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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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시인이 삶의 낙차가 그리 크지 않은, 비교적 유순하고 평탄한 삶을 살아왔을 거라는 짐작이다. 시인과의 친분이나 일면식도 없는 나로서는 그저 바람이나 희망이 섞인 추측성 가설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 까닭은 독자로서 시인을 아끼는 마음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구비가 없는, 바르고 평탄하기만 한 삶이 어디 있을까마는 속도가 빠르지 않은 삶의 물살을 타고 유람을 하듯 천천히 삶의 굴곡을 넘어왔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강가에서 2


  깊은 물 속으로, 더 깊은 물 속으로 내려서면서 우리는 발끝으로 당신의 가슴 언저리를 더듬었습니다 이명처럼 오랜 날들이 지나고 우리가 닿은 곳은 당신의 하구河口였습니다 밤새 비 내리고 폭풍우가 멎은 아침, 흰구름이 피어오르는 바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맑게 닦인 모래알처럼 고운 당신의 웃음이 우리를 받았습니다


저마다의 삶은 '비 온 뒤의 웅덩이처럼 내 기다림 뒤에 있는 당신'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고 시간의 외길을 꼬닥꼬닥 걸어가는 것이지만 우리가 시인의 시를 천천히 암송하고 있노라면 삶도 죽음도 별것 아니라고, 다만 '그대가 내 손을 잡고 부르던 노래는 죽음이었'을 뿐이라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된다. 시의 효용은 언제나 절망과 낙담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는 것이지만 이성복 시인의 시는 우리에게 현실의 무게를 절반쯤 덜어내는 방법을 조곤조곤 일러주는 것이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아슴아슴 졸음이 밀려드는 오후, 나는 삼일절 연휴를 기다리며 이틀처럼 긴 하루를 견뎌낸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또는 덜컥거리는 하나의 슬픔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울음


  때로는 울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는지 잊었습니다 내 팔은 울고 싶어 합니다 내 어깨는 울고 싶어 합니다 하루 종일 빠져나오지 못한 슬픔 하나 덜컥거립니다 한사코 그 슬픔을 밀어내려 애쓰지만 이내 포기하고 맙니다 그 슬픔이 당신 자신이라면 나는 또 무엇을 밀어내야 할까요 내게서 당신이 떠나가는 날, 나는 처음 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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