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의 사상과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서사시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사순옥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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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부끄러운 글을 적었다가 지워버렸던 적이 있다. 나는 술을 안마시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세상에는 절대, 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너무나 사는 게 힘들고 괴로우면 술을 마실 수도 있는 것이고, 나 또한 절대, 와 같은 말에 별로 구애되지는 않는 성격이라서 조금 마셨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마신 걸까, 그리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제법 취기가 올랐었다. 나는 보통 술을 마시고 나면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되면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안하고 그냥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편이지만, 혼자서 자작을 하는 경우에는 그냥 어지럽다고 그냥 잠이 들거나, 혹은 긴 글을 썼다가 지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블로그를 하게 된 이후에는 블로그에다가 음주 후에 헛소리를 적기도 했었고 말이다. 물론 내 블로그는.. 최대한 방문객들을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하루 평균 방문자수가 0명에서 1명을 웃도는 수치였고, 그 덕분에 나는 이중적인 감정, 그러니깐 이 곳은 공개된 곳이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공간이다, 와 같은 감정에 몸부림치며 자기만족적인 욕구를 쉽게 채울 수 있었다. 원래는 전화를 했었다. 술을 마시고 친한 친구에게 말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민폐다. 나만 상대방을 친한 친구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곤란하고, 설령 둘다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더라도 새벽에 술취해서 전화하는 것은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힘든 일이다. 그러다보니 점차 블로그에다가 음주 포스팅을 올리는 나날들이 많았었다. 술을 마셨을 때는.

 

며칠 전에도 마찬가지로 술이 취해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려다가(여기에서 서재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정말 가끔 블로그에 들렀는데, 그러다보니 점차 뜸해지게 되고 최근에는 거의 안쓰고 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 서재에 들어와서 글을 끄적거렸다. 물론 여기 서재는 책을 글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블로그에 비해서 좋은 편이며, 나 또한 최근에는 거의 여기에서만 활동하니까 그렇게 글을 끄적거렸던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 서재는 내 블로그와는 달라서, 생각보다 방문자수가 많은 편이다. 이 말은 부끄러운 글을 끄적거리게 되면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 물론 어차피 얼굴을 드러내놓고 쓰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쓰냐, 지나친 신비주의다,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능력, 그러니깐 죄과를 빨리 폭로하여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와 동시에 일종의 일기장을 빙자하여 진솔한 양 스스로를 멋지게, 혹은 뛰어나게 꾸밀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이 먼저 폭로해서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은 용납할 수 있지만 타인이 '야, 그거 너 잘못했잖아' 라고 말한다면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들고 부끄럽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타인이 나에게 비난을 던지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익명의 글쓰기는 나는 이런 저런 일들을 겪어왔지만 실제로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다, 라는 뉘앙스를 가진 글을 쓸 수도 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이정도 학식을 가지고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알게 뭔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정말로 알고 있는지 혹은 모르는지. 부끄러움은 최소화하고 자신의 공은 최대화한다. 이는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항상 조심해야 할 부분일테고.. 설령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는 항상 그런 위험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지나친 자기검열이다, 라는 비판을 분명 들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겨우 두 세시간 뒤에 정신을 약간 차린 나는 겨우 겨우 그 글을 지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찔한 일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성, 의 이름을 빙자한 자기검열, 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 아주 부끄러운 내용을 적은 것은 또 아니다. 그냥 사는게 힘들다, 원래 난 안이랬는데 뭐 이런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 의 수레바퀴 아래서, 를 틀로 가져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나는 실제로는 꽤 뛰어난 사람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내용의 결말은 그래도 살아야지,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당시 어느 정도 술이 깼던 내가 집어든 책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였다. 정말 이상하게도 이 책이 읽고 싶어졌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내 머릿속에서 짜라투스트라, 의 한 구절이 자꾸만 맴돌았었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이 나무는 이곳 산간에 외롭게 서 있다.

 

나무는 너무 높게 솟아있었다. 산과 동물 모든 것을 뛰어넘어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너무 높게 솟아 있는 존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존재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고대한다. 무엇을 고대하는가?

 

이 나무가 고대하고 있는 것은 뇌신이 아니었을까?

 

바로 저 어구였다. 저 어구만이 나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너무나 힘들 때 읽었다. 나는 광인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고, 감정은 나를 불사르고 나의 외형을 지우고 이윽고 밖으로 뻗어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랬다. 선이 있었다. 그 선을 넘으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는 그런 선을 느끼는 나날이었다. 소크라테스에게 몇 번이고 귀에다가 이야기를 해주며 그를 바른 길로 이끌었다던 데몬은 나에게 이르러 그의 반대의 길로 나를 몰아붙였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결코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감정의 광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그 '선'을 넘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를 지탱하던 것은 우습게도 다른 사람의 시선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한 사람을 파멸로 몰아가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사회에서 구축되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도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나를 따뜻하게 보아주는 시선과 나를 경멸하는 시선 그 모두가 나를 다시금 선 안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다시금 나는 그때의 막막함을 느끼고만 말았다. 어두운 밤 홀로 깨어있는 나, 그리고 너무나 어색하게 보이는 나.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낯설음 속에 나는 마음 속으로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절망했다. 내가 고대하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었기에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내가 고대하고 있던 것이었나? 그들의 인정이 내가 필요한 것이었나? 그 말이 그르다고 할지라도 이 마음 속의 어둠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전에 선 안으로 다시 들어온 나는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었다. 광인과 깨달은 자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어설픈 광인이나마 되어볼 뻔 했던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를 높이 평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나무가 높이 자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뿌리가 깊어야한다. 물론 나무의 생육조건에는 적절한 물과 햇빛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높이' 자라기 위해서는 그 뿌리가 튼튼해야 하리라. 그러나 줄기와 잎은 빛의 세계에 속한 것이다. 햇빛을 직접적으로 받는 부분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뿌리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비유적인 이야기를 풀어서 쓰면 이런 것이다. 어떤 정신적으로 높은 단계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그 어둠도 깊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마음 속의 어둠은 깊어지고 짙어진다. 나무는 뇌신을 고대한다고 말했잖는가.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뇌우가 나무를 흔들  것이며, 그 뇌우에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모습을 겉으로는 보여줄 지라도 나무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겉으로 보여주기 위해 '더 땅 속으로 깊이 파고 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 만큼이나 나 자신을 낮추어 보게 되었다. 나는 실제로는 뛰어난 사람이라고? 무엇이 뛰어난 사람인가? 스스로를 마주보라. 내 마음 속의 어둠은 이렇게도 깊은 것인가? 그야말로 마음이 병들었다는 말에 딱 들어맞지 않은가. 그리고 그날 밤 다시금 막막함에 마주서서 절망에 빠져들고 말았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 에서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죽음은 어떤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학자이자 실존주의자였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적인 성향을 그 뒷받침에 두고 있던 그에게 죽음은 그런 기독교 세계의 종말이었고, 기독교적인 비의와 생명의 상실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후에 니체가 등장하였다. 니체는 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역설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왜 죽었는가? 신은 인간에 대한 동정이 넘쳐 죽었다. '동정을 초월하지 못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모두 슬픈 자들이다.' 신은 슬픈 자이다. 인간을 동정하고, 인간을 동정하고만 자신을 동정하고, 이윽고 죽고 만다. 하지만 신의 죽음은 타살이다. 인간은, 인간은 자신의 어둠과 치부를 구석구석 바라본 자를 살려두지 않는다. 신은 우리 인간의 치부를, 추악함을, 그리고 그 심연을 구석구석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참견쟁이는 이윽고 우리의 손에 의해서 죽게 되고마는 것이다. 그의 지나친 호기심과, 호기심으로 그를 이끈 동정심이 그를 죽이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나 스스로의 어둠을 보게 된 나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이는 나의 파멸이다. 나의 어둠, 치부, 그리고 추악한 생각을 알게 된 '나' 는 나의 손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나와 '나' 사이에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사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 아, 이 말은 얼마나 추악한 것인가? 나는 '나'를 배제하지 않고서는 나를 사랑할 수 없으며, 동시에 나를 배제할 때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고결하지만 그 마음에 어둠을 감춘 내가 아닌 동정의 독에 빠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무는 뇌우를 고대한다. 뇌우에 맞아 쓰러지기를 고대한다.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몰락' 이다.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어가려는 몰락이다. 짜라투스트라가 그의 산에서 벗어나 인간 세상으로 그의 '몰락'을 시작한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선택은 '나'를 죽여 몰락을 완성시키는 것 뿐이었으리라.  하지만 최후의 순간 나는 머뭇거렸고 몰락은 실패했다. 나는 아직 몰락할 만큼 충분히 높이 자라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번지점프를 하듯, 잠깐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맛본 것에 불과한 내가 어찌 몰락할 수 있었겠는가? 짜라투스트라는 다시금 이렇게 말한다.

 

아직까지 내가 범하지 않은 그 마지막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몰락을 시작한 짜라투스트라는 정오의 빛을 등지며 걸어나간다. 찬란한 태양은 그의 빛이다. 그를 살찌우게 할 양식이다. 동시에 그는 번개의 예언자이다. 번개는 우리가 느끼기 전에 그 빛이 먼저 우리에게 다다른다. 우리가 모든 죄를 범하고 쓰러질 때, 번개는 우리를 태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은 밧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죄를 짓지 못했다. 나는 나의 삶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별 너머에 더 넓은 우주공간이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이 삶은 그야말로 과정이다. 하지만 아직 죄를 짓지 못했기에 죄를 짓기 위해 살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죄가 '나'를 죽음에서부터 끌어내리는 것이다. 왜 죄를 지어야 하는가? 그것은 예비작업이다. 수많은 죄와 나 스스로를 부정하는 작업을 통해서 나는 부서지고 깨지고 이윽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은 척하는 행위는 미망이며 도리어 진실된 깨달음을 방해한다. 죄의 끝은 징벌이고, 그 징벌은 번개와 같이 날아오리라. 그리고 입을 벌릴 수 조차 없는 그 짧은 시간이 밧줄은 타버릴 것이고 결국 나는 번개와 함께 살리라. 그것은 모든 미혹을 지우는 금강의 무기이다. 바로 그때 나는 비로소 제대로 몰락할 수 있을 것이다. 대지로 일직선으로 내려꽂히는 저 번개처럼.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 모든 죄를 지을 만큼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대도 살아가는 것이다. 우수함도 부끄러움도 잘못도 모두 내려놓고 살아가는 것이다. 스페인 민간 전설을 모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왕이 자신을 숨기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 여행했었다. 결국 왕이 얻은 결론은 '사람은 부끄러움을 안다' 였다. 우리는 항상 부끄러워한다. 삶에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능력이 모자람에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에 비교하면서 항상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이 지나치면 잘못으로 기울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부끄러움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 신이든 악마든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항상 과오와 거기에 따른 부끄러움으로 점철된다. 이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일종의 천형이다. 그러나 그렇게 '삶이 아무리 그대를 괴롭힐지라도', 그대가 아무리 큰 후회를 안고 살아가더라도, 아무리 큰 잘못을 했더라도 일단은 살아라.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다. 앞서 신은 죽었다고 말했던가? 신은 결국 죽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가 한 일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간에 대한 동정의 결말을, 그의 지옥의 결말을 끝내 그는 두 눈으로 지켜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는 인간을 짓밟고 살아남았다면 그는 자신의 행위를 돌이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이제 우리 인간의 문제가 남았다. 그렇기에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이라도 그대가 되돌리겠다는 믿음이 있고, 그 전에 어떻게든 살아있다면 그 일을 되돌릴 수 있다. 이는 그대가 되돌릴 수 있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대가 살아있기에 다른 사람이 그대에 관해서 되돌리고 싶은 일을 되돌릴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 그대가 용서를 할 수 있는가, 는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아예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신의 지옥이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이라면 우리의 지옥은 상대방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 자체를 태워버릴 것 같은 그 지옥의 업화속에서도 우리는 내가 너를, 네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헛되다하여 누가 어리석다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가능성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가능성은 살아있음으로써 획득된다. 그렇기에 발로 땅을 딛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땅 속으로 아무리 발이 파고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의 어둠을 바로 마주하라. 그것은 그대의 눈이 하늘을 바라본다면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짜라투스트라가 등졌던 저 찬란한 정오의 태양으로 대표되는 니체의 생명력 예찬에 대한 우리의 답가인 동시에 그가 우리에게 주는 죄라는 이름의 선물이다. 물론 삶을 되돌리는 것은 내가 한 것처럼 버튼 하나로 서재 글을 지우는 것만큼 간단하지는 않다. 몇 번이고 돌아가야만 할 것이고 때로는 갔던 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걸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으니깐. 그것이 영원회귀이자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초극하기 위해서 지어야 할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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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2-12 22:47   좋아요 0 | URL
'삶이 아무리 그대를 괴롭힐지라도', 그대가 아무리 큰 후회를 안고 살아가더라도, 아무리 큰 잘못을 했더라도 일단은 살아라.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다.

이 말 좋네요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좀 더 나아질 수는 있겠죠
살아있다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조금 삐딱한 마음


희선

가연 2013-02-13 23:45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나아질 수는 있겠죠? 아니, 최소한 나아지려고 마음은 먹으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