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 이제 한 숨 돌리고 끄적거리네요, 풋.

 

 

 

너의 목소리가 들려.

워낙 이야기도 많이 들었구, 이상문학상도 탔겠다, 기대가 상당히 큰 책이었는데 다 읽은 후 보니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다, 또 읽고 싶다 등의 그런 소설이 아니더군요. 읽으면서 당황스러웠던 것은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다고 여기지도 않았는데 이 책을 잡고는 도저히 놓지 못하고 거의 30분만에 다 읽어내려갔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한 번 잡으면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런 이상한(정말 이상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힘이 이 소설에게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볼 수 밖에 없었고, 그 이상한 힘은.. 비유하자면, 가파른 벼랑에서 자전거를 타고, 핸들을 놓고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런 힘처럼 느껴졌습니다. 너무 무서운데도 눈을 감지 못하는 그런.. 하지만 그런 감정은 놀이공원의 어트랙션 기구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스릴과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놀이공원의 어트랙션을 타고 스릴을 느끼지만, 결국엔 우리가 '살아서' 지상을 다시 밟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죽음'을 그대로 맞닥뜨리게 만듭니다. 아마 그 묘한.. 위험을 마주보는 그런 경험이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그런 묘한 '힘'을 소설에 구현해내기 위해서 작가가 희생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제이와 동규이고, 그들은 소위 말하는 거리의 아이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이가 주인공이겠지요. 소설은 동규의 눈을 빌려, 제이의 행적을 함께 밟아나갑니다. 소설 말미에서는 우리가 '동규의 눈' 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동규로부터 제이의 이야기를 들은 '소설가의 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실존하는 이 책을 쓴 '김영하'와 소설 속의 '소설가' 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되며, 이는 어떤 뉴스나 매체보다도 더 이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동규'의 눈을 빌려 쫓아왔던 '제이'의 성장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 서사가 실제로는 '소설가'까지 거쳐서 들려온다는 점을 독자에게 일깨워주어, 제이의 작중 행동들(마치 거리의 아이들의 교주처럼 행동했던)이 그저 기벽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화를 걸어오게 만듭니다. 즉, 작중에서 이 이야기(제이와 동규의 이야기)를 쓴 소설가로 인하여 현실의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는 현실성을 획득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를 부정하는 결말을 맞게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이지요. 어쩌면 그런 자기 파괴적인 부분은, 희생한 부분이 아니라 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힘의 구성 요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무슨 말을 덧붙이든지 이 책은 (적어도 저에게는) 재미있지는 않지만,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책에게 기대를 만족시켰다, 기대보다 못하다, 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할 책이 아닌 것 같으니깐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 밖에, 하하. 하나만 더, 김영하작가는 요즘 '작가' 이야기를 쓰는데 재미가 붙은 모양입니다. 혹은 가장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를 택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스노우맨.

두꺼운 책이긴 합니다만,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성적인 묘사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크흠) 어쨌든 책에 집중하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고, 읽는 재미도 그럭저럭 있었습니다. 네.. 그럭저럭 있었습니다. 사실 요즘 추리 소설의 경향은 탐정 대 범인이 아니라 독자 대 범인이 되는 경향이 되어가고 있다고 저는 여기고 있습니다. 독자를 직접 책에다가 끌여들여서 머리를 쓰게 만드는 거지요. 그렇게 만들면 책의 내용이 어떻든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데는 최고일테니깐요. 독자는 자신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가면서 탐정못지않게 추리합니다. 그러다가 독자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으면 서술트릭을 묘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면 독자는 한 대 맞고 와우 이 책 대단한데, 라고 여기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서술트릭 등을 배제하고 완고하게 탐정 대 범인의 구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탐정이 아니라 경찰 해리 홀레겠지만요. 그래서 신선하다고까지 여겼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중반 이후로는 흥미를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중반이 되자 범인이 누구인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독자는 소설 안의 '해리 홀레'가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소설을 쓴 작가의 문체나 서술 방식 등으로 쉽게 '볼 수 있'으니깐요. 저자는 안간힘을 다해서 소설 내용의 흐름을 작중의 실제 범인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으려고 합니다만 도리어 그 부분이 독자에게 어색하게 다가온다는 점을 생각했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뭐, 사실 개인적으로 범인을 확신하게 된 것은 수많은 다른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이 숱하게 물어봤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어떤 것' 때문이었지만요.

 

 

 

어나더.

그런 의미에서 이 어나더, 는 철저하게 독자 대 범인 (이 책에서는 범인도 아니지만..) 의 구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는 범인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독자가 추리해내어야 할 대상은 존재하지요. 이 책의 장르를 분류하자면 호러미스테리 소설이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추리할 대상만 있는게 아니라 귀신도 나옵니다. 이야기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어느 중학교 3학년에는 학급이 세 개가 있는데, 3학년 3반이 저주 비슷한 것을 받아서 (소설에서는 죽음과 가까이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만) 매년 귀신이 반에 함께 지내게 되고, 귀신이 그렇게 있는 1년 동안은 매달 한 명 이상이 죽어나가게 됩니다. 죽는 방식은 별의 별 방식으로 다 죽어나갑니다. 심지어 그 맞기 어려운 벼락을 맞아 죽은 학생도 있으니 말이지요. 그러나 귀신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아이들을 죽이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웃긴 것은 그 귀신도 자신이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평범하게 학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포에 떨면서 1년을 보낸다는 것이지요. 영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과 흡사합니다. 단순히 죽기 때문에, 혹은 잔인하게 죽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죽기로 예정된 사람은 죽음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정말로 무서운 것이지요. 이는 심지어 보고 있는 독자들의 간담마저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요, 이번에는 앞서 스노우맨, 과는 달리 너무 독자들과 죽은 자, 의 구도로 맞추었기에 곰곰히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맞고 이해도 안되는 내용이 생기고 말았지요. 무엇보다도 주인공들의 모습은 아무리 중학교 3학년 학생이라지만 그다지 공감이 와닿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특히 결말은.. 고대 희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어떤 작품성으로는 부족한 소설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오락성은 뛰어나다고 봅니다. 읽는 중에는 이런 저런 단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수난.

저는 무슨 종교든 믿을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어느 종교든 다 배척하면서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곧 책에서 특정 종교의 색이 강하다고 해서 그만읽는다거나 처음부터 바라보지도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조금의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실 이 수난, 이라는 책의 원제는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Christ, recrucified' 입니다. 그래서 읽을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저자를 보니깐.. 그 유명한 그리스인 조르바, 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였더군요. 어쩌면 저 recrucified가 너무 종교색이 강해서 수난, 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일 수도 있겠고, 더 엄밀히 원제를 쓰자면 'The greek passion : Christ, recrucified' 라서 수난,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괜찮은 제목으로 여겨집니다. 만약 이전에 번역된 (지금은 절판된) 책처럼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라고 적혀있었다면, 분명 좀 더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을테니깐요. 터키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의 어느 지방에 '수난곡' 을 7년마다 재연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예수가 어떻게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십자가에 매달렸는가, 를  재연하는 행사라고 합니다. 이 행사를 위해서 마을의 장로들은 예수, 요한, 베드로, 야곱, 막달라 마리아, 유다를 각각 선정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정말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이 배역에 있습니다. 이전에 '우상의 눈물' 이라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 설령 악인이라도 사회가 강제적으로 어떤 역할을 부여하면 별 수 없이 그 역할에 따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며 살게 된다, 라는 말이 아주 그르지는 않다는 이야기이지요. 장로들이 저마다의 이득을 위해서, 혹은 별 생각없이 정한 배역은 그 배역을 맡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점차적으로 예수역의 마놀리오스와 유다역의 파나요타로스는 대립을 하게 되지요.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맘에 들었던 말은 마을의 터키 지배자 아그하의 말이었습니다. '당신네 예수와 우리네 알라가 술을 이렇게 한 잔씩 주고 받는다면 전쟁같은 것은 없을 텐데' 정말 그렇지 않을까요? 카라마조프가네 형제들, 의 대심문관 부분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p.s. 이 글을 쓰면서 위로가 되어준 에미넴 Stan (feat. 엘튼 존) 에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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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9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9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