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 말복도 지난 요즘도 말매미의 소음은 여전하다. 마치 거대한 모래바람의 소음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듯한 공원 한켠의 벤치에 앉아 오르한 파묵의 소설 <새로운 인생>을 읽었다. 지난 수요일부터 이어진 휴가. 고3 수험생 아들을 둔 나로서는 코로나 확산 국면이 오히려 반갑다. 핑계 김에 쉬어간다고 코로나를 핑계로 집안에 눌러앉은 나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자거나 하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한껏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에 다만 하나의 나쁜 점이 있다면 이따금 시간의 경과를 잊는다는 것이다.

 

"책의 심연에 내려갈 수 없었고 자난의 진지함에 다다를 수 없었던 나는, 밤의 늦은 시간에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자난에게 시간이 가장 끔찍한 거라고 말했다. 우리가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 여행을 나섰지만 이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출발했었고, 이 때문에 전혀 움직이지 않는 순간을 찾고 있었다. 그 어떤 것에도 비유할 수 없는 순간은 이 충만함이었다. 그것에 우리가 접근했을 때 어떤 탈출구가 있을 거라고 느꼈고, 이 믿을 수 없는 지역의 기적을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 눈으로 충분히 목격했었다. 아침에 우리가 뒤적이던 어린이 잡지에서, 책에 나오는 지혜가 온전한 상태로 가장 어린애 같은 형태로 존재했고 우리는 이제 머리를 사용하여 그것을 파악했어야 했다. 저편에는, 저 먼 곳에는 그 아무것도 없었다."  (P.210)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이 바뀌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우리의 내면을 건드리는 오르한 파묵의 장난기, 혹은 알쏭달쏭한 말장난으로 인해 한낮에도 잠이 솔솔 오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지녔다. 이럴 때 파인만의 <강의>를 읽는다면 수학적 논리의 명쾌함에 눈이 번쩍 뜨일지도 모른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수학이 가장 쉬웠어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다만 생각으로 그칠 뿐 실수로나마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곤란한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고, 한낮의 더위도 견딜 만한 수준으로 떨어진 요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 놀라는 눈치. 책에서 눈을 떼면 말매미의 소음이 귀를 먹먹하게 한다. 비가 내리려는지 두터운 습기가 온몸에 척척 감겨온다. 모공을 뚷고 들어오는 습기의 틈새로 앚었던 그리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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