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나는 종종 '책잠'에 빠져들곤 했는데 이런 나를 두고 형이나 누나들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 말하자면 내가 힘든 일을 피하기 위해 짐짓 못 들은 체 한다는 거였다. 예컨대 아주 추운 날 연탄을 날라야 한다거나, 샘에서 물을 길어와야 한다거나,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야 한다거나 할 때면 나를 아무리 불러도 못 들은 체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책잠'에 빠져 있어서 듣지 못했노라고 해명하곤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정말 일단 책을 잡기만 하면 마치 가수면 상태로 진입한 것처럼 책에 빠져들곤 했었다. 나는 그것을 '책잠'이라 부르곤 했는데, 형이나 누나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일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핑곗거리 내지는 변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큰 소리로 불렀는데 듣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그러나 나는 정말 책에서 깜박 '깨어났'을 때 현실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잠시 동안 어리둥절하곤 했었다.

 

내 방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탓에 '책잠'에 한껏 빠져둘고 싶은 날이면 형과 누나의 눈을 피해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곤 했었다. 곰팡내 지독한 광이나 외양간으로. 나는 그곳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책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따금 진짜로 잠이 든 적도 없지 않았으므로 그럴 때마다 형과 누나는 나를 찾아 헤맨 적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이제 나는 '책잠'에 빠지지 않는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를 보며 짬짬이 읽는 독서가 그렇게 될 리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한동안 길들여져 온전히 책에 집중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쩌면 책이라는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단조롭고 안전한, 때로는 평화롭고 푸근한 느낌에 한껏 취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아들과 함께 서점에 들러 책을 읽을라치면 아들을 통해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책에 흠벅 취한 아들은 혼자 킬킬대기도 하고, 인상을 쓰기도 하고, 조용히 미소짓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아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책잠'에서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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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 피터 - 인생을 바꾸는 목적의 힘
호아킴 데 포사다.데이비드 S. 림 지음, 최승언 옮김 / 마시멜로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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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으면 넓을수록 풍요롭고 만족한 인생을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멀마 전 고등학생 때 만나 지금껏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스님으로서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죠. 속세와 동떨어진 작은 암자에 기거하며 단식과 좌선으로 일관하셨으니 이제는 적당히 사셔도 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아무튼 저는 어떤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곤 합니다. 한번 그렇게 휑하니 다녀오면 마음도 몸도 한결 가벼워지곤 합니다.

 

스님은 그런 저를 보고 이따금 농담삼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신부를 찾아갈 일이지 왜 애먼 중을 찾아 오느냐고 말이죠.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종교를 떠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한결 편한 걸요. 차를 타고 서너 시간을 가서 다시 산길을 두어 시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니 제가 사는 곳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저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죠.

 

이번에는 특별히 당부하실 말이 있었던지 스님이 먼저 청하셨습니다. 드문 일이죠.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는 게 도리이겠으나 세상에 매인 몸이 어디 그리 쉽게 떠날 수 있습니까. 이 핑계 저 핑계로 한참 뜸을 들이다가 간신히 시간을 내어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스님을 뵐 때면 으레 밀렸던 이야기가 늘어지는지라 보통은 하룻밤 신세를 질 각오를 하고 떠납니다. 스님과 하루 반나절 나누었던 대화를 이곳에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이번 산행에서 깊이 새기게 된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나와 죽음과의 거리에 있어. 죽음과의 거리란 시간상의 거리가 아니라 마음 속의 거리를 의미하지. 가령 내일 죽을 사람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과의 거리가 한없이 멀 테고, 죽을 날이 사오십 년 남은 사람도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고 맏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죽음이 지척으로 가까운 법이지. 어차피 죽음이란 순리이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명확히 인식하는 순간, 그 사람의 시야는 온 우주를 품을 듯이 넓어지는 게야. 생각해 봐. 어차피 죽는 마당에 욕심낼 게 뭐가 있겠어? 그제서야 나를 잊게 되고, 가족이 보이고, 이웃이 보이고, 우주가 보이는 법이지. 천지개벽이라고나 할까? 하여, 죽음 직전에라도 자신의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겠지. 대개는 내일도 오늘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지금 당장 죽어 나자빠지는 사람이 허다하니까."

 

결국 스님의 말씀은 '죽음과의 거리'를 좁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상으로가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서 말입니다. 나의 성공, 나의 가족, 나의 건강 등 오직 나에게만 집중되었던 시각을 이웃과 사회, 혹은 전 인류를 향해 시야를 넓히려면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더구나 젊은 나이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을 듯합니다.

 

저는 자기 계발서로 분류되는 책을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스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책으로 <난쟁이 피터>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저도 책을 읽는 내내 몇 번이나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려야 했으니까요. 책의 주인공인 피터는 얼굴도 못생기고 키도 작은 아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학교에서는 늘 놀림과 따돌림의 대상이었구요. 게다가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극적인 반전을 노린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말입니다. 피터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의 막노동꾼이었고, 폭력을 일삼기도 했었죠. 불쌍한 피터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머니가 유일했습니다.

 

그러나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피터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던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죽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와 둘만 남은 피터에게 불행은 또 다시 닥쳐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피터의 아버지를 이웃이 신고한 것이지요. 아버지마저 요양원으로 보내지자 피터는 가출을 합니다.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던 그는 어느 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길이 보이지 않는 외로운 사막에서도, 파도가 무섭게 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도 별빛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두려움을 이겨냈대. 그래서 별빛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꿈이 되고, 사랑이 되는 거야. 피터, 살다 보면 정말정말 힘들 때가 있을 거야. 이 엄마조차 도움을 줄 수 없는 때..., 그때는 별을 한번 쳐다봐. 나의 목적이 뭔가를 생각하고 방향을 확인하는 거지. 그런 다음에는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는 거야." (p.46)

 

집에서 갖고 나왔던 돈도 떨어지자 피터는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고, 신원도 불확실한 그로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 그는 택시 회사에 취직을 합니다. 알선료를 지불하면서 어렵게 만든 자리였죠. 택시기사를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피터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일등공신은 단연 크리스틴 선생님이었죠. 피터의 어머니가 죽은 후 가출한 피터를 찾기 위해 노숙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할 정도로 애정을 보이셨던 분이니까요. 크리스틴 선생님을 통하여 여자친구도 사귀게 됩니다.피터의 택시를 탔던 승객 중에는 무료진료 봉사를 하는 소아마비 의사도 있었습니다. 그는 피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사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누며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욕심부릴 때 세상은 한없이 불공평해 보이죠. 왜냐하면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분명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내 것을 먼저 나누고,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면 세상은 공평하게 보입니다. 어디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죠." (p.109)

 

피터의 인생에 멘토 역할을 한 사람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노숙자들을 돌보는 알렉스 경, 같은 택시기사이면서 형 동생으로 지냈던 가브리엘, 하버드 법학대학원 교수인 프랭크, 피터의 곁을 지키며 응원을 해주었던 여자친구 미셀 등이 대표적입니다. 불행한 환경이었지만 그의 곁을 지켜주던 많은 멘토가 있었기에 피터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워너 교수의 '회복 탄력성'이 생각나더군요. 피터는 야간 대학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물론 택시기사를 하면서 말이죠. 그후 프랭크 교수의 도움으로 하버드 법학대학원도 마치게 됩니다. 노숙자에서 변호사가 된 신화를 쓴 셈이죠. 그는 교수로 남는 게 어떠냐는 프랭크 교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겠다며 뉴욕의 거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비록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고등학교에서 연설도 하게 됩니다.

 

"저를 바꾼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목적의 힘'이었습니다. 그 힘은 나(ME)를 뒤집어 우리(WE)를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가난은 참 많은 면에서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인생을 좌우할 만한 결정적인 변수는 되지 못합니다. 신체적 결함 또는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시련 같은 불가항력적인 고난 역시 우리 삶을 멈추게 할 정도로 중요한 요인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목적이 없다면 삶은 확실하게 엉망이 됩니다." (p.245)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죽음과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지요? 혹시 영원처럼 먼 거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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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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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올랐지?' 의아해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사람들의 기호도, 관심도, 웃음이나 낭만 코드도 다 제각각이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최근에 골랐던 책 중에는 마저 다 읽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던 책이 있다. 요나스 요나손이 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그것이다. 황당한 이야기의 연속, 나의 웃음 코드와는 번번이 빗나가는 썰렁함, 낯선 지명과 이름들의 연속, 도대체 나는 뭘 의지하여 이 책을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얇기라도 했으면 그나마 다 읽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그랬던 게 엊그제인데 또 다시 나는 요나스 요나손의 책을 고르고 말았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가 그것이다. 저자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고른 내 잘못이 컸지만 책을 읽기도 전에 하품부터 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젠장!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고 나면 속이라도 후련하련만 집에 들어 오는 순간부터 내 대화 상대라고는 TV나 라디오, 컴퓨터가 유일하니 그들이 내 욕설에 맞장구를 쳐줄 리도 만무하고 등을 토닥이며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넬 리도 없지 않은가.

 

눈물을 머금고 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읽어야지', 이를 악물었다. 장장 541쪽의 험난한 여정. 이건 뭐 숫제 마운틴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거나 진배없었다. 소설은 소설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심정으로 읽어나갔다. 소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남동쪽 소웨토(흑인 거주지)에서 시작된다. 시너에 중독된 엄마를 돌보며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다섯 살 때부터 분뇨통을 날라야 했던 소녀 놈베코. 분뇨 수거인에서 갑작스레 관리자가 된 그녀는 자신을 성추행하려 했던 옆집 아저씨로부터 글을 배우고 매일같이 라디오를 들으며 똑똑하게 말하는 방법도 터득한다. 유난히 셈에 밝았던 그녀는 우연히 손에 넣은 다이아몬드를 들고 소웨토를 탈출한다. 단순히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목적으로.

 

놈베코는 보도를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지만 보상을 받기는커녕 가해자에게 보상하기 위해 7년 동안의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그녀가 간 곳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던 비밀 연구소 '펠린다바'. 교통사고 가해자였던 엔지니어는 그 연구소의 연구소장으로서 그는 오로지 아버지의 권력과 부유함 그리고 넘치는 행운으로 남아공 최고 핵 전문가가 된 인물이다. 놈베코는 연구소에 있던 모든 책을 독파하여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던 엔지니어를 도와 무난히 핵폭탄을 생산하게 되지만 생산된 핵폭탄은 여섯 개가 아닌 일곱 개였다.

 

연구소를 감시하고 있던 이스라엘 첩보원 모사드 A와 B를 따돌리고 스웨덴으로 망명한 놈베코. 그러나 그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잘못 배달된 핵폭탄 한 기를 떠안게 되고 망명자로서 인정도 받기 전에 핵폭탄과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된다. 여차저차 하여 놈베코는 둘 중 하나만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쌍둥이 형제 홀예르1, 홀예르 2. 그리고 CIA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불안증에 걸린 미국인,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짝퉁 사기'를 일삼는 중국 여자들과 철거 예정지의 주택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여전히 핵폭탄 처리 방법을 고민하면서 말이다.

 

놈베코는 그 와중에도 스웨덴어를 배우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홀예르 2를 사랑하는 놈베코와 존재하지만 생각할 줄 모르는 홀예르 1을 사랑하는 셀레스티네의 좌충우돌 생활기가 그려지고 놈베코는 결국 스웨덴 수상과 국왕을 만남으로써 핵폭탄을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스웨덴 방문 기념품과 함께 중국으로 보낸다. 뿐만 아니라 놈베코와 홀예르 2는 수상의 도움으로 신분증을 획득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복귀한다. 스웨덴 대사의 자격으로 말이다.

 

작가는 황당한 인물과 황단한 설정을 통하여 세계의 역사를 풍자하고 가장 낮은 신분인 놈베코로 하여금 지배층을 조롱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와 체제를 비판한다. 작가의 생각은 여과없이 소설에 반영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핵무기의 개발, 인권이나 환경문제 등 현대 사회의 부조리가 패키지로 등장하는 셈이다.

 

 "이로써 조지 W. 부시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된 반면, 알 고어는 심지어는 스톡홀름의 아나키스트들조차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환경 운동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부시는 사담 후세인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무기들을 모조리 파괴해 버리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다." (p.386)

 

작가는 분명 특이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나와는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았을 뿐. 얼마 전에 읽었던 천명관의 <고래>만큼이나 새로운 소설이지만 서양 작가의 풍자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작가의 천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인지 아무튼 나는 힘겹게 읽었다. 정말 힘들었다. 힘들다는 게 감상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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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4-12-03 23:48   좋아요 0 | URL
아직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사 놓고 읽지 못하고 있는데요....저도 끝까지 못 읽으면 어쩌죠...

꼼쥐 2014-12-04 18: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 악물고 한번 읽어보시죠. 그러다 이가 부러지면 책임질 수는 없지만.

별족 2014-12-04 09:05   좋아요 0 | URL
저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끔찍했어요-_-;;;

꼼쥐 2014-12-04 18:14   좋아요 0 | URL
저는 다 읽지도 못하고 중도 포기했어요.ㅜㅜ

완벽한위로 2014-12-04 10:03   좋아요 0 | URL
재미있다던 100세 노인을 정말 힘들게 읽었는데...
저만 그런 게 아니었네요. -ㅁ-;

꼼쥐 2014-12-04 18:15   좋아요 0 | URL
이 작가의 책은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것 같아요.
최악이거나 최상이거나.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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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해 겨울방학에 나는 '명심보감'을 외우기 시작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고, 뜻하는 바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당시 어머니는 하숙을 쳐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계셨고, 하숙생 중에는 몇 달 밀린 하숙비를 떼어 먹고 야반도주를 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그 사람들은 으레 필요도 없는 옷가지며 자질구레한 가재도구를 마치 꼭 다시 오겠다는 맹세의 일환인 양 손도 대지 않은 채 떠나가곤 하였다.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올 것을 굳게 믿었던 까닭인지 아니면 물건에서 어떤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는지 어머니는 언제나 그 물건이 놓였던 자리를 한동안 정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두셨다. 약간의 미련이 묻은 그 옷 보따리를 말이다.

 

그해에도 그렇게 떠난 사람이 있었고, 나는 그 옷 보따리 속에서 모서리가 너덜너덜 닳아빠진 책 한 권을 발견하였다. '명심보감'이었다. 기껏해야 '아들 자, 계집 녀'를 지나 '배울 학, 학교 교'의 수준에 이르렀던 나의 한자 실력으로는 눈에 익은 글자를 찾아내는 데만도 가뭄에 콩나듯 하였다. 버릴까? 하다가 왜 갑자기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불현듯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전에 없던 호승심이 치솟았던 것이다. '이번 겨울 방학에 이 책이나 외워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들 앞에서 어려운 말을 줄줄 읊어대는 내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가자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었다. 참으로 인연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시작된 '명심보감' 외우기는 그해 겨울의 엄혹한 추위처럼 맵고도 쓴 것이었다. 자치기를 하자는 친구의 유혹도, 외발 스케이트를 타는 스릴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나는 집 밖 출입을 삼가한 채 명심보감과 한자 사전을 끼고 살았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담했다. 명심보감 초략본 19편 247조 중 계선편 11조를 간신히 외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알량한 지식의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자왈, 위선자 천보지이복'으로 시작되는 명심보감의 문구를 이제 막 변성기가 시작되는 걸걸한 목소리로 읊을라치면 친구들은 마치 공자의 현신을 뵙는 듯 존경과 경외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곤 하였다. 개중에는 그게 무슨 뜻이냐며 한수 배움을 청하는 친구도 가끔 있었다. 나는 그럴 때면 '네깟 것들이 설명을 해준들 이해나 할 수 있겠냐'는 표정으로 뒷짐을 진채 한껏 점잔을 빼곤 하였다. 나와 공자의 첫 만남은 그렇게 특별했었다.

 

내가 공자를 다시 만난 것은 대학 신입생이었던 어느 봄날의 광화문 교보문고에서였다. 친구를 기다리면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던 나에게 후광이 비치는 듯 밝게 빛났던 '논어'. 나는 익숙한 스승을 다시 만난 듯 반가웠었다. 그때 나는 '그래, 대학생이라면 적어도 '논어'는 읽어줘야지.'하는 심정으로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미련없이 꺼냈던 것이다. 스승님을 다시 뵙는데 그깟 돈이 대수이겠는가. 그러나 '논어'의 한 구절 한 구절의 깊이는 '명심보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내내 잘 읽지도 않는 논어를 마치 부적처럼 가방에 고이 모시고 다녔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만 주야장천 읊어대면서. 그랬던 내가 최근에 공자를 다시 만난 것은 우간린의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통해서였다. 나에게는 이제 유식한 문구를 읊어댄다고 해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봐 줄 만한 친구도 없고, 그때의 치기는 더더욱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단순한 한자의 뜻풀이가 아닌 이야기와 에피소드의 방식으로 쓰였으므로 마음을 담아 조용히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공자의 가르침은 고지식하다거나 구태의연하다고 말한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가장 보편적인 지혜는 쉽게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심오한 진리를 쉽게 설명하기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이제 나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悅乎)'의 의미를 간신히 깨우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아는 공자는 자신의 지난했던 삶의 체험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무엇보다 가장 쉬운 말로 제자들을 가르쳤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 깊은 의미를 새록새록 깨닫게 되지만, 가슴 한편에서는 '아, 진즉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때늦은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초석이다. 단언컨대 공자의 가르침을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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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첫눈인가 봅니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저는 올해 들어 처음 보는 눈이니 제게는 첫눈인 것입니다.  부유하는 눈송이들은 지구의 중력과는 무관한 듯 그저 가볍습니다.

 

오늘 아침, 여느 날처럼 어둠에 싸인 산을 올랐을 때 저는 내심 눈 덮인 산길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바람만 거셀 뿐 눈은 내리지 않더군요.  어제 내린 비로 낙엽이 쌓인 등산로는 조금 질척거렸고 미끄러웠습니다.  밤새 불었던 바람은 마른 가지를 부러트려 등산로 여기저기에 흩어 놓았고, 어둠에 익숙지 않은 나의 발부리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길에 비인지 진눈깨비인지 잠시 흩뿌렸습니다.  오늘의 날씨에 지레 겁을 먹은 등산객들은 집에서 나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유난히 인적이 드물었던 오늘의 등산로에는 바람 소리만 가득했습니다.  어둠은 끝내 걷히지 않았고, 그 어둠 속에서 젖은 낙엽들만 밟혔습니다.

 

빗줄기로 시작된 오늘의 눈은 소나무 위에 슬몃 얹혀 12월의 첫날을 기억하게 합니다.  지금 밖에는 부유하듯 눈발이 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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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4-12-0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곳에도 첫눈이 많이 왔답니다.
그런데 지붕에는 첫눈치곤 많이 내려쌓였는데요.
길바닥에는 거의 쌓이지 않고 금방 다 녹더군요.
여태까지 따스한 늦가을 날씨가 물러가지 않았던 탓 같습니다.

조금 전, 밖에 나가 이웃집 승용차 지붕에 쌓인 눈을 뭉쳐
밤하늘 높이 던져올려봤네요.^^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던진 눈뭉치를 받다가
잘못 받는 바람에 부서진 눈뭉치가
몸속으로 들어가 가슴 밑에서 차갑게 녹았습니다.
첫눈과의 상견례를 꼼쥐 님 윗글을 읽다가 이렇게 치렀답니다.^^

꼼쥐 2014-12-02 09:41   좋아요 0 | URL
아~~그러셨군요.
저는 오늘 아침 산을 올랐을 때 쌓인 눈을 밟는 느낌이 좋았어요.
떨어진 기온에 비해 많이 춥지는 않았구요. 아마도 바람이 잦아들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뭇가지 위에도 소복소복 눈이 쌓여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