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가뭄이 심하던 예년과 다르게 올해는 비가 잦다.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등산로를 걸을라치면 발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풀썩 일고 매캐한 먼지내가 솔내음보다 더 진하게 퍼져나가곤 했었다. 이맘때의 등산로는 표토층만 겨우 녹아 쭉쭉 미끄러지는 통에 사정도 모르고 나온 초보 등산객의 발길을 꽁꽁 묶곤 했던 예년과 다르게 올해는 따뜻했던 겨울 날씨와 잦은 비로 등산로는 물 반 진흙 반으로 꽤나 질척거린다. 비탈진 등산로에서는 늘어진 나뭇가지를 붙잡지 않고서는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이 들 지경이다. 덕분에 뽀얗게 이는 흙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일도, 산불의 위험도 크게 떨어진 게 사실이지만 왠지 나는 겨울과 봄 사이의,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계절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에 마음이 께름칙한 것이다. 이제껏 본 적 없었던 겨울과 봄 사이의 1.5의 봄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습한 날이 지속되면 알레르기 비염 환자들에게 조금쯤 도움이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남녘에선 속속 꽃소식이 전해오고, 강원도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지는 이런 이상한 계절 한가운데서 나는 오늘도 계절과 더불어 이상한 하루를 보냈다. 제정신이 아닌 게 어디 계절과 사람뿐일까마는 나는 오늘도 분분히 낙하하는 영혼의 잿빛 무리를 목격하며 저 무리들 속에 나의 영혼도 힘없이 꺾이겠구나, 절망했었다.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의 어느 봄날에 쓴 일기 한 구절은 오늘의 날씨처럼 스산하였다.


"다만 봄이 아직 지나지 않았고 까무러칠 만큼의 고독한 시간은 이제 시작될 것이다. 당신도 그렇겠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아, 이 고독이라는 건 정말 고독하구나. 술을 마시고 누구에겐가 편지를 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생에 더이상은 없었으면 좋겠다."


"......

섬득섬득 사라지는 빛의 봄 오후/북풍의 봄 오후/정말, 당신 때문일까,/이렇게 저녁을 준비할 자격이 있을까, 햇살아?/당신에게 부치지 못하는 편지들을 곱게 접는 봄 오후//" 


궂은 날씨를 뒤로 한 채 귀갓길을 서두르는 사람이 있고, 궂은 날씨를 핑계로 귀가를 미루는 사람이 있다. 오늘의 날씨는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었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어제 읽던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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