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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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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친애하는 마르크스 동지에게

 

 

  언젠가 동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지만,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보니 쓸 시간이 없더군요. 이제야 겨우 틈이 나서 이렇게 몇 자 씁니다. 먼저 자신을 밝히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요? 사실 우리 공산주의를 따르는 동지들에게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저는 이름 없는 공산주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공산주의자라는 그 이름에 걸린 무게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르크스 동지가 그랬듯 말이에요. 나이야 조금 어리지만, 그런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실 처음에 동지가 쓴 책자들, 자본론, 과 공산당 선언, 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어구가 생각나는데,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라니요. 비록 멋있게 보이는 문구라고는 생각했지만, 노동자들의 단결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는 믿지 못했고, 제 주변에서도 마르크스 동지의 이름을 이야기하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으니깐요. 게다가 마르크스 동지를 개인적으로 잘 안다고 하는 어느 사람이 하는 말에 의하면 마르크스 동지는 정작 부르주아처럼 살았다면서요? 그래서 더욱 반감이 생겼었지요. 하지만 제 눈으로 위대한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달리 먹었습니다. 아, 마르크스주의는 정말 실현이 가능하구나, 라고 말입니다. 물론 위대한 레닌 동지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마르크스 동지가 이론적인 배경을 쌓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물론 아직까지 마르크스 동지의 심오한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이 책은 과연 저 성질 더러운 자본가놈들의 배를 걷어차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성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항상 돈이 있는 놈들은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해왔습니다. 제 옆집에 살던 이웃은 피혁 공장에 다녔었는데, 처음에는 9시간만 일한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밤낮없이 일하고 집에 오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더러운 공장주놈의 배만 채워주었던 거지요. 여하튼 어려운 것은 다 모르겠고, 우리 노동자들은 옳고, 공산주의는 옳고, 우리를 억압해온 자본가놈들은 나쁘다, 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마르크스 동지들이 저의 눈을 확실히 뜨게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2월에 혁명이 안일어났으면 저는 아마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에 반발해서 파업을 일으켰거든요. 다니던 공장에서 말입니다. 그 후에 10월에 위대한 레닌 동지의 지도아래에 혁명을 제대로 일으켰지요. 우리를 본받아 이제 전세계에서 혁명이 일어나겠지요. 저 더러운 부르주아놈들이 깜짝 놀랐을겁니다. 이제 그들은 대가를 치를 시기를 맞이한 거에요. 모두가 레닌 동지와 마르크스 동지 덕분입니다. 다만 딱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는데, 마르크스 동지는 자본주의가 극에 달하면 결과적으로 자연스레 공산주의 체계로 변할 거라고 했는데, 우리가 혁명을 성공한 것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아니면.. 혹시 우리가 뭔가 잘못한 걸까요?

 

 

 

 

1917년 10월 25일

이름 없는 공산주의자가

 

 

 

 

 

 

  친애하는 마르크스 동지에게

 

 

  안녕하세요, 마르크스 동지. 아니, 안녕이라는 말이 어색하군요. 그곳 날씨는 어떤가요, 라고 물으려고 해도 마르크스 동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생전에 종교를 별로 안 좋아했던 마르크스 동지였으니 천국에도 지옥에도 있지 않겠지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사실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심지어 신학교까지 다녔었지요. 하지만 마르크스 동지의 이론을 접하고, 물론 지난번 편지에서 말했듯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가톨릭 같은 종교를 버렸습니다. 종교 같은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구원을 약속하지만, 저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지금 현재의 구원이 더 소중하거든요. 이런, 서두만 꺼냈는데도 벌써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어버렸군요. 뭐,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이 편지가 전해지면 답장 좀 해주세요. 뭐, 마르크스 동지가 있는 그곳에도 자본주의의 독이 퍼져있다면, 그 체제의 우편배달부들이 다 그렇듯 제대로 편지가 가지 않겠지만요. 하여튼 자본주의는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최근 제 주변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답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까, 음 가장 먼저 이것부터 말해야겠네요. 일단 레닌 동지가 죽고 스탈린 동지가 우리를 지도하게 되었어요. 저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 동지 같은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레닌 동지 이후에 우리를 이끌 사람은 군사 영웅인 스탈린 동지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탈린 동지를 위해서 엔카베데에서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지요. 아, 엔카베데는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기구입니다. 반체제 인물들을 색출해내는 기구인데, 아무래도 대놓고 활동하면 그대로 들키니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기구이지요. 제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엔카베데에 속한 이후로 수많은 불순분자들을 잡았답니다. 감히 외국 부르주아의 문화, 에스페란토어를 쓴다거나 우표를 수집한다거나 등을 향유하는 그런 녀석들에서부터 반체제 주제를 담은 시를 쓴 녀석들까지 말입니다. 특히 짜릿했던 순간은 오시프 만델시탐이라는 녀석을 잡은 순간이었는데, 아니 글쎄, 이 녀석은 우리 위대한 스탈린 동지를 비난하는 시를 썼더군요. 당장에 잡아서 굴라크로 보내려고 했는데 우리 스탈린 동지는 관대하게도 석방시켰답니다. 뭐, 결국 다른 일로 시베리아로 보내졌지만 말입니다. 그러고보면 스탈린 동지는 정말 힘들 때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 같아요. 독일에 히틀러라는 놈이 있는데, 그 놈이 정권을 잡고는 공공연히 우리를 비난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유대인과 볼셰비키는 때려죽여야 된다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원. 주변이 이런 놈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내부의 적들을 모조리 소탕해야 되는데.. 소탕해도 소탕해도 그 끝이 보이지가 않네요. 언제쯤 스탈린 동지의 위대한 뜻을 알아줄지.. 아, 물론 레닌 동지와 마르크스 동지도 정말 위대하지요. 그럼 다음에 또 편지를 쓸 기회가 있다면, 또 쓰도록 하지요. 부디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 어디든 공산주의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고 계시길 바랍니다. 마르크스 동지 만세! 공산주의 만세! 스탈린 동지에게 영광있으라!

 

 

 

 

1938년 7월 21일

이름 없는 공산주의자가

 

 

 

 

 

 

  마르크스 동지에게

 

 

  어제 당신에게 부쳤던 두 통의 편지를 서랍에서 발견하고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렀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당신에게 부친다고 말만 했을 뿐, 실제로는 우체통에다가 집어넣지도 못했지요. 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죽은 사람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벌써 제 나이는 90살이 넘었고, 기력은 노쇠해지고 젊은 날의 열정은 시들해졌습니다. 손자 녀석이 제 서랍을 뒤지다가 엎어놓는 바람에 하게 된 책상 정리에서 스스로가 썼던 편지를 발견하고는 한참 동안 쳐다보았지요. 만약 아들 내외가 손자를 데리고 찾아오지 않았다면 영영 그 편지들은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읽어보니깐 젊은 날, 이십 대 때는 정말 열정 하나만으로 살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내가 하는 이 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었지요. 아니, 이 일 덕분에 세상이 좀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음.. 좀 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지금 내가 있는 곳부터 이야기해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사실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의외라구요? 네, 저도 제가 이렇게 자본주의의 심장부에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꿈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로 사람들을 괴롭히지요. 소련을 빠져나오게 된 계기는 별로 대단치 않습니다. 뭐, 다들 그렇듯이 갑자기 소련의 현실에 눈을 떴다, 정도겠지요. 저는, 지난번 편지에서 썼다시피, 스탈린 밑에서 엔카베데 활동을 했었는데, 베리야나 예조프같은 사람이 누구를 색출하라, 라고 지시하면 탐문 수사 및 표적 수사를 하고, 그대로 수용소에 집어넣으며 그대로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처음에는 그들의 말을 따르면 좀 더 내가 사는 삶,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삶이 나아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기계적으로 타성에 젖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를 잡아라, 라고 지시하면 그대로 따르는 삶..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제 목적마저도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처음의 진실했던 열정, 더 나은 삶을 위한 열정.. 그래서 저는 소련을 떠났습니다. 떠난 방법을 구차하게 여기서 일일이 늘어놓는 것은 웃긴 일이니 줄이고, 음..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 지도 모릅니다. 네가 초기에는 열정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때 그 열정을 가지고 흘린 피는 정당화될 수 있겠냐고, 부농이라는 명목으로 네 손에 수용소에 보내지고 처형당한 수많은 사람들, 별 것 아닌 것으로 꼬투리 잡혔던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는 정당화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마르크스 동지는 사실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었지요, 그렇죠? 레닌 동지가 혁명을 일으킨 것은 자본주의의 끝에 다다르지 못한 러시아를 억지로 공산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어렸을 때의 나는 공산화가 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지만, 내 삶도, 다른 사람의 삶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내 손에 묻은 피만 늘어나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정당화되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말입니다. 비록 맹목적인 믿음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런 피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새기면서도, 만약 저 때 저 시기를 다시 반복하게 된다면 그래도 공산주의 혁명에 내 모든 것을 걸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습게도 자본주의의 심장이라고 할 만한 이 미국에 와서 살아보니까 더욱 더 커져가더군요. 어렸을 때는 잘 짐작가지 않던 마르크스 동지의 분석이 어느 정도 적용되는 모습을 바라보니 말입니다. 스탈린과 그 아래에 있던 베리야 같은 사람의 폭력은 눈에 보이는 폭력이지만 여기서 가해지는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폭력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다시 시간을 되돌려 공산주의 혁명에 뛰어들 일이 있다면, 아마 다시 손에 피를 묻히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여기 미국에서는 늘 이야기합니다. 소련은 오래 못갈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날고 기어도 결국 자본주의 체제를 조금이라도 흡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독이 퍼져서 결국 죽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지금 소련은 스탈린도 죽고, 흐루쇼프도 죽고,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았는데, 그가 지금 개방정책을 펴고 있답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혼자서 자급자족하는 나라라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지 그도 깨달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렇게 개방정책을 펼치면 소련은 끝나고 말겠지요.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자본주의자들이 하는 말이 다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나는 스탈린이 이끌었던 공산주의, 스탈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변질시켰다, 라고 말이지요. 프롤레타리아를 가장한 부르주아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자신의 몸만 편하면 모든 게 달리 보였었으니깐요. 나도 그랬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진정한 공산주의,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분배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있는 만큼 일하는 그런 이념이 실천된다면 그런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그 옛날처럼 뛰어들고 싶네요. 하지만 지금은 늙고 병들었고, 젊었을 때의 나는 내가 따르던 공산주의가 정말 순수한 공산주의인지 아니면 변질된 것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히틀러와의 전쟁.. 미국과의 냉전.. 스탈린의 죽음. 내가 도망칠 때는 베리야가 물리학자들을 윽박지르는데 정신이 팔렸고, 스탈린도 신변정리가 어수선했기에 운이 따라주었지요. 하지만 나 이외의 탈주자들은 그런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도망쳐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트로츠키는 결국 얼음 송곳에 두개골이 파열되어 죽었지요. 나도 언제 그런 꼴이 될지 몰랐기에 숨죽여 사는 수 밖에요. 뭐, 결국 지나서 여기 미국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결혼도 하게 되고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 있네요. 여기서는 파업을 조직하지 않았냐구요? 설마요, 그랬다가는 공산당에게 눈에 띄여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지는 못하겠지요. 여기 미국에도 공산당이 있고, 크렘린이랑 연결되어있었으니 말입니다. 쓰다 보니 늙은이의 신세한탄이 되어버리네요. 젊었을 때는 두려울 것이 없었는데. 끝까지 소련이 어떻게 될 지, 살펴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내가 먼저 떠날 것 같네요.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그래도 내가 그래도 몸담았던, 그리고 이상을 위해서 노력했던 곳인데, 붕괴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분명 슬플 테니, 도리어 내가 먼저 죽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래도 설령 소련이 무너지고, 지구상에 모든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더라도.. 사람이 꿈을 꾸는 한, 다른 사람과 내가 평등해질 수 있다는 이상을 가지는 한, 다시금 나타날 거라는 예감이 드네요. 어떤 모습으로든, 돌연변이처럼이라도, 기형적으로라도. 그때가 되면 다시 동지의 이름을 찾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겠지요?

 

 

 

 

 

 

1986년 2월 12일

주세프 살리야노브

 

 

 

 

 

 

 

 

 

 

 

 

 

p.s. 주석을 좀 달까, 생각했다가.. 아무래도 자기가 쓴 글에 자기가 주석을 달자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못달겠네요. 하늘나라(혹은 지하?)의 마르크스의 답신을 쓰려다가ㅎㅎ 힘들어서.. 나중에 좀 더 이해가 깊어지면..

 

p.s. 2.  당연하게도 실제 인물이 아닙니다, 풋, 멋대로 만든 이름이긴 한데.. 괜스레 그럴 듯해 보이는 이 기분이란ㅎ  이름을 마지막에 밝힌 것과 날짜는 조금 의미가 있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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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9-20 13:55   좋아요 0 | URL
와우!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름은 혹시 아나그램? 아마도 주석을 달면 주석이 훨씬 긴 글이 될 것 같군요. 저도 어서 이처럼 좋은 리뷰를 써야 하는데, 사실 아직 1부만 겨우 읽었..

가연 2012-09-21 03:48   좋아요 0 | URL
헉, 고맙습니다. 아나그램은 생각못했어요, 풋. 그냥 책에 나오는 몇 명 인물들 이름 늘어놓고 적당히 조합해서 고쳤지요..ㅎㅎ 그루지야 인물같은 이름이 되었으면 하고 고쳤는데..(그루지야인은 100살 사는게 드물지 않다고 나오더군요, 그래서 편지에서 90살이 개연성이 있게..) 그냥 러시아인 이름 처럼 되어버렸네요, 풋. 조금 주석을 달아보려고 했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말씀하신대로 너무 길어져서 안썼답니다.

ㅎㅎ 총 5부까지 있던데.. 기한 더 필요하시면 연장 메일 써주세요. 맥거핀 님 글 잘 읽고 있으니깐요.

CYMCA 2012-09-24 10:19   좋아요 0 | URL
파트장님 11기 신간 평가단의 충용무쌍 입니다.

오늘 2권의 리뷰가운데 한권은 마감시한내로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코뮤니스트의 경우 독서할 시간이 부족해 아직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시한을 일주일만 연장해 주시면 추선연휴를 활용해 이달 말까지 리뷰를 완성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가연 2012-09-24 15:21   좋아요 0 | URL
네, 괜찮습니다. 시일 더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더불어숲 2012-09-25 19:39   좋아요 0 | URL
파트장님! <코뮤니스트> 리뷰 올렸습니다.
책은 진즉 읽었으나, 제 입장과 어긋난 관점인지라, 리뷰 마무리가 쉽지 않더이다.
평가단 하면서, 이보다 더 좋은(!!!) 경험은 없겠다 싶어요. ㅎㅎ
미리 연락 못드려 죄송해요. 봐주소서~! 즐 한가위 되시구요^^*

가연 2012-09-25 23:13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 리뷰 잘 읽을께요.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ㅎㅎ

꽃도둑 2012-09-25 23:45   좋아요 0 | URL
대장님, 리뷰 급조 날조해서 급히 올렸습니다...^^

가연 2012-09-26 13:00   좋아요 0 | URL
네, 확인하겠습니다.

일개미 2012-09-28 00:47   좋아요 0 | URL
솔찍히 말씀드리면 이 서평 때문에 기가 팍 죽어서 며칠동안 아무것도 못썻어요ㅋㅋㅋ너무 좋네요. 제가 마르크스 역할 해서 답장이라도 써주고 싶은ㅋㅋ 그리고 저 방금 전에 두권 다 서평 올렸다는 것, 신고합니다.

가연 2012-09-28 18:06   좋아요 0 | URL
ㅎㅎ 고맙습니다. 부끄럽네요. 음.. 저야 사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을 읽어서 아무래도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기가 쉬웠던 것 같네요.. 좀 애매한 부분은 스탈린 평전에 더 자세히 나와있었던 경우도 있었던 것 같고..ㅎㅎ 형식은 랩퍼 에미넴의 명곡 'stan'에서 착안해서 쓴 거에요. 아마 주석을 달았다면.. 우편배달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에 '에미넴의 stan참조'라고 썼을.. 것 같은데ㅎㅎ 그 곡 가사에 우편배달부에 대한 말이 나와서ㅎㅎ 역시 이렇게 설명하는것은 좀 부끄럽네요. 이렇게 안달아도 읽는데 크게 지장도 없는 것 같고..

일개미님의 서평 잘 읽을께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의 사상과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서사시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사순옥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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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부끄러운 글을 적었다가 지워버렸던 적이 있다. 나는 술을 안마시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세상에는 절대, 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너무나 사는 게 힘들고 괴로우면 술을 마실 수도 있는 것이고, 나 또한 절대, 와 같은 말에 별로 구애되지는 않는 성격이라서 조금 마셨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마신 걸까, 그리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제법 취기가 올랐었다. 나는 보통 술을 마시고 나면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되면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안하고 그냥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편이지만, 혼자서 자작을 하는 경우에는 그냥 어지럽다고 그냥 잠이 들거나, 혹은 긴 글을 썼다가 지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블로그를 하게 된 이후에는 블로그에다가 음주 후에 헛소리를 적기도 했었고 말이다. 물론 내 블로그는.. 최대한 방문객들을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하루 평균 방문자수가 0명에서 1명을 웃도는 수치였고, 그 덕분에 나는 이중적인 감정, 그러니깐 이 곳은 공개된 곳이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공간이다, 와 같은 감정에 몸부림치며 자기만족적인 욕구를 쉽게 채울 수 있었다. 원래는 전화를 했었다. 술을 마시고 친한 친구에게 말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민폐다. 나만 상대방을 친한 친구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곤란하고, 설령 둘다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더라도 새벽에 술취해서 전화하는 것은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힘든 일이다. 그러다보니 점차 블로그에다가 음주 포스팅을 올리는 나날들이 많았었다. 술을 마셨을 때는.

 

며칠 전에도 마찬가지로 술이 취해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려다가(여기에서 서재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정말 가끔 블로그에 들렀는데, 그러다보니 점차 뜸해지게 되고 최근에는 거의 안쓰고 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 서재에 들어와서 글을 끄적거렸다. 물론 여기 서재는 책을 글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블로그에 비해서 좋은 편이며, 나 또한 최근에는 거의 여기에서만 활동하니까 그렇게 글을 끄적거렸던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 서재는 내 블로그와는 달라서, 생각보다 방문자수가 많은 편이다. 이 말은 부끄러운 글을 끄적거리게 되면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 물론 어차피 얼굴을 드러내놓고 쓰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쓰냐, 지나친 신비주의다,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능력, 그러니깐 죄과를 빨리 폭로하여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와 동시에 일종의 일기장을 빙자하여 진솔한 양 스스로를 멋지게, 혹은 뛰어나게 꾸밀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이 먼저 폭로해서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은 용납할 수 있지만 타인이 '야, 그거 너 잘못했잖아' 라고 말한다면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들고 부끄럽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타인이 나에게 비난을 던지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익명의 글쓰기는 나는 이런 저런 일들을 겪어왔지만 실제로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다, 라는 뉘앙스를 가진 글을 쓸 수도 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이정도 학식을 가지고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알게 뭔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정말로 알고 있는지 혹은 모르는지. 부끄러움은 최소화하고 자신의 공은 최대화한다. 이는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항상 조심해야 할 부분일테고.. 설령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는 항상 그런 위험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지나친 자기검열이다, 라는 비판을 분명 들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겨우 두 세시간 뒤에 정신을 약간 차린 나는 겨우 겨우 그 글을 지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찔한 일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성, 의 이름을 빙자한 자기검열, 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 아주 부끄러운 내용을 적은 것은 또 아니다. 그냥 사는게 힘들다, 원래 난 안이랬는데 뭐 이런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 의 수레바퀴 아래서, 를 틀로 가져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나는 실제로는 꽤 뛰어난 사람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내용의 결말은 그래도 살아야지,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당시 어느 정도 술이 깼던 내가 집어든 책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였다. 정말 이상하게도 이 책이 읽고 싶어졌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내 머릿속에서 짜라투스트라, 의 한 구절이 자꾸만 맴돌았었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이 나무는 이곳 산간에 외롭게 서 있다.

 

나무는 너무 높게 솟아있었다. 산과 동물 모든 것을 뛰어넘어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너무 높게 솟아 있는 존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존재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고대한다. 무엇을 고대하는가?

 

이 나무가 고대하고 있는 것은 뇌신이 아니었을까?

 

바로 저 어구였다. 저 어구만이 나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너무나 힘들 때 읽었다. 나는 광인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고, 감정은 나를 불사르고 나의 외형을 지우고 이윽고 밖으로 뻗어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랬다. 선이 있었다. 그 선을 넘으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는 그런 선을 느끼는 나날이었다. 소크라테스에게 몇 번이고 귀에다가 이야기를 해주며 그를 바른 길로 이끌었다던 데몬은 나에게 이르러 그의 반대의 길로 나를 몰아붙였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결코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감정의 광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그 '선'을 넘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를 지탱하던 것은 우습게도 다른 사람의 시선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한 사람을 파멸로 몰아가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사회에서 구축되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도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나를 따뜻하게 보아주는 시선과 나를 경멸하는 시선 그 모두가 나를 다시금 선 안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다시금 나는 그때의 막막함을 느끼고만 말았다. 어두운 밤 홀로 깨어있는 나, 그리고 너무나 어색하게 보이는 나.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낯설음 속에 나는 마음 속으로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절망했다. 내가 고대하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었기에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내가 고대하고 있던 것이었나? 그들의 인정이 내가 필요한 것이었나? 그 말이 그르다고 할지라도 이 마음 속의 어둠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전에 선 안으로 다시 들어온 나는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었다. 광인과 깨달은 자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어설픈 광인이나마 되어볼 뻔 했던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를 높이 평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나무가 높이 자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뿌리가 깊어야한다. 물론 나무의 생육조건에는 적절한 물과 햇빛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높이' 자라기 위해서는 그 뿌리가 튼튼해야 하리라. 그러나 줄기와 잎은 빛의 세계에 속한 것이다. 햇빛을 직접적으로 받는 부분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뿌리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비유적인 이야기를 풀어서 쓰면 이런 것이다. 어떤 정신적으로 높은 단계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그 어둠도 깊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마음 속의 어둠은 깊어지고 짙어진다. 나무는 뇌신을 고대한다고 말했잖는가.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뇌우가 나무를 흔들  것이며, 그 뇌우에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모습을 겉으로는 보여줄 지라도 나무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겉으로 보여주기 위해 '더 땅 속으로 깊이 파고 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 만큼이나 나 자신을 낮추어 보게 되었다. 나는 실제로는 뛰어난 사람이라고? 무엇이 뛰어난 사람인가? 스스로를 마주보라. 내 마음 속의 어둠은 이렇게도 깊은 것인가? 그야말로 마음이 병들었다는 말에 딱 들어맞지 않은가. 그리고 그날 밤 다시금 막막함에 마주서서 절망에 빠져들고 말았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 에서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죽음은 어떤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학자이자 실존주의자였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적인 성향을 그 뒷받침에 두고 있던 그에게 죽음은 그런 기독교 세계의 종말이었고, 기독교적인 비의와 생명의 상실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후에 니체가 등장하였다. 니체는 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역설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왜 죽었는가? 신은 인간에 대한 동정이 넘쳐 죽었다. '동정을 초월하지 못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모두 슬픈 자들이다.' 신은 슬픈 자이다. 인간을 동정하고, 인간을 동정하고만 자신을 동정하고, 이윽고 죽고 만다. 하지만 신의 죽음은 타살이다. 인간은, 인간은 자신의 어둠과 치부를 구석구석 바라본 자를 살려두지 않는다. 신은 우리 인간의 치부를, 추악함을, 그리고 그 심연을 구석구석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참견쟁이는 이윽고 우리의 손에 의해서 죽게 되고마는 것이다. 그의 지나친 호기심과, 호기심으로 그를 이끈 동정심이 그를 죽이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나 스스로의 어둠을 보게 된 나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이는 나의 파멸이다. 나의 어둠, 치부, 그리고 추악한 생각을 알게 된 '나' 는 나의 손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나와 '나' 사이에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사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 아, 이 말은 얼마나 추악한 것인가? 나는 '나'를 배제하지 않고서는 나를 사랑할 수 없으며, 동시에 나를 배제할 때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고결하지만 그 마음에 어둠을 감춘 내가 아닌 동정의 독에 빠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무는 뇌우를 고대한다. 뇌우에 맞아 쓰러지기를 고대한다.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몰락' 이다.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어가려는 몰락이다. 짜라투스트라가 그의 산에서 벗어나 인간 세상으로 그의 '몰락'을 시작한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선택은 '나'를 죽여 몰락을 완성시키는 것 뿐이었으리라.  하지만 최후의 순간 나는 머뭇거렸고 몰락은 실패했다. 나는 아직 몰락할 만큼 충분히 높이 자라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번지점프를 하듯, 잠깐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맛본 것에 불과한 내가 어찌 몰락할 수 있었겠는가? 짜라투스트라는 다시금 이렇게 말한다.

 

아직까지 내가 범하지 않은 그 마지막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몰락을 시작한 짜라투스트라는 정오의 빛을 등지며 걸어나간다. 찬란한 태양은 그의 빛이다. 그를 살찌우게 할 양식이다. 동시에 그는 번개의 예언자이다. 번개는 우리가 느끼기 전에 그 빛이 먼저 우리에게 다다른다. 우리가 모든 죄를 범하고 쓰러질 때, 번개는 우리를 태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은 밧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죄를 짓지 못했다. 나는 나의 삶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별 너머에 더 넓은 우주공간이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이 삶은 그야말로 과정이다. 하지만 아직 죄를 짓지 못했기에 죄를 짓기 위해 살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죄가 '나'를 죽음에서부터 끌어내리는 것이다. 왜 죄를 지어야 하는가? 그것은 예비작업이다. 수많은 죄와 나 스스로를 부정하는 작업을 통해서 나는 부서지고 깨지고 이윽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은 척하는 행위는 미망이며 도리어 진실된 깨달음을 방해한다. 죄의 끝은 징벌이고, 그 징벌은 번개와 같이 날아오리라. 그리고 입을 벌릴 수 조차 없는 그 짧은 시간이 밧줄은 타버릴 것이고 결국 나는 번개와 함께 살리라. 그것은 모든 미혹을 지우는 금강의 무기이다. 바로 그때 나는 비로소 제대로 몰락할 수 있을 것이다. 대지로 일직선으로 내려꽂히는 저 번개처럼.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 모든 죄를 지을 만큼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대도 살아가는 것이다. 우수함도 부끄러움도 잘못도 모두 내려놓고 살아가는 것이다. 스페인 민간 전설을 모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왕이 자신을 숨기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 여행했었다. 결국 왕이 얻은 결론은 '사람은 부끄러움을 안다' 였다. 우리는 항상 부끄러워한다. 삶에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능력이 모자람에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에 비교하면서 항상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이 지나치면 잘못으로 기울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부끄러움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 신이든 악마든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항상 과오와 거기에 따른 부끄러움으로 점철된다. 이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일종의 천형이다. 그러나 그렇게 '삶이 아무리 그대를 괴롭힐지라도', 그대가 아무리 큰 후회를 안고 살아가더라도, 아무리 큰 잘못을 했더라도 일단은 살아라.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다. 앞서 신은 죽었다고 말했던가? 신은 결국 죽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가 한 일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간에 대한 동정의 결말을, 그의 지옥의 결말을 끝내 그는 두 눈으로 지켜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는 인간을 짓밟고 살아남았다면 그는 자신의 행위를 돌이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이제 우리 인간의 문제가 남았다. 그렇기에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이라도 그대가 되돌리겠다는 믿음이 있고, 그 전에 어떻게든 살아있다면 그 일을 되돌릴 수 있다. 이는 그대가 되돌릴 수 있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대가 살아있기에 다른 사람이 그대에 관해서 되돌리고 싶은 일을 되돌릴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 그대가 용서를 할 수 있는가, 는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아예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신의 지옥이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이라면 우리의 지옥은 상대방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 자체를 태워버릴 것 같은 그 지옥의 업화속에서도 우리는 내가 너를, 네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헛되다하여 누가 어리석다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가능성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가능성은 살아있음으로써 획득된다. 그렇기에 발로 땅을 딛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땅 속으로 아무리 발이 파고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의 어둠을 바로 마주하라. 그것은 그대의 눈이 하늘을 바라본다면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짜라투스트라가 등졌던 저 찬란한 정오의 태양으로 대표되는 니체의 생명력 예찬에 대한 우리의 답가인 동시에 그가 우리에게 주는 죄라는 이름의 선물이다. 물론 삶을 되돌리는 것은 내가 한 것처럼 버튼 하나로 서재 글을 지우는 것만큼 간단하지는 않다. 몇 번이고 돌아가야만 할 것이고 때로는 갔던 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걸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으니깐. 그것이 영원회귀이자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초극하기 위해서 지어야 할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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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2-12 22:47   좋아요 0 | URL
'삶이 아무리 그대를 괴롭힐지라도', 그대가 아무리 큰 후회를 안고 살아가더라도, 아무리 큰 잘못을 했더라도 일단은 살아라.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다.

이 말 좋네요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좀 더 나아질 수는 있겠죠
살아있다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조금 삐딱한 마음


희선

가연 2013-02-13 23:45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나아질 수는 있겠죠? 아니, 최소한 나아지려고 마음은 먹으려구요...
 
[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족기담.

 

 

 

  개인적으로 공포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라, 나로서는 영화관에 가면 최대한 공포 영화는 피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꼭 봐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다른 일행들이 모두 공포영화를 택한다면 나로서는 그들의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으니깐 말이다. 물론 피와 살의가 난무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고역이지만, 혼자서 다른 영화를 보겠다고 다른 상영관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좀 낫다. 일단 보게 되면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영화를 보려고 한다. 이왕 보는데 눈을 감고 보는 것도 돈이 아깝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어떤 괴물이나 살인자가 나와서 칼을 휘두르는게 무서운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주인공과 그 주위의 엑스트라들이 예정된 운명(밖에서 보는 우리는 온갖 복선을 통해서 어떻게 주인공들이 당할 것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을 깨닫지 못하고 그 운명으로 한 발짝씩 걸어들어갈때의 그 긴장감,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왠지 복도에 장치된 살인기계가 휙 날아와 목을 뎅겅, 하고 잘라버릴 것 같은, 그런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긴장감을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 그 긴장감은 일종의 필연성과 맞닿아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피할 수 없구나, 하는 그런 운명이랄까. 그러다보면 한참 고조된 긴장감은 우울감으로 바뀐다. 그런 상황들 때문에 나로서는 공포 영화에서 흥미를 느낄래야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공포 영화를 보게 될 때 사용하는 전략이 하나 있으니, 바로 지식화, 다. 바로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귀신이 덜컥 하고 나타났다고 하자. 그러면 그 귀신을 보고 이렇게 분석하는 것이다. 분장이 덜 됬네, 부터 시작해서 컴퓨터 그래픽 잘 쓴 것 같다, 등처럼 말이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귀신이나 살인마의 심리를 생각해본다. 저 살인마가, 혹은 귀신이 굳이 저 엑스트라를 죽였어야 했나, 저주에 얽매여있다면 그 저주에 맞게 행동해야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물론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때로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아마 그런 것이 현실과 더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어처구니 없는 이유나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게 되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촘촘하지가 않아, 하고.

 

저런 식으로 잣대를 들이대다보니, 어느 순간 다른 영화들에게도 저런 잣대를 조금씩 들이대는 경우도 생겼다. 예시로 초능력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생각해보자. 엑스맨, 에는 정말 수많은 초능력자들이 나온다. 자비에 교수의 텔레파시, 부터 그의 대극에 위치한 자기장을 조종하는 매그니토까지. 그런데 매그니토가 그의 자기장능력을 사용해서 물리적인 공격을 막아내려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정도의 자기장이 집적되어야 될까? 이런 의문들이 저런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불쑥 고개를 내밀때가 있다. 남들이 보면 정말 재미없게 영화를 본다고 말하겠지만, 의외로 나는 이런 식으로 보다보니깐 도리어 쏠쏠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런 식으로 무언가 분석적이고 어쩌면 과학적일지도 모르는 잣대를 들이대어 영화를 보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한 것이 아닌지라, 이미 영화나 소설 등에 슈퍼맨이 날아가면 그 반동은 어느 정도일까요, 배트맨은 재산이 얼마나 되는 걸까요, 와 같은 엉뚱하다면 엉뚱할 수 있는 분석들에 나름 현실적인 답을 내려놓으려고 시도한 책들도 나와있기는 하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일종의 재해석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행간을 읽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뒤집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실에 적용하면 실제로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사실 이런 어떤 영화나 소설 등에 재해석을 가하는 경향은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인 신화에 재해석을 가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널리 알려진 트로이 전쟁에서 정말 신들이 나타나서 바람을 훅 하고 불어주었을까? 정말 각종 무구들을 신들이 자신의 후원자들에게 나눠주었을까? 신의 이름만 빌린 것이 아니었을까? 신이라는 비현실적인 존재를 제거해보면 우리는 신화에서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된다. 트로이 전쟁 뿐만 아니라 미노타우르스의 전설을 생각해보자. 미노타우르스를 미궁에 가둬놓고 공물을 받는다. 나라 간의 역학 관계를 의미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 옛날, 신이 인간과 함께 웃고 떠들던 시대에도 한편으로는 '삐딱하게' 사물을 보던 사람들은 그렇게 신을 제외하고 자기들만의 해석을 내려보기도 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여러 역사가들, 헤로도토스나 투키디데스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굳이 신이라는 딱 봐도 비현실적인 존재가 있어야만 재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공자의 춘추, 그러니깐 노나라의 역사서를 보라. 후대의 사람들은 공자가 기록한 단 한줄에서 수많은 내용을 뽑아낸다. 공자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똑같은 뜻을 가진 한자가 따로 있는데 왜 굳이 이 한자를 썼을까? 거기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바로 좌구명이 쓴 춘추좌씨전이다.

 

이런 재해석의 칼날은 설화나 민담과 같은 고전이야기도 피해나갈 수 없다. 아니 고전이기 때문에 도리어 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고전이야기들은 그 이야기가 횡행할 때의 사회인식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을 재해석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인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발달해왔는가, 혹은 도리어 저하되었는가, 와 같은 변천사를 알아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이런 재해석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어찌 보면 전세계적인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라서, 수많은 고전들, 조웅전, 박씨부인전, 춘향전, 아기장수전, 옥루몽, 사씨남정기, 등과 같은 고전들이 재해석의 기회를 맞이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족기담, 이라는 책도 그러한 관점에서 쓰이진 책이다. 고전문학을 연구한 저자가 현실의 경향과 고전이 쓰여질 때의 경향을 교차시켜서 여러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책, 가족기담에서는 고전을 가족의 '관계' 로 묶어서 우리에게 제시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첩과 남자의 관계, 본처와 첩의 과계, 본처와 남편의 관계, 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이 책의 시작을 여는 손순매아, 와 장화홍련전을 보자. 손순매아, 는 말 그대로 손순이라는 효심깊은 아들이 부모를 위해서 자신들이 낳은 아이를 눈에 묻어버린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권선징악이라는 우리 나라 고전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주제에 걸맞게 해피앤딩으로 끝이 나지만, 저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무리 부모를 위해서라지만 아이를 눈에 묻어서 살해를 저지르겠다고? 이는 영아살해다. 범죄이자 패륜이다. 장화홍련전은 어떤가? 왜 배좌수는 과년한 자신의 딸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낙태했다는 계모의 말만 듣고 죽이라고 하는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으로, 왜 시집을 보내지 않는가? 이 책에서는 부녀간의 부적절한 관계, 가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시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낙태, 라는 말을 듣고 '아니 다른 남자가 있단 말인가' 와 같은 심정으로 딸을 죽이라고 명한 것이다, 라고. 물론 이런 것에 대해서는 그저 물음표만 던져볼 뿐이다. 실제로 배좌수가 그저 가문의 명예를 중시한 것인지, 혹은 딸의 남자에 대한 꼴사나운 질투때문인지, 혹은 그저 멍청했던 것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동안 배좌수가 어리석다, 가문의 명예를 중시한 사람이다, 등과 같은 해석을 해왔다면 이제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 전혀 다른 방향의 해석을 시도해보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재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좀 더 고전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첩과 남편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영웅은 삼처사첩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군담고전소설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주인공들은 항상 수많은 여자를 거느리는 것 처럼 보인다. 구운몽의 주인공도 그렇고, 옥루몽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첩의 인권은 처의 인권에 비해서 항상 떨어진다. 처가 눈을 부라리면 첩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러나 처는 자신의 남편을 첩에게 뺏겨도 결코 질투해서는 안된다. 만약 질투를 하고 첩을 괴롭힌다면 비현실적인 힘, 의 개입을 받아 꿈에서 교화되게 된다. 옥루몽, 이라는 고전 소설에서 그런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옥루몽은 구운몽과 비슷한 내용을 가진 이야기인데, 천상계에 노닐던 사람이 지상의 태를 빌려 나와서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위기를 막으며 많은 여성들을 처와 첩으로 거느린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두번째 처가 첩에 대해서 질투를 일삼으며 괴롭히고, 죽이려고 든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도리어 꿈에서 질투가 많은 여자, 라는 죄목아래에 끊임없는 고통을 받게 되고 결국 교화되어 순종적인 아내로 바뀌게 된다. 고전에서 읽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무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처와 첩은 그들의 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위협당할 수 있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이런 군담류의 소설에서는  처와 첩이 손을 잡고 주인공을 내조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으로 본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문제가 되는 처나 첩을 응징한다. 그리고 그들의 반가정적인 성향을 뜯어고쳐서 주인공을 뒷받침하도록 만든다. 결과적으로 남성중심주의가 만연하는 것이다.

 

이런 고전에 대한 분석과 재해석을 통해서 이 책, 가족기담은 우리에게 그야말로 고전이 감춰둔 살인, 근친상간, 패륜, 등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물론 그렇지 않을까, 와 같은 문제제기 수준에 그치는 내용도 있고, 조목 조목 구절을 근거로 들어가며 이야기하는 고전소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삐딱하게 보는' 책의 서술은 몇 가지 단점을 낳는다. 먼저 첫 번째 단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고전은 앞서도 말했다시피 당시의 사회인식상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는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가부장적이었고, 유교적인 가치가 최고의 가치였던 시대였다. 두 번의 큰 난리, 왜란과 호란을 통해서 가치가 뒤흔들렸을수도 있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고전과 같은 소설에서는 그런 중심되는 가치들, 가부장적인 가치나 유교적 가치를 더욱 더 강조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고전 소설은 실제 현실에 비해서 더욱 더 가부장적인 요소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고전의 모든 내용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전, 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놓아두어야 할 부분도 존재할 것이다. 저런 강화된 가부장적인 가치, 가 바로 그대로 놓아두어야 할 부분이 아닐까? 부연하자면 현대에 들어서 누가 저런 가부장적인 가치를 그대로 따르겠는가. 그러나 고전에서 가부장적인 가치와 유교적 가치를 빼면 그야말로 '기담', 과 '도술'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한 쪽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지만 다른 쪽에서는 뼈를 이루는 부분이다. 물론 현실에서도 가부장적인 가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가장이 이런 고전의 영향을 받아서 가부장적인 인식을 획득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가치, 남자중심주의를 비판한다면 그 결말은 일종의 반동으로 여성의 권리, 에 대한 논증으로 끝나게 된다. 첩과 처의 관계에서 이 책이 분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굳이 고전을 재해석하지 않아도 충분히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주장이다.

 

그리고 다른 단점이 또 하나 있으니, 이 책의 후반부에 이르면 타자화, 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 타자화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일종의 차별이다. 누구든지간에 자기자신이 사실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인격과 성격이 자기 자신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런 기준을 가지고 타인을 바라보면 타인은 나에게 못미친다. 나는 다른 사람을 배려해주는데 저 사람은 그렇지 않다. 저 사람은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다. 결과적으로 타인을 나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게 되고, 더 나아가면 일종의 물체로 보게 된다. 그들도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이나 인격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물론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 그렇다면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물체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타자화라고 부른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인류학사에서 가장 큰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식민지로 파견가서 연구를 하는데, 식민지의 사람들도 그들, 지배하는 사람들처럼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 처럼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들을 그동안 그랬던 것 처럼 지배할 수 없으니 그들의 인격은 모조리 무시하고 더욱 더 물체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이를 두고 피식민지인들을 타자화시켰다고 부른다. 이 책, 가족기담에서는 이 타자화, 를 가져와서 어떻게 고전에서 여자가, 그리고 심지어 가장까지 타자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타자화에 대한 분석이 시도되었다면 그 다음 순서는 당연하게도 타자화에 대한 해결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말미에서는 그런 해결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보이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가족의 가치, 에 대한 강조로 마무리를 짓고 만다. 기술적인 문제를 한참 이야기하고 끝에서 사랑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거야,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렇다, 분명 가족의 사랑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나 가족의 가치는 언제든 강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중간에 여러 단계를 건너뛴 해결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고전에서 이야기하는 가치를 우리는 그대로 별 비판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절개가 중요하다고 하면 절개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되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 말을 쫓아 남편에게 순종해야만 하는가? 이런 질문만으로도 이 책은 우리에게 큰 전환점을 줄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너무 당연하게도 절개를 지킨 춘향이는 참 좋은 여자다, 열녀다, 놀부는 그야말로 나쁜 놈이다, 벌을 받아 마땅하다, 등과 같은 인식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저런 인식만 배우게 된다면 우리는학교에서 줄을 잘 맞추어 시키는 대로 이야기하는 앵무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학급이 돌아가려면 선생님이 안볼때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리고 칠판에 선생이 판서하는 내용을 삐딱하게 쳐다보는 아이도 있어야 할 지도 모른다.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이 학급에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획일적인 집단이라면 외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저런 삐딱함, 은 불확실성을 높여 그 집단이 환경, 사상, 인식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잘 대응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무수한 세월을 거쳐서 지금껏 살아남은 생물 집단들처럼 말이다.

 

어느 광고에서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광고가 한창 유행할 시기, 나와 친구들은 우스개소리로 모두가 YES할 때 혼자 NO하면 따돌림당한다, 혹은 두들겨 맞는다, 등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분명 모두가 예, 라고 말할때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좀 더 삐딱하고, 좀 더 특이한 시각으로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사람말이다. 기존의 해석이 굳어내려져온 고전을 독해할 때, 특히 그런 시각이 필요하다. 고전이라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고전 자체를 일종의 가치로 생각하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필요할 지 몰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다각적인 비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고전 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주류로 내려오고 있는 어떤 가치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가치들을 남들이 따른다고 해서 그대로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인식에 우리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삐딱하게 쳐다보아야만한다. 그리고 이 가족 기담, 과 같은 책이 그 첫걸음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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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10 16:15   좋아요 0 | URL
리뷰를 읽어보면 이 책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막상 제가 읽으려고 책을 펼치면 다 못읽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가연님의 리뷰가 더 재미있지 않을까..


가연 2012-09-10 19:17   좋아요 0 | URL
사실 별로 길지 않은 책이에요..ㅎㅎ 제가 자꾸 도입부에 공을 들이다보니, 푸핫, 리뷰가 자꾸 길어지네요. 뭐랄까, 약간 불친절한 부분이 있는데 설명을 고전 내용을 우리가 거의 다 알거라고 가정하는 부분이 쫌 있기는 해요. 뭐, 사실 장화홍련전이나 옹고집전은 거의 다 알긴 하겠지만..ㅎㅎ

2012-09-10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0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1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1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2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3-09-28 01:04   좋아요 0 | URL
무서운 영화를 보는 방법 재미있네요 그것뿐 아니라 다른 것을 볼 때도 그러는군요 그냥 보기만 하는 것보다 좋겠습니다


처와 첩이 손을 잡고 주인공을 내조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으로 본다.

제가 이 말을 잘못 봤습니다 처와 첩이 손을 잡고 남편한테 맞선다로...^^ 다시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잘못 보고 떠오른 소설이 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역로>에 나오는 '옅은 화장을 한 남자' 예요 처와 첩이 손을 잡는...

고전을 다르게 해석한 이야기 재미있을 것 같네요 가연 님은 거기에서 문제점을 조금 찾아냈군요 삐딱하게 보기, 필요한 일입니다


희선

가연 2013-10-03 21:09   좋아요 0 | URL
처와 첩이 손을 잡고 남편에게 맞서는 경우도 있겠죠?ㅎㅎㅎ
 
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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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 공주의 방은 조금 어두웠다. 그렇기에 꿈사냥꾼이 그의 앞에 있는 아테 공주가 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아테 공주는 단추 대신에 방울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옷을 벗으려고 하거나, 옷을 입으려고 할 때는 항상 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방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아테 공주의 방에 들어와 있는 꿈사냥꾼마저도 그 방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찾을 수 없으며, 어느 한 상태를 모르면 다른 상태도 알 수 없다. 방울 소리는 적어도 그녀에게 한해서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촉매였다. 물론 어느 상태가 그녀에게 좋은 상태인지는 그녀 자신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아테 공주의 침실은 커다란 경호견들이 새하얀, 너무나 하얘서 은빛마저 감도는 그런 털을 두르고, 그 털만큼이나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지키고 있었다. 그 경호견들은 마치 조각상같았으며, 가끔씩 혀를 드러내고 헐떡이지 않으면, 혹은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마지막으로 배가 규칙적으로 부풀어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지 않았다면 마치 어느 신전에서 침입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세워둔 가고일과 같은 조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호견들이 잠깐 움직일때에는 음식을 먹을 때 뿐이었고, 그 외에 낯선 사람이 아테 공주의 침실을 기웃거릴때 눈동자만 좌우로 굴리며 경계할 뿐이었다. 복도에는 어렴풋한 지린내가 감돌고 있었다. 유일한 때가 있다면 경호견들이 교체될 때의, 그러니까 한 무리는 자러 가고 다른 무리가 들어와 다시금 석상처럼 서 있을 때의 어수선함 뿐이었겠지만, 그런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꿈사냥꾼은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꿈사냥꾼은 자신이 가진,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사용하였다.

 

아테 공주는 미인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물론 꿈사냥꾼이 그녀의 침실까지 들어가게 된 것은 그녀가 미인이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테 공주는 카간의 친척이자 그의 정부이다. 그녀의 몸이 탐난다고 해서 목숨을 버릴 만큼 꿈사냥꾼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한 번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만약에 그녀의 침실이 많은 경호견들로 지켜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아테 공주라는 인물은 실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고 꿈사냥꾼은 단정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침실 열쇠를 받자 - 열쇠는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그는 아테 공주가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꿈사냥꾼은 사제였다. 꿈을 사냥하는 사람과 사제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지는 아담 루하니, 시간과 영원을 다루는 천사만 알 뿐이다. 아담 루하니는 천사이자 인간이었다. '모든 사람이 가진 꿈이 하나로 모인다면 그 꿈은 거대한 인간 모양으로 변모할 것이며 그 크기는 대륙의 크기에 견줄만 할 것이다.' 꿈사냥꾼은 다른 꿈사냥꾼들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방법으로 아담 루하니를 숭배하였고, 그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수도원의 일만명이나 되는 처녀 수녀들을 아이를 가지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가 아담 루하니를 숭배하는 방법이었다. 아담 루하니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다. 진실된 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때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처녀 수녀들과 자신이 스스로마저 잊어버릴 것 같은 쾌락에 이를때, 그는 그녀들의 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담 루하니의 조각을 찾기 위해서.

 

"그래서 이제 여기에 이르렀나요."

 

아테 공주가 말했다. 그녀는 수도원의 마지막 수녀였다. 꿈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다. 그리고 아담 루하니의, 제 3의 천사의 조각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다음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 지라도, 자신은 꿈 사냥꾼의 역할, 수많은 꿈들을 모아 아담 루하니를 이룩해내고, 이윽고 인간이 인간 이상의 가능성을 가지게 만드는 그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역할보다도 지금 당장의 그에게는 그녀에게 확인해야만 할 것이 있었다. 그리고 아테 공주는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조각이었다. 그녀의 은빛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 사냥꾼은 숨을 헉, 하고 들이쉬었다. 과연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누구보다도 느렸다. 하지만 느린 사람이야말로 뒤에서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가장 빨리 보이는 사람인 것이다.

 

"공주여, 나는 그대에게 이르기 위해서 이 책을 넘기며 찾아왔습니다. 이 책의 매 장에는 죽은 자를 붙들어매고, 산 자를 죽게 만드는 독이 묻어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 장을 넘기면 나는 이제 죽을 것입니다."

 

"알 사파르, 내 앞에 있는 당신은 꿈인가요, 현실인가요?"

 

"나는 이미 꿈을 통해 당신의 말과 당신의 열쇠를 전달받았습니다. 여기 있는 나는 벌을 삼켜 죽은 알 사파르이기도 하며, 수많은 처녀를 잉태시켜 결코 편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게된 가련한 꿈사냥꾼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담 루하니의 사도, 그리고 그의 뒤를 바싹 따르는 종복입니다."

 

"나는 곧 죽을 거에요, 알 사파르.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이 힘을 모아 나를 지옥으로 보내려고 하고 있어요. 아마도 내 선택의 대가이겠지요.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에요. 그들의 지옥에서 나는 다시는 꿈을 꾸지 못할 거에요. 그렇기에 당신이 내 꿈을 꾸고 있었기에 다행이에요. 그래서 묻는 말이니 말해봐요, 알 사파르, 내가 다시 꿈을 꾸던가요? 그대의 꿈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이던가요?"

 

"공주여, 당신은 아랍인들의 종교를 맞아들이는 선택을 했고, 그 시도는 성공했지만, 그대의 깊은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스스로를 아담 루하니의 수녀이자 꿈사냥꾼의 후견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 아랍인과 유대인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책을 책이라 여기지 않고, 오직 주어지는 책만을 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손으로 아담 루하니의 흔적을 찾는 것이 그들의 주님을 구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완전을 꿈꿉니다. 거기서 꿈이 발생되어 나옵니다. 이미 완전한 상태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그리고 아랍인들은 모두 우리를 기만한 것이며, 그들의 주가 주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만입니다. 그렇기에 그대 자신도 스스로를 기만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옥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지어진 지옥이 아닌 스스로의 기만이라는 감옥을."

 

"나는 논쟁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들의 신을 믿으라고. 적어도 셋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공격을 당하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보복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들의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나도 스스로가 기만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앞으로의 나는 더한 기만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알라를 섬기다가 그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야훼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왕국은 너무나 깊고 그들이 아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이 가장 옳은 선택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면, 나 자신이 스스로를 기만할지라도,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될지라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에게 책을 집필해오라고 했었지요. 내 기만의 대가로 내가 잃어버리게 될 것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말이지요. 우리들의, 그리고 아담 루하니와 꿈에 관한. 그 책이 있고, 잊혀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몇 해전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흐른 적이 있을 때, 저는 예언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찾아올 것이며, 그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에 우리의 시간도 느리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저는 당연히 위대한 사람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사람이 개화하기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닐까, 라고 말이지요. 아마도 당신의 말은 옳을 것입니다. 내 꿈에서의 당신은 마치 새처럼 쿠, 라는 단어만 반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옥에 있지 않았습니다, 공주여. 당신은 당신의 현명함의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이리로 올라와요, 알 사파르. 마지막으로 내게 그대의 방식으로 아담 루하니를 섬기게 하세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이 바로 우리 민족의 책인 카자르 사전이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책의 매 장에는 몸을 마비시키고 이윽고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독을 발라두었습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이제 우리 꿈사냥꾼의 이야기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나 또한 사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몸, 우리 민족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짐작이 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부름을 받고 달려오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책은 태어나려고 한다. 이 책이 다른 사람에게 읽혀지든 읽혀지지 않든 그것은 이 책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 나는 이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책을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하게 하는 권리도 나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만,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이었는지 그대와의 이야기를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독은 단 한 번만 발랐기에 누군가 이 책을 끝까지 넘기면 그 다음 사람에게는 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히 나에게는 이 마지막 장을 넘길 힘이 남아있습니다."

 

알 파사르는 카자르 사전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독이 온몸에 퍼져 죽었다. 아테 공주는 명을 내려 꿈사냥꾼, 알 사파르의 죽은 몸을 우리에 넣게 했다. 그리고 물 위에 매달아두라고 명령했다. 시체는 썩지 않았다. 아테 공주가 물고기 모양의 열매를 입에 물었다가 그의 몸에 뱉자 그제야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아테 공주는 자신이 이제 이 물고기 모양의 열매, 쿠, 라는 단어만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참고 : 위의 책은 '하자르'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카자르' 가 더 좋은 것 같다. (설령 카자르, 의 K가 묵음일지라도.) 예전에 내가 읽은 책은 카자르 사전, 이라는 이름으로 남성판과 여성판으로 나누어져 있던 책이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 책을 읽었기에 나로서는 카자르, 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고, 여기서 쓰는 글에서도 카자르, 라는 이름으로 계속 진행할 것이다. 리뷰보다는 소설에 가깝지만, 이런 특별한 책에는 특별한 리뷰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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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9-03 00:49   좋아요 0 | URL
책 장마다 독을 발라두었다고 하는 거 움베르토 에코 소설 <장미의 이름>에도 나오지 않나요 이 책 읽지는 않았는데 그런 말을 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책 읽어보려고 했는데 앞에만 조금 보다가 말았습니다 재미있다고 하던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게 <장미의 이름>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이 한권이었거든요 찾아보니 두권이길래... 다른 것을 본 것인가

꿈사냥꾼은 작가인 밀로라드 파비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종교라는 것을 억지로 믿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기도 하군요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합니다(다른 나라에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이 있었죠) 보통 소설과는 다른 형식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색다르게 쓰셨군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희선

가연 2013-09-10 17:40   좋아요 0 | URL
멋진 소설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면ㅎㅎ 맞아요, 장미의 이름에서도 나오죠. 이 카자르 사전은 비슷한 내용을 말하긴 하는데 좀 달라요. 거기선 주요 트릭이지만.. 여기선 하나의 단어 설명이지요. 저는 꿈사냥꾼이 밀로라드 파비치 라는 생각을 한번도 안해봤는데.. 그러고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 외로 쓰기가 어려웠어요
 
상대성의 특수이론과 일반이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음, 이주명 옮김 / 필맥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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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인슈타인이 어린 시절 학습부진아였다, 라는 말은 새삼스럽게 더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최근(이라고 한다고 해도 약 5, 6년 전에 나온) 출시된 아인슈타인의 평전을 보면 관점에 따라서는 딱히 학습부진아라고 할 만한 부분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워낙 어렸을 때 학습부진아라고 알려져있고, 그리고 학습부진아라고 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명제가 깨어지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지, 어려서부터 천재였는데 커서도 천재다, 라는 식의 명제에는 그다지 호감을 가지기 어렵다. 어쨌든 어렸을때의 아인슈타인은 어학이나 인문계통의 전반적인 지식은 많이 떨어지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의 숙부 덕분에(수많은 아동용 아인슈타인 일대기에 숙부가 어떻게 그에게 방정식을 가르쳤는지, 대수학에 흥미를 심어주었는지가 나온다.) 수학과 과학에 대한 흥미는 잊지 않았고, 각각의 분야에서 상당히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가 대학, 그것도 세계에서 상위권에 드는 대학인 스위스의 취리히 공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그의 뛰어난 수학 성적때문이었다. 다른 과목들이 점수가 부족했는데도 학장이 배려할 정도면 우수한 수준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물론 바로 입학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한 발 앙보하자면 이는 리처드 파인만 등 다른 물리학자들에 비하면 사실 아주 뛰어난 수준은 아니기는 하다.

 

기대나 흥미를 떨어뜨리는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리처드 파인만의 경우는 그의 어린 시절을 보면, 역시나 어려서도 천재였는데, 커서도 천재다, 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이다. 우리는 그의 기행들, 그리고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등과 같은 저서를 통해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지적 능력이 뛰어났었는지는 도리어 과소평가하기 쉽다. 하지만 파인만의 경우에는 혼자서 무한급수와 적분을 공부했고, 자신만의 기호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그가 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물리학에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학과에 지원한 다른 학생들을 수학시험에서 압도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이런 수준에 이른 파인만이나 몇 십자리의 곱셈을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한 문제를 풀 때 잠깐 동안 수많은 답을 찾는 경로를 계산해 낸, 그야말로 컴퓨터의 수준에 다다른 수학자 존 폰 노이만(계산을 쉽게 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개발했는데, 도리어 그 컴퓨터의 수준에 인간이 다다르다니 좀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과 같은 경우와 비교한다면 확실히 어렸을때의, 그리고 대학생때의 아인슈타인의 재능은 주변인들이 볼 때 좀 뛰어난 영재에 지나지 않아보였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에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시민이 되고, 대학에 남아 연구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삶이라는 것이 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지는 않기에, 가정교사와 같은 직업을 전전하게 되었다. 연인이었던 밀레바와 결혼을 하게 된 것도 대학 졸업 후의 일이다. 의외로 물리학자들의 지성미에 반하는 여자들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위에서 언급한 파인만의 예를 들어도 그렇고.. 아인슈타인도 연인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렇게 결혼을 아무런 안정도 없이, 가정교사 생활을 전전하면서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저때 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특허 사무소에 취직을 해서 특허사무소에서 어떻게 보면 단순반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남는 시간에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공부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특허사무소에서 일했던 것이 아인슈타인의 그의 이론의 기초를 닦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역사학자가 지은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라는 책을 읽으면 거기에 대해 흥미로운 추측을 진행시킨다. 당시의 정확한 시계가 필요한 상황이 아인슈타인의 시간에 대한 고찰에 영향을 미쳤다던가. 푸앵카레는 (그렇다, 그레고리 페렐만이 증명한 푸앵카레의 추측, 의 그 푸앵카레다.) 프랑스에서 경도국이라는, 선박에 필요한 정확한 경도를 측정하는 그런 기관의 회장이었다고 한다. 이 추측이 어디까지가 사실일지는 모르나, 확실히 흥미로운 추측이기는 하다. 그러니깐 빅뱅이론(미국드라마)의 쉘든 쿠퍼(주인공이자 이론 물리학자)처럼 아무 단순반복직업이나 택해서는 물리학적인 영감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는 1905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다른 물리학자들이라면 평생을 바쳐서 이룩할 만한 뛰어난 고찰로 가득찬 논문을 3개나 발표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광양자 이론(양자역학의 기초가 되며, 이것으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았다.), 브라운 운동 이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수 상대성 이론이다. 물론 아인슈타인 혼자서 이 모든 것을 이룩해내지는 않았다. 부연하자면,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서 아예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 근본조차 새로운 무엇인가가 번쩍 하고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광양자 이론은 막스 플랑크에게 영향을 받았다. 상대성 이론은 앞서 언급한 푸앵카레나 로렌츠에게 (특수 상대성 이론의 수식에는 로렌츠 변환, 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설령 아인슈타인이 아예 근본부터 새로운 이론을 이끌어내지는 않았다, 라고 할지라도 그의 위대함은 조금도 반감되지 않는다.

 

어느 책에서는 창의성을 이런 식으로 정의한다. 창의적인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가? 가장 뛰어난 이론을 보고 듣고 공부하라. 거기에서 조금만 비틀면 마치 나비효과처럼 처음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등장할 것이고, 그것을 잡고 끊임없이 궁구한다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이 말은 아인슈타인에게 걸맞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구도 아인슈타인처럼 빛을 생각해보지는 못했고, 그 누구도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해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그는 그렇게 기존의 물리학 체계를 보완해내었고, 우리가 더 완전한 진리에 한 걸음 닫을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생각인데, 어쩌면 아인슈타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쌓인 수많은 고찰과 이론들, 그리고 뛰어난 직관은 쌓이고 쌓여서 마치 폭발 직전의 화산과 같은 상태였다. 그런 폭발 직전의 화산과 같은 상태에서는 그 어느 누구라도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바로 그런 기폭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과학이라는 것은 쌓이고 쌓이고 쌓이다보면 결국에는 올바른 길(여기서 올바른, 의 의미는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는 바른, 이라는 의미와 동일하다.)로 발전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에테르를 믿고, 절대 시계, 그러니까 우주 그 어느 곳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절대 시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다른 이론들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상대성 이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듯,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에 대한 뛰어난 고찰이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취급하는 아이디어이다. 물론 시간은 공간과 엄밀하게는 동일하지 않다. 공간은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만 시간은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비가역적이라는 이야기이다. 고전 역학에서 사물의 이치를 밝혀보려고 노력했던 갈릴레오나, 뉴턴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좌표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좌표계라는 것은 묘해서, 우리가 어떤 좌표계를 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운동을 기술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관찰을 어디서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운동이 달라지게 보인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공을 하늘에 던진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공은 시간에 따른 위치함수로 그 운동을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때 죽어라고 배웠던 방정식들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보자. 내가 걸어가면서 그 공의 운동을 보는 것과, 내 친구가 가만히 앉아서 그 공의 운동을 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앞서 어떤 식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운동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내가 걸어가면서 운동을 보는 것과 친구가 앉아서 보는 것은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두 상황에서 시간은 어떻게 될까? 과연 그 두 좌표계에서 시간은 똑같이 흐를까?

 

갈릴레오 이래로 많은 고전역학의 연구자들은 당연히 시간이 똑같이 흐를 거라고 믿었다. 두 좌표계상에서 시간에 관한 함수로 위치함수가 주어졌을때, 두 계는 동시에 시간을 공유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별다른 증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자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뒤의 전자기학을 연구할 때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아래에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시간은 보편적인 상수가 아니다. 각 계(엄밀히 말하자면 관성계)에 따라서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서 이 제멋대로인 시간을 규정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빛이다. 아인슈타인은 대담한 가설을 내세웠다. 빛의 속도는 불변하다고 말이다. 빛의 속도는 어느 계에서든 불변하며, 이는 빛이 이동한 거리와 시간이 비례한다는 것을 이끌어내게 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무언가 모자란 기분이 든다. 무엇이 모자란 것일까? 그것은 빛이 단순히 어떤 측정 기준의 매체를 넘어서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다른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인식론적인 이야기를 모두 제외하고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빛이 우리의 망막의 수용체를 자극하여 뇌신경을 통해서 후두엽으로 상을 해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빛은 측정 기준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어느 사물이 어느 시간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를 동시에 규정해주는 매체이다. 우리가 빛이 없다면 어느 정보도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왜 블랙홀 내부에 정보가 있는가, 없는가 를 두고 왈가왈부하는가? 그것은 블랙홀 밖, 사상의 지평선 외부에 빛이 탈출하지 못하기에 그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어떤 의미있는 정보도 빛보다 더 빨리 전송될 수 없다는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빛은 정보의 매개 역할도 하기에 재미있는 현상을 이끌어내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사고 실험으로 도달했던 바로 시간팽창과 길이수축이라는 현상을.

 

시간을 재는 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빛이다. (처음에는 대담한 가설이었지만 이윽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진실이 된다.) 빛이 이동한 거리와 시간이 비례한다. 비스듬하게 광원을 비추고 다시 반사되어 돌아오는 거리를 잰다면, 빛이 많이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볼 수 있으니, 최대한 비스듬하게 광원을 비출수록 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광원을 비추는 방법은 물론 우리가 각도를 변화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운동을 할 때 그런 현상을 나타나게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몇 가지 수식을 적절히 이용하면 시간이 팽창한다는 수학적 수식을 얻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길이 수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시간이 팽창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길이 수축은 쉽게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가 관찰한 일정한 속도는 거리를 시간으로 나누었을때 등장하는 값이다. 이 식에서 시간이 팽창하게 된다면 일정한 속도일 경우 당연히 거리가 수축해야만 유지가 된다. 마침 우리는 일정한 속도에 대응할만한 멋진 매개물도 있다. 바로 빛이다. 광속 불변이라는 가설에서부터 우리는 시간 팽창과 길이 수축 모두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는 운동하는 물체에 자를 매다는 방법으로 유도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빛은 정보를 우리에게 주는 매개물이다. 길이는 누구나 알다시피 어떤 물체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를 측정하는 것인데, 이 양은 절대적인 것이다. 사람이 측정할 수 있는 도구로서는 오차의 한계가 있겠지만, 마치 이데아의 원형처럼 무언가 절대적인 값이 하나 존재할 것이다. 이를 자신의 좌표계에서는 고유한 길이를 가진다고 하여 고유길이, 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으로서는 빛이라는 매개를 바탕으로 길이가 얼마인가를 받아들이기에 길이 수축이 일어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 자신의 좌표계가 아닌, 다른 좌표계에서 측정을 했기에 길이가 줄어드는 것 처럼 보인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한 번 도 꼬아서 생각해본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관측자이다. 관측자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빛을 뿜는 물체가 관측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나, 관측자가 빛을 뿜는 물체에게 다가가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가 중학교나 고등학교때 파장을 배우면서 물에 몇 번 손가락을 휘저음으로써 파원을 만들고 물결파를 형성하는 모습을 본 적 있을 것이다. 물결파는 물이라는 매질이 필요하지만 비슷한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빛은 매질이 필요가 없다. 결국 빛은 빛 자신과 그 빛을 보는 사람의 상대적인 운동관계, 상대속도에만 그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낭만적인 이야기이다.

 

여기까지가 사실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명한 식,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 정리는 그 이후에 간단한 수학적 장치를 통해서(물론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유도된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부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 등가성이 나오게 된 것은 뉴턴 역학을 보완하면서 나오게 된 것이다. 기존의 뉴턴 역학은 사실 운동에 대한 세 식에 의하여 체계가 완료된 상태였다. 마치 아르키메데스가 거대한 지렛대를 주면 지구의 무게를 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 처럼 뉴턴의 역학은 마치 라플라스의 악마와 같이 작용하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이론 이후에 그의 역학에는 어느 정도 수정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어떤 수정이 가해진 것일까?

 

뉴턴의 역학에서는 운동량의 보존 법칙이 성립한다. 외부와의 소통이 없는 어느 곳에 어떤 물체들이 있다면, 그 물체들의 총 운동량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우리가 완전탄성, 비탄성 하면서 탄성계수를 외웠던 바로 그 부분이다. 운동량은 간단하게 정의된다.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말이다. 이제 상대성 이론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저 물체들이 있는 좌표계를 움직여보면 특이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기존의 계에서는 운동량이 보존되었는데, 움직이는 계에서는 성립이 안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론적인 입장에서는 새롭게 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보통은 우리는 질량이 특수하고 완전한 값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질량을 다시 재정의해서, 상대론적인 질량을 도입하여 다시금 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 에너지 보존 법칙과 운동 법칙에서 유도후 도출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공식 E=mc² 다. (물론 여기서부터 설명을 위해서는 수식이 필요하다.)

 

이후 10년에 걸쳐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해서 아인슈타인은 연구를 거듭했다. 보통 물리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방정식, 이라고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보통 일반상대성이론에서의 장방정식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도출된 결론은 (안그래도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이미 충격을 받았는데) 더욱 더 충격적이고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기적의 해는 1905년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제목 그대로Annus mirabilis 그의 기적의 해의 연구의 편린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치기로 한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다가오지만,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본인에게 달린 것이다, 라고들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인슈타인은 그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두 손을 꽉 붙잡았고, 이윽고 자신의 손으로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 아무리 고전역학의 모순점이 폭발 직전에 다다랐더라도 아무런 노력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의 물리학에 대한 심원한 고찰과 존재계에 대한 '신비로운' 흥미를 계속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에게 이런 일들이 다가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은 나에게도 그런 기적의 해가 언젠가 찾아오지 않을까,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기적의 해가 찾아오기 위해서는 나또한 스스로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그렇게 활짝 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게, 물론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하겠지만, 존경을 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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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17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