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려나 봅니다. 계절의 변화를 처음 목격한 돌쟁이 간난 아가도 아닌데 계절의 변화가 뭐 그리 새삼스러울 게 있을까마는 비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한동안 강더위가 이어지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오늘처럼 서늘바람이 부는 날씨가 새삼 반가웠던 것입니다. 물론 계절이 바뀌고 선뜻한 냉기가 도는 만추를 기약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날들이 흘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늘은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거나 풀도 울며 돌아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나날이 더워지는 날씨 탓인지 그 정도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온종일 비가 내렸고 12호 태풍 '오마이스'의 상륙마저 예보된 처서의 풍경은 위기를 앞둔 팽팽한 긴장감이 넘쳤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에 곡식이 준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이맘때의 비는 그닥 반가운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은 에어컨 없이 밖에서 부는 바람만으로도 견딜 수 있는 이런 변화가 마냥 반가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맥락도 없는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것은 계절을 오가는 불필요한 소모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처서에 내린 비로 한결 차분해진 나는 왠지 전에는 없던 기운이 불끈 솟아난 듯 퇴근하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처서에 비가 내리면 독 안에 곡식이 준다는 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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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더위가 잔불처럼 남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불에 덴 듯 뜨거워진 열기를 선선한 바람이 불어 식혀준다는 것이랄까. 때 늦은 가을장마가 예보된 주말. 여전한 한낮 더위에 화덕 위의 솥뚜껑처럼 달궈진 인도를 걷는 게 마냥 힘들기만 했다. 정치권은 대선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고, 서민들은 식지 않는 부동산 열기에 너도나도 청약 경쟁에 뛰어들고...

 

탈레반에 의해 점령당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보면서 국가 지도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는 케케묵은 이념 논쟁과 지독한 엘리트주의에 있다. 자신보다 학벌이 낮은 사람은 지도자로 인정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의 하인이나 머슴쯤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에게 조롱과 멸시로 일관하였던 것은 물론 없는 죄도 덮어 씌워 급기야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엘리트주의는 공직 사회, 특히 법조계에서 유독 심하다. 판, 검사의 엘리트주의는 가히 망국병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들을 지금과 같은 학벌 괴물로 만든 배경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그들 모두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의 언론 역시 무소불위의 권력인 검찰에 기생하면서 동급으로 성장한 게 사실이다. 어떤 악의적인 보도로 사람이 죽어 나자빠진들 그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사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하였다는 소식에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언론 및 야당 정치인들이 거품을 물고 반기를 드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도 이제 자신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엄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도, 청렴결백한 사람을 뇌물을 밝히는 파렴치범으로 몰아도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 않던 언론인들이 이제는 그와 같은 허튼소리를 하다가는 무거운 책임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언론 신뢰도 세계 꼴찌 수준인 대한민국이 더 떨어질 신뢰도도 없건만 언론사에선 그들의 신뢰도 후퇴를 걱정한다. 참으로 웃기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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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8-20 16: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적어 주신 내용에 대해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아침에 라디오에서 새로운 언론
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숙의가 더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하는 언론
인의 말을 들었는데...

아니 그렇게 시간이 많았는데
그동안 숙의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하니
숙의를 하겠다고 하는 건지.

전형적인 시간끌기 전법으로 밖
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서구를 능가하는 언론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서구에서는 통용되는
징벌적 손해배상에는 게거품을
물면서 반대하는 것에도 1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꼼쥐 2021-08-22 20:39   좋아요 0 | URL
언론이 제3의 권력으로 수십 년 동안 소비자인 일반 시민을 무시하면서 제멋대로 행사해왔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못하게 생겼으니 속이 타겠지요. 가뜩이나 유튜브와 같은 개인 미디어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추세이니 자신들의 권력도 차츰 낮아지고 있는 마당에 이와 같은 법률 제정은 더욱 맘에 안 들겠지요.
 

입추, 말복도 지난 요즘도 말매미의 소음은 여전하다. 마치 거대한 모래바람의 소음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듯한 공원 한켠의 벤치에 앉아 오르한 파묵의 소설 <새로운 인생>을 읽었다. 지난 수요일부터 이어진 휴가. 고3 수험생 아들을 둔 나로서는 코로나 확산 국면이 오히려 반갑다. 핑계 김에 쉬어간다고 코로나를 핑계로 집안에 눌러앉은 나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자거나 하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한껏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에 다만 하나의 나쁜 점이 있다면 이따금 시간의 경과를 잊는다는 것이다.

 

"책의 심연에 내려갈 수 없었고 자난의 진지함에 다다를 수 없었던 나는, 밤의 늦은 시간에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자난에게 시간이 가장 끔찍한 거라고 말했다. 우리가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 여행을 나섰지만 이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출발했었고, 이 때문에 전혀 움직이지 않는 순간을 찾고 있었다. 그 어떤 것에도 비유할 수 없는 순간은 이 충만함이었다. 그것에 우리가 접근했을 때 어떤 탈출구가 있을 거라고 느꼈고, 이 믿을 수 없는 지역의 기적을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 눈으로 충분히 목격했었다. 아침에 우리가 뒤적이던 어린이 잡지에서, 책에 나오는 지혜가 온전한 상태로 가장 어린애 같은 형태로 존재했고 우리는 이제 머리를 사용하여 그것을 파악했어야 했다. 저편에는, 저 먼 곳에는 그 아무것도 없었다."  (P.210)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이 바뀌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우리의 내면을 건드리는 오르한 파묵의 장난기, 혹은 알쏭달쏭한 말장난으로 인해 한낮에도 잠이 솔솔 오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지녔다. 이럴 때 파인만의 <강의>를 읽는다면 수학적 논리의 명쾌함에 눈이 번쩍 뜨일지도 모른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수학이 가장 쉬웠어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다만 생각으로 그칠 뿐 실수로나마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곤란한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고, 한낮의 더위도 견딜 만한 수준으로 떨어진 요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 놀라는 눈치. 책에서 눈을 떼면 말매미의 소음이 귀를 먹먹하게 한다. 비가 내리려는지 두터운 습기가 온몸에 척척 감겨온다. 모공을 뚷고 들어오는 습기의 틈새로 앚었던 그리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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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변모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한민족 운운하면 '옛날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동양의 섬과 같은 이 작은 나라에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커다란 성과를 이룰 때마다 같은 한민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 뿌듯한 감동도 함께 느끼는 것이다. BTS의 버터가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에서 9주간 1위를 달리며 올해 최장 1위 기록을 세웠을 때도, LG화학의 배터리가 전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때도, 국내 조선업이 전 세계 선박 수주 1위를 달성했다는 뉴스를 들을 때도...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과 민간기업의 탁월한 능력과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극우 세력과 맥을 같이 하는 일부 친일 세력의 준동을 목격할 때마다 저들은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의 소유자인가 내심 궁금해지는 것이다. 어제는 MBC의 PD수첩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부당거래 - 국정원과 日 극우'라는 제목의 금회 방영분에서 국가정보원과 일본 극우단체의 은밀한 거래 정황을 단독 공개했던 것인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의 최고 정보기관이자 정부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정원은 일본의 식민지 단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이에 동조하는 몇몇 인사들 역시 제국주의 일본의 신민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방송에 따르면 이명박 시절의 국정원은 일본의 혐한단체에게 금품을 제공했던 것은 물론 북한에 대한 극비 정보를 제공하는가 하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 역시 국정원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게다가 독도나 위안부 관련 인사가 일본을 방문할 시 일본 공안에게 그 정보를 알렸고 일본 공안은 그들의 극우 세력인 혐한단체에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니 국정원은 과연 일본의 기관인지 대한민국의 기관인지...

 

일본의 신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몇몇 인사들의 인터뷰도 실렸는데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과연 일본이 제공하는 돈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일본의 신민이 되고자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다가오는 일요일은 제76주년 광복절. 태극기를 흔들며 제 나라의 대통령만 욕을 할 게 아니라 일본의 혐한단체와 이에 동조하는 대한민국의 몇몇 일본 신민을 욕하고 비난하는 게 광복절을 기념하는 취지에도 맞고,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는 길 아닌가. 왜 허구한 날 성조기와 관련도 없는 이스라엘 국기가 난무하는가. 하느님도 까불면 죽는다고 하는 놈들이 왜 일본의 총리에게는 까불면 죽는다는 말을 못 하나. 참으로 딱한 작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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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참 다행이야!'라고 생각되는 몇몇 순간들을 우연처럼 만나게 된다. 삶에서 그런 우연마저 없다면 인생은 참으로 감당하기 벅찬 어떤 것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가뭄의 단비처럼, 삶을 풍요롭게 하는 깜짝 선물처럼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그런 우연들은 예고도 없이 찾아오곤 한다.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순간에 조금쯤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하느님의 응원이 우리에게 배달된 것처럼...

 

어제는 잔여백신 예약을 통해 코로나19 백신 1차 접종을 했다. 약간의 긴장과 두려움을 안고 방문했던 병원. 접종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나는 이렇다 할 느낌도 없이 얼떨떨한 기분으로 병원을 나왔다. 미리 준비해둔 타이레놀 한 알을 먹었고, 나른해진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비발디의 사계를 들었다. 왠지 모르게 머릿속이 텅 빈 느낌도 들고, 깊은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낮은 음의 메아리가 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듯도 했다. 한두 시간 까무룩 잠이 들었었나 보다. 특별하지 않은 저녁을 먹었고, 몸에는 별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김연수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었지만 접종 후에 들었던 멍한 느낌 탓인지 좀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선거도 치르기 전에 대통령은 이미 떼어 놓은 당상인 것처럼 거만하게 굴던 윤 전 검찰총장의 기세가 크게 꺾인 듯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요즘, 그의 지지율은 한낱 허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게 아니다. 지진하고 해일이 있어서 피해가 컸지만 원전 자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방사능 유출은 기본적으로 안됐다"라고 말했던 바와 같이 일본 극우적 사고방식이 그의 정체성일지도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대통령으로서의 재목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그나마 선거가 한참 남은 지금 시점에서 밝혀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최 전 감사원장의 태도는 더욱 가관이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학교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하고, 매주 월요일 아침의 전체 조회 시간에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으며, 국기 게양식이나 하강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하던 일을 멈추고 부동자세로 서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해야만 했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 내에서의 자유인 동시에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자신들이 출제한 시험 문제를 얼마나 잘 맞히는가에 대한 잣대인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가 국가 시스템이나 시험 문제는 잘 만들 테니 너희들은 관심 끊고 하던 일이나 해라, 하는 게 그들의 생각인 것이다. 그것이 곧 자유요, 공정이다.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것. 최 전 감사원장의 며느리들이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면서도 누구 한 사람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게 공정이자 자유인 셈이다.

 

어떤 결과가 도출되기 전에 실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막상 일이 진행된 후에 돌이키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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