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Blu (리커버) 냉정과 열정 사이
츠지 히토나리 지음, 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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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싸움에서도 그렇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서는 누구의 잘못이 큰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사람은 늘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유불리를 따져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숨기거나 축소하게 마련이니까. 그와 같은 방어기제는 누군가로부터 학습을 통해 습득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선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싸움의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사랑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사랑도 싸움도 집단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원초적인 생존 수단에서 비롯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일본의 남녀 소설가 2명이 같은 결말의 서사를 남자와 여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냉정과 열정 사이>는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에 이르는 과정을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추억하며 각자가 지닌 사랑의 정도를 저울질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꽤나 기발한 발상이자 흥미로운 기획인 듯 보인다. 하기에 일본의 여성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와 일본의 남성 소설가 츠지 히토나리에 의해 쓰인 두 권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 Blu>는 두 사람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 소설이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하나의 단점이 있다면 ROSSO든 Blu든 하나를 먼저 읽고 나중에 읽는 소설은 어쩔 수 없이 가독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각각의 소설가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다는 점도 무시할 수가 없다.


"후회 없는 인생이 있을까. 후회만 계속해왔다. 평생, 후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진다. 느슨하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올려다보았다. 굽어지는 길 중간쯤에 메미가 사는 아파트 불빛이 보였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어떡할까, 하고 망설였다."  (p.60)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가 쓴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를 먼저 읽었던 나는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Blu>를 읽는 데 꽤나 긴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츠지 히토나리의 문체나 서술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두 소설의 내용이 많은 부분 중첩되거나 예상 가능한 부분이 많아서 좀처럼 독서에 속도를 높일 수 없었던 때문도 아니다. 제목이나 주인공의 이름을 달리 썼다면 완전히 새로운 소설이었을 테지만 단지 주인공의 이름이 같고, 결말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독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나의 독서 이력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과거밖에 없는 인생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시간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서글픈 일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뒤쫓는 인생이라고 쓸데없는 인생은 아니다. 다들 미래만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나는 과거를 그냥 물처럼 흘려보낼 수 없다. 그래서, 그날이 그리워,라는 애절한 멜로디의 일본 팝송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것이다."  (p.194~p.195)


교포 출신의 아오이와 쥰세이는 도쿄의 대학에서 만나 연인이 되고, 사랑하던  두 사람은 아오이의 임신을 계기로 심하게 다툰 후 헤어진다. 그 후 쥰세이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미술품 복원사로 일하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미술품 복원 일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쥰세이는 공방에서 함께 일을 배우는 다른 수련생의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게다가 조반나 선생님은 짬이 날 때마다 쥰세이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린다. 어린 시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쥰세이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뉴욕에 살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표출된다. 그리고 엄마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쥰세이는 조반나 선생님에 대한 특별한 감정으로 이어진다. 한편 그의 곁에는 일본인 유학생 메미가 있다.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일본인 엄마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메미는 두 사람의 이혼 후 줄곧 엄마와 함께 일본에서 생활한 터라 이탈리아어는 몹시 서툴렀다. 어학당에 다니며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메미의 유일한 조력자는 언어가 통하는 쥰세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헤어진 연인 아오이를 잊지 못하는 쥰세이는 연인인 메미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겉돌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쥰세이가 복원을 맡았던 명화가 심각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고, 그 일에 책임을 느낀 조반나 선생님은 공방을 폐쇄하기에 이르고,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수련생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책임을 느낀 쥰세이도 결국 일본에 사는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가 무기력한 생활로 일관한다. 어느 날 이탈리아에 있던 메미가 연락도 없이 쥰세이를 찾아오고...


"나의 광장. 예전에 그렇게 부르며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다.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 떠돌며 살아가던 내게 있어 그녀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도시의 광장처럼 시원스러운 존재였다. 별다른 용건도 없이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 노인처럼 매일 그곳을 찾아갔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자신이 고독하지 않고, 행복한 존재라 생각할 수 있었다."  (p.168)


누구보다도 쥰세이를 아끼고 사랑했던 할아버지 곁에서 시간을 보내던 쥰세이는 조반나 선생님의 자살 소식을 듣고 다시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리고 헤어진 연인 아오이와 했던 오래전 약속을 떠올리는데...


남녀간의 사랑이나 결별은 한쪽편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결론짓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변수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많은 변수를 일일이 확인하고 점검하여 최종적으로 누구의 잘못임을 객관적으로 밝힐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도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언제나 사랑 앞에서 무모한 듯 보이고, 맹목적일 수 있다. 비록 그 결과가 참혹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사랑에 대한 용기는 그 무모함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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