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고 이따금 비가 내렸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쓰고 몇 번인가 되짚어 생각해야 했습니다. 바람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비가 먼저였는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거듭하여 생각하느냐 비난할 분도 분명 있을 터이지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 문제에 골몰하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자본주의 논리로 따지자면 너무나도 하찮고 가치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무심히 지나치는 경우도 있고 정말 하찮은 일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기는 가깝거나 먼 미래의 일이 되겠지요. 현실에서는 내 앞에 닥친 일에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대처할 방법만 찾는 데 골몰하기 마련이니까요. 지나고 나면 훤히 보이는 일인데 현실에서는 왜 그다지도 어려운 것인지요.

 

나는 끝내 바람이 먼저였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습지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주말의 풍경은 지금처럼 바람이 불고 이따금 비가 내리는 날씨는 분명 아니었을 것입니다. 암갈색의 플라타너스 낙엽이 차도 위에 시체처럼 흩어져 그 스산함을 더하는...

 

가깝고도 먼 미래에 나는 또 어떤 식으로 오늘을 평가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씀씀이는 나날이 줄고 있는데 생활비는 왜 다달이 늘어나는가? 하는 문제에 시간을 더 할애해야 했었다고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구요. 아무튼 나는 오늘 바람이 먼저였는지 비가 먼저였는지 골똘히 생각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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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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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하루키에 대한 나의 팬심이 대략 30리터쯤 덜어졌었는데 그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고 다시 채워진 느낌이다. 어쩌면 그 이상이었는지도. 말하자면 이 책에서 작가는 예전의 그의 모습, 소설가로서 내가 상상하는 그의 면모를 다시 회복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단편집 <중국행 슬로보트>를 읽었을 때의 순한 감동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하루키 문학의 특징은 독자와의 일정한 '거리두기'에 있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간의 거리두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예컨대 작가는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거나 보았거나 때로는 상상해보았다"는 식으로 툭 던져놓고는 작가 자신은 왜 그것을 말하려 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썼는지,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도통 말하지 않는 것이다. 독자가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 작가는 독자의 관심이나 애정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투다. 그런 하루키식 '거리두기'는 수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소설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루키의 이런 방식은 그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 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한다.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것처럼.

 

세상과(또는 독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작가의 태도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타자와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게 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생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읽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인간의 노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한계, 그 절망적인 한계를 인식한다면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더 가까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관음증적 욕구는 어차피 사그라드는 게 아닐테니까. 작가는 그 한계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듯하다. 작가가 이 책의 제목으로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고 붙인 이유도 아마 그럴 것이라고 짐작된다. '여자'는 젠더(gender)적 구분이 아닌 남자가 가장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가까워질 수 있는 대상, 또는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다만 해소될 수 없는 욕구일 뿐이다.

 

이러한 거리두기의 방식은 인간의 절대적인 고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한편 인간의 선천적인 관음증적 욕구를 최대로 자극하곤 한다. 나는 모든 지적 욕구가 선천적인 관음증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하고 있다. 타인의 감춰진 비밀을 엿보려는 심리나 자연이나 기타 다른 사물의 비밀을 캐내려는 욕구는 그 대상만 다를 뿐 방식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본능인 동시에 지극히 은밀하고도 사적인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심을 갖고 무엇인가 알아내려고 하는 일련의 행위,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는 욕구는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에 관음증적 욕구는 더더욱 강해지는 게 아닐까.

 

이 책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표제작인 '여자 없는 남자들'을 포함하여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각각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여자가 없다. 아니, 여자는 있는데 관심을 갖고 상대방의 비밀을 속속들이 탐구하고 싶어하는 대상은 아닌 것이다. 소설을 이해하는 관점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성욕이나 사랑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감추어진 어떤 것을 은밀히 엿보거나 탐구하려는 욕구.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이 책의 첫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아내와 사별한 가후쿠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배우인 그는 아내가 암으로 죽기 전에 몇 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후쿠는 그 중 한 명인 다카스키를 만난다. 가후쿠는 아내가 죽기 전 왜 그 사람과 섹스를 했는지, 왜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 가후쿠는 다카스키를 통해 그것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의문으로 남는다.

 

두 번째 작품인 '예스터데이'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까운 친구로 지내왔던 기타루와 에리카가 등장한다. 연인 관계였던 둘은 에리카가 대학에 합격하고 기타루가 재수를 하게 되면서 소원해진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끝내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지 않았던 기타루에 대해 에리카는 이해하지 못한다. 에리카는 일일 데이트 상대였던 화자에게 자신이 꾸었던 꿈 얘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단둘이 작은 선실에 있고, 밤늦은 시간이라 둥근 창 밖으로 보름달이 보여. 그런데 그 달은 투명하고 깨끗한 얼음으로 만들어졌어.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고. '저건 달처럼 보이지만 실은 얼음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한 이십 센티미터쯤이야.' 아키가 내게 알려줘. '그래서 아침이 와서 해가 뜨면 녹아버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동안 잘 봐두는 게 좋아.' 그런 꿈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꿨어." (p.97)

 

세 번째 작품인 '독립기관'에는 성형외과 의사인 도카이가 등장한다. 그는 쉰두 살의 독신남이다. 그는 지금껏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가 원하는 것도 '매력적인 여자들과의 친밀하고 지적인 교류'일 뿐이다. 상대는 대개 유부녀거나 연인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여자들을 만나고 쿨하게 헤어질 수 있었던 그가 결국에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상대는 물론 애가 있는 유부녀다. 도카이는 그녀로부터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한 언젠가 닥쳐올 이별에 대해 염려한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젠 그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뭔가로 단단히 묶여버린 느낌이에요.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이런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감정입니다. 그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요. 이대로 점점 그리움이 깊어지면 나는 대체 어떻게 될까 하고." (p.145~p.146)

 

네 번째 작품인 '셰에라자드'에는 늘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하바라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에게는 그를 대신해 일정한 주기로 장도 봐주고 그와 섹스도 하는 여자가 한 명 있다. 그녀는 성행위가 끝나면 매번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미모의 왕비처럼.

 

"그는 원래부터 혼자인 것에 익숙했다. 그의 신경은 혼자가 된다고 그리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하바라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렇게 되면 더이상 셰에라자드와 침대에서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좀더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뒷부분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p.178~p.179)

 

다섯 번째 작품인 '기노'에는 스포츠용품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던 기노가 등장한다. 그가 출장을 갔다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자신의 직장 동료와 자신의 집에서 한 몸이 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후 그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을 나왔다. 이모의 가게를 임대하여 바를 개업했었는데 어느 날 이혼을 한 전처가 그의 가게로 찾아온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를 하지만 그는 다만 형식적인 용서를 할 뿐이다. 일시적으로 가게의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났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그때 상처를 받았음을 인식한다.

 

여섯 번째 작품인 '사랑하는 잠자'는 다들 짐작하겠지만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그레고르 잠자가 주인공이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 듯 느끼는 그레고르 잠자는 고장난 자물쇠를 수리하러 온 꼽추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을 뿐.

 

"그녀를 생각하고 그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속이 아련히 따스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아니란 사실이 점점 기쁘게 다가왔다. 두 다리로 걷고 옷을 입고 나이프나 포크로 식사하는 것은 분명 몹시 성가신 일이다. 이 세계에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만일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되었다면 이렇듯 신기한 마음속 온기를 느끼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p.311)

 

일곱 번째 작품은 표제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는 한밤중 한 시가 넘은 시각에 엠의 남편으로부터 그녀의 자살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아주 사소한 인연으로(단지 지우개를 빌려주었다는) 연인 관계로 발전했던 그녀는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만났었고 그렇게 헤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나'의 열네 살은 세상에서 함께 사라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p.327)

 

작가의 소임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탐구(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타인이든 자기 자신이든), 그리고 흐르는 시간과 그 속에서 존재했던 사람들의 관계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어렴풋이 짐작하는 일일 것이다. 문학이란 결국 나 스스로, 오픈된 장소가 아닌 사적인 영역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몰래 엿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타인과의 대화가 그렇고, 드라마 시청이 그렇고, SNS가 그렇고, 독서가 그렇다. 그러나 가장 은밀하고 스릴있는 방법은 역시 독서가 아닐까 싶다. 나는 왜 그때 그것에 끌렸을까? 작가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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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와 관계없이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따로 적는다.

 

"스무 살 전후의 나날, 나는 일기를 쓰려고 몇 번 노력해봤지만 영 잘되지 않았다. 당시 내 주위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쉴새없이 일어났고, 그걸 따라잡기에도 벅찼다. 도저히 날마다 멈춰 서서 그날 일어난 일들을 일일이 노투에 적어둘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건 꼭 적어둬야지' 하고 생각할 만한 사건도 아니었다. 나로서는 거센 맞바람 속에서 가까스로 눈을 뜨고, 호흡을 가다듬고,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게 고작이었다." (p.111~p.112)

 

"인생이란 묘한 거야. 한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거야. 내 눈이 대체 뭘 보고 있었나 싶어서 어이가 없어져." (p.211~p.212)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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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허리를 다쳐 고생하고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허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살았던 요 며칠 동안 나는 그동안 알지(엄밀히 말하자면 체감하지) 못했던 몇몇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니까.

 

일의 시작은 마트에 장을 보러 갔던 월요일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주로 월요일에 일주일 먹을 식량(그래 봐야 혼자서 몇 끼 먹는 것에 불과하지만)을 구입하기 위해 근처 마트에 들르곤 한다. 그날도 마트에 들러 생수며 과일이며 (비상식량 성격의)라면이며 (아침 식사 대용으로 쓰일)떡이며 몇몇 필요한 것들을 사서 짧은 시간 안에 장보기를 마쳤었다. 늘 하던 일이니 더 오래 머물 이유도 없었다. 물건을 골판지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 조수석에 실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물건을 꺼내려는데 옆에 주차된 차와의 간격이 너무 좁아 어쩔 수 없이 운전석쪽의 문을 통해 박스를 꺼내야 했다.

 

박스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조수석에서 운전석을 지나 문을 통과하기까지 불편한 자세로 용을 써야 했다.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 집(숙소는 아파트 2층이라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까지 운반하여 냉장고에 넣을 것은 넣고 무사히 정리를 마쳤다.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던 것 같다. 다음 날 늘 하던 대로 아침운동을 나갔는데 그때부터 뜨끔뜨끔 아프기 시작했다. 어찌나 아프던지 윗몸일으키기는 아예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산을 내려왔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설 때부터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어찌나 아프던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발을 질질 끌고 다녀야 했다. 허리에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허리를 곧게 펼 수조차 없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점심을 먹고 약국에 들렀다. 파스라도 붙여볼 요량으로. 화장실에서 파스를 덕지덕지 붙였다. 조금 나아지는가 했는데 마음뿐이지 상황은 점점 악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밤새 찜질팩을 허리에 두르고 씨름을 했다. 그 덕분인지 오늘은 그나마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통증은 계속되고 있지만 말이다. 파스를 있는 대로 다 붙였더니 냄새가 진동을 한다. 한동안 앉아 있다 일어설라치면 의자 팔걸이를 붙잡지 않고서는 곧바로 서기도 어렵다.

 

지금까지 살면서 허리가 아팠던 적은 한두 번 있었지만 이번처럼 심하게 앓았던 적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몸을 잘 관리해온 덕분이겠지만 그런 까닭에 오히려 몸을 아무렇게나 굴려온 게 아닌가 싶다. 건강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 불러온 참화 앞에서 나는 조금쯤 자책을 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성을 했다.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오직 다리 힘만으로 걸으려니 찌르르 감전된 듯 발끝까지 저려왔고 밤에는 손도 저렸다. 오죽하면 몸에 걸쳤던 코트의 무게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허리가 떠받치는 무게가 상당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직접 겪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허리가 아픈 사람들의 고통도, 건강의 고마움도. 오늘도 밤새 찜질을 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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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4-11-2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이 글을 읽고 아무생각 없이 좋아요를 눌렀는데 ..ㅜㅜ 죄송하구만요 ㅎㅎㅎ
전 허리 아파본 적은 없는데
허리 아픈 분들 말 들어보면 장난이 아니더군요. 잘 낫지도 않고.ㅠㅠ
당분간 조심 다니셔야 겠어요. 무거운 것도 들지 마시구요 ~^^

꼼쥐 2014-11-27 20:26   좋아요 0 | URL
정말 장난 아니더군요. 조금만 충격이 가도 `억` 소리가 절로 나오고. 무엇보다도 앉았다 일어날 때 꾸부정한 허리를 펼 수도 없고. 참 답답하더라구요. 그런데 오늘은 조금 나아졌어요.

오후네시 2014-11-2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허리아픈건 글로만 읽어도 너무 힘든거같아요 쾌차하세요!!ㅜㅜ

꼼쥐 2014-11-27 20:2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여러 이웃분들의 염려 덕분인지 조금 나아졌네요.

hnine 2014-11-26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원엔 안가보셔도 되겠어요?
거의 모든 신경과 골격이 척추에서 뻗어나가니 허리가 아프면 온몸이 아픈것이나 마찬가지일텐데요.
무거운것 들때 조심하라는 말을 저도 아직 실감을 못하고 있는데 꼼쥐님 말씀을 들으니 정말 조심해야겠네요. 어서 나으셔야할텐데요...

꼼쥐 2014-11-27 20:28   좋아요 0 | URL
그동안 건강에 자신있다 생각하고 조심하지 않았던 게 잘못인 것 같아요. 그것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냥저냥 걸을 만하더군요. 통증도 조금 덜해졌구요. 고맙습니다. ^^

세실 2014-11-2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 받으셔야 할듯요. 허리는 쉽게 낫지 않던데요...
저도 얼마전 생애 처음으로 스크린 골프 치고는 오른쪽 팔이아파 고전하고 있답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요.

꼼쥐 2014-11-27 20:30   좋아요 0 | URL
밤새 찜질도 하고 지인분한테 지압도 받고 정말 여러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들인데. 이제는 그만그만하니 조심하면 곧 나을 것 같아요.

qualia 2014-11-27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리 고장나면 정말 아무것도 못하죠.^^
꼼쥐 님, 허리 정말 심하게 아프신가봐요.
저도 노가다하다가, 목욕하다가, 쪼그려앉았다가, 갑자기 허리가 고장난 적이 많아요.
심하게 다쳤을 때는 단 1센티미터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허리를 어떻게, 어느 부위를 다치셨는지 모르겠지만
허리 고장에 대처하는 제 나름의 방법이 있어 말씀드려 봅니다.

먼저 방바닥에 일자로 쭉 엎드립니다.
엎드린 자세에서 두 팔로 방바닥을 짚고(┏○┓)
아랫몸은 방바닥에 밀착시킨 채 윗몸을 위로 찬찬히 젖혔다 폅니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씩 살살 윗몸을 젖히면서 통증을 조절합니다.
통증을 참으면서 젖혔다 폈다를 반복하면 나중에는
통증이 점점 사라지면서 점점 큰 각도로 젖힐 수 있죠.
그러니까 안쪽으로 구부러진 활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몸을 젖히는 운동을 (구부리는 각도/빠르기/강약 등등을 조절하면서) 반복하는 겁니다.

이렇게 윗몸 젖히기를 반복할 때는 허리께보다는
몸통 중간쯤의 척추를 젖힌다는 느낌으로 해야 효과가 좋아요.
그리고 윗몸을 젖힐 때 동시에 목도 쭉뽑아 뒤로 젖히면 효과가 더 좋죠.
이런 윗몸 젖히기(혹은 구부러진 척추 바로잡기)는 상당히 효과가 좋아요.
약 쓰고 병원 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자가치료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심하셔서 함 해보셔요.^^

꼼쥐 2014-11-27 20:33   좋아요 0 | URL
자세가 안 좋은 상태에서 무거운 것을 들다가 그리 되었어요. 상체를 차 안에 두고 하체는 차 밖에 둔 채로 운전석쪽에서 조수석 의자 위에 있던 박스를 잡아당기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자세가 구부정하고 힘도 제대로 줄 수 없었거든요. 좋은 방법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당장 시도해봐야 겠네요.
 
완전변태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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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가슴이 먹먹해지고 콧마루가 시큰해지는 순간이 있다. 살다보면 누구나. 강해 보이기만 했던 엄마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작고 초라하게 보였을 때, 뼈마디가 툭툭 불거지고 쪼글쪼글 주름이 잡힌 엄마의 손을 잡았을 때 한동안 말을 잃고 한쪽 귀마저 멍멍해지곤 한다. '이만큼 세월이 흘렀구나. 엄마도 이제 늙으셨구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볼 때가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야 그렇다 치지만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사람에게서도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글이 점차 생명력을 잃어간다고 느끼는 순간이 내게는 더할 수 없이 아픈 때이다. 그의 몸에 새겨진 주름이야 확인할 길 없지만 그의 작품에서 마음에 잡힌 주름을 절절히 느끼게 될라치면 슬몃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을 때도, 공지영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었을 때도, 그리고 오늘 이외수의 소설집 <완전변태>를 읽었을 때도 가슴을 훑는 쓸쓸함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지나친 오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모름지기 마음에 주름이 잡히는 순간 소설가로서 그의 생명은 이미 빛을 잃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마음의 주름이란 이런 것이다. 가장 큰 것은 상상력의 부재(또는 경직된 상상력)에서 오는 화석화 된 글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세운 마음의 제약이 수도 없이 늘어나게 되는가 보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식의 구분으로 인해 젊은 시절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거침없이 써내려갔던 작가도 나이가 들수록 도덕이나 제도, 삶의 철학이나 자신의 위치에 지나친 신경을 쓰곤 한다. 그렇게 쓰여진 글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작가도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구나 조바심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삶에서 깨우친 모든 것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려니 오죽이나 다급했을까.

 

그러나 소설은 잠언집이나 철학책이 아니다. 어떤 깨달음을 주겠다는 생각, 이를테면 주제에 대한 집착은 그 부작용이 너무 크다. 소설은 그저 현실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그것으로 소설은 제 임무를 다한 것일 터, 그것을 읽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 주제가 무엇이냐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작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길로 독자를 인도하겠다는 생각이면 그는 이제 소설보다는 철학을 해야 한다. 삶의 원리와 삶의 부조리를 밝히는 철학자 말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마음의 주름이 잡힌 작가의 글은 갈수록 비약이 심해진다는 법이다. 인간의 현실을 벗어난 비약,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가을의 공기처럼 메마르다. 인간의 희노애락을 느낄 수 없는 설정은 공감하기 어렵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절정이 <1Q84>나 <상실의 시대>를 썼을 때라면 작가 이외수의 절정은 <벽오금학도>나 <들개>, <칼>을 썼던 시기가 아니였나 싶다. 누구에게나 삶의 절정이 있게 마련이다. 또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절정을 누리기도 한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마음에 주름이 잡히지 않아야 한다. 소설가가 독자에게 가르침을 주겠다는 욕심, 그것은 단지 욕심일 뿐이다. 소설가는 상황을 만들고 보여주는 사람이지 상황을 분석할 겄까지는 없는 사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예비죄인 아니면 현역죄인 이거나 아니면 예비역 죄인이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공범에라도 해당한다. 단지 현역죄인은 감옥 안에 존재하고 예비죄인이나 예비역죄인은 감옥 밖에 존재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p.93)

 

이 책의 표제작인 <완전변태>는 205호실 감방에 수감된 작가와 애벌레를 상정하고 있다. 애벌레는 언젠가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갈 날을 꿈꾼다. 작가 자신도 그 애벌레처럼 완전변태를 꿈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화등선을 하듯. 그 외에도 시골이라면 몸서리를 치는 도시 출신 어느 여선생을 그린 <청맹과니의 삶>, 사랑하는 이로 인해 인생 최대의 유혹과 대면한 한 무명화가의 이야기를 담은 <유배자>, 보기만 하면 일만근심을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돌 ‘해우석’을 찾아 전국을 누비는 탐석광의 이야기를 그린 <해우석> 등 열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어쩌면 자신이 썼던 예전 작품을 보며 조금쯤 부끄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는 다르다. 적어도 젊은 시절의 작가는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삶도 있다고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기술이 아닌 삶의 방법을 가르칠 수 있기나 한 걸까 하고 말이다. 인생은 그 나이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도 있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하지만 진정한 종교 지도자들과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별로 어렵지 않다. 진정한 종교 지도자들은 대개 베풀라는 설교를 많이 하면서 몸소 그것을 실천해 보인다. 하지만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은 대개 바치라는 설교를 많이 하면서 교세를 확장하는 일에만 주력한다. 물론 욕심에 눈이 멀어버리면 어떤 부류인지 구분할 능력을 상실해 버리지만." (p.204)

 

과거에 좋아했던 작가의 쇠락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작가의 마음속 주름이 깊어지는 걸 작품에서 확인했을 때, 나는 세상의 어떤 다리미로라도 그 주름을 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주름이 잡히지 않은 그의 글을 단 한번이라도 다시 읽고 싶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박한 평을 할 수밖에 없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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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낙엽이 떨어진 보도 위로 모르는 발자국들이 끝없이 흘러간다. 짓눌린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낙엽은 이내 와삭 부서지거나 이따금 되살아난 낙엽이 찬바람에 몸을 뒤챈다. 그 헛헛한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노라면 몹시도 책이 고플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책이 고픈 게 아니라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 둔 내 유년의 추억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디어 책을 읽던 기억. 이불 속의 퀴퀴한 냄새가 내 발에서 나는 것인지 청국장 뜨는 냄샌지... 그렇게 길디긴 겨울이 느리게만 흘러갔었다.

 

나는 그때 '셜록 홈즈'나 '괴도 뤼팽' 등 그 또래의 아이들이 즐겨 보던 추리소설에 홀딱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초저녁잠이 많으셨던 할머니는 늦게까지 잠들지 않는 당신의 어린 손자를 향해 매일 밤 잔소리를 늘어 놓으셨다. 먹을 게 귀했던 시대에 할머니는 손주들 어디 나가서 배는 곯지나 않는지, 궁색한 저녁을 먹은 어린 손자가 잠들기 전에 혹여라도 허기가 지는 건 아닌지 언제나 애면글면하셨다. 그러니 늦게까지 책을 보는 손자가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을 터, 하룻저녁에도 몇 번씩 '그만 자라' 말씀하셨다.

 

나는 어릴 적 기억을 안고 소파에 엎디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질풍론도>를 읽었다. 어깨가 아플라치면 등을 대고 눕고, 그마저도 힘들면 다시 일어나 앉으면서 밤이 늦도록 책을 읽었다. 이맘때의 밤이면 늘 들리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나는 사실 장르소설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혈팬도 아닙니다. 추리소설이라면 오히려 내가 예전에 읽었던, 지금 읽으면 약간 촌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책들을 더 좋아합니다. 예컨대 '셜록 홈즈 시리즈'라거나 '괴도 뤼팽'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들 말입니다. <질풍론도>도 서재에서 뽀얗게 먼지만 쌓이는 게 안타까워 이제서야 읽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소파에서 몇 번인가 몸을 뒤채면서도 결국은 다 읽게 되더군요. 추리소설이 다 그렇듯 끝까지 읽기 전에는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든 법이지요.

 

사건의 발단은 다이호 대학 연구실에서 불법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탄저균 배양 샘플을 분실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K-55'로 명명된 그 생물 병기를 훔친 범인은 스키장 인근의 설산 외진 곳에 그것을 묻고 표식으로 너도밤나무에 테디 베어를 걸어둔 사진을 찍어 연구소장에게 메일로 보냅니다. 물론 거액의 돈을 요구하지요. 그러나 범인은 교통사고로 그만 죽고 맙니다. 범인이 'K-55'를 숨겼던 장소는 미궁에 빠지게 되었고, 연구소에서 불법적으로 진행된 일이었기에 연구소장은 선뜻 경찰에 알릴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만년 선임 연구원이었던 구리바야시는 스노보드 마니아인 중학생 아들을 대동하고 설산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추적 과정에서 구리바야시가 다리를 다치는 등 몇 번의 위기가 있었으나 결말은 싱겁게 끝납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반전이나 기발한 추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죠. 물론 독자의 허를 찌르는 전개가 두어 번 나타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선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소설을 단숨에 써내려갔을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눈에 띄는 휴지(休止)가 보이지 않았거든요. 이를테면 작가가 더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몇 달이고 끙끙대면 나중에 이어 붙인 뒷부분은 앞부분과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그런 게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몰입 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요. 물론 그동안 형성된 마니아층과 작가의 인지도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세밀한 묘사도 없이 대화와 스토리 라인만으로, 그것도 광대한 스케일을 무대로 하지도 않는, 게다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소재로 독자들을 이만큼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이 소설의 전체 스토리에 주목하기보다는 오히려 구리바야시와 그의 아들 슈토에게 눈길이 갔던 게 사실입니다.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구리바야시, 눈에 띄는 능력이나 탁월한 처세술도 없이 만년 선임 연구원의 직책에 머물러야 했던 주인공은 우리 주변의 흔하디 흔한 아버지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게다가 일에 치여 가족 여행조차 변변히 다녀온 적 없고, 아빠로서 아들과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누어 본 적 없는, 젊은 시절에 즐겼던 취미도 이제는 먼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그럼에도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불쌍한 아버지의 모습 말입니다. 구리바야시는 'K-55'를 찾기 위해 갔던 스키장에서 아들 슈토와의 벌어진 간극을 실감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 보편성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들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특징만 잡아 빠르게 전개시키는 그의 방식은 마치 세부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대상의 중요한 성질이나 특징을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는 크로키 화가를 닮아 있는 듯합니다.

 

어제 밤늦게까지 책을 읽은 탓인지 졸음이 몰려온다. 방금 전에도 밖에 나가 시원한 바람을 쏘였음에도. 이제 계절은 겨울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젊어서는 스키를 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겨울이 마냥 기다려지곤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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