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랗습니다. 몸 안에 스미는 공기도 더없이 맑고 깨끗한데 다만 코끝을 스치는 쨍한 추위가 어깨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가뜩이나 명절 연휴 이후의 하루는 더욱 고되고 힘든 시간인데 동장군의 기세가 희미하게 남은 의욕마저 꺾어버립니다. 다 올랐다 싶은 산의 정상에서 가파른 계단을 만난 셈입니다. 삶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의외의 현실로 인해 무너지곤 하는 법이지만 긴 시간으로 보면 이것은 다만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릅니다.


아들은 명절 연휴의 마지막날이었던 엊그제 새벽 친구들과 일본 여행을 떠났습니다. 대입 재수를 한 3명의 친구들을 위로하는 차원인지, 아니면 그들보다 1년 먼저 대학 생활을 경험한 선배로서의 입장인지 나로서는 알 수는 없지만 3박 4일 일정의 여행 계획을 세워 나에게 알렸을 때, 아비로서 혹은 삶을 먼저 살아 본 선배로서 거절할 명목은 딱히 없었던 듯합니다. 물론 아껴 쓴다고는 하지만 만만치 않은 여행 경비가 부담이 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아들은 일본 여행 다음으로 제주도 여행이 잡혀 있습니다. '2023 제2회 전국 장애·非장애 대학생 창업경진대회' 참가 목적으로 2월 7일부터 2월 10일 일정의 제주도 여행이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대학 여학생의 코딩 과제를 도와준 인연으로 함께 대회에 참가하자는 제안을 받고 얼떨결에 참가하게 된 행사인데 오프라인에서 미처 얼굴도 보지 못한 팀원들과 잘 지내게 될지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 게다가 팀원들 대부분이 여학생들인 듯한데 숫기 없는 아들이 어떻게 버텨낼지...


이번달에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생각자도 못한 도시가스요금 청구서를 받았던 일입니다. 집에서는 겨우 잠만 자고 나오는 나에게 있어 도시가스는 난방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비해 2배 이상 오른 고지서를 받고 보니 그저 웃음만 나왔습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던 듯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습니다. 1년에 월급이 2배씩 오르는 것도 아닌데 생활 물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니 대통령 하야 투쟁이라도 해야 할 듯합니다. 지하철 요금, 도시가스 요금, 전기 요금 등 공공요금 인상은 우리와 같은 서민의 생활을 위협하는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하늘은 맑고 동장군의 기세는 매섭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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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학생들을 동원하는 웅변대회가 많기도 했다. 웅변대회의 주제는 대개 정부를 찬양하거나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내용이 주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웅변 원고를 쓰는 일도 만만치 않아서 온전히 학생에게 맡기기에도 미덥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교내 웅변대회야 자체적으로 하는 행사이니 참가하는 학생들이 스스로 원고를 쓰고 자발적으로 웅변 연습을 하게 마련이지만, 군 대항 혹은 도 대항 나아가서 전국 대항일 경우에는 학교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니 선생님들도 뒷짐을 진 채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학생이 쓴 원고에 첨삭을 가하고, 방과 후에 남아서 웅변 연습을 지도하고, 다른 학교의 출전자 정보를 빼내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었다. 학교 대표로 선발되는 학생은 주로 학업 성적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 선생님의 말귀도 잘 알아듣고, 주제에 맞게 원고도 잘 쓴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했을 테다.


소심하여 남 앞에 서는 걸 무척이나 꺼리고 두려워했던 나도 웅변대회라면 지겹도록 많이 참가했었다. 대개는 담임 선생님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덕분에 발표력이 조금씩 좋아졌던 걸 감안하면 소득이 아주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최근 아랍에미리트를 국빈 방문한 대통령의 연설이 야당과 일부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각)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된 아크부대 장병들에게 "아랍에미리트는 바로 우리의 형제 국가"라면서 "합동훈련을 하고, 작전을 하고, 교육을 하는 이 현장은 바로 여기가 대한민국이고 우리 조국"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무난했다. 이어서 말하길 "형제국의 안보는 바로 우리의 안보"라며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라는 맥락에도 맞지 않는 다소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야당과 일부 언론은 '외교 참사'라는 평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란과 아랍에미리트는 한때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관계를 완전히 복원하였고, 이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 면에서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란'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은 국제 정세를 모르는 무식의 발로는 맞지만 그게 만약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스라엘'이라고 했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아부다비 지속가능성 주간' 개막식 기조연설에서도 '원전 생태계를 빠르게 복원하고'와 같은 행사 주제와 맞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말을 연설 전문에 끼워 넣음으로써 우리나라 대통령의 무식을 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식함이란 한 개인의 쪽팔림으로 끝날 수 있다. 물론 그가 대통령이라면 그 무게가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연설만 했다 하면 실수를 반복한다. 그건 아마도 자신이 모르는 내용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써준 원고로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수를 줄이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공부를 하기 싫으면 아는 내용만 말해야 한다. 예컨대 모든 연설에서 폭탄주 제조법이라든가 대한민국의 술문화 등에 대하여 말한다면 실수는 거의 없거나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물론 연설의 주제에 맞지 않아 코미디 같은 느낌이 약간 들긴 하지만 그래도 뭐 어떠랴. 실수를 무한반복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웃음을 주는 게 더 좋지 않은가. 국익에도 그리고 듣는 이의 정신건강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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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1-17 16: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뉴스를 보셨군요^^
제 생각이랑 어쩜 이리도 일치하시는지..
매번 실수 실수 실수..
대통령이 무식하고 무능한거 죄악이지 않습니까?
남편은 아니라고... 용서가 가능하다는데 전 그말에 반대합니다
참 너그럽기도 하죠!
제발 공부 좀 합시다!

꼼쥐 2023-01-17 18:27   좋아요 1 | URL
대통령을 대신하여 변명하자면 대통령을 처음 해보는 것이라서 그런 듯합니다. ㅎ
사법시험에 9수를 한 것처럼 대통령 선거에서 9번쯤 떨어져 봤거나 대통령을 두 번쯤 연임했더라면 좀 잘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늘 술만 마셨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잘 모르겠네요. 대통령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ㅎ

singri 2023-01-17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죽하면 아무것도 하지말고 관저에서 술만 먹어라 하고싶은심정입니다

꼼쥐 2023-01-17 18:28   좋아요 1 | URL
그게 국익을 위해서는 백 번 옳은 선택인 듯합니다.
해외순방만 나갔다 하면 사고를 치니...

북프리쿠키 2023-01-17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란이 아니고
˝이런˝으로 우기지 않을까요 ㅎㅎ

꼼쥐 2023-01-17 18:29   좋아요 1 | URL
그러면 이란이라고 최초 보도한 방송국을 먼저 찾아야 할 듯하네요. 그게 만약 TV조선이라면 어쩌죠? 정정보도를 요구할 수도 없고...

DYDADDY 2023-01-17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설만 코메디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의 정치는 코메디를 넘어 흉측해진지 오래라서 차라리 연설만 코메디면 좋겠습니다.

꼼쥐 2023-01-17 18:31   좋아요 3 | URL
다른 나라 국가가 나올 때도 가슴에 경례를 하고 있고 흠을 잡으려 들면 모든 게 코미디인 듯합니다. 이건 뭐 국격을 떨어트려도 너무 떨어트리고 있으니 대통령이 아니라 북한의 X맨이 아닐까 의심스럽습니다.

잉크냄새 2023-01-1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지지리도 모자란 놈이란 생각만 드네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는 인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더니 그 머저리로 인하여 대통령의 자리가 참 우스워졌어요.

꼼쥐 2023-01-20 15:03   좋아요 0 | URL
대통령 본인도 대통령이란 자리를 우습게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겟죠. 해외 동포들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하더군요.

기억의집 2023-01-18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러니 지금 미국이 상대도 안 하죠. 우리 나라 북한문제를 우리 나라만 빼고 미일만 회담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 기업들이 대량 구조조정해서 지금 난리라던데.. 노인분들은 자기 자식들 짤려서 좋겠어요!!!

꼼쥐 2023-01-20 15:02   좋아요 0 | URL
미국이 자국의 경제만 우선시하니까 잘나가는 기업들 대부분이 미국으로 미국으로 떠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미국 말이라면 뭐 하나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꼴이란 정말 가관도 아닙니다. 게다가 일본에게 우리가 빚진 게 없는데 일본이 하자는 대로 모든 걸 양보하는 걸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9. 권력의 서열과 아내 멧돼지의 질투


진흙 목욕을 즐기는 우리 멧돼지들에게 있어 날씨는 꽤나 민감한 문제입니다. 웬만하면 참고 견디는 게 일상인 우리들입니다만 춥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는 멧돼지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조건이지요. 그런 날에는 가뜩이나 먹이를 구하기도 어려운데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몇 배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따뜻했던 날씨 덕분에 2023년 새해를 기분 좋게 시작했습니다만 어제부터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역마다 편차가 심해서 어떤 곳은 침수가 되기도 했고, 어떤 곳은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날씨는 여전히 푸근합니다. 비가 그치고 다음 주에는 다시 또 추워진다고 합니다만 나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아내 멧돼지와 함께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집에서건 밖에서건 아내 멧돼지가 무섭습니다. 이처럼 아내 멧돼지를 극도로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은 무척이나 오래된 일입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의 성격과는 다르게 아내 멧돼지는 앞뒤 가리지 않는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차이에서부터 나는 아내 멧돼지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이긴 하지만 아내 멧돼지를 두려워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성격 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뒷골목 시절 내가 저질렀던 온갖 비리를 아내 멧돼지가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인간 세계의 속담이 멧돼지 세계에서 통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내가 털끝만 한 흠이라도 잡혀 갈라서는 날에는 나의 비리가 만천하에 밝혀지는 걸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운 것입니다. 이런 약점을 아내 멧돼지라고 모를 리 없습니다.


다른 멧돼지들은 모르는 사실입니다만 리더 멧돼지로서의 나의 권력은 한낱 허울뿐인 권력일 뿐 모든 권력은 아내 멧돼지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멧돼지의 속성 상 다산과 개체수 조절에 별 관심이 없는 관계로 나는 한때 나와 공부도 같이 했고, 뒷골목 생활도 했던 암컷 멧돼지 한 마리를 다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에 임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아내 멧돼지로부터 온갖 욕설과 비난을 들어야만 했고, 어떻게 하면 그 암컷 멧돼지를 자를 수 있을까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사직서를 제출한다기에 나는 단칼에 해임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 암컷 멧돼지에게 특별한 애정이나 관심이 없다는 걸 아내 멧돼지에게 간접적으로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그 암컷 멧돼지는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뻐서 젊은 시절 많은 수컷 멧돼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아내 멧돼지인지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나는 사실 세계 최강이라는 날리면 멧돼지를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날리면 멧돼지보다는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에게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정책이라면 뭐든 강력하게 지지하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의사는 아내 멧돼지와 나의 선대 멧돼지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나의 선대 멧돼지뿐만 아니라 나의 똘마니 멧돼지들의 조상들 역시 과거 일본 멧돼지들이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식민지 시절 당시 많은 보살핌과 지원을 받았으므로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게 멧돼지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많은 멧돼지들이 죽고 강제 노동에 끌려갔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의 생각에 반하는 야당의 멧돼지들이나 일반 멧돼지들의 저항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력하게 막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내가 알던 암컷 멧돼지를 부위원장직에 임명했던 나의 실수를 만회하고 아내 멧돼지로부터 신뢰와 애정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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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1-15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5년 동안 연재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꼼쥐 2023-01-15 14:2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전제는 대한민국의 존립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지 않는 것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아이들이 떠난 운동장은 휑한 쓸쓸함이 가득합니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 눈석임물이 얕은 물길을 내어 흐르고, 빈 운동장을 독차지하듯 길냥이 두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산책에 나섰습니다. 푸석푸석한 오후의 겨울 햇살이 운동장 한가득 퍼져갑니다.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먹이를 찾는 듯 포릉포릉 가볍게 날고 있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한 길냥이들이 까치 주변으로 몰려듭니다. 위험을 감지한 까치가 밭은 울음소리를 내며 경고성 엄포를 놓아 보지만 길냥이들은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길냥이들의 짓궂은 태도에 까치는 그만 포기하고 저만치 날아가버렸습니다. 운동장은 다시 길냥이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겨울 햇살이 약간의 온기를 뿌려주는 동안 눈석임물이 졸졸 소리를 내어 흐르고 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사무실 근처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아 햇빛을 쪼이다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크게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하루하루의 일상은 언제나 평화롭고 푸근합니다. 어제 도서관에 잠시 들렀다가 팟빵의 오디오 매거진 <월말 김어준>이 책으로 출간된 것을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반갑기도 했고 말이죠.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월말 김어준 part 1'이라고 쓰인 책등을 발견하였을 때 뭐랄까, 오래된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서가 옆에 서서 책을 잠시 펼쳐보고 다시 꽂아 놓을 생각이었는데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책을 대출하고 말았습니다.


동장군의 기세가 절정을 이루어야 할 시기에 예년보다 따뜻한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봄이 멀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백은선의 산문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한 가지 면만 가진 사람도 없고 한 가지 성격만 가진 인간도 없고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슬프고 이상하고 안도하고 그런 반복을 계속해서 들락날락거리는 게 내게 남은 삶을 탕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것은 나뿐이야."


두서없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삶이 두서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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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3-01-10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어준 책 어려워보여요.tbs서 내쳐지더니 유튜브에서 첫방으로 슈퍼챗 세계 1위찍었다고. 왠지 유튜브도 불안하긴하지만요ㅋ .
5세후니 일 잘 하네요;;ㅡㅡ

꼼쥐 2023-01-12 15:55   좋아요 0 | URL
팟빵에서 가끔 들었던 내용인지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다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해서인지(건방지게)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유튜브 방송은 동접자가 여전히 20만에 육박하고 슈퍼챗도 많더군요.
 

8. 존댓말과 상민 멧돼지


도시는 며칠째 미세먼지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1995년에 있었던 도쿄 지하철 차량 내에서 발생한 무차별적인 사린 가스의 살포를 잊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이기도 하고,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의 무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한 추위는 꿔다가도 한다'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비껴가려는지 쌀쌀하던 날씨가 풀려 미세먼지만 가득합니다. 그나저나 뒷골목 시절부터 늘 반말에 익숙했던 내가 리더 멧돼지가 된 지도 한참이나 지난 오늘 이렇게 존댓말로 일기를 쓸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존댓말로 지극히 사적인 일기장을 메운다는 게 저로서도 믿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에게 하는 말일지라도 뒷골목 세계에서는 언제나 반말이 일상어처럼 쓰였던지라 다 늦은 나이의 내가 이제 와서 존댓말을 배운다는 게 말이 되지 않을뿐더러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똘마니들에게 누차 설명했는데 이번 존댓말 건에 대해서는 도무지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내가 지고 만 것입니다. 나에게 존댓말을 쓰도록 건의한 비서 멧돼지 왈, 반말 짓거리를 찍찍하는 내 모습이 과히 보기 좋지는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꼴값을 떠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여론도 좋지 않고 말입니다. 결국 나는 외국어를 배우듯 존댓말을 배우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레귤레이션인 것처럼 말입니다.


멧돼지들에게 이름이나 별명이 붙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내가 리더 멧돼지가 된 후 상민 계급의 멧돼지인 나의 충복에게 '어이, 상민(常民) 왔는가?' 하고 물었던 게 인연이 되어 상민 멧돼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쓴 바 있습니다. 상민 멧돼지로 하여금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겼던 것은 나에 대한 그의 충성심도 충성심이지만 '두꺼비'라는 그의 별명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사회성이 부족하여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감 능력이 전무하고, 말을 가려서 할 줄 모르며, 미래에 처할 자신의 운명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데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만 아니라 내가 리더에서 물러나는 순간 내가 저질렀던 대부분의 죄를 나 대신 그가 옴팡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는 뒷골목 시절 그가 심판을 보았다는 경력 때문에 후임 심판으로부터 죄를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쯤 알고 있습니다.  내가 리더에서 물러나는 순간, 나의 부름을 받았던 많은 수하들이 감옥에 갈 것이며 사면이나 복권을 기대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리더 멧돼지가 된 후 많은 멧돼지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정부의 잘못이었습니다. 나라고 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상민 멧돼지를 보직에서 해임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앞으로 저지르게 될 많은 죄들을 그가 대신 뒤집어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의 방패막이인 셈이지요. 그는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할 것입니다. 비록 눈치가 없고, 공감 능력도 부족하지만 나처럼 매사에 두려움과 공포가 큰 멧돼지에게는 상민 멧돼지만큼 배포가 크고 우직한 멧돼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법이지요. 내가 리더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듯합니다. 내가 그를 신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도시는 여전히 미세먼지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당 대표에 출마하는 여러 똘마니들이 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연일 굽실대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 충성을 다짐하며 나를 알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정치권도 여전히 안갯속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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