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오후에 공원을 산책하는 것은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겠습니다.

그 길에서 나는 음악을 들으며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중년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스마트폰에 내장된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많아도 1초 이내의) 짧게 머물다 지나쳐 갔습니다.

그 중년의 여성은 그들의 시선에는 어떤 관심도 두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미세먼지 예보가 있었고

그녀가 틀어놓은 음악이 공원의 적당한 침묵을 잠식하는 동안

미세먼지의 서걱거림이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그룹 아바(ABBA)의 노래였습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노래의 제목은 'I have a dream'이었던 듯합니다.

참으로 오래된 노래입니다.

 

스치듯 들었던 그 노래로부터 나는 '국기 하강식'을 떠올렸습니다.

'왜?' 라고 묻는다면 뭐라 답변할 말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추억은 국기 하강식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식의 가는 줄에 매달려 한동안 펄럭이다가

무의식의 품으로 갈무리되는 그런...

 

노래가 끝나기 전에 국기는 천천히 내려오고

먼지가 날리는 아스라한 운동장에 석양이 내려 앉는

그런 시각에 국기 하강식은 진행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가던 길을 멈추고 애국가가 울리는 쪽을 향하여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죠.

 

오늘 내가 들었던 아바의 노래가 끝나기 전에,

한동안 펄럭이던 내 추억의 깃발이 다 내려오기 전에,

어디선가 가던 길을 멈추고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얹은 채

내 추억의 깃발에 경의를 표해줄 그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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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고향친구가 나의 숙소를 찾아왔었다.

객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는 연락도 없이, 그것도 늦은 시각에 세상 다 산 표정을 하고는 나를 찾았던 것이다.  밤 11시쯤 되었을까.  초인종 소리에 놀라 문을 열었더니 친구는 오래 절인 배추처럼 추레한 모습으로 어두운 복도에 그렇게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치킨 한 마리와 맥주 두 병을 들고.

 

 밖에는 바람이 부는지 아파트 뒤편의 소나무가 술에 취한 거인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뿌연 달빛.  친구는 부부싸움을 하고 무작정 나왔는데 그 시각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고 했다.  술을 못 마시는 나에게도 거품이 넘치도록 가득 부어주고는 목이 말랐는지 안주도 없이 거푸 몇 잔을 들이켰다.  트림인지 한숨인지 깊은 숨을 토해내는 친구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부럽다고 했다.

가족과 떨어져 홀애비 아닌 홀애비 생활을 하는 내가 부럽다니...  맞벌이를 하면서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친구.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그와 나는 이따금 전화를 할 뿐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바빴던 것인지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임에도 정 떼는 연습부터 미리 하며 살았나 보다.

 

만사태평한 친구와 무엇에든 욕심이 많고 성마른 성격인 그의 아내는 극과 극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잘도 살아왔다.  그렇게 다른 성격이어서 그렇게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체중 때문인지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친구는 운동 좀 하라는 아내의 말에 괜한 성질을 부렸었나 보다.  그렇게 1시간쯤 다투고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옷도 변변히 챙겨 입지 않은 채 집을 나왔다고 했다.  막상 나오고 보니 딱히 갈 데가 없다는 걸 알았고.

 

친구는 자고 가겠다고 했다.  연락도 없이 그래도 되느냐 물었더니 괜찮다며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렇게 친구는 잠이 들었고, 나는 침대에 누워 몇 번을 뒤척였다.  어찌어찌 잠이 들었고, 운동을 나가기 위해 잠이 깨었을 때 친구는 더 자라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겠다며 옷을 입었다.  현관을 나서는 친구의 뒷모습이 어두웠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매달려 공연 시간을 기다리는 줄 달린 인형처럼 처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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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9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TV를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아무 목적도 없이 목을 길게 늘인 채 TV 화면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프로건 상관없이 켜진 대로 무작정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뉴스는 잘 보지 않습니다.  세상의 끔찍한 사건이란 사건은 죄다 모아 놓고 말하면서도 무심한 듯 아무런 표정도 없는 아나운서를 볼 때마다 세상 공포영화 중에 그렇게 무서운 공포영화도 없겠다 싶어서입니다.

 

그렇다고 예능 프로를 즐겨 보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웃긴지, 어느 시점에서 웃어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게다가 코맹맹이 소리로 세살배기 애기 흉내를 내는 어느 코미디언의 나이를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저는 놀람보다는 공포를 느끼곤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이 스물이 넘어도 성인으로서의 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늙어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철이 드는 것인지...

 

이렇게 쓰고 보니 제가 마치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네가 된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취향이 다를 뿐이죠.  저는 자연 다큐멘터리나 인문학 강의 등을 즐겨 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그 생생한 화면이나 놀라운 촬영 기술에 감탄하곤 합니다.   '세상 좋아졌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지고 기술의 발달에 새삼 감사하게 되지요.

 

그럼에도 어쩌다 예능 프로를 우연히 보게 되는데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구나 느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까무룩 잠드는 낮잠처럼 들었던 생각입니다.  젊은이들이 장악한 모든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의 엣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자주 비교하여 보여주는 것에서 저는 '아, 이제 물질문명의 정점에 도달했구나'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 앞뒤의 연계성에서 그닥 필요한 장면도 아니었는데 출연자의 옛모습을 보여주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왜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과거는 무조건 나쁜 것, 과거는 무조건 촌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기업 광고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과거를 부정하고 폄훼함으로써 현재의 수요를 창출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힘겨워 보였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자주 보게 되었다는 것, 뉴스와 비슷한 아침 프로그램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광고로도 수요를 늘릴 수 없는 기업의 다급함이요, 정부의 아우성처럼 들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물질이 넘쳐나는 시공간에 도달한 것입니다.  경제지표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ISM 제조업지수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지요.  미국은 그동안 수요를 늘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시장에 쏟아부었던 것일까요.  그럼에도 수요는 예전처럼 늘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했던 그런 생각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암울한 경제 전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문명의 종말과 함께 사람 냄새 나는, 사람다운 세상이 오려나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내가 쓰지 않는 물건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푸근한 미소를 덤으로 줄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제 꿈이 너무 야무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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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이 시골이어서 그런지 나는 집을 고를 때도 인근에 산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그런 곳에서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쉽게 정을 붙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도 야트막한 산이 있다.  평일 아침에 그 산을 매일 오르다보니 몇 년 되지 않아 나는 그 산의 속살을 훤히 꿰뚫게 되었다.  하여, 요즘처럼 밤이 긴 계절에도 달빛도 한 줄기 없는 캄캄한 길을 손전등도 없이 잘 걷는다.  아마 눈을 감고 걸어도 눈 뜬 초행자 정도는 따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요즘 오르는 산과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산천과는 산에 사는 식물들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그 이름을 모른다는 게 어찌나 얼띠고 한심하던지.  가끔은 산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이따금 식물도감도 찾아 보면서 이제는 어지간한 것들의 이름은 외우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제가 나고 자란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자리를 잡아  정착하는 데는 시간도 걸리고, 품도 드는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산에는 소나무, 아카시아, 은사시나무, 졸참나무, 밤나무, 쥐똥나무, 산벚나무, 찔레나무 등 수종이 비교적 다양한 편이지만 요즘 내 눈에 들어오는 나무는 밤나무와 졸참나무다.  미끈하게 쭉 뻗어 몸피도 야리야리한 은사시나무와는 달리 가지도 많고 몸통에 잔주름도 많은 그 나무들이 내 눈을 잡아 끌었던 것은 단지 겨울이 다 지나도록 칙칙한 작년의 갈잎을 다 떨구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였다.  이제는 말라 오그라든 채 가지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  때로는 약한 바람에도 어떤 무게감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 그 잎들이 그렇게 겨울을 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와삭 부서질 것 같은 마른 갈잎이 매서운 겨울 눈보라를 이기고 봄철 새순이 돋을 무렵이 되어서야 묵은 옷을 벗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줄기를 보호하는 보온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닐 테요, 그렇다고 잡아먹힐까 두려워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식물학자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나는 요즘 그 나무들이 배려심이 많은 까닭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새순이 막 돋아날 무렵, 꽃샘추위로부터 여린 새싹을 지켜주기 위해 겨울 한철을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강한 봄바람을 타고 어딘가에 있을 어린 새싹을 찾아 멀리 날아가는 갈잎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무한의 사랑과 배려심에 생각이 이르자 나는 밤나무와 졸참나무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게다가 가지에 붙어 엄혹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잎의 수분을 모두 날려보내고 최대한 가벼워져야 한다는 사실도 갈잎을 통해 배웠다.

 

요즘 나는 아침에 산을 오를 때마다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등산로 주변의 밤나무와 졸참나무에 가만히 손을 얹고 그 사랑과 배려를 생각하곤 한다.  식물도 그럴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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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더할수록 명절을 보내는 것이 더욱 힘겹습니다.

마치 내게 남겨진 에너지를 각혈을 하듯 어딘가에 모두 게워내고 돌아온 느낌입니다.  오가는 도로에, 사람들과의 대화에,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새겨진 고단함에, 그리고...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감동이 없는 만남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동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시간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도 견딜 수 없게 합니다.

 

삶이란 3차원의 실재(實在)에 심각(心覺)을 더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에 마음을 더하는 일, 삶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싶습니다.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현실은 삶에서 죽은 시간이자, 지워진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흔하디 흔했던 감동이 썰물처럼 스러지고 있음을 시시각각 느낍니다.  어쩌면 나는 지워진 시간 속에서 그림자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살아 보면, 인생은 외롭게 혼자인 게 제 모습인 듯합니다.

제 그림자건 제 내면이건 제가 저를 길동무 삼아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요.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혼자 걷는 데 익숙해지고 태연해지는 것이기도 하고요."

 

저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 봅니다.

내가 바로잡을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하시로 휘둘립니다.  내 말과 행동에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또 그렇게 상처를 받고 많이 외로웠겠지요?  제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는다는 건 참으로 서글픈 노릇입니다.  아내의 처진 어깨가 내 눈에 아프게 박힙니다.  이런저런 풍경들 앞에 그저 담담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가족들과 헤어져 빈 숙소로 돌아온 오늘,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진한 고요를 우려내고 있습니다.

비 그친 하늘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먼 산이 우련하여 마음마저 흩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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