 각성하여 아스카를 구하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아스카와 아스카가 탄 에바는 양산형 에반게리온들에게 철저하게 파괴된 상태였고, 양산형 에반게리온들은 초호기에게 눈을 돌린다. 결국 초호기를 붙잡고 대기권 위로 올라가게 되는데, 이는 일종의 의식 - 인류보완계획 - 이었다. 바로 그 때 허공에 세피로트의 나무, 가 그려지면서 의식의 시작을 알린다. 에반게리온을 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무슨 장면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가 빠르겠지만, 사실 에반게리온과 카발라는 그다지 관련이 있다고는 못하겠다. 왼쪽 위의 책은 그 상징에서 나아가 에반게리온 전체를 관통하는 카발라적인 의미, 를 찾..으려 애쓴 책으로 보이는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에반게리온 해석서, 이상으로는 보기 어렵다. 여하튼,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을 보면 세피로트의 나무와 카발라에 대해서 이런 관념을 가지게 된다. 생명의 파괴와 창조에 관련된 어떤 비술이라고 말이다.

 

어느 종교에나 비술이나 비밀적인 교의가 있다. 불교에서는 금강승이라고 해서, 대승과 소승을 넘어 현세에서의 구원을 위한 비법이 밀교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우리가 티벳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등을 볼 때 무언가 물레같은 것을 돌리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물레라기보다는 바퀴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한데, 이를 두고 마니차, 라고 부른다. 이 마니차에는 경전이 겉면에 빼곡히 적혀있거나 혹은 경전을 안에 품었기에 한 번 돌릴때마다 경전을 한 번 외운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가져온다. 단순히 읽는 것보다 몇 번이고 돌리는 것이 훨씬 쉬우리라. 그렇기에 순식간에 경전을 몇 번이고 읽은 인과를 현세에 만들게 된다. 이를 두고 기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그런 바퀴를 돌린다고 과연 자신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하지만 기만이라고 불리지 않기 위해서 금강승 수행자들은 엄격히 선발된다. 밀교 교의에 맞게 일대일로 스승에서 제자로 밀교적 성격을 가지고 비의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 금강승에 애초에 입문할 정도라면 경전은 벌써 수만번은 읽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뛰어난 인격자로 판단된 사람이리라.

 

카발라도 이런 비의적 개념이 강한데, 다만 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위의 금강승의 전통의 경우에는 엄격히 전승된다는 점이 있겠지만, 이 카발라는 일종의 민족개념으로까지 퍼져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중들에게 알려진 어떤 창조와 관련된 비술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앞서 언급한 금강승의 경우에도 창조나 파괴의 비술과는 거리가 멀다. 금강승에 관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설명하기로 하고, 카발라와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사실 카발라의 문헌들 - 뒤에 말할 조하르나 바히르 서, 탈무드에 이르기까지 - 에서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한 두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심지어 '창조의 서' 라고 이름이 붙은 문서에서도 생명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저 창조의 서, 에서 말하는 창조란 전혀 다른 의미로, 생명을 무에서 만들어내는 비술같은 것은 적혀져 있지 않다(고 알고 있다. 직접 읽은 것이 아니지만 신뢰할 만한 문헌의 정보다.). 말하자면 천지창조의 그 창조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바람의 정령을 불러낸다거나 불의 정령을 부르고 땅의 정령을 사역하는(중세 메르헨들에서 많이 언급되는 묘사들) 방법은 적혀있지 않다. 천지창조이외의 어떤 창조에 관한 개념은 마치 이런 것이다. 비가와서 죽은 나무가 썩었는데, 며칠 지나서 그 나무 속을 파보니 애벌레들이 꿈틀거린다거나, 하는 것이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서의 창조뿐이다.

 

하지만 현대에서 카발라가 창조와 관련지어지는 것은 아마 골렘, 에 얽힌 전설때문이리라. 왼쪽의 골렘, 이 그런 전설들을 그리고 있는 책인데, 사실 잘 알려진 유대전설을 그리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저런 골렘의 창조가 널리 알려진 것은 거의 현대에 들어와서이다. 1900년대에 많이 알려졌다고 해야 할까, 그 전에는 저런 설화는 일종의 지역적 설화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에 어느 작가가 그걸 바탕으로 살을 붙인 이후에 폭발적으로 퍼져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저 골렘전설의 내용은 간단하다. 압제에 못이기던 유대교 랍비가 카발라의 힘을 빌어 진흙에서 유대인들을 지켜줄 골렘을 만들었고, 압제에서 해방시킨 뒤 그 골렘을 파괴했다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두자면 카발라는 이런 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 (어떤 마법이나 주술에 궁금증이 많다면 미국에서 팔리는 위치크래프트 서적들을 찾는게 훨씬 좋을 것이다. 미국은 그런 것들이 많이 팔리는 나라들 중 하나이다.) 카발라는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신비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며 다만 ( )에 다다르기 위해서 받는 것이다. (( )가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나 또한 설명할 수 없다.) 왜 받는다, 라는 말을 내가 사용했는가? 그건 카발라Kabbalah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받는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받는다, 라는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 신(유대교이니 아무래도 야훼, 가 그 대상이 될 것이다.)이 모세에게 10계명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야훼는 잔인한 신이었고, 유대인들을 비호하며 그들을 매우 사랑하던 신이었다. 예수가 등장하면서 유대인들의 신에서 세계의 신으로 발돋움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구약에서의 야훼는 상당히 종잡을 수 없던 신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카렌 암스트롱이 지은 축의 시대, 는 그런 부분을 가감없이 적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늘의 비밀을 잠깐 보여주었다. 바로 여기서 카발라, 받는다, 라는 의미가 나온다. 받은 것은 무엇인가? 하늘의 비밀이다.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유대인들이다. 왜 받았는가? 야훼는 유대인들의 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 유대인들이 특별한 사명을 가진 민족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비밀이 카발라로 전수되었다. 그 하늘의 비밀에는 여러가지가 담겨있는데, 대략 카발라 저서라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천지창조. 둘째, 신의 힘을 빌려오는 주술이나 마법들(이런 의미에서 신비주의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셋째, 천궁의 모습. 넷째, 천궁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하늘의 비밀을 기술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인간의 그림은 하늘의 모습을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조악하며,  인간의 정신은 하늘의 뜻을 떠올리기에는 너무나 어리석다. 결국 카발라는 아파티스Aphatis, 즉 언어로는 도저히 닿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를 담게 된다. 카발라에 있는 어구들을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는 종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구들 이상에 위치하는 무엇인가를 갈구하기에 카발라가 카발라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 경향은 뒷날에 신지학에 영향을 주었다 - 앞서 썼던 글 중 하나에 그런 내용이 있을 것이다.) 적혀있는 어구를 그대로 믿지 않는다. 그 이상을 추구한다. 이것이 카발라와 종교의 차이점이다. 간단한 예로 일반적인 종교의 경전에 '착한자는 복을 받는다' 라고 적혀있다면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은 그 말을 그대로 따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카발라의 비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의구심부터 가질 것이다. 이 말에 담긴 진정한 뜻을 찾아서 말이다. 신은 항상 옳은가? 가톨릭, 기독교의 전통을 잇는 사람이라면, 신정설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신은 항상 옳다.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여 악을 만들고, 그 악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다다르기를 바란다. 겉으로는 이상해보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항상 옳다. 하지만 카발라는 다르다. 신은 그 내부에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잘못으로 악이 생긴 것이 아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성스러운 빛의 유출과정에서의 이상이 바로 잘못된 것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신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카발라가 신비주의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방향의 차이이다. 비록 마법이나 주술에 관련된 이야기를 (릴리스를 쫓는 부적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마치 만다라와 같은 그림에 천사들의 이름을 가득 적어놓았다.) 다루고 있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발라는 신비주의와 다르다.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것은 바로 힘의 방향의 차이이다. 카발라에서는 힘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하지만 신비주의에서는 힘이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힘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이야기를 좀 더 다듬으면 '유출'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세피로트의 나무, 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앞서 에반게리온을 이야기할 때 세피로트의 나무, 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꺼내었었다. 그렇다면 세피로트의 나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에 대한 설명에 앞서서, 기존의 카발라 문헌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꺼내고 진행하고자 한다. 탈무드와 토라(모세 5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당연히 연구해야 할 문헌들이리라.

 

카발라의 문헌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천궁의 모습을 그려낸 책도 있고, 앞서 말한 바히르 서도 있다. 이 바히르 서는 카발라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차지한다. 어떤 문서가 카발라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규정을 바히르 서는 대략 드러낸다. 10가지 신성한 힘에 대한 서사, 그리고 10가지 힘 중 하나의 여성적인 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란Ilan이라는 나무 형태로 그려지는 힘의 궤적. 가장 중요하다고 일컫을 수 있는 문헌은 조하르, 이다. 한국어로는 아직 번역이 되어있지 않지만 (그리고 나 또한 읽어보지 못했다.) 내가 본 이차문헌들에서는 대부분 조하르를 카발라의 중심 서적으로 두고 있다. 왼쪽의 책이 조하르 : 광휘의 서이다. 이는 일종의 가상저자를 내세워 현실의 저자가 책을 쓰는 그런 방식으로 쓰여져 있고, 한 명의 저자가 대부분을 쓰긴 했지만, 후에 덧붙여진 것도 상당한 양을 차지한다. 마치 주역에서 주역 본문과 십익의 관계를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랍비들은 앞서의 세 가지 규정들에 더하여 세피로트의 10가지 위계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한다. 그 위계는 한 가지 법칙을 따른다. 바로 신인동형론이다. 신이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고는 각 부분에 위계를 그려낸 것이다. 신의 머리에 세 위계가 있다. 각각 케테르, 호크마, 비나, 라고 일컫는다. 신의 오른 팔은 헤세드가 차지하며, 신의 왼 팔은 게브라(혹은 딘)이 그 위치를 가진다. 신의 심장은 티페레트, 라고 불리며 신의 오른다리는 네자라고 불린다. 신의 왼다리는 호드라고 불리며 신의 성기는 예소드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한 위계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여성적인 힘이다. 가장 아래에 배치되는 그 위계의 이름은 셰키라, 라고 불린다. (말쿠트, 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셰키라, 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여긴다.)

 

각각의 위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케테르는 왕관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자 무한하고 신성한 빛, 아인 소프(곧 설명할 것이다.)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무에서 유로 나아가고, 다시 집약되는 가장 강력한 그릇을 가진 위계이다. (신성한 빛 사이의 어떤 우열은 없지만 그 그릇의 우열은 있다. 이 또한 곧 설명할 것이다.) 영지주의적 환상에서는 신과의 합일, 과 같은 환상을 보았을 때 이를 케테르와 연관짓는다. 호크마는 그 신성한 빛의 집적이 어디로 나갈 것인가, 그 계획성을 가리키는 위계이다. 비나는 이제 현실에 그 빛이 현현하는 그 상황을 가리킨다. 신성한 빛의 흐름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각각의 위계의 그릇을 채우다가 마치 물이 넘치듯이 '유출'된다. 헤세드는 신의 사랑을 뜻하고 게브라는 신의 정의를 뜻한다. 심장인 티페레트는 헤세드의 영향과 게브라의 영향 모두를 받아 복합적인 것을 뜻한다. (티페레트는 10번째 위계 셰키라, 에 상대되는 남성성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있기에 이런 복합적인 성질을 가진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네자와 호드는 상위 위계인 헤세드와 게브라의 약한 성격을 가진다고 알아두어도 좋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좀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예소드는 신성한 힘의 흐름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셰키라, 는 그 힘이 아래의 피조물들에게 향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셰키라가 열번째 위계에 있다고 해서 그 영향력이 작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셰키라는 가장 피조물들과 가까이 있는 위계이고, 따라서 가장 피조물들이 영향을 끼치기 쉬운 위계이며, 동시에 가장 피조물들에게 영향을 주기 쉬운 위계이다. 셰키라가 하늘로 떠올라 티페레트에 가까울때 피조물들은 신성한 힘을 고루 받는다. 하지만 아래로 향하며 각종 타락에 더럽혀질때 피조물들의 세상은 괴롭다.

 

아무래도 신이 인간과 동일한 모습을 가진다, 라는 신인동형론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때도 있었으리라. 그 완전하고 위대한 신이 인간과 동일한 모습을 가진다니, 그렇다면 그 신은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이미 불완전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신의 형상을 인간의 인지로 파악하려들다니, 그리고 그 형상을 끝끝내 인간의 모습으로 끌어내리다니, 정말 오만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신인동형론은 꽤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고, 이윽고 세피로트의 나무는 그 기반을 단단하게 한다. 하지만 여전히 불협화음은 남아있었다. 저 세피로트의 나무에서 어떻게 세계가 창조될 수 있었을까? 악은 어디서 생기게 된 것일까? 저 세피로트의 나무는 인간뿐만의 편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카발라 비의 중의 비의로 판단되어 왔으며, 이윽고 신성한 빛의 유출로 설명이 완료되었다.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신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라는 관점을 바탕에 두도록 하자. (범신론과는 다르다. 그리고 이를 잠깐 위의 세계문학의 천재들, 의 저자 헤럴드 불룸의 평론과 비교해보면, 그는 천재성이 내재되어있고, 그 빛이 나뉜다, 라고 판단했으며, 그런 면에서 볼때 카발라를 적절하게 사용한 듯 하다.) 여기서의 신은 신성한 빛이며 모든 것의 근원이자 말로 더 설명할 수 없는 ( )이다. 이를 우리는 앞서도 말했다시피 아인 소프, 라고 부른다. 이는 일종의 부정적 개념과 부정적 개념의 합이다. '끝'이 '없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아인 소프라는 개념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조악한 언어때문이다.(앞서 언어 그 이상을 카발라가 연구한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하라)

 

그런데 이 아인 소프는 사실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여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지 못하다. 인격신으로 현현한 모습을 그린 구약성경을 보라, 야훼는 인간을 시험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파라다이스에서 쫓아내는 존재이다. 사실 완전한 신이라면 애초에 그런 상황이 있겠는가? 물론 현대 크리스트교에서 내세우는 신정론적인 해석에 따르면 완전한 신이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기 위하여, 라는 해석을 내놓겠지만, 카발라에서 보는 신의 모습은 다르다. 여기서 셰비라, 짐줌과 테히르, 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아인 소프에서 어떻게 악이 형성되는가? 그 전체적인 과정은 셰비라, 라고 불린다. 셰비라, 라는 것은 그릇이 깨어진다, 라는 의미이다. 그릇이란 무엇인가? 앞서 10개의 세피로트의 위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생명의 나무, 그림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생명의 나무 체계에서 각 위계는 원으로 그려진다. 하나의 신성한 빛이 아래로 유출되어 흘러나올때, 그 빛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원으로 그려진 것이다. 원은 그릇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 그릇은 사실 신성한 빛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그릇도 유일하게 '무에서 유로 현현하는' 신성한 빛에 의하여 창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릇이 자신이 담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면 그릇이 그릇으로서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중세의 랍비들은 이렇게 가정했다 : 그릇을 이루는 신성한 빛은 그 내부에 가득 차 있는 빛보다는 덜 신성하다.

 

덜 신성한 것으로 신성한 것을 가둘 수 있겠는가? 인류학적으로 볼때, 신성한 것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이 서재에서 몇 번이나 언급한 왼쪽의 프레이저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황금가지에서는 부정한 것과 신성한 것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서술한다. 둘 다 닿으면 죽는 것이다. 안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류는 그때 비의에 손을 뻗는다. 더 신성한 존재의 힘을 빌린다. 그러면 신성한 힘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말해서, 덜 신성한 힘은 더 신성한 힘에 의하여 막힐 수 밖에 없다. 위의 카발라에서의 유출도 마찬가지이다. 그릇이 신성한 빛을 품고 있지만, 그 그릇자체로는 도저히 그 광채를 견딜 수 없다. 겨우 견딜 수 있는 위계는 최상위 위계인 케테르, 호크마, 비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남은 7개의 위계는 어떻게 되는가? 깨어진다. 그리고 빛은 폭포수처럼 아래로 유출된다. 이것이 셰비라이다. 이 파국은 악을 가져온다. (하지만 동시에 삼라만상의 형성을 가져온다.)

 

짐줌은 저 셰비라의 시작과정이다. 짐줌은 물러남, 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모든 계에 영향을 미치고 가득 차 있는 아인 소프는 국지적인 상황에서 그 힘을 '거둔다' 잠깐 물러나서 공백을 만드는 것이다. 그 공백을 테히르라고 부른다. 그 테히르에 세피로트의 그릇들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그릇들은 좀 특이한 상황에 빠져있다. 아인 소프의 모든 곳에 있는 성질때문에(이부분의 이해가 어려울 것이다. 방금전 물러난다고 했는데 모든 곳에 있다는 말은 모순적인 어법이다. 하지만 사실 나로서는 당장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아주 조악한 이야기지만 아인소프는 당신이 생각하는 완전함 그 이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내부에 레시무, 잔여물들을 남긴다. 이 잔여물들은 타자성을 가진다.(이 부분의 설명도 사실 어색하다. 이 과정이 괜히 비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 타자성은 그릇이 깨어질 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빛을 받아 그회복을 더디게 한다. 레시무들이 신성한 빛과 잘 융합한다면 파국의 과정은 해소되겠지만, 잘 융합하지 못하고 끝내는 아래로 가라앉는다. 여기서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결국 아래로 가라앉으면 그 신성한 힘들은 악의 의지에 (신성한 빛에 비교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악이 될 수 있다.) 공격당하고 괴로워한다. 둘째, 불합리한 융합 (레시무와 신성한 빛) 은 그 모순으로 불합리함을 가져온다. 셋째, 위의 설명을 종합하여 악과 만물이 생성된다.

 

완전한 존재이고, 완전해야만 하지만 그 내부에 모순을 품고 있다. 바로 이것이 카발라의 비의다. 그 모순은 카발라를 크리스트교와 선과 악의 이원론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구분짓게 만든다. 카발라에 의하면 인류가 이렇게 괴로운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한 아담의 원죄때문이아니다. 인류는 사실 무슨 짓을 해도 결국에는 악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왜? 아인소프에 그 악의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악을 떼어내서 최대한 신성함을 보존할 수는 있다. 결국 앞서도 살펴보았다시피 악 또한 신성한 빛 (그릇이든 레시무 또한 신성한 빛에 의하여 생긴다. 아인소프와 신성한 빛을 근본적으로는 동일하게 두고 -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인과 형상인을 떠올려보라. 동일한 질료로 빛어진 서로 다른 형상들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형상인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 설명한다는 점에 유의하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신성한 빛을 위로 올린다면 악은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폭포수같은 물을 받아먹으며 악의 식물이 살아가는데, 어느 순간 그 폭포수가 역류해버린다면 식물은 말라죽으리라.) '빛을 위로 올리는 과정' 을 그릇의 수선, 티쿤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티쿤, 을 얻을 수 있을까? 여기서 카발라의 민족적인 성향이 나타난다. 카발라에서는 그 티쿤의 임무가 유대민족에게 지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민족이 말 잘듣고 바르게 살면 '들어올려진다' 고 한다. 그대,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를 지었는가? 하지만 그 죄를 짓는 것 자체도 티쿤의 일종이었다.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들어올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다시금 내려와 악의 의지에 고통받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은 너무 가혹하다. 아담과 이브처럼 단 두명 뿐이라면 숨막힐듯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수십만명이 되는 유대민족 전체가 어떻게 율법을 지키며 바르게 살 수 있을까? 여기서 '메시아' 의 존재가 필요하게 된다. 민족 전체의 죄를 대속할만한 그런 메시아, 말이다. 여기서 그 메시아는 예수는 아니다. (카발라는 시기적으로 중세에 그 이론들이 엄밀하게 정립되었다는 점을 잊지말라.)

 

중국 고대 철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흥미로운 개념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고대 철학이란 적어도 하나라, 그러니까 공자 이전을 이야기한다.) 중국에서는 천도, 라는 개념을 매우 강조한다. 하늘의 도, 라는 이야기이다. 이 하늘의 도가 내면화된 것이 인간의 근본 정신이다. 그렇다면 그 하늘의 도를 받아들이데 왜 악이 생길까? 대답은 바로 이것이다. 부족하게 받아들였기때문이다. 도가 불충분하게 내면을 채우면 거기서 악이 생긴다. 그렇기에 우리는 도를 갈고닦아야 하리라. 위의 레지무와 셰비라, 그리고 티쿤의 과정과 흡사하지 않은가?

 

하지만 카발라는 각각의 의식마다 또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다.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 유럽에 전반적으로 지식인들 -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같은 - 에게 비의로 전해진 카발라 의식은 또 차이가 있다. 전반적인 내용은 동일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중세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카발라 의식은 마지막 여성적인 힘을 왕국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향상시키고는 호크마, 라고 이름을 붙인다. 이 카발라는 당시 인간들의 의식체계를 장악하고 있던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무시 못할 정도로 받았다. 또한 각각의 위계에 여성적인 힘들이 쌍을 하나씩 이루고 있다고 가정하기도 하고, 음존재, 라는 것을 가정하여 인간의 인식을 넘은 초공간을 가정하였다. 아인 소프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아인 소프, 만 있던 것으로는 주술사들과 비의의 집전자들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인 소프를 세분화하여 아인, 아인 소프, 아인 소프 오르, 이렇게 3계로 나누었다. 각각 없다, 끝이 없다, 끝이 없는 빛, 으로 해석되며, 각각의 계는 아인으로부터 순차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주술사들은 이야기한다. 절대로 카발라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카발라 명상으로만 본 뜻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이런 저런 사람들 - 블라바츠키와 같은 인물이나 마법사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와 같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 영지주의와 카발라, 뉴에이지 운동 등이 섞여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쪽의 미스티컬 카발라는 카발라를 연구할 때 한 번 읽어보면 좋은 책이다. 제목은 오컬트의 느낌을 확실히 뿜어내지만 많은 참고 자료를 가지고 카발라의 철학적인 기초를 세우려고 노력한다.

 

대략 여기까지가 카발라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이다. 사실 카발라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카발라 자체에 대한 심원한 명상에 좀 더 무게를 싣는다는 위의 미스티컬 카발라, 에서의 이야기는 옳은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일반인들의 카발라에 대한 접근을 막는 어떤 핑계처럼 들릴 수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인터넷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고, 문헌들은 '고대의 신비로운 전승을 거친 문헌' 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 그 고대의 문헌들이 인터넷 세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초에는 마법적 의식을 통해서 전해내려오던 것들이 말이다.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의 법의 서, 와 같은 서적을 그대로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더이상 신비로움, 이 신비로움이 아니게 되버렸다. 여기서 마법사들이 그들의 비의에의 우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명상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아도 문헌의 지식보다도 어떤 신과의 합일에의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신과의 합일에의 경험, 이라는 말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야 한다. 대부분의 참선 종교에서는 수행자가 신과의 합일을 경험했다, 혹은 갑자기 확 맑아지는 기분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 도리어 당황스러워한다. 불교에서는 마가 끼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한다. 사실 깨달음이란 그리고 깨달음의 순간이란 담담한 것이다, 라고 말이다. ('불광'- 불교 잡지 - 에 요즘 멘토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혜민 스님이 기고한 글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맑아진다거나 하는 것은 위험한 징조다. 그리고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수행에의 진전은 더이상 없다. 그리고 카발라에서도 당연히 위험스럽게 여겨진다. 케테르에 다다르는 것은 깊은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리라. (물론 이런 이야기들 모두가 위에서의 비판, 비의에의 우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라는 것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카발라에 대한 설명이 길었다. 이제 나름대로 세피로트의 각 위계에 어울릴만한 작가와 책들을 하나씩 꼽아보도록 하겠다. 해럴드 블룸의 해석도 뛰어나지만, 저 책, 현대 문학의 천재들에는 약간 눈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밟히는 것은 해럴드 블룸이 극렬 셰익스피어 팬이라는 것이다. 한문단에 적어도 한 번은(앞부분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찬양이 나온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첫 위계인 케테르에 셰익스피어를 놓는다. 그 다음으로 걸리는 것은 해럴드 블룸, 은 서문에서 작가의 죽음, 이라는 개념을 비판하지만 나로서는 롤랑 바르트의 그 개념에 대한 비판이 일차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블룸은 이렇게 생생한 인물들을 그려내는 작가를 눈앞에 두고 죽었다는 소리를 하는가, 라고 화를 낸다. 하지만 그 화는 사실 롤랑 바르트에게 향해져서는 안된다. 왜? 그 생생한 인물들의 마음속을 작가가 전부 알 수는 없다, 라는 점을 블룸은 간과하기 때문이다. (블룸이 말한대로 인간처럼 생생한 인물들이라면 그 생생한 인물들의 속 또한 인간들만큼이나 알 수 없다는 점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앞으로 전개될 이 글의 내용에는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내가 해럴드 블룸만큼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었던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전문적인 비평가도 아니다. 다만 카발라와 문학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흥미로워보이며, 그렇기에 이렇게 몇 자 적어보는 것이다.

 

 

케테르 - 성취, 위대한 완성. 

 

나 또한 셰익스피어를 케테르의 좌에 놓는 것에 이견이 없다. 세계문학의 천재들, 의 저자처럼 셰익스피어의 옹호는 아무래도 심정적으로 힘들지만 (혹은 내가 영문권 사람이 아니라서 이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뛰어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한여름 밤의 꿈', 그리고 '템페스트' 이다. (굳이 고르자면 템페스트, 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케테르와 좌에 오를만한 작품은 역시 햄릿, 이다.  결국 사람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비극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준다. 그래서 비극이 희극보다는 더 케테르에 어울린다. 그런데 비극중에서 왜 햄릿을 골랐는가? 햄릿에 대한 분석은 많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햄릿의 성격이다. 유유부단하고 몇 번이고 자신의 복수를 이룰 기회를 잡지만 놓치고 마는 햄릿은 현대인들의 투영이다. 프로이트는 햄릿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내리지만 -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를 두고 자신의 욕망을 대신 실현한 존재처럼 여기는 - 사실 프로이트의 해석은 미진한 점이 많다. 프로이트를 잠시 제쳐두고 이야기하자. 햄릿은 현대인들의 투영인가?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인들만의 투영인가? 아니다. 중세인들의 투영이기도 하고 르네상스인들의 투영이기도 하다. 전 시대를 걸쳐서 발하는 속성, 나아갈 길을 두려워하고 걸어온 길에 후회하는, 그리고 이윽고 '실패에의 예감 - 실패할 것을 알지만 몇 번이고 반복하고 결국에는 그것을 기대하게 되는' 을 현계시키는 인물이 바로 햄릿이다. 전 세대를 꿰뚫는 그 빛은 분명 첫번째에 합당하다.

 

 

호크마 - 지혜, 현현에의 계획.

 

지혜, 의 속성을 가진 호크마의 좌에는 플라톤의 작품을 쓰는게 옳을 것이다. 세계 4대 성인에 소크라테스를 놓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소크라테스가 정말 그 정도로 성인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소크라테스 본인이 직접 남긴 글은 없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플라톤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을 윤색하지 않았다는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스승이 한 말들을 그렇게 플라톤이 잘 기억하고 있을 수 있었을까? (물론 인간이란 정말 적응의 동물이라서 만약에 이 세상에 모든 컴퓨터가 사라져버린다면 갑자기 모두들 암기력이 장난아니게 증진될 것이다, 마치 반달족의 침입을 앞두었던 수도회 수사들처럼.) 그러나 그런 의문은 뒤로 하더라도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모두 현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일화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상기설, 에 관한 것이다. 어느 어린아이에게 몇 가지 방법을 알려주고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유도시켰다던가. 모든 지식은 그저 실마리만 잡히면 다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다, 라는 상기설은 인간 본연에 내재한 지혜를 설명할 수 있을것이다. 그 지혜를 잡는 실마리는 어디서 오는가? 여기서 내가 부정된다. 실마리는 나를 벗어난 곳에 있다. 너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 너 자신이 무지하다면 너는 대화를 통해 그것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든, 혹은 다른 사람을 직접 만들어 대화를 하든 말이다.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의 첫 일보이리라. 길을 예비하는 자, 죽음을 각오하듯이 현현을 계획하려는 위계는 그 자신의 공허를 깨달아야 한다.

 

 

비나 - 사유 능력, 현현.

 

이제 신성한 힘은 본격적인 유출을 시작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데미안의 유명한 경구이다. 마찬가지로 이 위계에서 신성한 힘은 현실계에 그 자신을 드러내어 흐르기 시작한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던 싱클레어는 밝음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커가면서 깨닫게 되고, 카인의 낙인을 가진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그 자신의 카인과 아벨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들려준다. 카인은 배제당한 것이라고 말이다. 비나 위계는 앞서 말한 셰비라, 과정에서 남아있는 위계 중 하나이며, 가장 마지막 위계이다. 비나는 파국과 존재의 경계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세피로트의 해석방법 중 하나 - 세피로트의 해석 중 번개모양으로 보는 방법때문이다.) 경계를 걷는다, 라는 말은 싱클레어에게 매우 적합하리라. 데미안에게서 시작된 배제당한 카인의 이야기는 싱클레어에게 생각의 확장을 시작하게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알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싱클레어는 언제 알에서 벗어나는가? 그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알 자신이 깨어질때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 말미에 데미안이 사라짐으로서 깨어지게 된다. 그리고 카인의 낙인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싱클레어 본인의 다리로 걷기 시작했다, 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 자신이 이제 현현하게 된 것이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 자신이 현현한 모습이 '깨어진 알' 데미안과 너무나 닮았다는 점이다. 이는 파국, 셰비라를 다시금 예비하고, 카발라에서는 이런 순환으로 하여금 전체 생명의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다.

 

 

헤세드 - 사랑.

 

남자의 오만과 여자의 편견, 이라는 문장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 부족한 것 없는 재벌집 아들이 뺨을 한대 맞고는 '오, 나에게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하더니 갑자기 여자의 손에 키스한다. 많은 왜곡이 있는 줄거리지만 딱히 핵심에서 벗어났다고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로맨스 소설을 그대로 따온듯한 소설에서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사실 세피로트 상의 헤세드는 신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 소설의 어디를 어떻게 읽을때 우리는 그런 빛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실 남녀주인공은 소설의 끝까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내가 요약한 줄거리 (재벌집 아들이 뺨맞고 등등) 가 핵심을 찌른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서로 바뀌지 않았음에도 남자는 오만을 접고 여자는 편견을 접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이해관계의 결과일런지도 모른다. 그 이해관계로 결혼(일반적으로 사랑의 열매라고 이야기되는)에 이르게 되었다. 이해관계는 사랑인가, 아닌가? 하지만 사랑은 접어두더라도 적어도 사랑에 필수적인 것을 이 소설은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서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 서로에게 자의로 맞춰주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사랑의 방식인 커플이 있다면 정말 천상의 커플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슬프게도 없을 것이고, 현실에 매몰하면서 적당히 맞춰서 살아가게 된다. 하루키의 단편에서 나오는 80퍼센트의 사랑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어떻게보면 현실적인 사랑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적절한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스스로가 이렇게 쓰기는 했지만 나 자신도 이 해석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게부라 - 심판.

 

천지불인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 라고 직역할 수 있겠는데, 사실 이 말은 어질지 않다, 라는 말 보다는 그냥 그대로 맡긴다, 라는 이야기이다. 하늘이 인간을 사랑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땅은? 어느쪽도 인간을 어여삐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늘은 돼지를 사랑하는가? 아니다. 어느쪽도 어느 생물도 어여삐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천지간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들과 인간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을까? 답은 어느 쪽도 우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몰아치는 토네이도를 직격으로 맞으면 사이좋게 돼지와 손잡고 요단강을 건널것이다. 자연은 그런식으로 자신의 힘을 사역한다. 그렇다면 신은 어떨까? 신인동형론은 신과 자신의 거리를 매우 좁히는데 성공했다. 인간모습으로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인간의 일에 개입한다. 여기서 어떤 신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천지불인의 자연처럼 사이좋게 요단강으로 보내버리는 심판을 내리지는 않는다. (매우 거친 비유이지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여기가 유리하면 반대편에 힘을 보태주고, 반대편이 유리하면 여기에 힘을 보태준다. 일리아스, 가 바로 그런 류의 전형인데, 이를 보면 신들의 심판이 매우 불합리하다. 그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그렇게 모욕을 당했어야 했을까? (그것에 대한 반발인지 나중에 단테의 신곡을 보면 사이좋게 지옥이지만 헥토르는 그래도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마하바라타, 의 카르나를 보라. 그 카르나가 그렇게 죽어야 했을까? 그런데 이 불합리야말로 심판의 핵심이다. 인간은 아무리 인간과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도 신을 어차피 이해할 수 없다. 불합리한 심판을 내렸다고 신을 살해할 수 있을까? 그런 힘이 있다면 애초에 불합리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의 심판은 항상 공정하지는 않다.

 

 

티페레트 - 아름다움, 자비.

 

이 책은 그야말로 티페레트를 그대로 구현한 책이다. 티페레트를 앞서 말할때 헤세드와 게부라의 성격이 섞여있다는 말을 했었다. 레 미제라블의 전체 주제는 인간에 대한 자비, 일 것이다. 미리엘 주교는 자비를 베풀어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주었다. 장발장은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었는가? 팡틴느를 보고 연민을 느끼고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자베르 경감과는 몇 번 부딪히면서도 놓아주었다. 미리엘 주교에서 시작된 자비는 장발장에서 그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장발장의 행적은 아름답다, 라는 말 외에는 표현하기 어려우리라. 이 위계 티페레트는 열 번째의 위계인 셰키라, 와 대응되기도 하는데, 대응으로서 파악할 경우 일종의 남성적인 힘을 드러내기도 한다. 빅토르 위고, 의 문체는 남성적이며 전반적으로 힘차다. 배경설명도 충실하다. 심장으로서 적절하다. 그런데 이 티페레트에게 신성한 빛을 유출하는 것은 신의 머리뿐만이 아니라 오른팔과 왼팔 모두이다. 아름다움과 자비는 사실 헤세드, 의 사랑의 힘이 더 강하다. 왼팔에서 오는 신성한 빛은 어디에 있는가? 장발장이 레 미제라블 5권 모두를 통틀어서 겪는 일들을 그 빛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게 신은 포슐르방 노인을 만나게 했지만 그 이상의 호의는 베풀지 않았다. 그에게 내려진 심판은 가혹하다면 가혹했으리라. 하지만 끝끝내 장발장은 신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네자 - 신의 승리.

 

신은 변덕스러운 면모를 분명 가진다. 인간을 시험하며 번민에 빠지게 만들고 영혼을 대가로 내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악마는 한 번도 신에게 이긴 적이 없다. 적어도 문학작품에서는 말이다. 성서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그것이 악마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신은 '악마'를 이용하는 것이다. 어떤식으로? 구약에서의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신이 신약에서의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을 베푸는 신으로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신을 부르짖는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변덕에 힘들어하면서 외치던 그 목소리, 왜 신이시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를 자신이 직접 내뱉으면서 신은 인간에게 다가가고, 이윽고 악의에 대한 진정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악은 그저 대순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의미에서 이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카발라에서는 신 안에 이미 모순으로서의 악의 의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고, 그 악의는 신성한 빛을 근원으로 한다고 앞서 이야기한 바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기때문에 악마에게는 서글픈 일이겠지만, 신은 언제나 승리할 힘이 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서를 아무리 들이대더라도 찢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이 파우스트, 이다.

 

 

호드 - 위엄, 도덕.

 

 

신의 심판은 항상 공정하지는 않다. 하지만 칼같은 심판은 그 심판을 내리는 자에게 위엄을 갖추게 한다. 실제로 카발라 위계상으로 호드에게 빛을 유출시키는 위계는 (앞서 빛의 유출이 단계적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한 점을 상기하라) 물론 티페레트, 에게서도 받지만 게부라, 이다. 눈먼자들의 도시는 그런 위엄을 작품 전반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갑자기 닥쳐버린 재앙에 사람들은 존엄을 잃어버리고, 그 재앙에 힘모아 이겨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거기서도 다시 위아래를 만든다. 외부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고립된 상황에서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짐승이 되어간다. 도대체 여기의 어디에 위엄이 있고 도덕이 있는가? 작중인물 중 한 명이 있다. '안과의사의 아내' 이리라. 이는 인간의 선한 면을 드러낸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고, 그 해석은 호드좌의 도덕, 이라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보다 나는 안과의사의 아내가 깡패두목을 가위로 찔러죽이는 장면을 택하고 싶다. 앞서 해석을 따라 저 장면을 선의 이름으로서 악을 처벌했다고 본다면 안과의사의 아내는 선인인가?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선이라도 악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가 있을까? 여기에 위엄이 작용하리라. 심판은 내려져야하며 그 심판은 위엄있게 시행된다.

 

 

예소드 - 근본, 성애.

 

사실 예소드, 를 선택하는데 상당한 고민을 겪었다. 관능적이지만 그 관능적인 요소가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소설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선택한 소설이 바로 이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다. 사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는 자신의 소설만큼이나 특이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은사의 아내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으리라. 예소드는 세피로트에서 신의 성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성애와 근본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고등동물에서는 자신의 종족을 보전하기 위해서 짝짓기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그 짝짓기에 쾌락을 넣었다. 자신의 종족을 보전한다, 라는 것이 과연 고등동물들의 삶의 근본인가? 우리들의 삶은 그것에 다 바쳐져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고 특히나 성애가 가져오는 쾌락에의 추구가 갈수록 심화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쾌락에의 추구가 그 근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이나, 계속 부인만 할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에서는 그 근본에 대한 탐구를 실시한다. 성애에 대한 가감없는 묘사를 통해서. 

 

 

셰키라 - 여성적인 힘.

 

사실 다른 작품들은 이 작품이 좋을지, 다른 작품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이 셰키라, 만큼은 프랑수아즈 사강, 의 작품이 바로 떠올랐다. 사실 카발라 체계에서 셰키라, 의 (나는 블룸과 달리 말쿠트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연인은 티페레트, 이다. (물론 9개 나머지 위계 전부에 대응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티페레트, 에 나는 레 미제라블, 을 놓았다. 과연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이 대응될 수 있을까? 일단 슬픔이여 안녕, 의 문체는 매우 여성적이며 섬세하다. 빅토르 위고의 만연체, 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최대한 배경에 대해서 밝고 선명한 빛으로 칠해버림으로서 사강의 작품에서는 도리어 배경에 그다지 신경을 안쓰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빅토르 위고의 끝없는 배경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장발장은 모두의 구원자이지만 여기의 주인공은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레프리컨과 같은 요정에 가까우리라. 가벼운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장난을 치지만 그 장난으로 인하여 이전에 몰랐던 감정을 깨닫는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일보를 내딛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분명 대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강의 섬세하고 십대의 일기같은 문체는 문학작품 전체에서 여성적인 힘을 보충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카발라에 대한 설명을 하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버렸다.  하지만 설명을 해도 해도 부족한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다. 말로써 표현하기가 어려운 부분도 분명 존재하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모르는 부분들이 남아있다보니 더 설명을 진행시키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카발라의 적용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 의 작가를 그대로 적용시킨 위계는 케테르, 호크마, 헤세드 정도가 그것들이다. 나머지는 내가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문학작품들을 임의로 배치시켰다. 다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식의 접붙이기는 분명 당시까지는 보지 못한 다른 부분을 보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종교적 해석을 관련지어서 읽는법도 좋을 것이다. 변증법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문학작품에서도 그 구조를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문학에서만 효용이 있는게 아니다. 루소와 카발라를 연결시키는 시도도 흥미로울 것이다. 노발리스를 매개로 삼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이런 글을 쓴다면 루소와 한번 연결시켜보겠다. 이 글에 어떤 이면이 있다면 아마 그것이 되지 않을까? 범주는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범주가 절대적이지도 않다.

 

 

 

p. s.  이달은 이제 더 글 안써도 될 것 같네요,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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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2-05 09:32   좋아요 0 | URL
이 달에 천천히 나눠서 읽어야겠네요, 풋.

가연 2013-02-13 23:35   좋아요 0 | URL
지금은 어디까지 읽으셨으려나요ㅎㅎ 잘지내고 계시죠?

이진 2013-02-05 16:59   좋아요 0 | URL
방대한 양에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네요, 풋.
아참, 그리고 제일 첫번째 책은 저도 읽으려고 사두었네요, 풋.

가연 2013-02-13 23:37   좋아요 0 | URL
근데 사실 방대한 양이라고 해도 영문위키피디아의 자료보다는 많이 부족한 것 같은데, 풋. 이걸 다 쓰고 대충 영문위키를 읽어보았는데.. 솔직히 영어의 압박때문에ㅎㅎㅎㅎㅎㅎㅎ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걸 보고 이걸 보니까 왜이렇게 부족한게 많이 보이는지..

2013-02-08 13:52   좋아요 0 | URL
원고료 안 받고 이렇게 길고 밀도있는 글 써도 되는 거예요? 훗

일단 카발라 설명 부분 1/5 읽고 밑의 작품 위계 읽었더니만, 카발라 설명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그래서 이 긴 글 다시 읽어 보게 될 듯. 이 밀도높은 글에 상응하는 재독이 될 터입니다. (읽은 데까지) 잘 읽었어요.

가연 2013-02-13 23:39   좋아요 0 | URL
아하하.. 사실 책 한 두 권 정도만 읽어도 이정도 내용은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끄럽네요ㅠ 아래쪽의 카발라 위계를 적용시킨 거야 제가 느낀대로 적었지만ㅎ

감사합니다.

희선 2013-02-17 01:17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읽어야지 한 게 여러번, 그러다 못 읽고 겨우 한번 읽었습니다
꽤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도 마음먹고 읽으니 끝까지 읽을 수 있더군요
카발라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책을 보기로 들어서 쓴 부분은 재미있게 봤습니다
며칠 전에 읽었는데 이제야 이렇게 씁니다
그러면 한번 더 읽을 수도 있었을 텐데...


희선

가연 2013-02-17 19:09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왠지 부끄럽네요. 쓸 때는 우오오오, 하면서 쓴 글이긴 한데 다시 읽을 때에는 으아아아, 라는 기분이랄까, 풋. 하지만 뭐, 저도 가끔 (정말 할 일 없을때) 제 글을 심심하면 읽는데 그럭저럭 재미있는것 같아요, 푸하하. (물론 농담입니다)

2013-02-20 20:02   좋아요 0 | URL
우오오오 -> 으아아아 .. ㅋ

가연 2013-02-22 01:31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하하하
 

 

 

 

일전에 몇 권의 책들을 읽었는데 정리할 기회가 없어서 미루고 있었다.

 

사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은 것도 있고 이번에 다시 읽게 된 책도 있다. 신간평가단을 안하다보니 뭐랄까, 어깨에 힘이 많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뭐랄까, 훨씬 가볍게 책들에 대해서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달까. 사실 나는 리뷰를 쓸 때 확 끌리게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는 리뷰를 아예 안쓰는 편이다.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부여하는 별점이 만점이 아니면 리뷰를 원래 아예 안쓰는 편이다. 그러나 신간평가단을 할 때에는, 그리고 사실 여기 있는 리뷰의 대부분이 신간평가단 리뷰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별 수 없이 별점을 매기느라 고심을 했던 것 같고, 그러다보니 상당히 힘을 꽉 주면서 썼던 리뷰들도 몇 개 된다. 원래 내가 남에게 나쁜 소리는 잘 안한다, 풋.

 

그렇게 별점이 만점이 아닌 책들을 리뷰하면서 생각한 건데, 분명 서평과 리뷰는 좀 다른 면이 있다고 본다. 리뷰에는 어떤 자신의 감상이나 주관적인 느낌을,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느꼈다, 완전 감동이다, 등등을 적는 것도 괜찮지만, 서평에서는 약간 그런 면을 지양해야 되지 않을까. 리뷰에는 일종의 붙여넣기,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책의 누구누구는 이런 말을 했다, 라는 식으로 쓸 수 있겠지만, 서평에서는 그런 부분은 피해야 되지 않을까. 리뷰에서는 나는 이 책이 완전 좋아, 반론은 허용하지 않아, 라고 쓸 수도 있겠지만, 서평에서는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잘 모르겠다, 라고 마무리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내가 지금껏 쓴 글들은 저런 리뷰와 서평들이 뒤섞인 글들이라고 밖에 할 수는 없다. 어떤 글은 서평이지만 어떤 글은 리뷰다. 굳이 예시를 들지는 않을 것이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둘 중에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또 곤란한 일이다. 물론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리뷰는 있다. 과학이나 인문계열의 책을 예로 들자면 바로 밑에 내가 쓴 '얽힘의 시대' 에 대한 것 처럼 어떤 개념 설명으로 메우는 리뷰들 말이다. 이 뿐만 아니다. 이 책의 어느 사상가는 이렇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밑에 사상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형식으로 나가는 리뷰들도 있다. 소설로 치면 주인공이 뭘했는지 끝까지 스토리를 다 누설하는 리뷰나 다름없다. 이런 리뷰들은 본인 스스로의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 리뷰다. 그래서 바람직한 리뷰는 아니다. 하지만 본인이 만족해서 그렇게 쓰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래의 얽힘의 시대, 리뷰를 예로 들자면, 사실 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나는 아래의 리뷰에 매우 만족한다. 결국에는 서로간의 우열은 없고 글을 쓰는 본인이 만족해야 되는 거다.

 

그러나 나쁜 리뷰나 서평은 있다.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이것은 매우 나쁜 리뷰며, 매우 나쁜 서평이다. 그럴 거라면 그냥 책을 중간에 덮고 스스로의 생각을 적는게 훨씬 낫다. 내가 쓴 단어. 내가 쓴 문장, 내가 쓴 개념이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인가? 나로서는 매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사실 개인적으로는 리뷰든 서평이든 잘 안쓰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내 허영이 있다. 적어도 나는, 내가 정말 많은 것을 모르는구나, 아는 게 정말 별로 없구나, 라는 것을 안다. 넷 서핑을 하며 리뷰를 읽다보면 쓴 웃음이 나오는 리뷰들도 많고, 잘 모르는 개념에 대해서 그저 붙여넣은 수준으로 쓴 글들도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적어도 이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내 허영심이다.

 

허영심이라는 말을 쓴 것처럼, 사실 이런 생각을(그러니까 남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가지는 것 자체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이런 허영조차도 없다면 계속 독서를 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책을 읽을때마다 나는 '어라, 내가 이것도 몰랐어?', '아, 이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야 했었다구', '아,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이 책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뭐지?' 등등의 생각에 사로잡혀 그야말로 나락에 빠지게 된다. 그런 나락과 절망 속에서 날카로운 사유를 가진 책은 쉽사리 구원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면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땅을 파고 어딘가 숨고 싶을 정도가 되버린다. 이럴 때 넷 서핑을 하면서, 에휴, 그래도 저 사람들보다는 내가 그래도 낫구나, 하는 생각을 약간씩 가지는 것이다. 그러고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진다. 저들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고 있구나, 그래도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으니 이제부터 쌓아올리면 돼, 라고.

 

 

 

레 미제라블.

최근 영화로 정말 인기가 많았던 작품이다. 사실 나는 장발장, 이라는 청소년용 축약본을 읽은 게 전부이지만, 이번에 영화 개봉을 기회로 한 번 읽어보았다. 물론 지금껏 영화는 보러가지 못했다. 굳이 두 책을 넣은 까닭은, 왼쪽의 민음사판은 1, 2권을 읽었고, 오른쪽의 더 클래식판으로는 5권을 다 읽었기 때문이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오른쪽의 더 클래식 출판사에서 번역한 책들을 여러권 읽어봤는데, 아래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의외로 읽을 만했다. 이건 매우 호불호가 갈릴 일이겠지만, 적어도 나 개인적으로는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원서의 충실함을 느끼려고 한다면 분명 민음사판이나 다른 출판사의 판본이 나을 것이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보석의 원석이 있다. 민음사나 다른 출판사의 경우에는 이 원석을 적당히 갈아서 광택도 내고, 캐럿수도 높게 유지했으나, 더 클래식의 경우에는 너무 갈아서 광택만 내었다, 라고. 광택은 있을지 모르나 원석에 비하면 캐럿 수가 너무 줄어버린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니 줄이겠다. 다만 고백하자면 장발장과 같은 사람은 분명 대단한 사람이겠지만, 저렇게 살 수는 없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솔직히 말해서 이 출판사가 깜찍한 짓을 한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영문판에 번역까지 제공하고, 게다가 가격도 싸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몰랐지만 (1+1이면 이득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는 알았달까. 나로서는 사실여부를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출판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사실 상당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영어 단어 정리가 되어있는 영문판을 함께 제공할 이유가 없다.) 다만 무작정 비판하기에 좀 저어되는 부분은 읽는데 크게 문제가 없다, 오히려 술술 잘읽힌다, 라는 부분이려나. (원문과 차이가 많이 날지라도 적어도 쉽게 읽힌다는 것은 강점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다르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쉽게 잘 읽히는 부분에 점수를 주는 편이다. 아마 내가 다른 출판사의 책들을 모아서 같이 읽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대한 번역본들 중 단 한 권만 추천하라면 미안하지만 이 출판사의 책은 아닐 것이다.) 그만하고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을 전반적으로 관통하는 구절은 성경의 이 구절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 책의 주인공은 저 구절 그대로 온 세상을 얻고 자신의 영혼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이 영혼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파괴했다.

 

 

 

백년 동안의 고독.

아무래도 책에 관한 이야기보다 번역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금 하게 될 것 같다. 원래 내가 읽었던 책은 민음사판으로 나온 백년의 고독, 이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읽게 된 책이 왼쪽의 백년 동안의 고독, 인데, 나로서는 원문과 일일이 대조할 어학 실력이 없기에 번역본 두권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책이 더 쉽게 읽혔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왼쪽의 백년 동안의 고독, 의 손을 더 들어주고 싶다. 민음사의 판형이 좀 딱딱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준다면 문학사상사의 판형은 물흐르듯이 한번 잡으면 놓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듯 하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다 : 장하준이 자신이 감명깊게 읽은 책 중 하나로 이 책을 추천했었다. 매년 다시 읽는다고 했던가. 그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소설에 별도의 가계도가 첨부될 정도로 구성이 얽혀있다.) 왜 그럴까, 라고 고민했었는데 (그당시 읽고 있던 민음사판에 끝도 없이 나오는 인물들에 좀 질렸던 것이 컸다.) 나중에 다 읽고나니 그 모든 장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진실로 마술같은 책이다. 혹시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시간을 다섯 시간 정도 떼어놓고 끝까지 한 번에 보기를 바란다. 그러면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갑자기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이 어느 순간 폭풍처럼 휘말려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그런 기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지식의 역사.

겨우 다 읽었다. 일전에 70퍼센트 정도만 읽고 놓아둔 상태로 있었는데, 뒤의 세 장 읽기가 앞의 열 몇 장을 읽는 것 보다 더 힘들었다. 70퍼센트만 읽었던 나로서는 이 책에 후한 평가를 줬었지만 (이전에 쓴 페이퍼 중 이 책에 호의를 보인 페이퍼가 있다.) 뒤의 30퍼센트까지 읽고 쓰게 된 이 페이퍼에는 무작정 호의를 보일 수가 없다. 이 책을 구입한다면 앞의 70퍼센트만 읽고 그냥 놓아두기를 바란다. 뒤의 과학에 관한 부분은 저자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압권(나쁜 의미로)인 것은 미래의 백 년을 예측한 마지막 장인데, 사이언스 픽션작품을 너무 많이 읽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저자도 마지막에다가 솔직히 자신이 사이언스 픽션작품들을 많이 참고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긴 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별로 잘못된 점이 없다고 여기는 듯 하다. 저자가 미래전문가도 아니니 굳이 엄격하게 기준을 들이댈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쎄, 적어도 책을 출판한다면 최소한 근거가 사이언스 픽션보다는 더 나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 책은 1960년대에 쓰여진 책이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앞부분의 역사에 관한 부분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쓰여진 부분은 뭐랄까, 약간 편향된 시각이 있는 듯 하다. 그 부분은 다른 책들을 읽으며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

 

 

 

고대문명교류사

아직 다 읽지 못해서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다. (적어도 내가 읽고 있는 부분까지는) 저자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내 기억으로 정수일, 이라는 이 책의 저자는 남파간첩출신으로 알고 있다. 세간에 원래 알려진 이름은 무함마드 깐수. 필리핀 국적의 레바논 사람으로 연세대를 거쳐 단국대 사학과정에 들어갔고, 문명사 부분의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보인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순수 100퍼센트 한국인이었단다. 조선족 출신으로 매우 뛰어난 엘리트였는데 간첩으로 파견되면서 정수일이라는 이름 대신 깐수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얼마나 철저했냐면 잠꼬대마저도 아랍어로 했다던가. 손익계산을 해보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정수일이 북한으로 보낸 자료들은 사실 크게 가치가 없는 정보들이었고, 남한 입장에서는 문명연구에 권위자 한 명을 얻게 된 것이니 사실 남한으로서는 이득일려나. 이 책은 감옥에 갇혀 있을때 쓴 책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문명연구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교류란 어떤 의미인가, 등의 정의를 자료를 가지고 꼼꼼하게 정의하고는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참고서 광고같지만) 기초부터 심화된 부분까지를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여기서부터는 여담인데, 도서정가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가진 생각은 단순하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책이 비싸니 좀 싸게 샀으면 좋겠다. 그래서 도서정가제가 강화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도서정가제를 찬성하는 측의 의견이 일리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말인데, 도서정가제가 강화되기 전에 할인등을 하는 책들 중에서 양서들을 미리 구입해놓을 생각이다. 게임에서도 사기캐릭터가 하향패치된다는 선고를 받으면 패치되기 전에 그 캐릭터로 게임을 하는 것이 이득이니 말이다.

 

여러번 말하게 되는 것 같은데, 나는 상당한 실용주의자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그 책에 어떤 내용이 실려있느냐, 이며 그 책의 내용을 내가 아는가, 이다. 인터넷으로도 동일한 정보를 구할 수 있다면 굳이 책을 구입할 이유가 없고, 고전의 경우에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를 활용하는 편이다. 영어를 어느 정도 한다면 굳이 문학작품들을 구입할 이유는 없다. 원문이 인터넷의 바다에 널려있는데 무엇때문에 번역본을 (그것도 번역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읽겠는가, 하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는 로마제국 쇠망사도 올라와 있다.) 예를 들어서 나의 경우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을 영어로 읽었다. 물론 읽는 속도야 느려지지만 그게 대수인가?

 

도서정가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인데, 아무래도 도서정가제는 아무리 알라딘에서 반대하더라도 (알라딘 혼자 반대하는한) 강화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게다가 나 또한 도서정가제 강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의견들에서 (논리적 연결은 사실 빈약한 부분이 있지만) 큰 문제점을 찾지 못했으니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뭐라고 말해도 사실 내가 심정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그저 책값이 비싸니 싸게 사고 싶다, 라는 생각이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으니 대의적 측면에서는 솔직히 찬성측 의견에 밀린다. 그렇다면 그냥 정가제 강화되기 전에 양서들을 구입해놓는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실용적인 의미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실용적인 내 결론과 달리 심정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신간에 대해서 도서정가제를 강화하는 것은 옳지만 그걸 구간(현행으로는 1년 6개월 지난 책들)에까지 강화시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인 것 같다. 신간에 대해서야 값을 그대로 받는 것은 이해가 가고, 장기적으로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출간된지 오래된 책들도 제값을 모두 주고 판다? 과연 그 책들을 살 사람들이 있을까? 안그래도 인문계열의 독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텐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 책을 생각해보자. 이안 커쇼의 히틀러 1,2 권의 경우에는 합쳐서 11만원에 달한다. 지금은 할인이 좀 되어 10만원 남짓으로 구입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정가 그대로 판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살 사람이 있을까? 전공자가 아니라면 구입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저 히틀러 평전은 정말 뛰어난 책이다. 번역도 매우 뛰어나고 제책도 매우 잘되어있는 책이다. 2차세계대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빌려서라도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러나 11만원씩이나 주고 구입하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저 책 히틀러, 가 11만원의 값어치를 못한다는 말인가? 글쎄, 그렇지는 않다. 전공자들에게는 그 값어치 이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전공자가 아니며 단순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11만원으로 구입하기에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11만원이라는 가격을 본다면 우선순위를 생각할 것이다. 이 돈으로 다른 것을 할 수 있을텐데, 라고 말이다. 당장에 나에게 도움이 안될텐데 이 돈으로 그냥 인터넷 강의를 수강하는게 낫지 않을까? 차라리 옷을 사는게 낫지 않을까? 나로서는 옷에 거의 관심도 없고 대충 입고 다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멋진 옷이 책보다 못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히틀러에 대한 심도있는 지식이 무슨 도움이 될까? 사람들에게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흥미롭게 듣다가 이렇게 묻는다.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는데?'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은 솔직히 모르겠다. 물론 삶의 방향이니 어쩌니 등과 같은 말을 하기란 쉽다. 하지만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결국에는 전공자들이나 구입하는 책이 될 것이다, 히틀러, 와 같은 책들은.

 

그런데 우습게도 우리는 히틀러, 에 대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서 찾다보면 위의 히틀러 1,2권에는 못미칠지언정 적어도 5만원에 해당하는 정보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공짜로, 당신 스스로가 찾아내고자 하는 열의가 있다면. 그리고 인터넷의 정보는 계속 재생산될것이다. 하지만 그 정보는 11만원의 이안 커쇼의 평전과는 적어도 6만원 가량의 정보는 빠진 상태로 계속 재생산될 것이고, 이윽고 사람들은 이정도의 정보로도 충분해, 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결국 깊지 않은 정보만 일반적으로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저런 책들을 구입하며 읽게 될 전공자들은 대중과 유리될 것이다, 혹은 자신들의 틀에 갇히게 될 것이다. 쉽게하려고 히틀러, 를 예로 들었지만 히틀러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렇게 책읽는 사람들 중 혹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혹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게 더 많으니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람의 등을 떠밀어버릴것이다.

 

비약이 섞인 이야기이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될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 당황스럽다. 실제로 현재도 이런 일들이 진행형이다. 특히 한국어권 위키는 내용이 너무 축약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 뿐만이 아니다. 블로그, 질문과 답변들 등에서 보이는 대답이 여러 곳에 붙여넣기 된 경우가 흔하게 보인다. 왜? 인터넷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답변이 바로 그것이거든.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다. 안그래도 인터넷 검색해서 다 나오는데 뭐하러 십만원씩이나 주고 책을 사서 읽는가? 책을 왜 읽는데? 그 돈으로 옷을 사입는게 낫지 않아? 먹는것을 잘 먹는게 낫지 않아? 책 많이 읽는다고 자랑할 속셈인가? 책 많이 읽었다고 해서 무슨 인격이 고매해진 것도 아닌 주제에 아는 것도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얕은 지식을 가진 주제에 말이다. 그리고 모르는 부분, 그러니까 앞서 말한 6만원짜리 정보를 말하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데?' 그리고 실제로 소용이 없다.

 

아마 구간 할인마저 폐지한다면 저런 현상이 가속화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으아, 그 비싼 책을 뭐하러 살까? 가격이라도 좀 할인된다면, 어라? 지적 허영이라도 부려야지 하는 마음에서 구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렇게 구입한 책을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놓다가 너무 심심해서 한 장 들쳐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격이 5년이 지나도 십만원이라면 다른 우선순위에 계속 밀리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이렇지 않을까? 독서를 통해서 교양을 쌓니 어쩌니 하지만 실제로 독서를 많이 한다고 해서 인격이 좋아질 거라고는 난 절대 생각못한다. 차라리 불경이나 성경, 코란을 100번 읽는게 훨씬 교양 쌓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에는 책을 안읽는게 가장 큰 문제다. 도서정가제를 강화한다면 신규독자들을 생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구간의 기간을 1년 6개월로 정해진 것을 2년 이상으로 잡고, 구간 할인은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좋겠다, 는게 내 바람이다.

 

나 또한 이런 저런 책들을 그럭저럭 읽는 편이다. 하지만 매번 스스로에게 절망하고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지? 나는 정말 아는게 하나도 없구나, 라고. 그리고 사실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굳이 독서의 필요를 찾는다면 다만 그저 흥미롭기 때문에 읽을 뿐이다. 아마 나는 독서계에서는 별난 독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딱히 정해진 분야가 없이 여간한 책들의 여간한 장르는 다 읽는 편이다. 이는 독서가 사실은 내 삶의 중심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건 나만의 이야기인가?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도서정가제가 독서계에서나 이슈지 사실 누가 관심 가지는 사람이 있는가? 솔직히 대부분은 책을 잘 안읽지 않는가. 대부분은 삶의 중심에서 독서가 그다지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서계에서 중요한 것이라면 그런사람들 중에서 신규독자를 만들어내는 것일텐데 어차피 옷 십만원 어치 살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옷 십만원 어치를 살 것이고, 어차피 책 안 살 사람들은 앞으로도 안살것이다..... 특별할인, 오늘만 반값, 이런 문구라도 붙지 않으면, (가격경쟁력이 어느정도로 사람들을 유인하는지는 위의 더클래식 출판사의 책들의 세일즈포인트를 본다면 확인할 수 있을것이다. 사실 번역의 완성도 이런것보다도 더 책을 읽게만드는 것은 슬프게도 가격이다.) 혹은 저번의 정의 열풍처럼 열풍이라도 불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물어보라. 아니, 옷을 십만원 어치 사는 것은 안아까우면서 책을 십만원 어치 사는 것은 아깝다고? 옷 십만원 어치는 당장 내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있거든.. 소개팅 나갈 때 입고 나갈 수 있거든. 책은..? 소개팅할때 히틀러, 라도 들고 나갈거야? 풋. 뭐, 결혼했다고? 쳇.

 

 

 

하나만 더, 전 알바가 아닙니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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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1-28 13:38   좋아요 0 | URL
저는 욱, 해가지고 말이지요.

네, 나 알바입니다, 어쩔래요.

이런 글을 쓸 뻔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꾹, 참았어요. 욱, 했다면 꾹, 참을수도 있어야 되는 법.. (응?)
(아, 진짜 알바라는건 아니에요. 노파심에..orz)


도서정가제에 대해서는 저는 로쟈님의 페이퍼를 읽고 이게 좋겠다, 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도서정가제' 라면 쓰여진 가격 그대로를 받아야 정가제 아닌가요? 그러니 신간에 대해서는 그 정가 그대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그대로 받되,
구간에 대해서라면 할인을 적용하자는거죠. 가연님의 의견에 덧붙이자면,
팔리지 않는 구간들을 창고에 쌓아두는 것만큼 무용한게 어디있나 싶은거죠. 그걸 가격을 내려서라도 소비자한테 공급하면, 공간낭비도 줄일 수 있을것이고 재고로 쌓아두지 않아도 될 것이며, 소비자는 망설이던 책에 대해 기꺼이 소비를 하고 읽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요. 책은 독자에게 읽힐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생기죠.


아, 그리고, ㅎㅎㅎㅎ
저는 '서평' 이든 '리뷰'이든 그게 너무 어려워서, 에라이, 이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으니 걍 내 마음대로 페이퍼나 쓰자, 가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확실히 페이퍼는 쓰기 쉬워요. 막힘이 없죠. 그런데 리뷰쓰기를 클릭하는 순간 멘탈이 붕괴되고 말아요. orz

가연 2013-01-28 20:26   좋아요 0 | URL
사실 이 글은 도서정가제 부분은 빼고 쓰여질 예정이었답니다, 풋. 로쟈님의 글은 저도 읽었는데, 사실 그 글이 있는데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알바' 때문에 기분이 솔직히 좋지 않아서 뒤에 덧붙이게 되더군요, 풋. 알라딘 유저 중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거나, 적어도 반대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왜.. 선을 아예 그어버리려고 하는지 좀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알바 다수들, 이라는 표현에서 '다수들' 이라는 말로 다 빠져나갈 수 있다고 여기는 건가, 싶기도 하고...

다락방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구간 할인은 용인해달라, 라는 말도 나 책 싸게 사보고 싶소, 라는 말에서 크게 벗어난 얘기도 아닌 것 같아서, 풋.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너 책 싸게 사고 싶은거잖아?' 라 묻는다면 그런 비판을 벗어날 길이 없네요, 하하.) 결국에는 이기적인 입장의 글처럼 보일 것 같네요. 이왕 이렇게 된거 그냥 심정적 생각은 모두 지우고 실용적으로 도서정가제 강화하기 전에 빨리 괜찮은 책들을 모아두어야겠다능... 하지만 신간에는 도서정가제를 엄격하게 적용하되 구간에는 할인을 허용한다는 제안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솔직히 해봅니다. (물론 구간의 기간을 2년 이상으로 잡아야겠지만)

ㅎ저렇게 써놓긴 했지만 저건 제 개념일 뿐이구.. 다른 분들은 각자가 서평에 또다른 개념들을 가지고 계시겠지요. 결국 자기가 읽기에 재미있어야 되지않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줄 독자는 결국 자기 자신일테니, 풋.

맥거핀 2013-01-28 14:39   좋아요 0 | URL
계속 살까말까 하고 있었는데 이안 커쇼의 <히틀러> 1,2권을 이 글을 보고 질렀어요. 교양인 출판사에 들어가보니 리퍼브 도서로 이 책을 싸게 팔길래, 4만4천원에. 도서정가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말씀하신대로 그래도 살 수 있을 때 사둬야할 것 같아서..여러모로요.

가연 2013-01-28 20:12   좋아요 0 | URL
ㅎ 구입할 수 있을때 사둬야죠 뭐.. 음.. 사실 구간까지 엄격하게 적용하면 약간 염려되는게 예를들면 최근에 재출간된 비트겐슈타인 평전, 의 경우 이전의 판본이 품절되었었는데, 중고시장에서 한권당 가격이 7만원을 호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도서관에서 읽고는 중고로 구해볼까 하다가 가격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이건 미친짓이다, 라는 생각에 결국 구입을 안했는데, 카자르 사전(최근 하자르 사전, 으로 재출간된)의 경우도 비슷한 경우를 겪었었지요. 뭐, 사실 중고의 가격을 책정하는 거야 판매자 마음이긴 하지만, 구간할인이 있을때도 저렇게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었는데 구간 할인이 인정안되는 상태에서 어느 책이 품절이 되었다, 와 비슷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뭐랄까, 중고로 품절도서를 팔 때 가격을 책정하는 심리적 저항이 상당히 낮아질 것 같아요, 풋. 5만원짜리를 그냥 15만원에 판다거나..(2만5천원으로 구할 수 있었던 녀석을 15만원으로 올리는 것 보다는 쉽게 올릴거라는 것은 확신하겠네요.) 그렇다면 도서정가제가 강화되기전 열심히 책을 구입해서 책테크가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 푸하하, 책테크 이야기는 당연히 농담이구요, 모든 중고도서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 근거가 빈약하기도 하고.. 어렴풋한 예측이니 확신은 없지만...

Shining 2013-01-29 11:38   좋아요 0 | URL
하하. 뭔가 속이 시원한 느낌이네요. 저는 혼자서 읽은 책 중에 엄청 좋았던, 혹은 자꾸 뭔가를 말하게 만드는 책만 리뷰에 쓰거든요. 그건 제가 잘 알아서라기보단 하고 싶었던 말이 많기 때문에, 겠죠. 그래서 제 리뷰는 별점들이 대개 좋은 편이에요. 왜냐면 기본적으로 좋았던, 그러니까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 많다는 것에 별점을 높이 주니까요(웃음). 그렇지만 신간평가단 하면서, 아이구, 첫 책부터 막혀서 꽤나 고생했습니다ㅠ 저는 이 책에 대해 쓰기에 적절한 독자가 아닙니다, 라는 고해문까지ㅠ 어려워요 정말. 아니 어렵다기보단 복잡한 걸까요.

제가 요즘 책을 자꾸 구입하게 되는건 어쩌면 무의식중에 가연님 말씀과 같은 생각이 있어서일까요?ㅎㅎ 잘 읽고 갑니다 :)

가연 2013-01-29 22:19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샤이닝님과는 신간평가단에서 인연이 좀 있네요. 다른 분야긴 하지만 예전에 책이 한 번 잘못배송되어서 샤이닝님과 교환을 했던것 같네요, 풋. 평가단하면서 가장 힘들었던게 별을 몇 개를 주는게 옳을지.. 였던 것 같네요. 은근히 신경많이쓰이니까..ㅎ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요? 음,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샤이닝님이나 저같은 경우는(은근슬쩍 자신을 끼워넣는다) 그만큼 고민을 한다는 이야기니까, 푸하하. 좋게 좋게 생각하면 매우 적절한 독자라고 자부해도 될지도 모르겠네요, 풋. 적절한 리뷰어일지는 모르겠지만, 아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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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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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얽힘의 시대, 는 양자역학의 정립을 둘러싼 여러 물리학자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단순히 연대기식으로 어느 연도에 무엇이 있었고, 그 다음 연도에 무엇이 있었다, 와 같은 책이 아니며, 마치 제목 그대로 얽혀있는 물리학자들의 이야기들을 다룬 책이다. 그러나 쉽게 구성된 것 처럼 보일지라도 이 책 또한 양자역학을 다룬 책이다. 역사책으로 여기며 읽어나가더라도 물론 재미있겠지만, 양자역학을 다룬 책이기에 어느 정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을 짚고 읽어나가면 좋을 것이다.

 

처음 다룰 이야기는 얽힘, 이라는 것이다. 얽힘Entangled은 미시적 세계에서 나타나는 양자역학적 현상 중 가장 특이한 현상들 중 하나로, 어떤 소립자 두개가 얽혀있다면, 그 소립자쌍을 아무리 멀리 떼어놓더라도 각각에 가해진 조작때문에 다른 소립자에도 영향을 미친다. 얽혀있는 소립자 한 쌍을 상상해보자. 이제 소립자 하나를 안드로메다 은하에 놓아두고, 하나는 우리 은하계에 놓아두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 은하계에 있는 소립자쌍을 괴롭히면 안드로메다 소립자도 즉각적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이 얽힘 현상이 신기한 것은 바로 이 '즉각적' 이라는 부분이다.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은하의 거리는 빛으로 250만년을 달려가야 한다.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걸 잘 이용하면 빛보다 빠른 전달 체계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 잘 알려진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구슬이 있다. 이 구슬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쪼개지는데, 이 쪼개진 단면은 매번 측정할 때마다 다르다. 만약에 이 구슬이 쪼개질 때 항상 단면이 매끈하다던가, 등등 일정하게 쪼개진다면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어떤 정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구슬은 거칠게 쪼개지고 (가끔가다가 매끈하게 쪼개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더 크게 쪼개질지조차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런 것으로 정보를 보낼 수 있겠는가?

 

두 번째 다룰 이야기는 불확정성 원리, 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간단하게 말해서, 미시세계에서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결정할 수 없다, 라는 이야기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모른다. 어떤 시점에서 우리가 소립자를 관찰했을때 그 소립자가 또렷하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고 설명을 해두도록 하겠다. 마치 진동하는 볼처럼 덜덜덜 떨린다거나(아주 안좋은 비유지만), 분명 본 것 같은데 알고보니 내가 본 녀석은 안드로메다 은하에 가있다거나 등등 말이다. 우리가 소립자 하나 하나를 맨눈으로 볼 수 있다고 가정할 때 말이다. (물론 이 문장 자체가 모순이지만 더 나은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굳이 현미경으로 소립자를 본다, 와 같은 예를 들지 않은 까닭은 자칫하면 광양자때문에 소립자가 교란당해서 생기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산란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불확정성 원리이다.

 

그 다음 다룰 이야기는 EPR 역설이다. EPR 역설의 이 이름은 각각 아인슈타인EInstein, 포돌스키Podolsky, 로젠Rosen의 이름의 앞머리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아인슈타인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고, 로젠은 웜홀을 상상한 아인슈타인-로젠 다리로 유명하다. 이 EPR 논문이 쓰여진 이유는 일반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에 대한 반감(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라고 아인슈타인이 말했었다.)때문이다, 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양자역학의 반감보다도 양자역학이 완전하지 못하다, 라는 감정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물론 완전함을 지향하는 사람이 불완전함을 보고 느끼는 감정과 단순한 반감은 그 표현형은 같을지도 모른다.)

 

이 EPR 역설은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초를 이루는 것은 두가지이다. 실재와 국소성. 가장 먼저 실재, 라는 것이 있다. 실재라는 말을 사용하면 어렵게 여겨지지만, 당신의 눈 앞에 있는 연필을 생각해보라. 그 연필이 실재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그 연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모두 다르겠지만) 지금은 침대 위에 놓여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연필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바닥에서부터, 벽에서부터 등등 50cm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라거나 좀 더 편리하게 기준점을 잡아서 좌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편의상 침대로부터의 거리를 쓰도록 하자. 이건 논리학적인 명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방에서는 바닥에서 50cm위의 벽으로부터 50cm 떨어진 곳의 침대위에 연필이 존재한다"

 

논리학에서라면 한 명제에서 그 역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르겠지만, 이건 논리학적인 명제가 아니기 때문에 '연필이 침대 위에~' 말고 위와 같이 쓰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저 문장에서부터 일반화시키면(물론 몇가지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어떤 물리적 실재는 그 실재에 해당하는 물리적 값을 가진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를 연필로 두고 값을 거리 등으로 둔다면 자명할 것이다. 이제 저 연필의 크기를 매우매우매우 작게 만들어보자.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연필의 크기는 너무 커서 양자역학적인 법칙이 전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노벨물리학상을 탄 연구 중 하나가 원자 크기에서의 거시적인 면에서 양자역학이 성립함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원자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너무나 작다.) 그런데 이 연필을 우리가 너무 작게 만들었는지, 갑자기 뻥, 하고 반으로 쪼개져서 서로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현상이 나타나버렸다. 말하자면 앞서 말한 '얽혀있는'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이제 원래 정지해 있었지만 쪼개진 저 연필의 한 조각을 A라고 하고, 다른 조각을 B라고 하자. 편의상 왼쪽으로 날아가는 녀석을 A라고 하고,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녀석을 B라고 두면, 모두가 아는 운동량 보존의 법칙 때문에 A의 운동량과 B의 운동량을 합한 값은 초기 상태, 그러니까 정지 상태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각각의 운동에 대하여 우리가 세울 수 있는 전제와 가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전제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옳다. 그리고 가정으로는 첫째,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것 처럼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 둘째, 보어가 맞다. 이렇게 두 가정을 살펴보면 첫째 가정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값만 보아도 매우 든든하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안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둘째가정) 보어는 이렇게 말한다. 아인슈타인, 신한테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지 마라! 이 두 가지 가정 중 일단 보어의 가정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A, B 조각에서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것들은 단면의 거친 정도, 속도, 질량(합쳐서 운동량), 그리고 얼마나 멀리 각각의 방향으로 나아갔는가, 정도일 것이다. 보어의 세계는 양자역학이 날뛰는 세계이고 불확정성이 돌아다니는 세계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불확정성 원리는 앞서 말했다시피 위치와 운동량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미시세계에세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앞서 보듯이, 연필은 이미 미시세계에 접어들었으니 불확정성 원리가 작용하기에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잴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EPR 역설의 시작이다. A조각의 위치를 측정해서 +5라는 값을 얻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B조각의 위치의 값은 -5가 될 것이다. (초기가 정지 상태였기에 이후 설명한 국소성의 원리에 의하여) A조각의 운동량은 잴 수 없다. 왜? 보어가 맞다면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작용할테니 말이다. A조각의 위치가 운동량을 교란시켜서 잴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B조각이 있다. B조각의 운동량은 교란되지 않은 상태이다. 아직 B조각의 위치를 측정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앞서 얻어낸 -5는 산술적 계산으로 나온 엄밀한 값이다. 하지만 어쨌든 측정은 하지 않았잖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B조각에서 운동량을 측정해서, 그 운동량을 가지고 운동량보존의 법칙을 이용 A조각의 운동량을 거꾸로 역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을 가지고 우리는 A조각의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엄밀한 값을 모두 구해낼 수 있다.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 아닌가.

 

그런데 이건 모순이다. 방금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구해낼 수 없다고 (불확정성 원리) 했는데 지금 사고 실험에서는 다 구해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보어는 틀렸다. 결국 아인슈타인이 맞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본인 스스로의 이론, 그러니까 상대성 이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성 이론에는 아래에 이야기할 국소성이 있고, 그는 이 국소성을 바탕으로 보어를 논박한 것이다. 자신의 이론이 맞다고 여긴 아인슈타인은 숨은 변수 이론을 내세우게 된다. 자신의 역설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아직 완전하지못하다. 그렇기에 완전하게 만드는 숨은 변수가 필요할 것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왜 EPR 역설이 역설로 불리겠는가? 옳다면 이론이라고 불릴 것이다. 결국 EPR 역설은 이후에 설명할 한 부등식과 그 실험 때문에 역설로 남게 된다.

 

참고 : 물론 위의 예가 완전히 옳은 예는 아니다. 정말로 연필조각이 한 쪽이 +5가 되었다고 다른 쪽이 -5가 되는가? B조각에서 운동량을 측정하면 B조각의 위치가 바뀌게 되는 것 아닌가? 등등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질문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초래된 국소성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 질문은 중요한 것은 A에서 둘 다 측정할 수 있다, 라는 것이기에 비껴나갈 수 있다. 또한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숨은 변수를 제안한다. 하지만 옳은 비유라고는 하기 어렵다. 실제에서는 파이온 입자가 전자와 양전자로 붕괴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그리고 위치와 운동량에서 확장해서 위치와 각운동량 등으로 확인해본다. 하지만 어느 쪽이는 결론적으로는 이 말이다.

 

네 번째로 이야기할 것은 국소성이다. 국소성은 이런 것이다. 태양 주위를 돌고있는 우리 행성계를 생각해보자. 모두 공전 궤도를 따라서 돌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태양이 사라져버린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공전 궤도를 따라서 돌고 있는 수금지화목토천해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갑자기 원심력으로 튕겨져 나가버릴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실제로도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수성부터 궤도를 이탈하게 될 것이다. 중력이 미치는 속도는 빛의 속도와 동일하니(초끈이론이 제안하고 있는 중력자의 성질 중 하나가 질량이 0이다.) 태양빛이 지구에 도달할때쯤 걸린 시간이 지나면 이제 우리 행성도 궤도를 벗어나 우주로 방랑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런 것이다. 어떤 것도 빛의 속도 이상으로 달릴 수는 없다. 어떤 것도 빛의 속도 이상 가는 속도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 앞서 태양이 사라졌다면 태양이 사라졌다는 정보는 빛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정보를 전달한다는 말이 단순히 인터넷에서 패킷 몇 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개념을 넓게 보면 우리 인체도 정보의 덩어리이다. 당신이 보고 있는 컴퓨터 자체도 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물론 플라스틱과 쇠 등으로 만들어졌다고 반론할 수 있겠지만, 당신이 그걸 알 수 있는 것은 빛이 우리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영화나 만화 등에서 나오는 양자 전송의 개념은 바로 여기서 착안한 것이다.

 

그렇기에 반대로 말하면, 빛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전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계에 무슨 작용이 미치지는 않는다. 바로 이것이 국소성의 원리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서는 물리적 작용이 멀리 떨어진 두 계에 동시에 미칠 수 없다.

 

따라서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한다면 앞서 연필의 한 쪽이 +로 나온다면 다른 쪽은 당연히 -로 나올 수 밖에 없다. 다른 쪽도 +로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지는 못할 거라는 말이다. 실제로는 파이온 입자의 붕괴를 상상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국소성의 원리는 정확한 것인가? 그렇다. 정확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정확한 만큼 정확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가장 최근의 실험에서도 그 완벽함을 자랑했다. 매우 정밀한 시계를 만들어 고도를 바꾸었는데 실제로 시간이 달라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앞서 EPR역설과 위의 국소성을 종합해 만들어진 것이 국소적 숨은 변수이론이다. 앞서 말했듯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론에서 유추된 국소성의 원리를 가지고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 불완전함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를 기억하는가? 그 스스로가 최대의 실수라고 불렀던, 하지만 결국에는 옳은 예측처럼 여겨지고 있는. 바로 그런 상수처럼 변수를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숨은 변수이다. 이 변수를 넣으면 완전하게 양자역학적인 문제들이 없어질 거라고 여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숨은 변수는 우주 상수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아래의 벨 때문이다.

 

여기서 벨이 등장한다. 물리학자 벨은 고민했다. 과연 EPR과 코펜하겐 학파의 설명 중 어느 쪽이 더 옳은 것일까? 기존의 양자역학 체계는 불완전하고 현실을 기술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생각 끝에 나온 것이 벨의 부등식, 이다. 만약에 EPR 역설이 맞다면 물리적인 실재들, 그러니까 앞서 말한 연필은 절대 빛의 속도 이상으로 다른 연필로 정보가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연필들 사이에서는 분명 연관성에 있어서 한계가 지워질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노래하는 사건과 내가 오디션을 보는 사건, 그리고 내가 거리에서 차를 모는 사건을 생각해보자. 이 세 가지 사건에서 내가 노래하는 사건과 내가 오디션을 보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은 내가 내가 오디션을 보는 사건과 내가 차를 모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에서 내가 노래하는 사건과 내가 차를 모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의 차집합보다는 항상 크게 된다. 세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만큼 더 크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말하자면 상식적이고 논리의 문제이다. 불완전한 이론의 보완 및 현실의 기술을 위하여 숨은 변수를 사용했으니 당연히 숨은 변수 또한 이 상식적인 부분의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걸 일반화하여 만든 부등식이 벨의 부등식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양자역학적 세계에서는 전혀 인과관계가 없어보이는 사건들 간에 인과가 생길 수 있다, 혹은 동시에 작용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기존의 양자역학이 옳았다. 벨 부등식은 지금까지 실험 중 한 번도 숨은 변수 이론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벨 부등식이 성립하는 상식의 세계는 양자역학의 예측 결과와는 여지없이 빗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벨 부등식의 실험 결과 나타난 현상을 사실 그냥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뭐? 정말 고양이가 죽은 상태와 살아있는 상태가 겹쳐있다고? 그럼 실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여러 상태가 지금 겹쳐지 있는 건가? 물론 이런 것은 비약이다. 그럼에도 미시세계에서는 우리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일어난다는 점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벨 부등식의 실험 결과 숨은 변수들을 폐기할 수 있었다지만, 엄밀히 말해서 벨 부등식이 폐기할 수 있었던 것은 국소성의 원리였다. 양자역학에서는 실재로 얽힘이라는, 앞서 이야기한 그런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데이비드 봄의 이론이 생명력을 얻는다. 그가 주창한 것은 비국소적 숨은 변수이론이다.

 

물론 데이비드 봄이 자신의 이론을 편 것은 존 벨의 부등식이 나오기 전의 일이다. 데이비드 봄은 사실 매우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 한참 소련과 적대관계에 있던 미국에서 적색으로 몰려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당하고 결국 풀려나와서 양자론을 세우게 되는데, 그의 양자론의 중심을 이루는 사상은 전체성이다.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매우 영적인, 심하게 말하면 무슨 철학이나 종교의 사상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데이비드 봄은 신지학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대담을 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자론은 수학적으로 매우 잘 뒷받침이 되어있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게 된 것은 전자기학을 정립시킨 제임스 맥스웰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 제임스 맥스웰은 당시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어떤 스칼라장을 예측했으나 정리되어지는 과정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맥스웰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드 브로이의 논의 또한 봄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제 그의 주장을 따라 몇 가지 개념을 이야기하겠다.

 

1. 파동함수는 실재하는 장을 나타내며, 이 장 말고도 입자가 있다.

 

2. 그 입자는 고전 포텐셜 뿐만 아니라 양자 포텐셜의 영향을 받는다

 

3. 앞서 말한 실재하는 장, 은 요동치며 존재한다.

 

이 세 가지 개념에 따라서 장의 요동(3)은 양자 포텐셜(2)에 따라서 입자(1)에 전달이 된다. 그런데 이 봄의 이론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기존 양자역학의 예측과 수학적으로 동일한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 예측에 이르기까지의 논리 구조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다름 때문에 비판에 직면한다. 쉽게 말해서 숨은 변수를 가정한 봄의 이론과 숨은 변수가 필요없는 기존 양자역학이 있는데 이들 중 어떤 것을 따르더라도 예측은 같다면 굳이 복잡하게 숨은 변수를 넣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기에 파인만은 이 책에서 이야기한다. 임의로 대사의 순서를 바꾸었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양자역학이 제대로 작동해. 문제될 것이 뭐가 있겠어? 하지만 그건 내 것이 아냐. 난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 난 해결할 문젯거리가 있는 게 좋아."

 

마지막으로 촘스키의 이야기이다. 사실 촘스키는 이 책에서는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과학에 대해서 대담을 가진 적이 있는데, 이런 말을 했었다. 거의 확실하게 옳은 과학적 이론이지만 유전적으로 결정된 우리 뇌구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이론들이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현대 미술을 보자. 요즘 미술은 밑에 설명이 없으면 사실 이게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촘스키 자신은 이런 말을 한다. 19세기 후반에 돈많고 시간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것들에 정통할 수 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성취 중 대부분은 일반인들과는 유리되어 있다고 말이다. 19세기 미술은 지금의 미술과는 매우 달랐다. 적어도 보면 무슨 그림인지는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찬가지의 일이 지금 물리학에서 일어나고 있다. 양자역학의 신비함은 사실 어쩌면 거시세계에 익숙한 우리들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쉽사리 풀리기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촘스키는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의 정신으로 과학을 세울 수 없는 듯이 보이고 지금까지 과학을 세우지 못했던 거대한 영역들이 있다' 라고 운을 뗀 뒤 '반대로 우리가 진정한 과학적 발전의 능력을 발휘했던 영역이 있다' 고. 바로 그 영역은 물리학이다. 그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촘스키의 말을 따라가본다면 '아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 정신의 본성에 관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 이라고 여겨진다. 물리학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우리 유전적 뇌의 구조때문에 양자역학에 고개를 갸웃거릴지라도 결국에는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발전을 이루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요약 정리

 

글의 내용이 잘 이해가 안된다고 여기는 분들은 이 요약 정리만 읽어도 충분하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내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에 이렇게 간단하게 얽힘의 시대, 와 관련된 내용들만 이야기해두겠다.

 

먼저 얽힘의 시대, 첫 부분을 읽고 나면 이런 느낌이 들 것이다. EPR역설이 옳고 기존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와 같은. 하지만 이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EPR역설에서 말하는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이 정확하게 말하면 불완전성이 아니었다, 라는 말이 되리라.) 저자는 아인슈타인과 봄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를 가지고 책을 서술하고 있지만 실험 결과와는 좀 다른 부분이 있다. 양자 역학의 발전 순서를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코펜하겐 학파의 기존의 해석, 양자역학의 세계는 정말 불가사의한 세계다. -> 그 다음 EPR 역설, 양자역학의 세계를 설명하는 기존의 해석은 불완전하다. -> 그렇다면 EPR 역설과 코펜하겐 학파의 설명 중 어느쪽이 맞는지 확인해보자, 존 벨의 부등식. -> 벨의 부등식을 실험해보니 코펜하겐 학파의 설명이 맞는 것 같다. 까지가 현재 전개되고 있는 순서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EPR역설은 그렇다면 폐기시켜야 하는가? 옳지 않으니? 하지만 그건 또 아니다. EPR역설의 국소성 부분은 폐기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재론 부분은 폐기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숨은 변수도 실재를 기술하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면 완전히 배제하기도 힘들다. 관측될 당시에 바로 소립자가 보이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비국소성 실재론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면 EPR역설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답은 현재의 해석으로는 전혀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이 그대로 남게 된다, 정도로 정리가 된다.

 

또 하나, 읽다보면 숨은 변수이론과 EPR 역설을 동일시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숨은 변수 이론은 EPR역설과는 다르며, EPR역설을 통해서 제안한 가설이다. 양자역학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숨은 변수를 넣어서 완전하게 만들자, 라고 하는 가설말이다. 그리고 이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른다. EPR의 해석을 받아들여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을 생각하거나, 혹은 비국소성은 받아들인채 비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을 생각하거나.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을 제창한 전자의 경우에는 아인슈타인과 드 브로이(얽힘의 시대, 에서 소개하기로는)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 봄은 비국소성 숨은 변수 이론을 제창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국소적으로 쪼개져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 강한 편이다. 그의 이론은 기존의 해석들에 비하여 더 보탤 필요가 없지만, 이런 저런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 정도로 정리를 해두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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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조금 시간이 생겨서 아껴가며 읽는 책 중 하나가 메르헨들을 모아둔 책이다. 메르헨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대략 환상적인 동화,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항상 환상적인 이야기들과 신화, 전설, 그리고 민담들은 나를 매혹시켰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들, 그리고 지금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포함해서 여기에 모아 본다. 물론 다시 읽게 되면 후회할 것이다. 말하자면 은하철도 999의 메텔, 그러니까 어릴 적의 환영같은 책들인 것이다.

 

 

 

이원수 전집.

사실 내가 여기에 추가하고 싶던 책은 이 책이라기보다는, 옛날에 나왔던 전집이다. 책들을 살펴보다가 그나마 내용이 기억나는 책으로 여기에 넣었다. 그 전집은 꽤나 두꺼운 판본으로 어떤 책은 분홍색, 어떤 책은 노란색, 어떤 책은 녹색 등으로 칠해져서 모여져 있던 책이었다. 어렸을 때 도서관에 가서 늘 한쪽 구석에 틀어박혀서 보석에 관한 책들을 읽거나, 이원수 전집을 읽었다. 지금까지 기억 나는 이야기가 몇 개 있다. 저축 통장을 만들기 위해서 돈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집이 잘 사는 아이가 돈을 한 번에 가득 가져와서 순식간에 저축왕이 되자 기분나뻐하던 그런 내용의 이야기도 있었고, 한국 전쟁때문에 가족과 헤어진 소년이 다시 가족과 만나는 그런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읽던 당시에는 한국전쟁이라는 것을 몰랐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이야기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였다. 콧대높고 자존심 센 소녀가 결국에는 소년의 우직함에 반해서 결국 서로 좋아하게 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였다. 부잣집 아가씨였던 소녀는 나쁜 무리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되고, 소년은 그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고생을 한다. 이윽고 소녀를 만나게 되지만 부주의했던 탓일까 어른들에게 걸려서 철도에 묶여서 기차가 지나가면 그대로 죽게 되는 그런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묶은 것이 허술했는지 겨우 풀려나와서는 소녀를 무사히 구했던,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읽으면서 몇 번이고 손에 땀을 쥐었는지 모른다.

 

 

 

소년 봉신방.

이 책에는 아픈 기억이 있다.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읽던 책이었는데, 빌릴 때마다 5권만 없었다. 결국 다 찢어지고 상태가 엉망이 된 책을 겨우 볼 수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5권이 본격적으로 도술을 다루고 주나라 은나라의 전투를 다뤘던 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인기가 좋았던 것 같다. 봉신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본적인 얼개는 중국의 봉신연의를 따라가는데 다만 소년들의 눈높이에 맞게 각색을 해두었다. 이 시리즈를 모두 읽고 나서 봉신연의를 읽었는데, 사실 깜짝 놀랐다. 분명 익숙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전개가 내가 알던 이야기와는 너무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소년 봉신방에서는 태사 문중은 그저 나쁜 존재처럼 그려지지만 봉신연의에서의 태사 문중은 망해가는 은나라에서 유일하게 고군분투하다가 태공망의 사악한(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함정에 걸려 결국 숨을 거두고 마는 일종의 영웅적인 캐릭터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년 봉신방의 주인공은 나타태자이지만 실제로 봉신연의에서 주인공격의 캐릭터는 굳이 꼽자면 태공망이리라. 그렇다. 실제 역사에서는 강태공으로 나오는 그이다. 비록 원작의 방대한 설정들(원작에서는 심지어 접인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의 부처들까지 등장시키기도 한다.)을 모두 살리지 못하고 가지를 많이 쳤지만 역경을 이기며 (스승 태을진인의 희생 - 실제 봉신연의와는 상당히 다른 각색이지만) 혼란속에서 자신이 할 일을 하는 나타의 모습은 어린 소년들에게 꿈을 실어주기에는 충분하리라.

 

 

 

끝없는 이야기.

너무나 유명한 미하일 엔데의 소설이다.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기에 줄이고, 여담을 끄적이자면 어릴 적 어느 방송국에서 '네버 엔딩 스토리' 라는 제목으로 이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한 외화 프로그램을 몇 번이고 봤던 기억이 난다. 어른이 되어 그 프로그램이 너무 보고 싶어서 가까스로 찾아서 일부를 봤는데, 조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구나..' 실제로 어렸을때 그렇게 환상적이었고 멋진 장면들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사실은 당연한 거다. 아름다운 기억들을 검은 물감으로 덧칠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시는 어렸을 때 좋아했던 영상들을 찾아서 보지 않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바스티안과 아트레유의 이야기는 내 기억속에서 선명하게 재생될 것이기 때문이기에.

 

 

 

 

블루엔젤.

이 책은 사실 어른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말이다. 쉽게 내용을 말하자면 일본판 소공녀라고 부르면 될 것 같다. 소공녀와 요시모토 바나나의 '티티새' 를 반쯤 섞은 분위기라고 하면 좋을까? 책 전반적으로 정말 불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소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그런 모습들이 잘 그려져 있다. 물론 권선징악에 해피앤딩이라는 전형적인 결말이기에 읽다가 질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무리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정말 계속해서 불운이 겹치는 일은 잘 없다. 어쩌면 어른들에게는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하늘을 보다가 '그래, 그래도 다음에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라는 기분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이 책을 읽으면 일종의 카타르시스처럼 묵은 감정이 조금이나마 씻겨나가지 않을까?

 

 

 

 

바다가 들린다.

이 책은 사실 동화라기보다는 하이틴 소설에 더 가깝지만, 어릴 적에 조금 접했던 기억이 나서 이렇게 담아둔다. 최근에 개정판이 출간되어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책들 중 하나다. 그동안 절판이 되어 쉽게 구하지 못해서 끝까지 읽지 못했었다. 왼쪽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뚱한 표정의 여자애는 이름이 무토, 라고 한다. 예쁘기는 하지만 성격이 나쁜 이 소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방으로 전학에 가게 되고, 거기서도 자신의 태도를 굽히려 들지 않아서 결국 친구를 많이 만들지 못하고 고교를 졸업하게 된다. 주인공은 남자 소년인데, 처음에는 이 무토라는 여학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보고 있으면 좋기는 하지만 말걸기는 힘든, 그런 사람이라고.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청춘 하이틴 소설을 관장하는 신의 농간인지 어쩔 수 없이 둘은 서로 엮이게 된다. 1권은 고교 졸업때까지의 내용이고, 2권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의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권 내용을 바탕으로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바다가 들린다' 라는 동명의 제목으로 애니메이션도 제작되었다. 애니메이션과 이 책의 흐름은 실제로 제법 다른 부분이 많으니 둘 다 접하면 매우 좋을 것이다.

 

 

 

 

호첸플로츠.

고백하자면 이 책에서 기억나는 것은 소시지가 너무 맛있을 것 같다, 라는 느낌 단 하나 뿐이다. 지글지글 소시지를 굽고 감자를 깎아서 다양한 요리법으로 조리한 뒤 거기에 후추를 잔뜩 뿌리고 맛있게 먹는다. 읽던 내내 침이 고였고 소시지가 먹고 싶다, 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래, 소시지를 굽는 부분만 열 번 정도 반복해서 읽은 것 같다. 소시지와 구운 감자, 그리고 후추를 곁들이는 부분은 가장 끝부분에 나왔고 덕분에 이 책은 앞부분은 뻣뻣했지만 뒷부분은 너덜너덜해졌었다.

 

 

 

 

 

 

 

 

황룡사 방가지똥

반은 실망하고 반은 좋아했던 책이다. 왼쪽의 표지의 삽화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경주를 배경으로 한 책인데, 줄거리를 조금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황룡사에 원래 종이 있었다고 한다. (책의 창작이 아니라 실제 전설상으로 황룡사에는 종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은 그 전설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 같다.) 전설상으로 그 종은 일본군이 약탈할때 가져가다가 바다에 떨어뜨려 버렸다는데, 가끔씩 소리가 울린다고 한다. 이 책에서 동자승은 그 종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그런데 아무런 단서도 없이 종을 찾는 것은 아니다. 종소리가 가끔씩 동자승에게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종소리는 모두에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동자승 등과 같은 순수한 사람들에게만 들리는 그런 종소리였던 것이다. 종소리는 너무나 맑고 투명해서 마음을 동자승의 마음에 천천히 스며들었고, 그 소리를 들으며 동자승은 다짐하는 것이다. 종을 찾겠다고. 과연 동자승은 그 종을 찾을 수 있을까?

 

 

 

갈대숲 속 작은 집의 비밀.

이 책은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특이한 상식을 많이 얻었던 기억이 난다. 뱀술이라던가, 뒷간에 대나무를 꽂아서 노란 물을 증류해서 약으로 쓴다거나 (..정말 저런 민간요법이 있는지는 아직도 확인 못했다.) 독사에게 천을 내밀어서 물게 하고는 홱 잡아당겨 이빨을 뽑아버린다거나 (실제로 맞닥뜨리면 이런 짓 하지 말자.)이 책의 배경이 되는 곳은 내 기억으로는 우포늪이었던 것 같다. 너무 옛날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분명 늪이 배경이었고, 그 늪에 자란 갈대숲 속에 제목 그대로 작은 집이 있었다. 그 집을 주인공은 아지트로 삼아서 살아간다. 도시에서 불행을 겪고 (내 기억으로는 화복이의 부모님에게 안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시골로 내려온 화복이는 적응하는데 고생을 많이 하게 된다. 아이들은 도시에서 온 녀석이라고 백안시하니 더 고생하게 된다. 그러다가 겨우 어울리게 되고 친구가 익사할 뻔 했다거나 하는 일을 대처하는 등 의젓해진다. 시골의 먹을 거리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어렸을 때 늘 먹던 라면이건만, 책에서 모여서 가마솥에서 끓여먹는 라면은 내가 먹는 라면과 다른 라면 같았고, 죽순을 먹는 이야기를 하면 죽순이 먹고 싶었다. 이건 여담인데 이 책을 읽고 우포늪이 너무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우포늪에 가보지 못했다.

 

 

 

부루가 간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했던 책이다. 지금은 개정판이 발간된 것 같은데, 나는 저 부루가 간다, 라는 책으로 읽었다. 먼저 고백하자면, 지리산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묘한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책 때문이다. 책의 도입부는 지리산 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부루의 아빠가 부루에게 지리산의 통천문 (어렸을때의 나는 이 동화에 나온 것 처럼 삿된 마음을 품고 이 통천문을 지나가면 벼락을 맞는 줄 알았다.) 에서 시작한다. 부루의 아빠는 나이가 많았지만 부루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아마 부루의 모친이 부루를 낳을때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고, 부루는 제대로 된 호랑이의 젖조차 먹지 못했던 내용이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렇게 조그맣고 약한 부루였기에 결국 산왕의 자리는 일종의 반란이 일어나 다른 동물에게 넘어가버린다. 부루는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해서 백두산까지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남한에는 더이상 한국호랑이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짝을 구하려면 백두산까지 가야만 했었다. 중간에 동물원에 잡혀가기도 하고 휴전선을 건너며 총에 맞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친 뒤 겨우 다다른 백두산에서 자신의 아내가 될 암호랑이 솔나를 만나게 된다. 이런 일들을 거쳐 완전히 성장한 부루는 지리산에서 최후의 결전을 펼친다. 읽으면서 지리산에서는 부루가 살고 있을까,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아, 하나만 이야기를 하자면, 부루가 총에 맞았을때 삼지구엽초를 환부에 바르는 장면이 나왔다. 어렸던 나에게는 만병통치약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니까 이런 동화책에다가 정보를 넣으려면 정말로 확실한 정보를 넣어야 할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든 지금도 잊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푸하하.

 

 

 

마지막에 이 책을 넣는 이유는 이 책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직 앞부분정도 밖에 읽지 못했지만 벌써 몇 몇 구절은 마음에 날아와 박혔다. 가자먼저 운디네,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동화가 있는데,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물의 정령에 대한 이야기이다. (4대 정령은 여러 판타지에서도 나오는 주제이다.) 인간세상으로 온 이 물의 정령은 어느 오두막집에서 자신을 주운 노인들과 함께 살아가다가 우연히 그 오두막으로 찾아온 기사와 숙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은 심장이 없는 운디네에게 심장을 부여해주었고, 운디네는 그 온기에 눈물흘리며 기사에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버릴 거라면 차라리 지금 버려주세요.' 운디네의 슬픈 예언은 빗나가지 않았고 이윽고 그녀는 그녀 정령들의 율법에 따라 자신을 버린 기사를 죽여야만 했다. 기사는 운디네에게 말했다. '그대가 우리가 처음 만난 모습처럼 아름답지 않다면, 죽어갈때까지 공포에 떨게 할 거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내가 느끼지 못하게 단번에 목숨을 빼앗아달라' 그리고 운디네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끝내 부서져버린 이종족간의 사랑. 책 전반에 이런 이야기들이 마음을 두드린다.

 

 

 

이외에도 아마 더 많은 동화책들이 있었던 것 같지만, 내가 겨우 기억을 떠올리며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었던 책들은 위의 책들 정도다. 안데르센 동화나 그림 형제의 동화 등은 너무 유명하니 제외했다. 나니아 연대기도 분권되어있는 책으로 읽었었다. 개인적으로는 안데르센과 그림 형제, 나니아 연대기 중 다시 읽고 싶은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니아 연대기를 고를 것 같다. 동화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명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리라. 단순히 기발하다거나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그 주인공이 되었을 때 주인공만큼의 용기를 보일 것인가? 혹은 주인공처럼 마법을 쓰면서 그 힘에 유혹당할 것인가? 그리고 결국에는 다시 제자리, 본래의 선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인가? 그런 것들을 계속 상상하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일 것이다. 안데르센이나 그림형제, 나니아 연대기 모두 뛰어나지만 계속 상상하게 만들었었던 책은 나니아 연대기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니아 연대기와 위의 책들을 포함해서 다시 나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면 과연 어떤 책을 나는 고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나는 분명 '부루가 간다' 를 고를 것이다. 가장 좋아했던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읽고 싶다' 와 '실제로 다시 읽는다' 와의 거리는 너무나 멀어서 결국에는 나니아 연대기를 집어들며 읽게 될 것이다. 성인이 되어 위의 '블루엔젤' 이 기억나서 다시 읽어볼까, 하고 어린이 열람실에 기웃거렸더니 사서가 왜 여기 있느냐고 묻길래 대답을 못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이 이유가 더 큰데, 다시 읽으면서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실망하고 싶지 않다. 부디 재밌던 내용만, 그리고 그 어릴 때의 두근거리던 가슴만 그대로 간직하며 앞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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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8 14:03   좋아요 0 | URL
나니아 연대기도, 호첸플로츠도, 어릴 적 읽을 때 더 재밌었어요. 그래서 다시 읽고는 조금 실망한.. 특히 호첸플로츠 읽은 나이가 더 어렸을 때라 그런지 더 실망이 컸음. 호첸플로츠 맨 앞에 있는 요리는 소시지 양배추 볶음 아니었나요. 저도 그 요리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 그 부분의 페이지를 마치 뜯어먹은 느낌.ㅎㅎ 수요일마다의 특식이었는데, 카스팔과 제펠이 그걸 못 먹게 되어 너무너무 분노했었죠. 전 그 분노에 굉장히 공감갔구요.하하~
끝없는이야기도 고3 독서실에서 시간을 잊고 읽은 추억의 책! 부루가 간다를 못 읽고 커버린 게 아쉽군요.~
전 성인이 된 뒤에 읽고 싶었던 건, 금성출판사의 무지개 시리즈와 은하수 시리즈의 모든 책.(계몽사의 메르헨 시리즈처럼 현대작가의 아동문학/동화/환상문학 등을 모아놓은 시리즈죠. 메르헨 시리즈도 재밌는 거 많았는데.) 아동열람실을 기웃거렸죠. 어린이들을 부러워하며..ㅋ

가연 2013-02-13 23:4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정말 맛있게 뜯어먹은 기분이 들지 않았던가요??ㅎㅎㅎ

부루가 간다, 는 정말 강추..지만 이미 커버린 분께는 해당안됩니다?ㅎㅎㅎ

희선 2013-11-29 00:42   좋아요 0 | URL
호첸플로츠, 소시지 굽는 부분에 빠져서 자꾸만 보는 가연 님을 상상하니 귀엽군요(예전에도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있지만 말은 못했습니다, 언제였더라...)^^ 아쉽게도 저는 그런 게 없습니다 또 생각나는 거 뭐 없을까요 친구하고 같이 봤던 책이나 이야기한 책 있으면 가르쳐주세요

저는 동화 다 커서 봤습니다 아주 어릴 때 본 그림책이 어렴풋이 생각나지만... 그래도 어떤 것은 재미있기도 했는데 요새는 잘 안 보는군요 그냥... 아주 가끔만 볼까 합니다 예전에는 동화 본 것만 썼습니다 다른 책도 읽었지만 쓸 수가 없더군요 그때 쓴 거 아주 가끔 찾아보기도 하는데 웃겨요 그런데 그대로 쭉 썼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동안 책 읽기만 하다가 다시 쓰게 됐거든요 그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어쩐지 지난날의 저한테 지고 있는 듯하네요 언제나...

끝없는 이야기 읽었는데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군요^^


희선

가연 2013-12-01 22:5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정말 묘사를 잘해두었답니다.

희선님의 예전 글들이 궁금한데..ㅋㅋㅋ그러고보니 동화를 많이 보시는 것 같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