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작고한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를 '하이퍼리얼(과도현실 또는 파생현실)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우리에게는 그닥 친숙하지 않은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하이퍼 리얼 쇼크>와 <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을 읽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 두 권의 책 사이에는 하등의 공통점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그렇구나'하고 느낄 수 있다.

 

플라톤은 그의 후기저작인 '소피스테스'에서  이 세계를 원형(이데아), 복제물(현실), 복제의 복제물(시뮬라크르)로 정의하였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데아의 복제물인데, 복제는 언제나 원형을 그대로 담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복제하면 할 수록 원형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실재하지 않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반면에, 포스트 구조주의의 핵심 이론 중 하나인 시뮬라크르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확립한 개념으로서 플라톤의 개념과는 다르게,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닌 독립성을 가진 개체로 보았다. 즉, 원형을 단순히 흉내낸 가짜가 아니라 원형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역동적인 존재로 여긴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쟝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에서도 나온 바 있다. 여기서는 주로 대중과 미디어, 소비사회에 대한 개념으로 쓰였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머리가 딱딱 아프다.  철학을 기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고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개념만 익히면 그 다음은 비교적 쉽다.  모든 일이 그렇지 않던가.  처음이 어려울 뿐 알고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정치를 예로 들면 이렇다.  정치가는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갈 올바른 철학과 탁월한 국정관리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국민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투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와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다.  가령 후보자의 약력에서 '하버드 대학 졸업'이라는 문구만 보아도 그 사람이 뽑히면 마치 대한민국의 학생들 모두가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또는 모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출마하면 우리나라 전체 국민이 그 사람의 이미지처럼 점잖고 바른 행동만 하는 덕치가 금방이라도 실현될 듯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평생 개그만 한 사람을 뽑아주면 웃을 일 없는 현실에서 매일매일이 즐겁고 행복한 날만 이어질 것같은 생각도 든다.

 

교환가치나 사용가치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이미지화 되고 기호화 된 세상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실존하는 사물을 소비하지 않고,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 또는 기호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배우 신세경이 광고하는 청바지만 입어도 그렇게 날씬하고 폼나는 자태를 갖게될 것만 같은 환상.  정치에 있어 하이퍼 리얼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고 노무현 대통령과 한명숙 전 총리가 아니었을까?  검찰은 피의 사실을 언론에 흘리고, 언론은 다시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편집하여 사건을 보도하고,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국민들은 앞다투어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거나 부풀리고...  그렇게 몇 단계만 걸쳐도 없던 현실이 실재 존재하는 가상의 현실, 현실을 지배하는 가상, 즉 시뮬라르크가 되는 것이다.

 

모처럼 편한 휴일을 맞았는데 이 두 권의 책이 나를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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