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꼼수다 뒷담화
김용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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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꼼수다'의 고정 멤버였던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대법원은 정 전 의원에 대한 상고심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로써 정 전 의원은 향후 10년동안 피선거권이 박탈되면서 출마 또한 무산되는 등 정치생명의 위기를 맞게 됐다.  그렇다면 현역 정치인이었던 그가 이런 결과를 예상 못한 바가 아니었을텐데 현 정부와 대척점의 위치에 있는 '나꼼수'의 고정 패널로 활동했는가 하는 문제와, 아무리 현 정부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의 판결을 이렇게 서둘러 종결지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의문으로 남는다.  유불리를 떠나 서로에게 치명적인 오점으로 작용할 사안이기에 누군가는 분명 무리수를 둔 셈이다.

  

나는 아주 편한 사람과 만나 가벼운 대화를 나누 듯 이 글을 쓰려고 한다.  순서가 뒤바뀌어 혼란스러울 수도 있고, 의미를 파악하느라 진땀을 흘릴 수도 있지만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문제이겠는가.  어차피 나 혼자 쓰는 블로그이고, 얼떨결에 방문한 분이라면 대충 훑어보거나 숫제 읽지 않아도 될 일이다.

 

먼저 전제를 달아야겠다.  공격성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보았던 프로이드의 주장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격성의 표출 양상은 너무나 다양해서 모두 다룰 수는 없고, 오직 말과 글을 포함한 언어적 관점으로만 그 범주를 축소해야겠다.  즉, 현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내내 지향해 왔던 강압적 방법을 동원한 언어적 공격성의 차단과 정권의 말기에 등장한 '나꼼수'의 이상 열풍을 들어 대화에 대한 주관적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먼저, 강제적인 겁박이나 실효적 법리로 인간의 본능을 차단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가령 성욕이나 식욕과 같은 본능을 법으로 억제하거나 차단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열이면 열 다들 코웃음을 날릴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질문이기에 세살배기 아이도 헛웃음을 지을 만하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을 하고, 또는 이간질이나 뒷담화를 일삼는 등의 공격성 표출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내재된 본능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뜩이나 그것을 분출할 다양한 수단을 확보한 현대인에게 원천적 차단을 강제하거나 시도하는 자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불가능함을 잘 알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지마라'는 항목을 늘릴수록 아이는 '일탈행위'의 쾌감과 스릴에 목 말라 할 테고, 그 강도가 심할수록 반발하는 힘은 더욱 강해지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러한 본능에 대응하는 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

상대방의 말에 주관적 평가를 더하지 말아야 한다.  즉, 자기식 소설 쓰기를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가령 아내가 "인간아, 술 좀 작작 마셔라."라고 했을 때, 남편이 이 말을 듣고 '아, 내 아내는 이제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구나.'하는 식의 주관적 평가, 또는 소설 쓰기는 결국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신에게만 상처를 입힌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 말에 내포된 의미만 받아들인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주관적 평가가 덧붙여지면 결국 대화는 차단되고 자신에게는 심각한 상처만 입히게 된다.  자신이 쏜 화살에 자신이 맞는 격이니 보통 심각한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학습을 통하여 체득된 이런 식의 소설 쓰기는 마치 이것이 자기 방어적 수단이라도 되는 양 습관화 되어 고치기 쉽지 않다.

 

다음으로, 바람직한 대화는 맹목적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자들의 '수다'가 여기에 가장 잘 부합할텐데 남자들은 사실 이런 대화에 취약하다.  목적이 없는 대화는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제다.  대화에 목적이 개입되는 그 순간부터 대화는 강의나 훈계와 같은 일방적 떠들기로 변질되고 만다.  무릇 세상의 모든 수컷들이란 가오잡기를 좋아하지 않던가.  현 정권은 한낱 수컷들의 가오잡기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나꼼수'의 열풍은 대화의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대화의 맹목적성(그들의 대화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더라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수컷들의 가오잡기가 없다는 점)과 청취자의 말을 그들 스스로가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저자 김용민은 나꼼수의 제작 뒷담화와 흥행 비결에 대해 이 책에서 그 나름의 평가를 피력하고 있다.

 

오늘 정봉주 전 의원은 '나꼼수'의 고정 패널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화의 즐거움을 알게 된 '나꼼수'의 열혈 청취자들은 제2, 제3의 '나꼼수'를 이어갈 것이다.  즐겁자고 하는 것이 대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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