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개념은 너무나 작고 편협한 것이어서 우리는 이따금 상대방의 해명이나 망설임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너무도 쉽게 판단을 내리고 이내 굵은 실선을 긋고 말지요. 이쪽은 내 편, 저쪽은 네편. 그 선의 폭은 어찌나 넓고 또 깊은 것인지요. 다시는 건널 수 없는 '레테의 강'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선을 긋고 편을 갈랐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이따금 하늘을 우러르며 '마음의 편지'를 쓰곤 합니다. 미안했다고. 내 그릇이 그것밖에 되지 못했다고.

 

육신의 상처는 저리도 쉽게 아물고, 세월에 따라 고통도 금세 잊혀지건만 한번 새긴 마음의 생채기는 어찌도 그리 오래 가는지요. 인생에서 후회로 남는 부분은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의 잘못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부조리한 삶의 일부분이라고 덮어 두기에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픈 그런 과거 말입니다.

 

인간의 용서는 항상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지요. 용서했노라고, 다 지난 일이라고, 당신 앞에서 호탕하게 웃어보이지만 실상은 제 마음에 담았던 푸른 멍울이 뒤돌아 서면 금세 보름달처럼 환하게 떠오르더군요. 당신도 그러했겠지요. 정녕 잊었노라, 용서했노라 했던 우리의 말은 아침 닭이 울기 전에 이미 상처만 더 키운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다만 허공에 뿌린 빈말로 남겨둔 채.

 

아, '친절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개념은, '용서'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쩌면 이렇게도 작고 편협한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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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의 <혼불>을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객지로만 떠돌던 나그네가 아주 잠시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며 한 번쯤의 귀향을 결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요즈음 주로 최근에 쓰인 책들만 읽어 왔었고, 그렇게 한동안 유행하는 작가의 책들에 익숙해지면 어느 날 문득 나그네의 향수처럼 그리워지는 책이 떠오르곤 하는 법이죠. 다들 그렇지 않나요? 예컨대 <혼불>이나 <토지>, <아리랑>, <임꺽정> 등과 같은 책장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채 오래도록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런 책들 말입니다.

 

제 예감이 그닥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 책들이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저는 한때 이런 책들을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읽어댔었죠. 제 주변에서도 나와 같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구요. 찬 바람이 부는 늦가을의 어느 날이나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는 한겨울의 늦은 밤에 썩 잘 어울리는 책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러나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은 요즘 사람들이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혼불>을 다시 펼쳤을 때 제 솔직한 느낌은 답답함이었어요. 누군가 한쪽 발로 제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체중이 아주 많이 나가는 그런 사람이. 자신이 지나온 길임에도 과거의 한 시점을 돌이켜 보면 '조금 촌스럽다'거나 '왜 그렇게 살았을까' 답답해지게 마련이지요. 아주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혼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에 대한 제 생각도 그런 게 아닐까 싶네요. 제가 직접 살아보지도 못한 조금 더 먼 과거의 일이니 오죽할까요.

 

어제 내리던 비는 이제 완전히 그쳤군요. 사람들의 발걸음도 100그램쯤 가벼워진 듯 보이구요. 하늘은 여전히 잔뜩 치푸린 듯 보이고, 희끄무레한 풍경 속으로 차들이 질주합니다. 저는 다시 <혼불>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싶군요. 효원과 강모, 강실이가 살았던 조금 먼 과거로 말입니다. 휴일은 그 과거 속에서 살아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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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운하가 바라다보이는 암스테르담의 멋진 식당에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앉아 있어요. 음, 연인이거나 방금 전 첫눈에 반한 사람이거나. 아무튼 당신 앞의 그 사람으로부터 '나는 아직 당신의 아름다움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어쩌면 당신은 당신의 기분을 숨긴 채 도도한 척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커플이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아닌 말기 암을 앓고 있는 한 소녀와 골육종으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소년의 대화라면, 운하 위로 미끄러지듯 석양이 흐르고 있다면...

 

존 그린의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드라마나 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적 스토리를 다룬, 말하자면 특별하지 않은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죽음을 앞둔 십대의 시각에서, 고통 속에서 남들보다 먼저 수동적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그들이 발견해야 하는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소설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분되는 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노력'이라고 썼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소아암을 앓는 대부분의 십대들이 죽음이나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세상과 결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그런 무의미한 죽음을 맞는 꼴은 원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깨달았거나 희미하게 눈치채고 있는 삶의 비의를 그들을 통하여 내보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난 지상에서 잊히는 게 두려워. 하지만 내 말은, 우리 부모님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난 사람이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고, 영혼 간의 대화를 믿어. 망각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거야. 내가 목숨을 잃는 대가로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게 두려운 거지. 위대한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최소한 위대한 선을 위해서 죽어야 하지 않겠어? 난 내 삶도 죽음도 그렇게 의미있지 않을까 봐 두려워." (p.178)

 

소설에 등장하는 헤이즐은 열세 살에 4기 갑상선 암 판정을 받았고 암세포가 폐로 전이된 상태입니다.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 헤이즐이 걱정이 되었던 헤이즐의 엄마는 그녀에게 서포트 그룹 집회에 참석할 것을 권합니다. 그 모임은 암을 앓고 있는 십대들의 모임이었죠. 그곳에서 헤이즐은 맘에 드는 남자 아이를 만납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어거스터스 워터스. 그는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고, 헥틱 글로우 밴드의 노래를 즐겨 듣는 열일곱 살의 소년으로서 여느 십대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요. 농구 선수였던 그는 골육종을 앓는 바람에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이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여주인공 나탈리 포트만을 닮았다며 자신의 집에서 영화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헤이즐에게 비디오 게임을 소설화한 <새벽의 대가>를 빌려주고 자신도 헤이즐이 좋아하는 <장엄한 고뇌>를 빌려 읽게 됩니다.

 

"제 이름은 헤이즐이에요. 어거스터스 워터스는 제 인생의 운명적이고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저희의 사랑은 웅장한 러브 스토리였고 아마 그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한다면 여기가 온통 눈물바다가 될 거예요. 거스도 알고 있어요. 알고 있죠. 전 저희들의 사랑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짜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이건 저희와 함께 사라질 거고, 그래야 마땅하니까요. 전 그가 절 위해 추모사를 읽어 주길 바랐어요. 왜냐하면 달리 그래 주길 바라는 사람이 없으니까......" (p.272)

 

위에 인용한 문장은 헤이즐이 어거스터스의 장례식에서 읊었던 추모사입니다. 그들의 운명적이고 위대한 사랑은 아마도 은둔 작가 피터 반 호텐이 쓴 <장엄한 고뇌>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미완성으로 끝난 <장엄한 고뇌>를 헤이즐이 특히 좋아했던 이유는 작가 피터 반 호텐이 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죠. 헤이즐은 <장엄한 고뇌>의 뒷부분이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위해 거스(어거스터스의 애칭)는 작가가 살고 있는 암스테르담으로의 여행을 성사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 피터 반 호텐은 술에 의지하여 사는 배뷸뚝이 아저씨에 불과했고, 그로부터 소설의 뒷이야기는 결코 들을 수 없었지요.

 

"물론 나도 피터 반 호텐이 제정신이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세상은 소원을 들어 주는 공장이 아니다. 중요한 건 문이 열렸다는 거고 내가『장엄한 고뇌 』 뒷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문지방을 넘어섰다는 거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p.193)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 전 사실 거스는 골육종이 재발한 상태였습니다. 같이 동행했던 헤이즐의 엄마와 집에 남아 있던 헤이즐의 아빠는 이미 거스의 부모님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 사실을 헤이즐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스는 자신의 병을 숨긴 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헤이즐과의 특별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사람들은 암환자들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도 그런 용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몇 년이나 바늘로 찔리고 칼로 찢기고 약물을 투여당하면서 어떻게든 버텨왔으니까.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그런 순간마다 나는 매우, 대단히 기쁘게 죽어 버리고 싶었다." (p.114)

 

소설의 결말은 누구나 에측할 수 있는 시시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스는 죽고 <장엄한 고뇌>의 뒷부분을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헤이즐을 위해 거스는 자신이 상상한 글을 작가 피터 반 호텐에게 보냅니다. 헤이즐의 추도문으로 말이죠. 죽어가면서도 거스는 홀로 남겨지게 될 헤이즐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소 우울하고 칙칙할 듯한 소아암 환자들의 사랑 이야기를 제가 조금 특별하게 읽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작가는 이 소설 내내 십대들의 언어와 행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죽음에서 풍기는 우울한 분위기를 걷어내려고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군데군데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긴 하지만 말입니다. 가령 헤이즐의 아빠가 헤이즐에게 들려 준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런 예이겠지요.

 

"대학 시절 수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단다. 작고 나이 든 여교수님이 가르치시는 굉장히 훌륭한 수학 수업이었지. 선생님께서는 푸리에 변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다가 말하던 중에 갑자기 멈추시고는 그러셨지. '가끔 우주는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곤 하는 것 같아.' 그게 내가 믿는 거란다. 난 우주가 자신을 알아채 주길 바란다고 믿는다. 우주가 의식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지 않고, 지성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을 해 준다고 생각한단다. 우주는 그 우아함을 사람들이 관찰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지. 그리고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내가 도대체 뭐라고 우주가, 최소한 내가 본 우주가 일시적인 거라고 말하겠니?" (p.236)

 

남들은 평생을 두고(대략 칠,팔십 년은 되겠지만) 천천히 배워가는 삶의 의미를 소아암 환자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압축해서 깨달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마음이겠지요. 어쩌면 초등학생에게 미적분을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두 종류의 어른들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피터 반 호텐처럼 뭔가 상처를 줄 만한 존재를 찾아 세상을 헤집고 다니는 비참한 생명체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처럼 좀비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며 계속 걷기 위한 모든 일을 의무적으로 하는 어른들도 있다. 둘 중 어떤 미래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미 세상의 모든 순수하고 좋은 것들을 다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설령 죽음이 앞을 가로막지 않는다 해도 어거스터스와 내가 나눈 것 같은 종류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p.289)

 

가을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군요. 괜스레 쓸쓸해집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의 삶에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아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삶마저 파괴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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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주세요!

조금 늦었다.  사실은 어제까지 이 페이퍼를 작성해야 했는데.  무리한 일정도 아닌데 나는 늘 이렇게 마냥 손을 놓고 있다가 기한이 임박하거나 하루쯤 지났을 때 바쁜 척 서두르곤 한다.  석양이 유난히 예뻤던 오늘, 가을도 이제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14기 신간평가단의 마지막 페이퍼를 써야 한다는 생각에 귀가를 서둘렀었다.  한 달에 두 권의 신간 에세이를 읽고 리뷰를 쓰는 일.  생각해보면 그닥 어려운 일도 아닌데 나는 늘 분주했고, 리뷰의 문장 하나하나를 고쳐 쓸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아쉽다.  어떤 일이든 지나고 나면 아쉬움만 손에 잡힌다.

 

- 14기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정유정 작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가의 진짜 모습은 소설에서는 절대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가의 산문집을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적절한 유머를 섞어가며 작가 자신의 민낯을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한 선에서 보여주었던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은 여행 에세이로는 드물게 감동과 웃음을 함께 주었던 기억에 남는 책이다.

 

 

 

 

 

 

 

 

- 14기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마지막까지 부실하다는 평을 들을 수는 없어 뭔가 멋진 말을 덧붙이고 싶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장미희처럼 '아름다운 밤이에요.'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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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별세 소식에 애도의 글을 쓴다는 건 좀 낯부끄러운 일이다.

나도 안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써야겠다 맘 먹은 이유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별다른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거나 그의 콘서트에서 특별한 일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이른 나이에 맞는 갑작스러운 죽음은 누구에게나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한다. 뭐, 멋있게 보이고 싶다거나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짓은 아니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마시길.(오해는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내가 가수 신해철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그가 모 방송국의 라디오 디제이를 맡았던 시기였다. 대중가요 가수라면 으레 '딴따라'로 비하되는 유교주의 잔재가 새끼손가락의 손톱만큼 남아 있던 시기에 그는 단연 세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사실 그의 노래보다는 빼어난 언변에 먼저 매료되어 그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세련된 언어와 물 흐르듯 거침이 없었던 그의 말은 마치 말이 먼저이고 머릿속에서의 생각이 천천히 뒤따르는 것처럼 보일 만큼 달변이었다. 그의 거침없는 발언과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고 호불호로 분명히 갈렸던 게 사실이지만, 나는 그의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가 맘에 들었다.

 

사실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소신을 밝히지 못하거나 자신의 소신과 베치되는 말로 어물쩡 넘어가는 것보다는 돌을 맞더라도 할 말은 하는 게 더 멋있어 보인다.( 한 100배쯤) 그의 생전 노무현 대통령 추모 공연에서도 자신은 가해자라며 그 때문에 영전에 담배 한 대 바치지도 못했고 조문도 못 했으며, 할 줄 아는 게 노래밖에 없어서 노래라도 드리러 왔다고 했다. 여전히 '딴따라' 같은 연예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는 특별했고, '마왕'이나 '교주'로 불릴 만큼 당당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그를 좋아하는 많은 팬들을 슬픔에 젖게 했다.(물론 그 와중에 악플을 다는,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일베스러운 짓거리를 하는 자들도 있다.)

 

그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고, 앞으로 그의 말과 노래들은 한 줄의 점선을 긋듯 띄엄띄엄 이어지다가 언젠가 점과 점 사이의 간격이 무한히 길어질 때가 되면 처음부터 여백이었던 듯, 빈 허공이었던 듯 잊혀질 것입니다. 박제가 된 그의 말들이 유리창 밖에서 소리도 없이 흔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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