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드롭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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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몰아서 읽게 되었다. 얼마 전에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를 읽었는데 그녀의 여행 에세이 <여행 드롭>을 또 읽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에세이에 있어서 만큼은 일본 작가의 작품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예컨대 나쓰메 소세키나 마루야마 겐지와 같은 예전 작가의 에세이도 종종 읽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나 에쿠니 가오리, 무레 요코나 마스다 미리의 작품도 자주 읽는다. 언젠가 나의 블로그에 쓴 적도 있지만 일본 작가의 에세이는 작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책을 읽는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어야만 해'가 아니라 단순히 '책을 읽는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할 뿐이야' 하는 식이다. 감정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어떤 장면을 보고 그냥 슬펐을 뿐이지 나는 너무 슬펐기 때문에 책을 읽는 당신도 역시 슬퍼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작가의 경우에는 다르다. 감정이나 주장에 있어 일본 작가에 비해 적극적이다.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두 나라의 국민성이 에세이라는 장르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에쿠니 가오리의 <여행 드롭>은 여행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여행 스케치이다. 개인적으로 혹은 업무차 다녀온 여행과 어느 날 문득 일상에서 떠오른 그날의 추억. 여행의 묘미는 정작 떠나기 전의 설렘이 팔 할이라면 다녀온 후의 회상이 나머지 이 할을 차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리고 여행지에서 겪었던 낯선 경험과 힘들었던 일들은 마음속 그리움으로 번지기 일쑤이다.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 여행에 대한 추억이 가슴 한편을 먹먹하게 물들일 때 우리는 다시 습관처럼 여행을 계획하곤 한다.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기분은 최고다. 밖은 비, 그러나 온천물은 따끈하다. 빨래 걱정도 없고, 저녁거리를 사러 나갈 필요도 없다. 눈앞에 펼쳐진 산속 나무들은 젖어 좋은 냄새를 풍기고, 이파리들은 선명한 초록이다. 극락. 비 내리는 날의 온천물은 화창한 날보다 부드럽고, 피부에 촉촉하게 스미는 느낌이다. 노천탕 전체의 부연 공기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p.77)


여행지에서의 생각은 일상의 그것과 사뭇 다르게 흘러갈 때가 많다. 시간에 대한 관념도, 일정이나 계획한 일에 대한 조바심도, 나를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시선도 때론 무감하게 느껴지곤 한다. 생각이란 게 도무지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처럼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멋대로 흩어져 나란 존재는 금세 쓸모없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경유하기 위한 시간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리라. 그 장소는 출발지도 아니고 목적지도 아니다. 시간은 출발 후도 도착 전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딘가에 홀연히 나타난 시공간, 게다가 외국. 경유하는 공항에 있을 때면, 나는 나 자신을 그곳에 분명히 있지만 없는 존재로 느낀다. 그리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럴 마음만 있으면 목적지가 아닌 장소로도 갈 수 있다고."  (p.104)


여행을 떠날 때면 ‘언제나 꼬맹이로 돌아가는 기분이다’라는 작가의 생각에 우리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게다가 마음에 맞는 일행이 한둘 섞이기라도 하는 날엔 그런 기분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기 마련이다. 나의 사회적 위치와 책무 같은 것들은 저 멀리 걷어차게 된다. 오직 나 자신과 여행을 함께 하는 여행의 동지,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 이제 막 오렌지색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낙조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얼굴들이 영상처럼 떠오를 뿐이다. 제어력을 잃은 과다 증폭된 감정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분출된다.


"여행을 좋아하는데도, 여행에서 돌아오면 반갑고 안도하는 것은 왜일까. 돌아오면 집 안 청소를 해야 하고, 우편물도 메일도 팩스도 잔뜩 쌓여 있고, 냉장고는 텅 비어 있어 장을 보지 않고는 먹을 것도 만들 수 없는 상태인데. 가족을 만날 수 있어서 그렇다, 하는 대답은 옳지 않다. 가족과 함께 여행한 경우에도 집에 돌아오면 안도하니까. (......) 규슈나 홋카이도, 미국이나 유럽 등, 여행을 좋아해서 아무튼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실제로 반복해서 떠나 보고 듣는 것, 만나는 사람, 먹는 음식 모든 것에 마음을 빼앗겨 벅찬 가슴으로 역이든 공항에서 여행 가방과 함께 돌아오면 집이 아직 거기에 있고, 게다가 여전히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 놀랍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반갑고 안도하는 것은 매번 그 사실에 감동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p.154~p.156)


다시 또 주말. 금세 봄이 올 것만 같던 날씨는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폭설 속에서도 꽃은 피고, 시간의 과묵함 속에서도 아이들 재잘거림이 나이테에 새겨질 테다. 우리는 그렇게 한 뼘 성장한 아이들을 대동하고 벚꽃 흐드러진 어느 강변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그 거리에서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 <여행 드롭>의 한 구절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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