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시.
다른 거의 대부분의 25시에 관한 글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쓰는 이 글도 25시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한다. 25시는 구세주가 왕림해도 구할 수 없는, 24시간 이후의 시간이다. 24시간까지는 빛이 있으라, 라고 외쳐서 세상을 창조한 신의 시간이라면, 그 최후의 최후까지 다다른 후에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은 절망과 적막의 시간 뿐이다. 저자 게오르규는 25시에 다다른 세상의 모습을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열거하듯 주인공을 내세워 그려나간다. 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루마니아인인 주인공은 주인공의 아내를 탐낸 군대의 소장때문에 실제로는 유대인이 아닌데도 유대인이라고 규정지어져 강제 노동에 동원되게 되고, 그 후에 간신히 루마니아인의 신분을 회복했나 싶더니 이번에는 루마니아인이기때문에 수용소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작중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순박하다기보다는 멍청하며, 날래기보다는 둔하며, 현명하다기보다는 어리석다. 그저 주인공이 내세울 점은 순수하다는 점인데, 이미 현대에 이르러 순수하다는 말은 바보같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이미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이 되어버린 우리가 어떻게 그가, 주인공인 요한 모리츠가, 멍청하다고 규정지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서양의 철학은 데이비드 흄에 의해서 그 극한까지 이르렀다가 칸트가 범주를 내세워 다시 반석 위로 올랐다. 그러나 그렇게 범주를 이용하는 방법이 인간들을 분류하는데 쓰이게 되기 시작하자 인간들은 그 자신들의 이성보다도 더 소중한 생명을 잃기 시작했다. 게오르규는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하고 범주로, 사회적 관계로 사람들을 규정짓는 서양의 제도에 대해서 이렇게 진단한다 - 이대로 가다가는 문명때문에 인간은 절멸할 것이라고. 잠수함에서는 흰 토끼를 기른다고 한다. 잠수함이 위험심도에 이르면 흰 토끼가 산소부족으로 먼저 죽기 때문이라던가. 그런데 흰 토끼가 죽을 때가 되면 벌써 늦은 것이다. 우리 주변의 흰 토끼는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가?
독일인의 사랑.
정말 상투적이라는 말밖에 더 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사실 저번에 은희경의 책에 대해서 끄적거리면서 '나왔을 당시에는 상투적이지 않았겠지' 라고 말끝을 흐린적이 있었는데, 분명 이 책도 나왔을 당시에는 상투적이지 않았을거다. 하지만 지금의 눈으로 볼때는 신분격차가 나는 두 남녀 사이의 사랑, 게다가 여자는 병약한 몸이라는 전개는 정말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게다가 결말까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바로 그 결말 맞다. (아닌가?) 하지만 다른 부분은 다 그냥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랑은 좀 부럽다. 책에서 남자주인공은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그녀의 연인이라도 좋고, 그녀의 오빠라도 좋으며, 그녀의 아버지라도 좋다. 그 어떤 것이든 나는 그녀의 '무엇'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이 무엇인지 강제한다, 라고.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보니 좀 달라졌을까? 하지만 저 마음이 나를 가슴아프게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

구입은 옛날에 했는데 이제 다 읽었다. 읽고 나서 소감은.. 제일 마지막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의 개관, 이라는 부분만 읽으면 로마 제국이 왜 망했는지 대충 감이 잡힐 것 같다는 것 정도. 그렇게 여기고 나니깐 앞에 힘들여 읽은게 괜히 아쉬..워 졌달까. 물론 읽고 나니 개운하기도 하고, 기번이 글을 정말 잘 써서 읽기가 편했지만 (축약본인데도 말이지) 정말 급하게 로마 제국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마지막 장의 서로마 제국의 멸망의 개관만 읽어도 될 것 같다.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나로서는 딱히 아쉬울 것은 없었다. 사실 내 안에서의 로마에 대한 이미지도 거의 서로마제국 중심이라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 아내 테오도라의 이야기 정도, 그리고 불가르족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니케포루스 황제 정도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역시 돈이 있다면.. 원본을 사서 읽는게 좋겠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읽었던 부분은 로마의 최전성기였던, 그리고 로마의 쇠망이 시작된 오현제 시대.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
정말 별의 별 책을 다 주워읽는 본인이지만, 그런 본인에게도 잘 안 읽는 부류의 책이 있으니 바로 자기계발서 부류다. 이는 절대 자기계발서 부류의 책이 다른 부류의 책에 비하여 뒤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본인의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다지 책에 취향을 타는 사람은 아니고 여성잡지나 남성잡지에 만화책도 들여다보지만, 이상하게도 자기계발서들은 읽으면 자꾸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서 어느 순간부터 잘 읽지 않게 되더라. 이 책도 살짝 자기계발서 느낌을 풍기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별다른 거부감없이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역사와 자기계발을 절묘하게 잘 섞은 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정리해놓은 지식 경영법들을 보면, 당장 수업들으면서 사용할 수 있을 것 처럼 보인다. (나로서는 직접 시행해본적 없기에 정말 수업에 효과가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논문을 써야 할 일이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게 좋을 듯.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어느 서점에서 이 책을 에세이부분에 분류해놓은 바람에 찾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난 당연히 과학분야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뭐, 어쨌든 이 책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고 앞부분을 좀 읽어봤는데 와우.. 역시 스티븐 제이 굴드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재미있는 글을 쓴다. 전혀 생물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이라도 별 생각 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그러면서도 그 내용은 간단한 내용이 아닌 그런 글이랄까. 그러고보면 스티븐 제이 굴드는 본문에서 본인을 에세이스트로 자처하는데, 이를 보면 에세이에 분류해놓은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가 가는 것은 인간 본성에 관하여 기술한 5장인데, 굴드의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사이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이 몇 권 더 눈에 띄는데, '시간의 화살~' 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도 출간되어있던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개념어 사전.
최근에 많은 개념어 사전이 출간된 듯 한데, 다른 책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조금 읽어본 결과, 개념어들을 이렇게 정리해서 책으로 내는 것도 분명 독서에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 이런 책의 원류가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에 실린 '철학 용어 사전'일 것이다. 형이상학 5부에 실려있던가. 그런데 형이상학에 실린 철학 용어 사전은 철학 용어 사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논지를 펴기 위해서 개념들을 미리 정의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고 보이나 (그 후에 여러 후학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지를 따라가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접어두고서라도) 이 책은 정말 개념어들의 풀이에 충실하기에 하나의 표지판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여러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그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도 예도 들고 있고 말이지.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막스 쉘러라던가, 독일 철학자인데, 그의 신앙심은 대단했지만 그의 사생활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쉘러와 동시대에 살던 신앙심 깊은 어느 주교가 쉘러에게 이르길 '당신은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하나님의 품에 인도해놓고는 왜 스스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라고 질문한거야. 그러자 쉘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지. '목적지까지 같이 가는 길안내인을 봤냐?' 이 책도 마찬가지다. 목적지까지 같이 가는 표지판은 없다.
p. s. 게오르규의 '25시에서 영원까지' 도 읽는 재미가 있지요.
'25시에서 영원한 시간에 이르기까지'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있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